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경남)

의병의 고장 경남에 있는 의령군 "이병철 생가" 와 진주성 내에 있는 "촉석루" 관람하고.(1)

용암2000 2013. 9. 23. 18:48

2013년 9월 20일 (금요일)

 

어제는 추석 한가위 이면서 나의 생일이라 다소 분주하게 돌아가는 하루가 되어지는데, 부산에 살고 있는 큰 아들과 며느리, 손녀 및 대구에서 살고 있는 사촌들과 함께 각 집으로 이동하면서 차례(茶禮)를 지내는 시간을 가진다.

더불어 오후에는 고향 부모님 산소 및 친척 방문 등 바쁜 일정을 소화시켰지만, 반대로 금일은 매우 한가한 날이 되므로 둘째 아들과 함께 유적지를 탐방하기 위하여 길을 나서 본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다소 긴 5일간의 연휴(年休)로 유익한 시간을 보냄과 동시에 추석(秋夕) 때 만든 음식도 소비시키면서 뜻 있는 곳을 방문하기 위하여 많은 음식을 챙겨서 길을 나선다.

방문 할려고 하는 장소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귀경 방향으로는 교통이 혼잡 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역귀경(逆歸京)이 되는 남해 방향의 국도나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Driver 하기 좋은 곳으로 선정하는데, 최상의 장소로는 서부 경남 지방이라고 생각되어 그 방향으로 Schedule를 잡는다.

아들이 애마 모닝을 운전하면서 구마고속도로를 잠깐 달려 현풍 Toll gate에서 내려 달성 2차 국가산업단지를 통과하여 낙동강변 따라 창령군 이방면사무소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곽재우 장군 무덤이 나타나는데, 묘소 앞에 있는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가 휴식도 겸하면서 잠시 무덤을 구경하여 본다.

 

1. 곽재우 묘소의 재 방문.

우리 나라에서 임진왜란을 이야기 할 때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 육지에서는 곽재우 장군을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명한 곽재우 장군이 잠들어 있는 산소가 이곳 낙동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일전에 창령군 이방면 우포늪을 방문하기 위하여 이 길로 내려갈 때 나는 Wife와 한번 돌아보았던 묘소이지만, 우리집 아들은 이곳 방향으로 처음 운전하여 가는 길이라 서비스 차원에서 재 방문이 이루어진다.

 

< 현풍곽씨 문중 묘소 앞에 있는 "비석" >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조그마한 야산 기슭에 수십기의 곽씨 문중 묘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묘소 주변에는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모인 곽씨들의 후손인지 아니면 나와 같은 불청객인지 한 무리의 젊은 남녀노소가 무덤 옆에 있는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 "현풍곽씨" 문중 묘소 전경 >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는 1552년 의병의 고장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천리에서 태어 났으며, 자는 계수(季綬)이고,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官軍)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서 관군을 대신하여 싸웠다.

그는 스스로 "천강 홍의장군(天降 紅衣將軍)" 이라고 하여,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입고 백마에 높게 앉아 아군과 적군에게 위엄을 보여 주었으며, 위장 전술로 적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장군이 이끄는 의병은 1592년 5월 이곳 곽재우 장군의 무덤이 있는 바로 아래 남강 및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왜적의 척후선을 격침하면서 처음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로 인하여 왜군의 진로가 차단되어 그들이 계획한 호남 진출을 막으므로써 왜놈의 기세를 꺽음과 동시에 의병의 기치를 크게 향상 시켰다고 한다.

그후 곳곳에서 승전(勝戰) 소식을 보내면서 선전을 이끌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곽재우 장군은 성주목사, 경상좌도 방어사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더 이상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광해 9년(1617년) 4월 10일 창령군 길곡면 상암리에서 66세의 나이로 타계하시며 숙종 35년(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익공(忠翼公)" 이라고 하였다,

묘소 입구 가장자리에는 일전에 방문 할 때 없었던 묘소의 현황과 더불어 설명문이 새롭게 만들어져 있어 그 내용을 읽어 보는데, 묘역에는 곽재우 장군의 증조부에서 부터 5대에 걸쳐 선영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 "현풍곽씨" 문중 묘소의 안내도 >

 

충익공 곽재우 장군이 임종 할 즈음 "나를 예장(禮葬) 하지 마라" 면서 "왜란 때 선왕의 두 능(陵)이 무너지고 불탔으니 신하된 자가 어찌 묘의 본봉을 쌓겠나? 내가 죽거던 구덩이에 묻기만 하여라" 고 유언하여, 충익공의 묘(墓)는 1617년 본봉도 없이 평장(平葬)으로 묻었다고 한다.    

