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문화와 산행.

2016년 백봉회 시산제는 나의 고향 인접지역 성주군 가천면에 있는 "독용산" 에서 개최.

용암2000 2016. 2. 19. 22:30

2016년 2월 14일.(일요일)

 

1. 독용산 산행.

백봉회는 매년 구정(舊定)이 되는 설을 지나고 처음 맞이하는 2번째 일요일 날 시산제(始山祭)를 겸하는 산행이 이루어지므로, 금년에는 2월 14일 일요일에 개최하겠다는 집행부 연락이 도착한다.

금월 산행과 더불어 시산제를 올리기에 적합한 산을 추천하여 달려는 의견으로, 나는 나의 고향이 되면서 독용산성(禿用山城)이라는 문화재를 품고 있으므로 몇 번 찾아간 성주군 가천면과 금수면의 경계선에 있는 "독용산(禿用山)" 을 추천하여 본다.

이 독용산은 가야산 지맥이 되는 산으로 나의 농원이 있는 용암면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산의 정상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는 독용산성 까지 차량이 올라가므로 준비한 제물(祭物)을 용이하게 운반하기에 적합한 산이라 하겠다.

아침 9시 10분 법원 앞에서 출발하는 마이크로 버스는 출발지에서 단 한명의 동문만 탑승하여 나의 집이 있는 앞산 4거리에서 내가 승차하고, 마지막 정차장이 되는 서부정류장 앞에서 4명이 탑승하므로 금월 시산제에 참석하는 동문은 총 6명이 되면서 매우 저조한 성적의 출석율(出席率)이 된다.

평월 보다 이렇게 성적이 더욱더 저조한 이유가 계성고등학교 총동창 산우회에서 실시하는 산행이 구정에 따라, 첫째 일요일에서 둘째 일요일로 한주 순연하므로 동문 몇 명이 총동창회 산행에 첨석하여야 하기에 중첩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산행의 들머리가 되는 성주군 가천면 시엇골 마을에 도착하면서 마을 앞에서 산성을 축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임도(林道) 따라 산의 허리길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차도는 너무나 협소하면서 급경사 및 낭터리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져 있다.

나는 이곳으로 모닝을 몰고 신나게 운전한 경험이 몇 번 있으므로 뒤 좌석에 앉아 유유자적(悠悠自適) 하게 산천 풍경을 즐기고 있지만, 추운 겨울 날씨에도 기사분과 동문들은 불알을 꼭 잡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어 아직 죽기는 싫은가 보다.

이렇게 독용산성으로 올라가는 도로는 해발 고도 약 100m 정도가 되는 가천면사무소에서 단숨에 해발 고도 약 800m 정도의 독용산성 까지 치고 올라가므로, 만약 도로에서 차량의 교행이 일어난다면 난리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최악의 조건을 간직하고 있는 도로이라 하겠다.

산의 능선에 올라서면서 급경사의 길이 다소 완만하면서 전망대 한 곳이 자리하고 있는데, 기사분과 동문들에게 땀을 좀 식하기 위하여 전망대 옆 공터에 정차를 시키고 하차를 명령 함과 동시에 전망대 아래에 펼쳐지는 성주댐을 구경하기로 한다.

 

<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성주댐" 전경 >

 

성주댐은 1992년 완공되었으며 댐의 높이 60m에 제방길이 430m, 면적 3.530㏊, 총 3.800만 Ton의 저수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성주 관내에 거미줄 같이 농수로(農水路) 시설이 잘 만들어져 있어 참외가 활발하게 활착하는 봄 가뭄을 해결하는데 긴요한 댐이라 하겠다.

그로 인하여 성주군 지방자치단체에서 단일 품목이 되는 참외 한가지로 년간 5.000억 매출 목표를 가진다고 홍보하므로 성주군이 전국에서 최고의 부농(富農)이 되고, 아울러 인구 대비 최고의 티켓 다방과 외제차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애향(愛鄕)의 지역이라 하겠다.

성주댐 중앙으로 돌출하고 있는 산이 한반도의 반대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곳 전망대에서는 완벽한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하부의 야산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서 보면 완벽한 한반도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그 모습은 성주군에서 홍보하고 있는 안내문에 잘 표현하고 있으므로 홍보지를 참조하기 바란다고 설명하여 준다.

