2012년 9월 15일.(토요일)
둘째 : 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마을 "하회마을" 돌아보면서.
충분한 점식식사를 끝내고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입장료 3.000원 지불하고 주차장으로 들어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에 오르니, 이내 출발과 동시에 5분 정도 운행하여 한 야산 모퉁이를 들어가면 하회마을 옛 주차장에 도착한다.
< 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 마을" 표시석 >
주차장 가장자리에는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는데, 내부에는 옛 모습 그대로 방문 당시에 사진과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기념관 >
전시품 하단에 설명문이 기술되어 있어 중요한 것 몇 개를 읽어 보면서 내부로 돌아보면 한쪽 벽면에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방문 기념 방명록 Sign과 더불어 생일 파티에서 받은 음식상 모형이 만들어져 있어, 그 때 안동지방에서 유행하고 있는 풍속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준다.
< 하회마을과 봉정사 방문 기념 "방명록" >
< "생일 파티" 에서 차려진 음식상 앞에서 >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구경하고 있는데, 이 조그마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시골 구석까지 영국 여왕이 방문하였다는 것에 대한 많은 부려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전시관을 나와 하회마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면 마을 초입에는 많은 장승을 만들고 있는 간이 공장과 더불어 황금 빛으로 물들고 있는 논두렁에 참새들을 호령하는 허수아비가 전형적 한국 농촌 풍경을 보여주고 있어, 자연과 동화하는 한국적 풍속에 대한 정감이 묻어나는 길이다.
< 안동 "하회탈" 을 모방하여 장승을 깍는 공장 >
< 참새와 씨름하면서 서 있는 "허수아비" 모습 >
마을 입구에는 하회마을의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3가지 코스의 관광 그림이 그려져 있어, 한번 더 하회마을을 이해하는 시간을 잠시 만들고 천천히 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 "하회마을" 의 역사와 관광 안내도 >
안동 하화마을은 "풍산류씨(豊山柳氏)" 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삶의 터전으로 만든 한국의 대표적 동성(同姓) 마을로써, 기와집과 초가집이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하면서 전통을 이어오는 고을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유학자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 선생님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님의 형제 분이 성장한 곳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마을 명칭이 하회(河回)라고 불려지는 것은 낙동강 물이 'S" 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곳에서 유래된 것이고, 풍수 지리학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에 해당하며 이미 조선시대 부터 사람 살기가 가장 좋은 곳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마을 동쪽에는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려온 해발 327m "화산(花山)" 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있으며 또한 이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는 수령 600여 년이나 된 "삼신당(三神堂)"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그 장소가 마을에서 제일 신성시 하는 곳이다.
그래서 하회마을 가옥들은 이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흐르는 낙동강 물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고, 집의 방향이 모두가 틀린다.
한국 대부분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다양한 방향으로 집들이 형성하고 있으며, 마을의 중심 부위에서 부터 큰 기와집으로 이루어지면서 주변으로 내려가면서 초가집들이 원형을 이루면서 배치되어 있는 것도 이 하회마을의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한다.
< "하회마을" 형성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조선 말에는 약 350 가구의 집들이 모여 살고 있는 풍산류씨의 집성촌 이었지만, 현재는 약 150 가구가 존재하지만 곳곳에 빈집이 많이 발생함으로 순수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가옥은 127개 가옥에 437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27개 가옥 중 12개의 가옥이 보물 또는 중요 민속자료로 등재되어 있는 역사적인 마을이면서, 더불어 하회마을에는 2개의 국보(하회탈, 징비록), 4개의 보물(양진당, 충효당, 활자본류, 고문서류), 1개의 사적(병산서원) 등을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 보고의 산실이다.
마을 중심길 따라 내부로 들어가면 동네 초입 왼편에 "하동고댁(河東古宅)" 이 나타나는데, 이 집은 중요 민속자료 제177호로 지정된 고댁의 초가집으로 지어진 집이다.
대문채를 살며시 밀고 들어가면 서쪽으로 꺽어 나오게 건축된 사랑채를 만나지만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잠겨 있는데, 그 이유는 "ㄷ" 자 형태로 만들어진 안채에 사람이 기거하므로 사적인 생활 보호차원에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잠겨져 있다.
< 서쪽을 꺽어지게 건축한 "하동고택" 사랑채 >
한국 어느 지방에서나 동등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고댁에서는 출입의 통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곳 안동 하회마을의 고댁에서도 주인이 거주하므로 관광객들에게는 다소 아쉽고 짜증나는 구경이 되겠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하루에도 수 천명의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관광객으로 당연한 결과의 조치이다.
