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0일 (금요일)
이병철 생가를 돌아보고 나서 의령군 의령읍 방향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의령천 건너편에 있는 충익사 앞 공원으로 들어가니, 공원 벤치 곳곳에 많은 가족들이 나들이를 겸하면서 추석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우리 식구도 그들과 함께 추석 음식으로 즐거운 식사를 끝내고 나서 다음 관광지를 돌아보기 위하여 지방도로 따라 한시간 정도 더 운전하여 진주시에 있는 진주성(晋州城) 동문 주차장에 도착하여 진다.
동문 입구에 있는 유료 주차장에서의 비용은 진주성 관람이 끝난 후 정산한다고 하여 일정한 곳에 주차를 하고 촉석문(矗石門) 입구에 있는 매표소에서 인당 2.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진주성으로 들어가는데, 이곳 입장료에는 진주성 내부에 있는 국립 진주박물관 관람 비용도 포함된다고 한다.
현재 전국에 있는 국립 박물관 전부가 무료 입장으로 되어 있는데, 결국 이곳 진주박물관은 간접적으로 입장료를 징수하는 형태가 되므로 다소 불쾌감이 일어나는 박물관이 되어진다.
1. 진주성의 역사.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곽의 둘레가 약 1760m, 높이는 5-8m 이면서 남쪽 방향으로 진주 남강을 접하고 있어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요새가 될 수 있는 강변 따라 군사적 방어 구축용 성곽을 쌓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 성곽 길이 1760m "진주 성곽" 모습 >
이곳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3곳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 방향의 촉석문, 북쪽에 공복문, 서쪽에서 조그마한 쪽문으로 되어 있고 외곽 성벽 따라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용이한 곳에 북장대와 서장대 및 다수의 포루가 포진하고 있다.
<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동문 "촉석문" 과 매표소 >
< 매표소 앞에 있는 "논개" 시비 >
아울러 진주성 내부 관람지로 동쪽에서 부터 촉석루, 의암, 의기사. 호국의 종, 김시민 장군 전공비, 임진대첩계사순의 단, 김시민 장군 동상, 영남포정사, 운주헌 터, 경절사, 청계서원, 창렬사, 호국사, 6.25 전승비와 3.1 독립운동 기념비, 쌍충사적비 등이 성곽 가장자리를 통하여 빙돌아 자리잡고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남강을 품고 있는 "진주성" 조감도 >
아울러 진주성을 더욱더 빛내고 있는 것은 진주성 중심부에 진주대첩에 대한 사실을 조명하여 주는 국립 진주박물관과 더불어 야외공연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책과 더불어 많은 역사적인 자료를 관찰할 수 있다.
진주성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 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며 고려 말 우왕 5년(1379년)에 진주 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土城)이던 것을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는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락하여 오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城民)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에 하나가 되는 "진주대첩(晋州大捷)" 이다.
이듬해 1593년 6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패한 설욕으로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과 관료 및 군인 등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殉節)하는 비운을 꺽기도 한다.
1972년에 동문의 촉석문(矗石門)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으며, 1979년 부터 진수성 내부에 살고 있는 민가 건물 모두를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하였으며 마지막으로 2002년 북쪽의 출입문 공북문(拱北門)을 복원 공사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동쪽에 있는 "촉석문" 내부 모습 >
2. 촉석루에 올라보면서.
동쪽에 있는 촉석문을 통과하여 약간의 비탈면으로 올라가면 토담으로 구획하여 놓은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한국의 3대 루각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촉석루(矗石樓)" 에 도착하여 지는데, 이곳 촉석루가 진주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힌다.
< 촉석루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촉석루는 고려 고종 28년(1241년)에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씨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는데, 전쟁 때는 장군의 지휘소로 쓰였으며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장 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명소(名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 남강 건너편에서 보는 "촉석루" 전경 >
< "촉석루"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현판 >
현재 촉석루는 모든 길손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 있는 루각과 달리 밀양에 있는 영남루와 더불어 이곳 촉석루도 주변의 아름다운 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므로 많은 방문객들이 2층 루각으로 올라가 도도히 흘러가는 진주 남강의 매력에 빠져든다.
< 2층 루각에서 여가를 즐기는 "관람객" >
예로 부터 남쪽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쪽으로는 평양의 부벽루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하여 오고 있는데,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 선생님의 "촉석루기(矗石樓記)" 를 비롯하여 많은 현판들이 걸려있다.