 

< 성주댐 속 반대의 모습을 가진 "한반도와 자연휴양림" >

 

댐 가장자리에는 성주군에서 새롭게 개발하고 있는 "아라월드" 라는 물놀이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 댐에 저장하고 있는 물이 전국에서 최고로 깨끗한 수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안심하고 몰놀이가 가능한 어린이의 천국이 되고, 또한 유흥시설과 더불어 잠자리가 되는 자연유양림을 운영하면서 이 휴양림의 숙박비도 전국적으로 최저의 비용을 받는다고 한다.   

동문과 기사분의 파란 얼굴에 다소 생기가 돌아오므로 출발을 재촉시키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약 10여 분 정도의 급커브 길을 계속하여 올라가면, 독용산성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과 더불어 독용산성을 홍보하는 조감도가 자리하고 있다.  

 

<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독용산성" 조감도 >

 

조감도를 보면서 간략하게 산행코스를 설명하고 시산제 용 제물을 분산하여 들고 산행의 초입길로 올라가는데, 초입길은 산성 내에 있는 고냉지 채소를 재배하는 농장으로 가는 넓은 비포장 임도가 잘 만들어져 있으면서 다소 완만한 산행길이다.

 

< 독용산성으로 올라가는 다소 완만한 "임도" >

 

한 모퉁이를 돌아서 올라가면 차디찬 겨울을 보내고 있는 나무가지 사이로 새롭게 복원 되어진 동문(東門)을 포함하여 뱀 같이 고불고불한 독용산성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풍족한 산세를 간직하고 있는 독용산 산맥이 한폭의 그림과 같이 펼쳐지고 있다. 

 

< 산 모퉁이에서 바라보는 "독용산성 및 동문" 전경 > 

 

산성을 바라보면서 조금 걸어가면 2개의 길로 나누어지는데, 아래 방향의 임도는 독용산성을 대표하는 동문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편 위쪽으로는 산성외곽 따라 독용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이 되므로 빨리 시산제를 지내기 위하여 나는 산성외곽 길을 선택한다.

 

< 오른편 "독용산 정상" 으로 올라가는 지름길 >

 

급경사의 산성외곽 길 따라 한 2-300m 정도 올라가면 동문과 연결 되는 산성에 도착하는데, 산성외곽에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없고 단지 한개의 암문이 자리하므로 겨우 빠져서 성안으로 들어가 성곽으로 올라간다.

 

< 산성 "암문" 으로 들어가는 암문 >

 

이곳 성곽에 올라서서 주변 풍경을 감상하여 보면 조금 전에 올라온 성곽이 산의 능선 따라 길게 도출하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성주군의 넓은 들판과 더불어 대구 인근으로 흐르고 있는 낙동강 모래사장이 아련하게 자리하고 있다.

 

< 성곽에서 내려보는 "독용산성" 일부 및 낙동강 >

 

고개를 조금 왼편으로 돌리면 첩첩산맥을 형상하고 있는 산속으로 성주댐 일부분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더욱더 한폭의 수채화를 형성하고 있어, 정말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산성이라 하겠다.

 

< 첩첩산맥 속에 자리하고 있는 "성주댐" >

 

여기에서 부터 산성 가장자리 따라 고도를 상승하면 오른편으로 멀리 수도산에서 발원하여 흘려내리는 계곡 "무흘구곡" 이 발 아래에 머룰고 있어, 이러한 풍경을 감상하면서 한참 고도를 상승하면 파손되어진 옛 산성 옆으로 길이 형성되어 있다.

 

< "산성 가장자리" 따라 걷는 동문 >

 

< 산성 오른편으로 펼쳐지고 있는 "무흘구곡" >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산성의 가장자리 따라 한 30분 정도 올라가면 해발 955.5m "독용산(禿用山)" 정상에 도착하는데,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과 더불어 헬기장 가장자리에 거대한 정상석이 삭풍에 몸과 얼굴을 노출하고 있다.

 

< 다소 "완만한 숲길" 도 걸으면서 >

 

<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독용산성" 따라 오르는 길 >

 

< "독용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정상석 >

 

독용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중 남쪽 방향으로 높은 가야산의 만물상 능선이 아련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수도산과 단지봉의 높은 산맥이 하나의 선을 형성하면서 하얀 눈 속에 머물고 있다.