< 하회마을의 돌담을 형성하고 있는 중앙 "대로" >
중앙 대로 따라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의 정점 방향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고댁 "북촌댁(북村宅)" 집이 있다고 하여 긴 골목을 통하여 대문 앞 까지 걸어가 보지만 이 집도 솟을대문 앞에서 멈추어야 하는데, 이유는 크다란 열쇠로 문이 잠겨있어 하동고댁과 달리 사랑채 관람도 불가능하게 한다.
< 북촌댁으로 들어가는 길과 "솟을대문" 전경 >
다시 되돌아 나와 좁은 골목을 꺽어서 들어가면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삼신당 신목이 있는 곳에 도착하는데, 이 신목 느티나무는 수령 600여 년이 되다 보니 밑 둥치에서 부터 벌어진 나무가지가 세월의 무게에 따라 많은 보수를 하였지만 그래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늠늠하게 성장하고 있다.
< 마을 중앙에 있는 "삼신당" 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 >
이 신목 나무는 마을 아낙내들에게 어린이를 점지하여 주고 출산의 성심을 돕는 성스러운 나무이라써,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 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린다고 한다.
< 매년 정월 대보름 날 "제" 를 올리는 600년 된 신목 >
나무 주변을 빙돌아서 새끼로 만든 금줄에는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기록한 종이가 빽빽하게 부착되어 있어, 한국인들의 토속 신앙에 대한 전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퐁속이 너무나 정겨워 Wife와 나도 몇 자의 소원을 기록한 종이 쪽지를 나무 앞에 있는 장승 입으로 넣어보는 의례도 가져본다.
< 신목 앞에 있는 "장승" 입으로 소원 종이도 넣어보고 >
이 신목 나무를 벗어나 조금 더 마을 내부로 들어가면 풍산류씨의 대종가(大宗家) 집 보물 제306호 "양진당(養眞堂)" 에 이르는데, 이 양전당은 서애 유성룡 선생님의 아버지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님이 기거한 집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우뚝 솟은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대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 뒤편에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랑채가 높은 계단 위에 지어져 있는데, 사랑채 현판에는 "입암고댁(立巖古宅)"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입암이라는 뜻은 겸암 "류운룡" 선생님과 서애 "류성룡" 선생님의 부친 류중영 선생님의 당호로써, 부친의 호를 따서 입암고댁이라고 불려진다.
출입을 금지하여 달려는 안내판을 살짝 넘어 계단에 올라서서 사랑채 내부를 돌아보면 뒤편 벽면에 "양진당(養眞堂)" 이라는 또 다른 현판이 붙어있는데, 양진당이라는 뜻은 겸암 선생님의 6대 후손 "류영" 공의 아호라고 한다.
이 양진당 건물이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 하므로써, 건물 뒤문을 열면 하회마을을 휘감고 돌아가는 "부용대(芙蓉臺)" 병풍 바위가 한폭의 그림 같이 펼쳐지므로 정말로 최고의 풍경을 간직한 사랑채 집이다.
사랑채 마당 왼편으로 "ㅁ" 자 형태의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지만 이 대문도 굳게 잠겨져 있으며 사랑채 오른편 마당 구석에 있는 돌담을 넘어 뒤쪽을 보면 아담한 2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왼편에 있는 건물에는 입암 선생님, 오른편에는 겸암과 서애 선생님의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하나 그곳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 입암 선생님과 겸암, 서애 선생님의 "불천위 제사" 를 올리는 사당 >
이 양진당을 벗어나면서 왼편으로 돌아가면 보물 제414호 서애 "유성룡" 선생님이 기거하신 "충효당(忠孝堂)" 건물 정문에 이르는데, 충효당은 서애 선생님의 종댁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선생님이 생존하면서 살았던 집은 아니다.
< 서애 선생님의 종댁 "충효당" 으로 들어가는 대문간채 >
서애 선생님은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 원종댁이 되는 양진당에서 형님과 함께 소년기와 만년을 보내다가 선생님이 관직으로 나아가 한양에서 30여년 몸 담고 있다가 관직에서 파직 당하고 나서 낙향 했을 당시 충효당 집이 매우 단출하였지만, 선생님 나이가 64세 때 1605년 9월 하회마을 전체가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칸초옥 "농환재" 에서 타계하였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님이 초가삼칸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님의 문하생과 사림(士林)의 사람들이 상호 도움으로 현재의 건물로 확장하여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 면모를 갖추고,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 충효당 대문간채 앞에 있는 "사랑채" 로 올라가는 계단 >
< 충효당 건물 중 "사랑채" 건물의 전경 >
대문간채를 들어가면 바로 앞에 사랑채 건물이 지어져 있으며, 왼편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으나 이곳도 사람이 거주하므로써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오른편 계단으로 조금 내려서면 서애 선생님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영모각(永慕閣)" 이라는 별채가 지어져 있어, 내부로 들어가면 서애 선생님의 일대기를 공부 할 수 있다.
