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문화와 산행.

퇴계 이황 선생님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서원" 을 돌아 보고서. (후편)

용암2000 2011. 11. 9. 19:02

2. 퇴계종택(退溪宗宅)

 

도산서원 입구 주차장으로 돌아와 상가 건물에서 판매하는 간단한 음료수로 갈증을 다소 해소하고 나서, 승용차는 봉화 방향으로 가는 고개 넘어 3거리에서 "이육사 문학관" 방향으로 가는 지방도로 따라 들어가다 보면, 이내 도산서원을 품고 있는 영지산(靈芝山) 뒤편 야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퇴계종택" 에 이른다.  

퇴계종택은 원래 있는 건물이 소실되어지므로 인하여, 1929년 퇴계 선생님의 13대 사손(嗣孫) "하정" 공이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터에 새롭게 건립한 집이다.

넓은 공터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종택의 솟을 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돌어가며는 아담한 집터 마당에 이르면서, 그 마당을 중심으로 "口" 자 형태의 고택이 고즈늑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건물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5칸으로 총 18칸으로 지어진 집이다.

 

< 퇴계종택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 전경 >

 

종택 건물 내부에는 사람이 생활하고 있으므로 사생활 침범에 따른 출입을 제한하여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주저되어 지는데, 특히 주인 아저씨가 한복을 입고 사랑채 마루에서 앉자 신문을 읽고 있으므로 더욱더 조심 스러워 진다.

 

< "口" 자 형태의 종택 건물과 신문을 보고 있는 주인장 >

 

종택 내부 마당을 거닐면서 오른편으로 돌아 들어가며는 집 주인이 출입하는 대문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열려 있는 대문 속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보는데, 건물 내부 마당에는 장독대와 더불어 우물이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생활용 살림 가구가 곳곳에 놓여 있어, 보지 못 할 여인의 속살을 보는 듯 미안함이 묻어난다.

 

< "퇴계종택" 내부의 모습 > 

 

종택 건물 대문 반대편 쪽문이 있어 그 쪽문 속으로 들어가니 우람한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정자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특히  정자 마루에는 벌써 월동을 준비하기 위하여 비닐 커텐으로 건물  전면을 차단하고 있어 쌀쌀함이 묻어난다.

 

< 종택 건물과 나란히 건립된 "정자" 와 "추월한수정" 현판 >

 

이 정자 앞에도 솟을 대문이 있으나, 관리의 효율성 때문인지 그 방향으로는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솟을 대문이 굳게 닿여 있어, 종택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으로만 출입이 허용하고 있다.

 

< 정자 앞에 있는 "솟을 대문" 전경 >

 

종택은 "진성 이(眞城 李)" 씨의 종가집으로 안동의 명문 거족(巨族)의 한 가문으로 "동방 유학의 성현" 으로 일컬어지는 퇴계 선생님을 낳았으니, 그 자부심이야 말로 설명 할 바가 아닌 것 같다.

진성 이씨 문중은 퇴계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58명을 배출 하였고, 문집 등 저술을 남긴 학자가 자그만치 50여명에 이르는 학문의 가문이라 하겠다.

 

 

3. 퇴계묘소(退溪墓所)

 

퇴계종택에서 이육사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지방도로 따라 3분 정도 더 내부로 내려가며는 도산서원을 돌아서 올라오는 낙동강 상류 인접 지점에 하계(下溪)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면서, 마을 초입에 퇴계 선생님의 묘소가 있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야산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퇴계묘소까지 150m 거리 이정표 따라 조금 야산으로 올라가며는 한기의 무덤을 만나는데, 이 무덤은 망부석과 더불어 좌판이 놓여 있지만, 좌판에는 아무런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는 산소이다.

이 산소에서 부터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 따라 숨이 찰 정도인 5부 능선까지 산행하며는 아담한 무덤 한기와 더불어 망부석 및 문인석상이 놓여 있는 무덤을 만나는데, 이 무덤이 퇴계 선생님의 묘소이다. 