 

< 독용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

 

동문 일행은 이곳 정상석을 배경으로 시산제를 올리기로 하면서 정상석 앞에 돗자리를 펼치고 간단하게 준비한 제물을 준비하고 시산제를 지내기로 하는데, 먼저 회장님의 배례와 더불어 축문(祝文)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진다.

 

< 독용산 정상석 앞에서 "시산제" 올리는 동문 >

 

< "축문" 을 낭독하는 회장 >

 

그러고 각자 돌아가면서 준비한 약간의 봉투를 내어놓고 절을 하는 순서를 가지는데, 산신제는 한해의 안전산행을 기원 함과 동시에 먼저 간 산우들을 추모하는 제사(祭祀) 의식과 더불어 가정의 평온 및 개인의 소망을 바라는 행사라 하겠다.

 

< 동문들도 "시산제" 를 드리면서 >

 

오늘 참석한 동문의 숫자가 워낙 적다 보니 간단하게 의식을 끝내고 넓은 헬기장에서 음복과 더불어 점심식사 시간을 가질려고 하였으나, 불어오는 삭풍으로 앉아 있기가 불가능 할 정도의 차디찬 바람이 지나가면서 잠깐 동안 나무가지에 설화(雪花)가 피어날 정도의 맹위가 떨치고 있다.

 

< 독용산 정상 주변 "설화" 가 피고 있는 나무가지 >

 

식사가 불가능하므로 바람이 더소 적게 불어오는 양지바른 곳으로 찾아가기 위하여 산행길을 재촉하는데, 하산길은 다소 시간적인 여유가 많으므로 산성도 구경할 겸 복문과 서문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시작한다.

 

< 정상에 있는 거리 "이정표" >

 

허물어져 있는 산성 따라 한 20분 정도 내려가면 3거리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직전의 방향으로는 가야산 또는 수도산으로 종주할 수 있는 능선길이 되고 왼편으로는 산성 중 서암문으로 내려가는 길이 된다. 

서암문 방향의 산성 따라 하산을 하면서 바람이 적게 일어나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 자리를 준비하고, 이곳에서 무겁게 지고가는 막걸이와 더불어 점심식사 시간을 가지기로 한다.

금일은 시산제로 사용한 막걸리와 더불어 푸짐한 돼지머리를 안주로 삼아 점심식사를 하고 제례용으로 사용한 과일을 후식으로 즐기므로, 추위에도 아랑하지 않고 즐거운 점심식사 시간이 무한정 흘려간다.

 

< 양지바른 곳을 찾아 "점심식사" 를 즐기는 동문 >

 

다시 자리를 정리하고 하산을 하는데, 여기에서 산성 따라 계속하여 전진하면 남문과 더불어 배바위, 안국사지 및 시엇골로 내려가는 종주길이 되지만 일행은 왼편 고냉지 채소 농사를 짖고 있는 밭 방향으로 내려가 독용산성의 허리길 방향으로 길을 선정한다.

해방 전후로 이곳 고냉지 채소 밭 주변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마을에는 약 40가구 100여 명이 거주하였지만, 1960년 대에 이주 정책으로 마을 전체가 이주하므로 현재는 산성 아래에 있는 시엇골 마을 주민들이 이곳 까지 왕래하면서 농사를 짖고 있다.

 

< 산성 내에서 "고냉지 채소" 를 키우는 밭 >

 

< 산성 허리길에서 만나는 고목의 "소나무" >

 

산성의 허리길이 되는 임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독용산성에서 유일하게 복원이 되면서 산성의 하일라이트가 되는 동문에 도착하는데, 동문 뒤편으로 산성의 축성 과정과 더불어 헌신한 5분의 불망비가 자리하고 있다.

 

< 독용산성의 하일라이트가 되는 "동문" >

 

< 동문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5분의 "불망비" >

 

이 불망비(不忘碑) 앞에 있는 동문으로 올라가 산성을 구경하여 보는데, 독용산성은 경북 천연기념물 제105호 지정되어 있으면서 산성의 길이가 약 7.7Km에 폭이 약 1.5m. 높이 약 2.5m, 면적 35만 5천 평이 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면서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이다.