< 루각 곳곳에 붙어있는 "한시" >
루각으로 올라가니 많은 사람들이 풍경에 빠져있는 인파 사이로 돌아 다니면서 촉석루에 걸려 있는 시문을 읽어 보는데, 촉석루는 남강 바위 위에 우뚝 솟아있다고 하는 것에서 부터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 "남장대" 라고도 쓰여진 현판 >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년) 병사 "남이흥(南以興)" 이 옛날 보다 더 웅장한 건물로 고쳐 지어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으로 불타 버리므로 국보를 취소가 당하는 비운을 품고 있는 루각이 되어진다.
현존 건물은 1960년에 진주 고적보존회(古蹟保存會)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 지은 것이며, 건물 구조로는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건축되어져 있다.
<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촉석루" 전경 >
3. 남강 물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의암을 바라보면서.
촉석루 1층으로 내려가 건물 중앙 앞에 있는 아취문을 통하여 강변으로 내려가면 먼저 비석을 보호하는 작은 정각을 만나는데, 이 정각 전면에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 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이 비각 앞으로 도도히 흘려 내려가는 남강 가장자리 물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가로 3.5m에 세로 3.3m의 작은 바위가 "의암(義巖)" 이다.
< "의기논개지문"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비각 >
< 촉석루 앞에 있는 "의암" 전경 >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로 조선 선조 25년(1593년) 6월 29일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었고, 그 전투에서 7만여 명의 민(民), 관(官), 군(軍)이 순절하자 논개(論介)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고 한다.
< 의기 논개가 순국한 "의암" >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남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 7년(1629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은 바위 서쪽 면에 전서채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면에는 한몽삼(韓夢參)이라는 선비가 해서채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다고 한다.
이 의암 앞으로 진주의 대축제 유등제를 위하여 많은 오색의 사람과 모형들이 만들어 물 위에 띄어 놓고 있는 풍경이 남강을 건너는 다리와 진주시가지 고층아파트 등과 상호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이 한폭의 수채화를 이루고 있다.
< 의암 주변에서 바라보는 "남강" 하부 전경 >
< 의암 주변에서 바라보는 "남강" 상부 전경 >
4. 의기사를 돌아 보고.
의암에서 다시 촉석루로 올라와 왼편으로 돌아가서 몇 단의 계단 위에 의기사(義妓祠) 입구 지수문(指水門)를 만나는데,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 및 신위을 모신 사당이다.
< 의기사로 들어가는 출입구 "지수문" >
< 의기사 내에 있는 "논개의 영정" >
논개는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1574년 한 양반가의 여식으로 출생하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집안이 몰락 위기에 처하자 경상우도 절도사 "최경희(崔慶會)" 의 후처로 들어간다.
남편 최경회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열하게 전사(戰死) 하자 진수성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기생을 데리고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는데, 이 때 논개는 지아비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기생으로 자청하여 연회에 참석한다.
논개는 적장의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 마디마디 반지를 끼고,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 를 꾀어 함께 남강에 있는 의암으로 올라가 투신 자살한 한국의 유일한 의기(義妓)가 되어지는데, 그 때 그녀의 나이가 19세 이었다고 한다.
이곳 의기사는 영조 16년(1740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씨가 창건한 이래 두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義妓彰烈會)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건물로써,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져 있다.
< 새롭게 건축한 "의기사" 전경 >
5. 김시민 장군 전공비 및 촉석정충단 비.
촉석루와 의기사를 관람하고 나서 쪽문으로 나와 진주성 내부를 효율적으로 구경하기 위하여 북편에 있는 언덕 방향으로 올라가면 넓은 마당에 이르는데, 이곳 마당 초입에 호국의 종(鐘)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옆 북쪽 방향으로 2개의 비각 건물이 서 있다.
< 촉석루 위쪽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범종각" >
왼편에 있는 비각은 김시민 장군 전공비(戰功碑)로써 이곳의 비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에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 김시민(金時敏)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석인데, 당시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로써 판관 성수경(成守 慶),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등과 함께 주도 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침하였다.
김시민 장군 3.800여 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킴으로 인하여,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적의 예기를 꺽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로 인하여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함으로써, 왜병의 호남전출을 원천 봉쇄하므로 임진왜란 초기에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든 김시민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오른편에 있는 "촉석정충단(矗石旌忠檀)" 비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3분의 장사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및 7만여 명의 민, 관, 군의 충의를 새긴 비(碑)로써, 조선 숙종 12년(1686년)에 세웠다고 한다.
< 마당 가장자리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 비" 모습 >
6.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 단.
이곳 마당 서쪽으로 제일 높은 곳에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晋州城 壬辰大捷 癸巳殉義)" 이라는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이 제단에는 진주의 임진대첩과 계사년(1593년) 순의 때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 시민의 소망을 담아 1987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세운 제단이다.