그로 부터 114년이 지난 영조7년(1731년)에 한음 "이덕형(李德馨)" 의 후예 현풍현감 이우인(李友仁)이 충익공의 묘소를 참배한 후 실묘(失墓)가 염려 된다면서, 후손들을 설득하면서 충익공의 뜻을 받들어 본봉을 낮게 쌓았다고 한다.

이와같이 본봉을 쌓았다고 보고를 받은 경상도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로 부터 비문을 받고,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으로 부터는 글씨를 받으면서 역시 충익공 유언을 존중하여 1732년에 소박한 장식의 자그마한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 가운데 조그마한 묘비와 묘봉이 있는 "곽재우" 장군 무덤 >

 

충익공 묘에는 그의 정부인 "상산김씨(商山金氏)" 와 합장으로 묘소를 만들어져 있으며, 인접한 유가면 가태리에 불천위 사우(祠宇)와 "예연서원(禮淵書院)" 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2. 호암 이병철 생가 방문.

곽재우 묘소에서 낙동강변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낙동강을 건너는 적포교를 만나는데, 이곳 적포교를 건너 경남 의령군으로 들어가 호젖한 시골길 따라 30분 정도 운전하여 가면 의령군 장곡면사무소에 도착하면서, 면사무소 내부에 호암 이병철씨 생가(生家)를 가르키는 이정표 따라 들어가면 마을 중앙에 넓은 주차장을 만난다. 

 

<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부잣길" 안내도 >

 

< 모든 것이 부자로 통하는 "마을" 안길 >

 

주차장에서 마을 복판으로 연결되어 지는 동네 안길 따라 고불고불하게 들어가면 먼저 왼편으로 솟을대문이 있는 거대한 기와집이 나타나는데, 이 기와집이 이병철씨가 결혼한 후에 분가하여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 마을 안길로 들어가는 "이병철 생가" 안내판 >

 

< 이병철씨가 결혼 후 분가하여 살았던 집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현재, 집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장남인 이맹희씨가 가끔 방문하지만 마을 사람들도 거의 대면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살짝 다녀가고, 아직도 3남의 상성그룹 회장 이건희씨는 한번도 방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동네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이 기와집 따라 만들어진 돌담 옆으로 50m 정도 마을 깊숙하게 들어가면 이제는 오른편으로 아담한 동산을 품고 있는 또 다른 솟을대문을 만나는데, 이 솟을대문의 집이 우리나라 재벌의 일인자로 성장한 이병철씨의 생가이다.

 

< 이병철씨의 분가 집 "돌담" >

 

< "이병철씨 생가" 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솟을대문 내부에는 양쪽으로 각각 한개의 방이 있는데, 왼편의 방에 방명록이 비치하고 있어 간단하게 서명하고 나서 마당 오른편 담장 아래에 이병철씨 일대기를 기록한 안내문이 있어 그 내용을 읽어본다.

 

< 안에서 바라보는 "솟을대문" 과 방명록을 비치하고 있는 방 >

 

이곳은 한국경제 발전을 이끈 지도적 인물인 호암 이병철(李秉喆)씨가 1910년 2월 12일 태어난 생가이며, 호암 선생님은 천석꾼의 경주 이씨 찬우(纘雨) 공과 안동 권씨의 4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낳다.

호암은 6살 때 부터 조부 문산 이홍석(李洪錫)씨가 세운 서당 문산정(文山亭)에서 유학 경전을 익히고, 신문학에 입문하기 위하여 인접하게 있는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다녔다고 한다.

그뒤 서울 수송보통학교 4학년으로 전학하여 공부를 끝내고 중동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8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서 거주하는 박기동씨(순천 박씨 충정공파 :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의 넷째딸 "박두을(朴杜乙)" 여사와 결혼하였다.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하여 경제학을 공부하였으며, 귀국 후 일제식민지 시대에 민족경제의 육성의 절실함을 깨달아 처가집 도움으로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업하였다.

그후 삼성물산, 제일모직,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61년에는 한국경제인협회(현 : 전경련)를 발의하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65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풍족하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에는 특유의 통찰력과 선견력으로 반도체 산업을 전개하여,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발전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호암 선생님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 경제발전을 선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선생님은 성균관대학교를 인수 및 운영하면서 인재 육성을 비롯하여 문화, 예술,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의 발전에 많은 업족(業足)과 교훈을 남기고, 1987년 11월 19일 노환과 폐암의 합병증으로 향년 78세로 돌아가신다.