 

< 퇴계 묘소로 올라가는 돌계단 >

 

< 문인석상을 거닐고 있는 "퇴계 묘소"  전경 >

 

퇴계 선생님은 살아생전 2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부인들이 너무 일찍 사별하므로 인하여 혼자 70세까지 장수하면서도 일생동안 혼자 학문과 생활한 것이 죽어서도 부인과 함께 하지 못하고 외롭게 한기의 무덤만으로 달랑 쓰여 있어 쓸쓸함이 묻어난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무덤에 도착하니, 대구에서 퇴계 오솔길을 걸으면서 트레킹하는 3명의 대학생이 퇴계 묘소를 참배하고 있어, 아직도 대구에는 삼강오륜의 예의가 살아있는 도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대구의 대학생과 함께 >

 

그런데, 이 학생들이 걸어서 다니다 보니, 차편이 없어 도산서원 앞까지 다시 되돌아 가서 안동으로 들아가는 막차를 타기에는 1시간 정도 여유 밖에 남지 않아 에둘러 도산서원으로 가기 위하여 작별 인사하고 떠난다.

참 젊음이 좋은 시절이라고 찬사를 보내는데, 동승 할 자리도 없지만 이후의 갈길이 상호 다르므로 인하여 그냥 걸어서 보내기가 미안함이 묻어난다.

묘소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니, 퇴계의 묘소는 한국의 전형적인 명당 묘터로써 야산의 5-6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묘소 앞으로는 낙동강 물이 흘러가는 배산임수의 장소에 다가 좌청룡과 우백호의 산맥이 양 옆으로 길게 내려놓고 있어, 강풍도 들어오지 않는 금계포란형 묘터이다.

 

< 나무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 상류지역 전경 >

 

묘소 옆에는 임종하기 전 퇴계 선생님이 직접 주문했다는 묘비명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 쓴 묘비가 있는데, 살아생전 퇴계 선생님은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묘비명을 새겨 달라고 유언 했지만, 후손들이 대외적인 체면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유언을 조그마한 묘비에 새겨 관리하고 있다. 

 

< 묘소 옆에 세워진 "묘비" >

   

 

4. 퇴계태실(退溪胎室)

 

퇴계태실은 퇴계묘소에서 국도 35번을 이용하여 봉화방향으로 10여분 정도 더 올라가며는 도산면사무소에 이르면서, 면사무소 가장자리에 있는 "은혜초등학교" 옆으로 하여 아담한 야산 기슭으로 들어가며는 "온혜리" 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이른다.

 

< 온혜리 마을 입구 주택에서 키우고 있는 "향나무" >

  

마을 가장자리에 솟을 대문 한채와 더불어 몇채의 한옥 집이 보이는데, 이 솟을 대문이 "퇴계태실" 로 들어가는 문이다.

 

< "퇴계태실" 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 >

 

이 집은 퇴계 "이황"(李滉 : 1501-1570) 선생님의 조부 이계양(李繼陽)가 조선 단종 2년(1454년)에 지었는데, 1501년 11월 퇴계 선생님이 이집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여 "퇴계태실" 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솟을 대문에는 "성림문(聖臨門)"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이 현판은 퇴계 선생님의 어머님 "춘천박" 씨가 퇴계를 가졌을 때 태몽으로 공자님이 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성림문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성림문이라고 명명한 분은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金誠一)" 선생님이라고 한다.

이 성림문을 통과하여 넓은 마당에 이르며는 마당의 정면 기단 위에 "노송정(老松亭)" 이라는 기엌자(ㄱ) 형태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건립된 노송정은 조부 이계양가 세조 원년(1455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소나무를 심고 거처를 노송정이라고 하였으며, 건물 앞에 붙어 있는 "老松亭" 이라는 현판은 이계양씨의 친필 또는 조선 서예 4대가의 한사람인 석봉 "한호" 의 글씨라고도 한다.

 

< 마당 기단 위에 건립되어 있는 "노송정" >

 

노송정 마루 안쪽에는 "옥루무괴(玉淚無愧)" 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 글의 뜻은 "혼자 구석진 방에 앉아 있어도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게 한다" 라는 것이다. 

마당 좌측으로는 약간 검은색을 띈 거대한 건물 한채가 독보적으로 서 있는데, 이 건물이 퇴계 선생님이 탄생하신 "퇴계태실" 건물인데, 건물의 마루 위에 편액 "온천정사(溫泉精舍)" 라는 글씨가 붙어 있다. 

 

< "ㅁ" 자 형태를 하고 있는 퇴계태실 전경 >

 

< 태실 측면에 부착되어 있는 현판 "온천정사" >

 

건물 전체 모양은 퇴계종택과 동일하게 "ㅁ" 형태를 하고 있는 정면 7칸 측면 6칸으로 구성된 총 22칸의 집이다.  