< 서애 류성룡 선생님의 일대기와 유품을 진열하고 있는 "영모각" >
전시관 내부에는 서애 선생님 일대기와 더불어 유품이 일목요약하게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그 중에서 국보 제132호 "징비록(懲毖錄)" 에 관련된 내용과 책이 진열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님이 임진왜란이 발생된 상황에 관하여 벼슬을 떠나 귀향한 후에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의 사람들에게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 징비록 이라고 하였다.
< 공부하는 서애 "류성룡" 모습 >
< 서애 선생님이 사용한 "유품" >
< 서애 선생님이 받는 교지와 종이로 만든 "어사화" >
이 징비록은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영의정 신분의 서애 선생님이 임진왜란 전에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비롯하여, 전란(戰亂)에 임한 국민적 항쟁과 명나라의 구원 및 바다의 제패에 대한 당시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임진왜란 사(史)를 연구 함에 있어 가장 대표적 기본 역사자료가 된다.
< "징비록"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국보 제132호 "징비록" 함꼐 2개의 "보물(활자본류, 고문서류)" 을 진열하고 있는 안내문과 책 >
필사본 징비록은 "조수익" 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으며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 일본 교토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어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유출을 금지 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고 한다.
비록 징비록 한권의 책이 진열하고 있지만, 깨알 같이 기록하고 있는 선생님의 필적을 대면하고 있으니 한개의 한문과 뜻도 모르고 그냥 보기만 하고 사진만 찍어보는 석두(石頭)가 원망스려워 진다.
< 국보 제132호 "징비록" 책과 서애 선생님의 글씨를 아무리 보아도..... >
충효당을 나와 낙동강 변에 있는 "작천고택" 도 잠시 들어가 보지만, 대부분 고택의 모습이 비슷함으로 더 돌아봄을 생략하고 마을 앞에 있는 낙동강 변으로 나아 가서 지금까지 걸어온 마을을 뒤 돌아본다.
마을 가장자리에는 대부분 초가집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집을 철거한 집터는 텃밭으로 농사나 채소를 키우는 밭으로 변모가 되어지므로, 한국의 전통가옥 숫자가 점점 줄어지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 고댁의 숫자가 점점 살아지고 "텃밭" 으로 변모하는 하회마을 >
< 낙동강변에서 자라고 있는 "고목" 나무 아래서 휴식도 가지면서 >
낙동강변 따라 부용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우측 민속놀이 마당에는 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이 모여서 그네와 널뛰기 놀이도 하면서 게임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강변에는 울창한 만송정(萬松亭) 소나무 숲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도 곳곳에 보인다.
< "민속놀이 마당" 애서 노닐고 있는 어린이 >
< "만송정" 으로 이루어진 소나무 숲길 >
이 만송정 소나무 숲을 가로질려 낙동강 강변 백사장으로 내려서면 강의 반대편에 있는 부용댸 병풍바위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으며 그 부용대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이곳 하화마을 풍경을 내려보고 있다.
나도 강의 건너편에 있는 부용대에 오르기 위하여 나룻터로 내려가 유람선을 승선하여 보는데, 인당 왕복 승선비가 3.000원을 요구한다.
< 만송정 소나무 숲에서 바라보는 "부용대" 병풍바위 >
낙동강을 가로 질려가는 나룻배가 반대편 선착장에 도착하므로 하선과 동시에 야산으로 이어지는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옥연정사(玉淵精舍)" 뒤편 쪽문에 이르는데, 이 옥연정사는 중요 민속자료 제88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서애 선생님이 관직에서 물러나 대부분 이곳에서 기거한 가옥으로써, 대가족의 사람과 사당이 있는 종택보다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조용하게 학문을 전념하기에 적당하여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역사적 대작 "징비록" 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옥연정사는 선조 9년(1576년)에 집을 짖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서애 선생님 나이 45세가 되는 1586년에 완공하였는데, 그렇게 오래동안 집을 건축한 이유는 청빈하게 살아가는 서애 선생님의 성품에 따라 건축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계속적으로 중단되었지만 인접하게 살고 있던 "탄홍스님" 이 그 뜻을 알고 스님이 전국에서 공양한 시주를 모아서 완공하였다고 한다.
