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 문화와 산행.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사림의 영수가 되는 남명 "조식" 선생님 생가 및 뇌룡정을 찾아보면서.

용암2000 2016. 11. 27. 22:06

2016년 11월 22일.(화요일)

 

1. 남명 조식 선생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학교에서 금일 오전 근무와 더불어 합천군 초계면에서 인접하게 있는 삼가면으로 내려가 보기로 하는데, 삼가면에는 이 지역에서 배출한 남명 "조식(曺植)" 선생님 생가와 더불어 뇌룡정, 향교, 기양루 등 많은 문화재들이 보유하고 있는 고을이다.

초계면에서 삼가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합천시가지로 들어가 새롭게 단장하고 있는 국도 33번을 이용하여 진주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국도 중간지점이 되는 산청군 대의면 소재지 방향에서 내려 남명로 따라 다시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방향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대의면소재지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자 마자 외토리 마을에 도착하면서 마을 입구에는 수령 약 450년이 되는 느티나무와 함께 도로 가장자리에 재실과 더불어 작은 건물 내 쌍비(雙碑)가 자리하고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어, 그 내용을 읽어보니 이 비석에는 인천이씨(仁川李氏) 의정 "이온(李縕)" 선생의 효자를 기리는 비석이 된다고 한다.

 

<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마을 입구에 있는 수령 450년 "느티나무" >

 

< 인천이씨 "이온" 선생을 기리는 쌍비 >

 

< 합천 외토리 "쌍비" 의 설명문 >

 

< 쌍비 왼편에 있는 "재실" >

 

효자 비석 앞으로 넓은 농경지가 펼쳐지고 있으면서 그 농경지 중간지점에 한 무리의 기와집 건물들이 자리하므로 다시 승용차를 몰고 농경지 가운데로 들어가 보는데, 입구가 되는 도로 가장자리에 뇌룡정이라는 입석이 서 있다.

 

< 도로 가장자리에 있는 "뇌룡정" 입석 > 

 

이 입석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전면에는 뇌룡정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광장 뒤편으로 용암서원이 자리하고 있고, 용암서원 왼편 구석으로 별도의 건물이 되는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지만 아직 개관하지 않은 상태로 방치하고 있다.

 

2. 용암서원을 관람하면서.

관람 순서는 먼저 광장 뒤편에 있는 용암서원을 구경하기로 하는데, 넓은 광장의 좌측에는 화장실과 더불어 관리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광장 뒤면에는 정문이 되는 솟을대문과 더불어 대문 앞에 한장의 팜플릿이 놓여 있으므로 팜플릿에 기록하고 있는 남명 조식 선생님의 내력을 살펴본다.

 

< 넓은 광장과 함께 하는 "용암서원" 입구 >

 

남명(南冥) 조식 선생님은 1504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를 지낸 부친 조언형(曺彦亨)과 모친 인천이씨의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 낳으며,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건중(健仲)이며 호는 남명이다.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으나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자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학문을 배웠고,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목격하였으며 10세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의 죽음을 당하고 숙부도 이에 연루되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잘못된 정치의 폐단을 슬퍼하였다.

30세 부터 처가가 있는 김해의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건립하여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를 가르켰으며, 48세에는 다시 고향이 되는 삼가의 토동(외토리)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복당(鷄伏堂)을 짓고 제자를 길렀다.

이 시기에 선생님의 명성은 이미 사림(士林)의 영수로 온 나라에 떨쳐 각종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55세에는 그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를 올려 사림의 기개를 드높였다.

61세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德山)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고, 선생의 교육 철학은 개성 교육으로 개인의 자질에 따라 가르키며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중시하였다.

또한 성리학의 이론적 측면만을 궁구 함에 따른 폐단을 익히 알고 실천을 중시하여,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궁마(弓馬), 향진 등의 학문도 가르켰다고 한다.

선생이 67세 되는 해 왕위에 오른 선조 임금이 여러번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고, 68세에는 학문적 성과를 집약한 것으로 유명한 "무진봉사(戊辰封事)" 를 올려 정치의 폐단과 이를 개혁 할 대안을 제시하였다.

