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 문화와 산행.

경남 합천군 삼가면 소재지에 있는 유형문화재 "삼가향교" 를 비롯하여 "기양루" 등 방문하면서.

용암2000 2016. 11. 30. 21:05

2016년 11월 22일.(화요일)

 

1. 삼가면의 역사.

남명 선생의 생가를 벗어나자 마자 지방도로 따라 한 20분 정도 합천읍 방향으로 올라오면, 삼가면 소재지에 도착한다.

소재지의 동네를 2분화(二分化)하는 양천(梁川) 강을 중심으로 옛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북쪽과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남쪽으로 양분하고 있다.

 

< 삼가면 소재지를 양분하고 있는 "양천" 강 >

 

삼가면(三嘉面)은 삼한시대에는 사이기국(斯二岐國)이란 부족국가의 옛 터로써, 양전리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삼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어 이를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고려 때는 삼기현(三岐縣)과 가수현(嘉樹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을 조선 태종 14년(1414年)에 첫 글자를 따서 "삼가(三嘉)" 라 불려졌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곳에 삼지현(三支縣)을 설치하였고, 35대 경덕왕이 이곳 지명을 삼기현(三岐縣)이라 고치고 강양군(江陽郡)의 영현으로 부속시켰다.

그 후 고려 8대 현종 9년(1018년)에 합천의 속현으로 두었으며 공민왕 22년(1373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렸고, 가수현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가주화현으로 불렸으며 35대 경덕왕 때 진주(晋州) 관할에 두었다.

고려 이후 삼가현의 현청을 현재의 삼가쪽으로 옮기고 현감을 두었는데, 조선 고종 32년(1895년)에는 현에서 군으로 승격 명실상부(名實相付)한 행정의 중심부가 되었으나 19년 만에 다시 면(面)으로 격하되어 옛날의 권위는 찾을 수 없으면서 1914년 합천군에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의 규모는 축소되어 옛 영광을 찾지는 못하지만, 옛 시가지가 되는 강북 방향의 중심지에 있는 재래시장을 비롯하여 한우 불고기를 판매하는 식당들이 즐빈하게 자리하고 있어 주말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먹거리 촌을 형성하고 있다.

 

< 삼가면 중심지에 산포하고 있는 "한우 불고기" 식당 >

 

< 삼가면에서 재일 맛 있는 "한우 불고기" 를 제공한다는 식당 > 

 

2. 삼가향교를 찾아서.

먼저 소재지 남쪽 방향에 있는 "삼가향교(三嘉鄕校)" 를 방문하여 보기로 하는데, 향교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시골 마을이 형성하고 있어 고불고불한 마을 안길 따라 한참 들어가야만 향교를 만나게 된다.

 

< 마을 입구에서 "삼가향교" 를 가르키고 있는 표시 >

 

다소 좁은 주차장 뒤편으로 향교의 외삼문이면서 2층의 루각 건물이 되는 "풍화루(風化樓)" 가 보이지만, 건물 앞을 가로 막고 지어진 시골의 집으로 향교의 전면 풍광을 억망으로 만들고 있어 크게 실망이 일어나게 하는 향교가 된다.  

 

< 주차장 뒤편 구석에 있는 "하마비" 와 시골의 집 >

 

정문이 되는 풍화루 앞으로 접근하면 높은 축대 위로 건립되어져 있는 풍화루 건물이 너무나 급경사 면에 자리하고 있어 고개를 완전하게 뒤로 누워야 건물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 높은 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풍화루" >

 

그러나 풍화루의 1층 삼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의 출입이 불가능하여 관람을 접을까 하는 마음으로 오른편 마을 안길로 올라가니, 향교 오른편으로 관리사 건물로 들어가는 돌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 향교 오른편 "관리사" 로 들어가는 돌계단 >

 

관리사 건물로 들어가니 사람이 거주하는 살림 도구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인기척이 없어 건물 마당을 통과하여 향교 방향으로 들어가는 측문(側門)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는데, 향교에서 전학(前學)의 공간이 되는 명륜당 건물 옆에 도착한다.

 

< 제례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 과 향교로 들어가는 측문 > 

 

먼저 명륜당 마당 앞에 있는 풍화루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주변 풍광을 돌아보는데, 풍화루는 1986년에 중건한 정면 3칸에 측면 2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2층 누각으로 처마선이 거의 일직선이며 상층 누각 가장자리에는 안전을 위하여 평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 명륜당 마당에서 바라보는 "풍화루" 후면 >

 

다시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명륜당 가장자리에 있는 삼가향교에 대한 내력을 읽어보는데, 삼가향교는 세종 때 유림들이 향리의 자제들 교육을 목적으로 건립하였지만 건립 년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중종 15년(1520년)에 명륜당 등을 확장 및 보수 하였다고 한다.

 

< "삼가향교"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4년(1612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순조 26년(1826년)에 정우용(鄭友容)이 대성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풍화루와 홍학당(興學堂)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향교는 조선시대에 공인된 지방교육기관으로 국가로 부터 토지, 노비, 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가 실시되면서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향() 기능만 담당하게 되었다.

향교 건축물에는 크게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지는데, 삼가향교도 앞쪽의 낮은 터에는 강학공간이 되는 명륜당() 건물을 두고 뒤쪽 높은 터에는 제향공간이 되는 대성전(殿) 건물을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전형적 향교 배치를 따르고 있다.