<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
단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4m, 높이 3.6m이고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가로 9.7m, 높이 3.5m의 대첩비를 세웠는데, 단의 좌우 면에는 돋을 새김으로 당시의 역사적 장면을 표현하였고 앞뒤면에는 임진왜란 대첩과 계사순의의 역사적 기록을 새겨놓고 있다고 한다.
<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 의 제단 모습 >
7. 진주성의 정문 공복루.
계사순의 제단 오른편을 돌아가면 진주성 관리사무소가 보이고, 그 건물 옆으로 나아가면 숲속 야외 전시실에는 진주 유등제 축제를 위하여 많은 종이 모형품들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 정문 "공북루" 주변에 있는 유등제 모형품 >
야외 전시실 앞에 진주성의 북쪽 출입구 "공북문(拱北門)" 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공복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晋州城圖)에 나와 있는 진주성 정문으로 공(拱)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올려 공경한다는 뜻이며 북(北)은 임금이 계시는 복쪽인 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2002년 5월 1일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 2층 다락루로 되어있는 "공북루" 전경 >
이 문을 통과하여 남쪽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 야산 기슭 잔디광장에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한손에 큰 칼을 옆에 차고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 진도로 넘어가는 진도대교 옆에 새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과 너무나 흡사하다.
< 큰 칼을 차고 있는 "김시민" 장군 동상 >
8. 영남포정사.
김시민 장군 동상에서 부터 오른편으로 90도 꺽어 오르막 길로 조금 올라가면 야산의 정점 부근에 2층 루각 건물이 서 있는데, 이 건물이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이다.
< "영남포정사" 로 올라가는 길 >
영남포정사는 망미루(望美樓) 이라고도 불려지며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창건하여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는데,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도 사용한 건물이다.
< 4명의 병졸이 지키는 "영남포정사" 모습 >
건물 입구에는 4명의 병졸이 삼지창을 높게 세우고 서 있으며 그 오른편 기둥 옆으로 하마비(下馬碑)가 자리잡고 있는데, 엣날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부터 말(馬)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표시석이 되어진다.
< 영남포정사 오른편에 있는 "하마비" >
9, 경절사.
영남포정사 문을 통과하여 언덕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 건물이 있었던 운주헌 터(運籌軒 址)가 펼쳐지는데, 현재 이 운주헌 터에서 수십기의 비석이 도열하고 있는 비석 군락지와 경절사, 청계서원 등의 건물이 건립되어 있다.
< 운주헌 터 내에 있는 "비석" 군락지 >
운주헌 터 입구에는 진주 인근에 있는 비석을 모아 일괄 관리하는 곳이며, 그 비석 군락지 뒤편 임도 따라 조금 걸어가면 축대 위에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는 "경절사(擎節祠)" 에 이른다.
< 출입문이 굳게 잠겨져 있는 "경절사" 입구 >
이 경절사는 고려시대 거란의 2차 침입 때 크게 공을 세운 "하공진"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원래 진주시 수곡면에 있었는데, 1992년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건물은 서원과 비슷한 형태로 건축하였으며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사당인 경절사가 있고 앞쪽으로는 재실 모양의 2개 건물이 양쪽으로 있다고 한다.
하진공 장군은 진주성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이곳에 있는 경상남도 도청이 허물면서 사적지로 재 정비할 때, 진주의 대표적인 진주하(晋州河)씨 문중에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 멀리서 바라보는 "경절사" 전경 >
10. 청계서원.
경절사 좌측 동일 선상으로 "청계서원(淸溪書院)" 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청계서원도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여 지지만 청계서원을 감쌓고 있는 토담이 다소 낮은 담으로 구획하므로 내부를 들어다 볼 수가 있는 서원이 되어진다.
< 낮은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청계서원" 전경 >
청계서원은 순조 33년(1833년)에 건립되었는데,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크게 공을 세운 은열공 "정신열(鄭臣烈)" 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옷을 입게한 문충공 "정천익(鄭天益)" 선생님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라도 한다.
< 담장 넘으로 바라보는 "청계서원" 건물 >
본래 진주시 대평면 마동에 건립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서원이 훼철된 것을 1961년 이곳에서 다시 건립하였는데, 서원 내에는 경덕사, 정교당, 승은사, 진사청 등 새로운 건축물이 도열하고 있다고 한다.
< 청계서원 내 서쪽에 있는 "경덕사" >
< "정교당" 앞에 있는 비석 >
이상으로 진주성 내부에 있는 문화재를 탐방한 내용을 전반과 후반으로 분리하고, 또한 국립 진주박물관을 별도로 기록하여 3개 부분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 전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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