일생 동안 선비의 삶을 올곧게 지키며 국정의 쇄신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72세인 1572년 2월 8일 산천재에서 운명하였는데, 선생의 운명을 듣고 선조 임금은 스스로 소자(小子)라 칭하며 의지 할 대노(大老)의 서거를 슬퍼하는 사제문을 내렸다.

선생의 학문은 "경(敬)" 과 "의(義)" 두 글자로 집약 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을 뜻 한다)" 에서 따온 것이다.

선생은 학문과 삶이 일치되는 것을 강조하였고, 항상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마음 아파하며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역설하였으며, 그 후 광해군 때에는 문정(文貞)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으로 추정하였다.

선생의 문하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는데, 학문적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오건, 김우옹, 최영경, 하항, 정구, 정탁을 비롯한 48가(家)에 달하는 당대 석학들은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의병을 일으킨 3대 의병장을 비롯하여 조종도, 전치원 등 50여 명 의병장은 임진왜란의 국난 극복에 선봉이 되었다고 한다. 

솟을대문 오른편으로 거대한 바위와 더불어 남명 선생님 흉상이 자리하고 있어 그 내용을 읽어보기로 하는데, 거대한 바위에 새긴 내용은 선생님이 조선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으로 그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뭉클하여 지며 어찌 시골에 거주하는 사림의 한 선비가 왕에게 저렇게 직언이 가능할까 상상을 초월하게 만든다. 

 

< 솟을대문 오른편 "상소문" 을 기록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 >

 

남명 선생께서 명종 10년(1555년) 10월 11일 단성현감(丹誠縣監)에 재수되었으나 그 해 11월 19일 뇌룡정에서 단성현감 사직소(일명 단성소)를 올리면서 임금과 조정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의 소(疏)로 유명하며, 비석은 2009년 4월 6일에 세웠으며 크기는 가로 5.15m에 세로 2.0m, 두께 0.9m, 무게가 자그만치 8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이다.

그 옆에 있는 남명 선생의 흉상(胸像)은 높이 2.5m에 좌대 높이 1m, 폭 3m의 크기로 제작 되었는데, 그 좌대 우측면에 기술하고 있는 내용은 전주 부윤에게 보낸 편지로써 선생의 궁피한 삶을 기록하고 있어 남명 선생님이 얼마나 청빈하게 살고 있는지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 남명 조식 선생님의 "흉상과 편지" >

 

이렇게 용암서원의 주변을 관람하고 나서 솟을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갈려고 하니 문이 잠겨져 있는 것 같아 가깝게 접근하여 보니, 문고리에 로프로 묶여있어 좀 무리하지만 로프를 풀고 내부로 들어가 관람하기로 한다.

 

< 로프로 잠겨져 있는 "솟을대문" >

 

용암서원(龍巖書院)은 조선 중기 때의 거유(巨儒)이자 실천 성리학자가 되시는 문정공 남명 조식(1501-1572년) 선생을 존모하면서 제향(祭享)을 올리는 장소이면서, 또한 강학 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이 서원의 전신은 선조 9년(1576년)에 노흠(盧欽), 송희창(宋希昌) 등 여러 선비가 의논하여 삼가현 서쪽 20리 근처 회현(晦峴 : 현재의 가회면 장대리)에 세운 회산서원(晦山書院)이라고 남명집 등에 기록하고 있다.

회산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그 후 선조 34년(1601년)에 서원을 재 창건하면서 서원 지(地)가 협소하므로, 여러 선비들이 의논하여 봉산면 봉계리에 있는 황강 앞으로 옮겨 건립하였다.

황강으로 이건된 4년 후 선조 38년(1605년) 8월에는 남명의 위판(位板)이 봉안되고, 광해군 1년(1609년)에는 용암(龍巖)이라는 사액이 내려졌으나 용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내려진 1871년에 훼철이 된다.

지금의 건물은 2000년도에 복원추진 위원회가 결성하고 2007년에 현재의 자리에 이전 건립되었는데, 서원의 건물에는 사당 숭도사(崇道祠)와 전사청(典祀廳), 강당 거경당(居敬堂), 동재 한사재(閑邪齋), 서재 존성재(存誠齋) 및 내외의 삼문으로 지숙문(祗肅門)과 집의문(集義門)으로 구성하고 있다.  