 

< "동문" 에 올라 주변 풍경을 구경하는 동문 >

 

축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 부터 약 1.500여 년 전 성주군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성산가야" 시대에 쌓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산성 내에는 풍족한 수원과 더불어 넓은 공간이 자리하므로 장기 전투에 우수한 산성이었으며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마을 아래에 있는 주민들이 올라오면서 발견된 산성이다. 

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년)에 관찰사 "정중휘(鄭重徽)" 가 개축하였는데, 동서남북 7개의 포루와 아치형 동문, 수구문, 남소문 등이 있었으며 동서 군량고가 있어 성주를 비롯하여 합천, 고령, 거창의 군량미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 새롭게 축성한 동문 앞에 있는 "독용산성 설명서" >

 

동문 오른편으로 길게 뻗어난 성벽을 "치(雉)" 라고 부르면서 독용산성 내에는 이러한 치가 동문과 남문 2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치에서는 적의 동태를 관찰하는 망루가 있었다고 하지만 아직 망루를 복원하지 않고 있어 안내문과 차이가 발생한다. 

 

< 동문에서 "치" 까지 이어지고 있는 산성외곽 >

 

이곳 동문은 마이크로 버스가 주차하고 있는 주차장에서 한 30분 남짓 걸어 올라오면 만나는 곳으로 무너진 성벽과 성문이 남아 있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동문에 올라서서 주변 풍경을 구경하여 보는데, 산성 앞으로는 깊은 시엇골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골짜기 끝지점에 시엇골 마을과 더불어 멀리 성주군 들판이 자리하고 있는 풍경이 머물고 있어 정말 환상적 풍경을 보유하고 있는 산성이라 하겠다.

동문 주변에 머물면서 한참 동안 풍경을 즐기다가 혼자 기다리고 있는 기사님을 위하여 에둘러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오늘 따라 등산객 한명도 방문하지 않으므로 무척 지루 함을 가졌다고 한다.

오후 2시 40분 경 다소 일찍 산행이 종료 되므로 대구로 바로 출발 하기에 차량의 비용 등 경비 지출에 따른 효율성 제고(提高)가 너무 낮아, 성주군의 대표적 관광지가 되는 세종대왕 왕자 태실을 추가 관람하기로 한다.  

 

2. 세중대왕 왕자 태실 관람.

고향이 성주가 되는 나를 제외하고 동문 모두가 세종대왕 왕자 태실 방문이 처음이라고 하면서, 왜 세종대왕 왕자의 태실이 한양에서 최고로 머나먼 이곳 성주군에 자리하고 있는지 궁궁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할 수 없어 내가 마이크를 잡고 성주군의 역사와 변천사를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성주군은 한국에서 최고의 길지를 가진 지방자치단체로써 현재 성주군에는 3곳의 왕자 태실이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3곳 태실 중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 되는 제4대 "세종대왕" 은 아들 18명과 손자가 되는 단종 태실이 아곳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일괄 모시고 있으므로, 몇년 전 까지 성주군 행사가 되는 성주참외 축제를 "성주생명문화" 축제로 명칭을 변경한 사유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성주군은 인간의 생노병사가 되는 출생(세종대왕 왕자 태실), 삶(한개마을), 죽음(성산가야 고분)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성주군의 상징이 되는 별빛 또는 최고의 먹거리가 되는 참외 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근원으로 하기 위하여 현재 전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참외를 가감하게 버리고 생명문화로 전환하였다고 본다. 

그 중 한 곳이 되는 이곳 세종대왕 왕자 태실은 성주군에서 유명한 선석산 언저리에 천연 고찰 선석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이 선석사와 태실에 대한 내역은 입구에 있는 해설사가 너무나 잘 설명하므로 그분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로 하고 단지 나는 됫 스토리를 첨언하겠다고 한다. 

태실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추운 겨울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태실을 관람하고 있는데,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해설사 대기소로 들어가 일행의 숫자를 말하고 해설을 부탁 함과 동시에 안내 팜플릿 한장씩 챙기고 해설사 따라 해발 258.2m에 자리하고 있는 태실로 올라간다. 