특히 명륜당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5량 구조의 익공집으로 기단은 잡석을 막 쌓은 뒤 넓은 갑석을 덮어 마무리 하였고, 그 위에 원형 기둥으로 잘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을 놓았다.

 

< 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이 되는 "명륜당" >

 

명륜당을 돌아서 제향공간이 되는 대성전 영역으로 들어가면 먼저 내삼문을 만나는데, 내삼문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3량 구조의 솟을대문으로 구성하고 있다.

 

< 제향공간 앞에 있는 '내삼문" >

 

내삼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올라가면 대성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성전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6량 구조의 주심포집 건물로써 내부에는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 >

 

< 대성전 전면 양쪽에 있는 "정료대" >

 

1983년 8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어 있으면서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 및 보름에 분향하고 있는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두명 정도를 두어 운영을 맡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3. 기양루를 오르면서.

향교를 벗어나 삼가교 다리를 건너 가는데, 다리 입구에 있는 로타리와 더불어 다리 난간 옆으로 이 고장의 상징이 되는 한우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삼가면에는 한우 불고기가 유명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삼가교 좌우에 있는 "한우" 조형물 >

 

시가지 중심을 통과하여 삼가시장 방향에서 내부의 길로 올라가면, 도로변 가장자리에 2층의 "기양루(岐陽樓)"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양루의 건축 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합천군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 옛 고을 수령들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시가지 중심지에 있는 "기양루" >

 

이 누각의 동편으로 관아 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삼가현성(三嘉縣城) 안에 있었던 관청의 부속 건물로 보이는데, 이 건물에서 이순신 장군이 머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전에 건축되어진 누각이다.

 

< "기양루"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은 1597년 3월 4일 한양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되는데, 4월 1일 부터 8월 2일 까지 120일 간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한양에서 경남 하동으로 걸어서 내려가는 과정에서 경남 합천군을 지나간다.

6월 2일과 3일 동안 삼가현에 머물었다가 6월 4일 합천군 율곡면 매실마을에 있는 모여곡 "이어해" 집에 도착하여 7월 18일 까지 45일간 머물었다고 하는데, 전시에 이렇게 오래 동안 머물었던 것은 인근 지역 초계현에 "권율" 도원수 진이 있었다.      

특히 7월 18일 이어해 집에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 장군을 찾아와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의 패전 소식을 전하므로 침통해 하다가 이순신 장군은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나선 곳이기도 한 매우 의미가 있는 유적지가 되지만, 현재 이어해의 집은 표시석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고 한다. 

기양루((岐陽樓)라는 누각 명칭은 통일신라 시대의 경덕왕 때 삼기현(三岐縣)에서 강양군(江陽郡)으로 바꾸어지면서 양 지명에 있는 기(岐)자 및 양(陽)자의 두 글자를 응용하였다고 추정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조선시대 관청 건물의 이름을 지을 때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라 하겠다.

내가 누각 옆에서 머물고 있으니 누각 옆에 있는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젊은 청년이 다가와 울타리 중앙에 있는 쪽문을 통하여 누각 2층으로 올라가 관람하는 것이 좋겠다는 추천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계단을 이용하여 2층으로 올라가 누각 내부를 관람하여 본다.  

기양루 누각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2층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5량() 구조의 익공집으로 2층 마루를 따라 닭볏 모양의 난간()이 둘러져 있지만, 기단이 따로 없고 평지에 바로 약 40cm의 원 기둥형으로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된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2층 처마 주변으로 주련(柱聯)을 비롯하여 많은 탐방기를 기록한 현판이 붙어 있으면서 아울러 대들보가 상호 마주 보는 2마리의 용(龍)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 아래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 기양루 2층 후면에 붙어있는 또 다른 현판의 이름 "가수헌" > 

 

 < 기양루 처마에 붙어있는 "탐방기" 현판 >

 

< 2층 대들보로 사용하고 있는 "용" >


4. 삼가장터 3.1 만세운동 기념탑을 구경하면서. 

이 밖에 삼가면의 중심지가 되는 삼가장터 인접지역에 "3·1 만세운동 기념탑" 이 서 있는데,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 합천의 변방이 되는 심심산골에서도 군민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달려 나와 3·1 만세운동을 전개한 장소이라 정말 놀램을 가지게 한다.

 

< 삼가면 중심지에 있는 "장터" >

 

< 삼가장터 인접에 자리하고 있는 "3.1 만세운동 기념탑" >

 

< "3.1 만세운동 기념탑" 에서 바라보는 삼가장터 전경 >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합천의 인구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5만의 숫자도 되지 않은 작은 농촌이지만, 그 당시 지역민 약 3만명이 만세운동에 참여 하였다고 한다.

이 만세운동으로 40여 명이 순국하고 15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50여 명이 옥고를 치른 지역인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만세운동 중 하나가 된다고 한다.

 

< "삼가장터 3.1 만세운동"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2005년 8월 15일에 기념탑을 제막하였고 2006년 5월에 광장을 완공하면서 주변으로 만세운동에 참여 하였다가 전사한 사람의 성명과 더불어 무명의 시민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 이 지역에서 순직한 "애국지사" 의 기념비 >

 

< 삼가면의 주산이 되는 "백악산" 을 홍보하고 있는 현수막 >

 

기념탑 뒤편으로 삼가면의 주산이 되는 백악산(白岳山)과 더불어 삼가면 변천사를 기억하게 하는 현수막이 붙어있는데, 여기에 있는 주산을 오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심정에 대하여 다소 애석 함이 묻어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