 

< 강당이 되는 "용암서원" >

 

< 동재가 되는 "한사재" >

 

< 서재가 되는 "존성재" >

 

넓은 마당 뒤편에 있는 거경당을 구경하고 왼편으로 돌아서 가면 묘정비를 만나는데, 묘정비는 남명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그를 향사하고 있던 용암서원 뜰에 세웠던 비석으로 우암 송시열 선생님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삼가현감 오철상 선생님이 썼다고 한다.

 

< 강당의 왼편에 있는 "묘정비" >

 

강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내삼문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 내삼문에도 철사로 점겨져 있어 철사를 풀고 내부로 들어가면, 어느 서원과 동일하게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남명 선생님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숭도사와 더불어 전사청 건물이 보이지만 넓은 마당으로 인하여 매우 산만한 영역이 된다.

 

<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

 

< 남명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도사" >

 

< 숭도사 오른편 파손되어 있는 "전사청" >

 

3. 뇌룡정 구경.

이렇게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용암서원을 관람하고 서원 앞에 있는 뇌룡정을 찾아 보기로 하는데, 뇌룡정 건물은 4각의 울타리 속에 자리하면서 전면이 되는 남쪽 방향의 3칸 대문과 더불어 동쪽 및 서쪽 벽면에는 작은 쪽문이 자리하고 있다.

 

< 뇌룡정으로 들어가는 "쪽문" >

 

< 뇌룡정의 정문이 되는 "3칸 대문" >

 

그러고 마당 북쪽 방향에는 뇌룡정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뇌룡정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와가(木造瓦家)의 형태로 전면에는 원형 둥근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대청 좌우편에는 3개의 방을 두고 있다.

뇌룡정(雷龍亭)은 남명 조식 선생님이 48세 때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뇌룡정과 계복당(鷄伏堂)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켰으며, 1900년대 초 허유 등에 의해 뇌룡정이 다시 중건하였다.

 

< 제자를 가르켰던 "뇌룡정" >

 

뇌룡정이라는 말은 장자에 나오는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 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 "뇌룡정" 을 설명하고 있는 입석 >

 

4. 조식 선생님 생가 방문.

용암서원과 뇌룡정을 관람하고 주차장에 두고 있는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용암서원을 떠나기로 하는데, 용암서원 왼편으로 남명 선생님의 유물을 전시 할 공간이 되는 기념관 건물이 미완성으로 남아 매우 삭막함이 묻어나는 공간이다.

 

< 미완성 건물로 남아있는 "기념관" >

 

도로 따라 조금 더 내부로 들어가면 외토리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을의 안길 따라 거의 끝지점 까지 올라가면 남명 선생님의 생가가 있다는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어 안길에 차량을 두고 걸어서 야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새롭게 신축한 생가 대문을 만난다.   

 

< 외토리 마을 입구 "남명 선생 생가" 이정표 >

 

< 외토리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 >

 

대문 앞에는 생가터에 대한 안내문이 있어 그 내용을 정독하여 보면, 선생의 생가 건물 건립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면서 생가 건물은 70년도에 새마을 사업시 철거하였으며 생가 복원을 새롭게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 남명 선생님 생가 "안내문" >

 

대문 옆에 있는 담을 넘어 생가 내부를 들어다 보면 넓은 마당과 더불어 본채의 건물 한채 만 달랑 건축되어져 있어 너무나 삭막한 생가가 되면서 건물 주변으로 울창한 대나무 숲을 형성하고 있어, 합천군 율곡면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와 많이 유사 함을 느끼게 한다.

 

< 남명 선생의 생가 "대문" >

 

< 넓은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남명 생가 "안채" >

 

이밖에 인접하게 남명 선생님의 무덤과 더불어 아버지 및 어머니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설명문이 있지만, 여기에서 남명 선생님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으로 종료하며 삼가면에 있는 또 다른 문화재를 관람하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