쪽문을 통과하면 사랑채가 되는 "세심재(洗心齋)" 에 이르는데, 이 세심재 건물의 중앙에 마루가 있으며 좌우 각각 1칸의 방을 두고 있어 서애 선생님이 이곳을 서당(書堂)으로 사용한 건물이라고 한다.
< 옥연정사의 "세심재" 건물과 안채 >
내부로 들어가면 별당이 되는 "원락재(遠樂齋)" 를 먼저 만나고 이어 안채 "완심재(完心齋)" 에 이르는데, 이 세심제와 원락재 방에는 일반인들이 머물면서 고댁 체험의 장소로 사용하므로 안채는 고댁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제공하여 주는 음식물을 만들기 위한 살림 도구가 가지련하게 정렬하고 있다.
< "세심재" 와 "원락재" 를 구획하는 쪽문 >
이 안채를 돌아서 뒤문으로 더 나아가면 조그마한 마당에 이르는데, 마당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입석(立石)과 조그마한 입석 2개가 동시에 서 있다.
큰 입석에는 서애 선생님이 쓴 한시(漢詩)가 적혀 있으며, 그 옆에 있는 작은 입석에는 그 한시를 변역하여 놓아 나그네 발길을 잠시 머물게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님이 쓴 한시와 번역문 >
이 옥연정사 정문을 벗어나면서 조금 더 야산 모퉁이를 돌아가면 "화천서원(花川書院)" 이라는 사당 건물을 만나는데, 이 화천서원은 겸암 선생님의 학덕(學德)을 흠모하는 유림(儒林)의 선비들이 정조 10년 "경덕사(景德祠)" 를 세워 겸암 선생님을 배향하는 곳이다.
< 옥연정사 오른편에 있는 "화천서원" 의 전경 >
화천서원은 조선시대 대원군이 서원 훼철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기고 모두가 훼철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복원되었는데,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숭교당, 동재와 서재, 문루가 되는 지산루, 유도문, 전사청 등의 건물이 고즈늑하게 자리잡고 있으나 출입문이 잠겨 있어 이 또한 내부 구경이 불가능하다.
< "화천서원" 으로 들어가는 입구 >
다시 옥연정사로 돌아 나오면 옥연정사에서 형님이 되시는 겸암 선생님이 벼슬 길을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학문을 익히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머물고 있었던 "겸암정사(謙唵精舍)" 로 가는 길이 부용대 암벽 허리 낭떠리지 옆으로 연결되어진다.
현재 이 길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길이 허물어져 통행이 불가능 할 정도로 파괴되어, 대부분 관광객은 옥연정사 바로 앞에서 급경사의 오르막 길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부용대(芙蓉臺) 위에 있는 전망대에 이른다.
< "부용대" 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 >
이 부용대 전망대에 서면 낙동강 물이 화산(花山)을 휘돌아서 하회마을을 감쌓고 있는 모습이 발 아래에 머물고 있는데, 마을에는 오목조목한 옛집들이 상호 처마에 처마를 맞대고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 하회마을 앞에 있는 "만송정" 소나무 숲과 낙동강 >
옛날에는 하회마을에서 부용대로 건너가는 나룻배가 없어 부용대로 올라오지 못하여 부용대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 구경이 불가능하였지만, 오늘 높은 부용대에서 직접 내려보는 하회마을 실물로 대면하므로 풍수지리에 깡통이 되는 내가 보아도 하회마을이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느끼게 하는 장소이다.
정상에 한참 머물면서 마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몇 장을 만들어 보는데, 10여 명의 파키스탄 청년 노동자들도 이곳 하회마을 부용대 까지 올라와 한국의 자연미(自然美)에 도취하듯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고있다.
< 하회마을 배경으로 "우리도" 한 컷 >
부용대 전망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부용대 바로 아래 방향으로 겸암정사 건물이 있다고 하나, 다시 길을 내려 갔다고 되돌아 올라 올려고 생각하니 너무나 피곤하고, 대부분의 고택도 유사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겸암정사 구경을 포기하고 나루터로 내려와 유람선에 몸을 의존한다.
고운 모래사장을 건너 강둑에 올라서면 울창한 벚나무 터널을 형성하고 있는 강둑과 병행하는 도로 따라 조금 내려가면 셔틀 버스가 정차하고 있는 원점의 옛 주차장에 도착한다.
< "벚나무" 터널로 이루어진 길 따라 >
어느 정도 승객이 승차할 때 까지 대기하고 있는 셔틀 버스가 출발하여 승용차가 있는 대형 주차장에 도착 함으로 이것으로 간단하게 하회마을 관광을 종료하고, 다소 시간이 늦었지만 다음 목적지가 되는 병산서원으로 출발하여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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