 

< 해설사와 함께 "태실" 로 올라가는 계단 >

 

태실 가장자리에 있는 안내도 앞으로 인도한 해설사는 태실에 대한 내역을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이곳 세종대왕 왕자 태실에는 19명의 세종대왕 아들 중 18명의 왕자와 세종대왕의 손자가 되는 단종의 태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 "세종대왕 왕자 태실" 을 설명하는 해설사 >

 

우리나라에서 훈민정음과 더불어 많은 과학을 발전시킨 세종대왕은 19명의 왕자와 더불어 4명의 공주를 출생시킨 매우 다복한 왕이 되는데, 이 많은 아들 중 장손이면서 후대의 왕이 되는 제5대 문종의 태실을 제외하고 18명의 아들과 문종의 아들이 되는 단종 태실을 포함하여 총 19기 태실이 이곳 성주에 일괄 묻혀진 장소이다.

본래 이곳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기 위하여 역성 혁명을 일으킨 "이성계와 정도전" 과 한판 붙으면서 마지막으로 죽음을 당하는 고려말 충신 "이인임" 씨 선산이지만, 계룡산 천도를 주도하는 신돈의 주장을 꺽은 풍수의 대가 "하륜" 선생님이 이곳을 점지하므로 세종대왕이 탈치(?)한 장소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태실을 정한 세종대왕은 일반적으로 태실 한기를 이장하기 위하여 지관을 비롯하여 수천 명 사람과 비용이 들지만, 세종대왕은 나라의 곡간을 생각하여 4년 동안 일괄하여 여기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에는 2줄로 만들어져 있는데, 뒤줄의 제일 왼쪽에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이 된 조선 제7대 세조의 태실이 되고, 그 다음으로 정실 왕후에서 출생한 8명의 아들 태실이 일렬로 자리하고 있으면서 제일 오른편 구석에는 조선 제6대 왕이 되는 단종의 태실이 봉안되어 있다.

 

< 2줄을 형성하고 있는 "세종대왕 왕자 태실" 전경 > 

 

앞 줄에는 세종대왕의 후궁에서 출생한 10명의 아들 태실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등극한 세조는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반란을 도모한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안평대군 등 5기의 태실을 파손시켜 산 아래로 굴러 던져 현재는 받침돌만 남아있다.

각 태실 앞에는 왕자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비석의 글자가 너무나 오래되면서 마모가 되어 몇 기를 제외하고 누군지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그 중에서 평원대군, 영응대군, 의창군은 판독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태실은 1977년 12월 이곳을 보수 및 정비를 하면서 금성대군, 화의군, 단종 등의 태실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토기, 태호, 분청인화문 대접, 분청상감 연화문 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태실에 관련 되는 의궤(儀軌)를 발견하므로 태실의 주인공을 판독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조의 등극으로 인하여 제일 미운 조카이면서 단종의 태실을 소실하였고, 이곳 주민들이 태실을 수습하여 오늘 산행을 추진한 독용산 언저리에 있는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이곳으로 복원시켰다고 한다.

 

< 몇 번 이전을 당한 "단종 태실" >

 

그 시대에 세조는 장손도 아니면 또한 왕도 아닌 단순하게 한명의 "수양대군" 이므로 다른 왕자와 함께 이곳에 태실을 봉안하였는데, 추후 왕으로 등극하고 나서 자신의 태실 앞에 돌 거북이로 되어진 가봉비(加封碑)를 추가하므로 모든 왕자는 태실이라고 불려지지만 자신은 태봉(胎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 세조 태실 앞에 있는 돌 거북이의 "가봉비" 와 받침돌만 남아 있는 왕자 태실 > 

 

이 가봉비에 새겨진 내용도 거의 판독이 불가능한데, 이유는 세조의 행각을 비난하는 주민들이 세조가 너무나 미워 글씨를 지웠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과거나 현재 모두 권력에 아첨하는 정치인들은 동일한 추태를 보인다고 한다.

아울러 성주군에서 또 다른 명당의 태실은 세종대왕 아버지가 되는 조선 제3대 "태종대왕" 이방원의 태실이 나의 고향 마을과 인접하게 있는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에 안장하므로 성주군이 얼마나 풍수 지리학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 설명문 옆 왼편 성주군에서 3곳의 태실이 있다는 "사진" >

 

추위로 인하여 횡하니 태실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가 따뜻한 오뎅으로 몸을 녹이고 계곡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선석사 사찰을 구경 할려고 하지만, 날씨가 풀리는 계절에 관람과 함께 선석산 종주산행을 한번 추진하자고 하면서 대구로 출발하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