건물 특색은 몸채의 안마당 앞 정중앙에 태실이 돌출되어 있는데, 그 태실 바로 뒤편에 안방이 자리잡고 있으며 안방 좌측에는 부엌을 두고 있고, 우측으로는 안대청과 더불어 건너방을 차례로 두고 있다.

 

< 안마당 중앙으로 돌출되게 만들어진 "태실" 방 >

 

< 태실 뒤편에 있는 "안방과 마루" >

 

태실 남쪽으로 툇마루를 두고 삼면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둘린 헌함을 설치하여 누각처럼 꾸미고 있어, 태실 건물이 매우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 태실 주변에 "계자형" 난간으로 꾸민 헌함 >

 

툇마루 상부에는 "시세청명일(是歲淸明日)" 14세 손 "가원(家源)" 의 중수기가 걸려 있으며, 지금으로 부터 55년 전에 전면 개축 한적이 있다고 한다.

태실을 나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며는 가지런하게 정돈된 항아리가 놓여 있는 장독대를 만나고, 그 장독대 좌측편에는 조그마한 텃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여러종류의 가을 채소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지만, 이 태실 건물에는 입구 성림문 옆에 있는 작은 방에 할머니 한분만 기거 함으로 노인 혼자서 수확이 다 이루어질지 의심이 되어진다.

 

< 태실 뒤편에 잘 정리된 "항아리" 풍경 >

 

< 노송정 마루에서 채소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 >

 

노송정 우측편에 "사당" 건물이 보이지만, 짧은 가을 날씨로 인하여 조기에 어둠이 내리고 있어 사당 전부 돌아 봄을 취소하고 아쉽게 퇴계태실을 떠나야만 하는데, 시간의 부족함이 원수이다.

 

< 어둠이 내리므로 더 태실에 머뭄이 불기능하여 출발한다. > 

 

 

5. 이천동 석불상

 

안동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집 근교에 있는 "이천동 석불상" 을 구경하기 위하여 시내에서 영주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 석불상 입구 주차장에 이르는데, 이 석불상은 옛 서민의 소주 제비원을 연상케 하는 부처님이다. 

안동 이천동 석불상이 위치한 이 지역을 속칭 "제비원" 이라고 불리는데, 석불상이 위치한 제비원은 민간 신앙의 성지이면서 "성주풀이" 의 본향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 잘 조성된 공원에서 바라보는 "마애불" 전경 > 

 

그런데, 이름에서 "원" 은 사람들이 여행 길에서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려시대부터 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소로 쓰기 위하여 교통 요지에 있는 사찰을 국가적인 차원의 숙소인 "원(院)" 으로 지정하여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안동시 북쪽 이천동 태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불상은 화강암 석벽에 10m 높이의 몸통을 새기고, 2.56m 높이의 머리부분을 조각하여 올려놓은 고려시대의 마애불로써, 산신의 정기와 부처의 원력이 만나 소원을 이루는 곳으로 이름이 높다.

불상 앞 기도처로 들어가서 불상을 올라보며는 인자하게 뻗은 긴 눈과 두터운 입술, 잔잔한 미소가 토속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불상으로 만들어져 있어 보물 제 115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 "마애불" 발 아래 기도처에서 바라본 불상 >

    

마애불 주변에는 새롭게 공원을 조성하여 휴식처를 제공하여 주고 있으며, 마애불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연미사" 라는 사찰을 새롭게 건립하고 있는데, 현재 대웅전은 어느정도 완성되어 많은 불자들이 찾고 있으며, 부속적인 사찰 건물을 건립하게 위하여 공사를 추진 중이라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 새롭게 건립한 "연미사" 대웅전 모습 >

 

* 결론

 

오늘 안동에 거주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당일로 많은 유적지 돌아다니다 보니, 무엇을 보았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대충 찍어놓는 사진을 의존하여 블로그 작성 할려고 하니,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다.

진정한 퇴계 선생님 만날려고 시도하였다며 사전 퇴계 선생님에 대하여 조금 공부하여도 보는 안목의 부족으로 이해가 어려운 곳을,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불쑥 친구에게 안내를 요청한 내가 어리석은 것 같다.

많은 시간 할애하여 주고, 식사 대접하고, 길 안내하고, 문화재 해설하여 주고, 주차비 부담하고, 자동차 기름 소비하면서 운전수까지 자청하여 줌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아울러, 퇴계 선생님의 문헌을 보관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을 방문하지 못함이 더욱더 아쉬워, 추후 충분한 여가시간 만들어 찬찬히 돌아 보면서 블로그 내용을 보완 수정하여야 하겠다. - 후편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