이병철씨 가계도(家係圖)를 한번 더 정리하여 보면 장녀 이인희씨,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 삼남 이건희씨 등 모두 3남 5녀의 자식을 둔 가계도는 확실하게 정리하고 있지만,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등 선대 형제에 대한 족보는 철저하게 배일에 가려져 있다.

많은 방문객들로 인하여 간단하게 내용을 읽어보고 나서 넓은 마당 중심부에 있는 사랑채로 먼저 들어가 보는데, 이 사랑채는 일자형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집이다.

 

<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사랑채와 정원" > 

 

<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한 "사랑채" >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또 다시 넓은 마당을 품고 있는 안채를 만나는데, 이 건물 형태도 사랑채와 똑같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안채 앞에는 우물이 있으면 그 우물 뒤쪽의 왼편 담벼락으로 장독대와 광채가 자리잡고 있다.

   

< 울창한 대나무 앞에 자리잡고 있는 "안채" 모습 >      

 

< 안채 뒤쪽에 있는 "장독대" >     

 

< "안채" 주변의 정원과 광채를 구경하는 관람객 >

 

이 모든 건물은 1851년 호암 선생님의 조부께서 대지면적 약 600평에 전통한옥 양식으로 손수 지었으며, 이병철 선생님은 이 집에서 태어나서 유년시절과 결혼하여 조금 전에 본 솟을대문 집으로 분가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보냈다.    

그 동안 몇 차례 증축과 개축을 통하여 새롭게 집을 단장하였으며, 아담한 토담과 바위 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구분되어 지고 있으며, 집 뒤편으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조성하고 있어 매우 운치있는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 형상을 하고 있는 절벽과 주변 산의 기(氣)가 산자락 끝에 집결하는 위치에 생가 터의 혈(穴)이 되고, 그 지세(地勢)가 융성 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南江)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 중에 명당이라 하겠다.

 

< 안채 오른편 기(氣)가 모여지는 "노적봉" 바위 >

 

< 부자의 꿈을 꾸면서 "노적봉" 앞에서 >

 

< 나도 부자의 "기(氣)" 를 받아보면서 >

 

이 생가에서 특별한 것은 광채가 왼편 담의 뒤편으로 들어가면서 건축되었는데, 그렇게 남의 집 영역을 침범한 것 같이 지어진 이유는 이 부근 땅 전부가 이병철씨 조부님의 땅 이었다고 한다.   

문화해설사 이야기로 이병철씨 생가에는 선대의 할아버지 이홍석(李洪錫)씨 및 아버지 이찬우씨가 살았다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2분의 동생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외동으로 혼자 성장하므로 이병철씨에게는 4촌 형제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2분의 작은 할아버지는 이병철 생가 좌측과 우측으로 담을 경계로 집을 짖고 살았는데, 옛날에는 땅의 경계선이 선명치 않아 현재 광채가 작은 할아버지 집 구역으로 침법하여 들어갔다고 한다.

 

< 안채 왼편 작은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쪽문과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광채" >

 

< 광채 내에 진열하고 있는 "생활도구" >

 

< 오른편에 있는 또 다른 작은 할아버지 "고택" >

 

그의 작은 할아버지도 한국 경제분야에 일각이 있는 분인데, 한분은 마산에 있는 무학소주를 창업하셨고 다른 한분도 상강 아이스크림을 생산하는 공장을 창업하므로, 선대 부터 부(富)를 창출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의 피가 흐르고 있는 집안이라고 하겠다. 

 

3. 대구 삼성상회 상가 터 구경.

아울러 몇일 전 대구광역시 달성공원 앞에 있는 인교동 61-1 번지 삼성상회 상가 터를 돌아 보았는데, 현재 삼성상회 건물은 철수되어 다른 빌딩이 신축되어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 당시 지하 1층 및 지상 4층 건물로써 대단한 크기를 자랑하면서 이곳도 명당의 터가 되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 "삼성상회" 건물의 모형도 >

 

< 대구광역시 인교동에 있는 "삼성상회 터" >

 

< 옛 "삼성상회" 의 건물 조각품 >

 

안내문에는 "아름드리 나무도 가느다란 뿌리에서 부터 생명을 얻고, 거대한 물 줄기도 작은 샘에서 출발하듯, 세계를 향한 삼성의 꿈이 이곳에서 발원하였기에 삼성은 여기 삼성상회의 기념자리를 마련하고, 언제나 그 초심(初心)을 기억하고자 한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 삼성상회 건물 "설명서" >

 

참, 재벌(財閥)은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조상의 은덕과 더불어 명당에서 묻어나는 기(氣)에서 발생하여 천운(天運)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집과 상가 터이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