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6일.(목요일)
당일 좀 무리하게 합천군에 산재하고 있는 유적 및 관광지를 돌아보기 위하여 합천영상테마파크에서 황강 상류방향으로 조금 운전하여 올라가면 합천댐에 도착하는데, 댐을 홍보하고 있는 "물문화관" 이 10월말 까지 내부공사로 인하여 출입을 통제하므로 관람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물문화관에서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에 다소 아쉬움이 발생하여 나는 블로그를 작성하기 전 수시로 찾았던 황매산 모산재 방향 산행길에서 만났던 "영암사지(靈巖寺址)" 가 생각이 나는데, 나의 농장이 있는 성주 용암으로 돌아가는 길과 반대의 길이 되지만 그래도 도로 사정을 잘 알고 있어 눈 앞에 아롱거리고 있는 영암사지로 발길을 돌리기로 한다.
합천댐을 홍보하는 물문화관에서 한 20여분 정도 운전하여 가면 모산재 아래에 있는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 입구에 있는 모산재 식당에는 다수의 등산객들이 하산주를 즐기는 모습을 뒤로 하고, 모산재로 올라가는 매우 좁은 도로를 이용하여 조금 올라가면 영암사지 좌측편에 있는 임시 주차장에 도착 되어진다.
내가 이렇게 불원천리 영암사지를 찾아왔던 이유는 유홍준 선생님이 저술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6권의 표지모델로 선정한 보물 제353호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과 더불어 책에 수록한 내용에 대하여 너무나 감동을 받았던 기억들이 나의 두뇌에서 새록새록 살아남이 원인이라 하겠다.
승용차에서 내려 영암사지로 발길을 옮길려고 하니 일단의 축대 위로 수령 약 600년이 되어진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사찰의 역사를 대변하여 주고 있으며, 느티나무 옆으로 영암사지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과 더불어 발굴 현황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이 붙어 있어 내용을 읽으면서 사진으로 남겨본다.
< "영암사지" 임시 주차장 뒤편에 있는 모산재 기적길 안내문 >
< 영암사지 임시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수령 600년 "느티나무" >
< "영암사지"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영암사지는 건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 의 탁본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부터 영암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소실이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기록을 남겨져 있지 않다고 한다.
932년에 태어난 적연국사가 개성 인근 보법사(普法寺)와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다가 물러나, 1011년 합천군 가수현(지금은 폐읍이 된 삼가현의 옛 이름)의 영암사에서 기거하다가 고려 현종 5년(1014년) 향년 83세로 입적하여 영암사 서봉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현존하지 않지만 현재 영암사지에는 당시 비(碑)를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귀부가 남아 있고, 서봉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적연선사의 부도가 대기(大基)마을 뒤쪽이면서 영암사에서 서쪽으로 약 1.5km 지점 산중턱에 현존하고 있어, 이 절터가 비문에 기록된 영암사지로 판단된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 라는 절의 이름이 보이는데,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고, 또한 주민들 사이에서 사찰 이름을 "영암사(靈巖寺)" 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발굴현황을 설명하는 조감도와 더불어 진척 사항등이 기록하고 있는데, 발굴을 통하여 조사하여 본 결과에 의하면 불상을 모셨던 금당, 서금당, 회랑터, 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 영암사지를 발굴조사 하고 있는 "조감도" >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영암사지귀부 2기(보물 제489), 당시의 건물 받침돌, 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 있으며, 특히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어 절의 정확한 창건 연대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진다.
영암사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면석에 얼굴 모양이 조각되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 하고 있는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영암사지는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서 동과 서를 축(軸)으로 하여 배치하고 있는 산지가람으로써 크게 4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지는데, 제일 아래쪽 영역이 되어지는 곳에는 사찰을 방문하는 불자들이 머물 수 있게 하는 요사채 건물 터가 자리하고 있다.
그 위쪽 중간 영역에는 사찰의 부속 건물이면서 스님들이 기거하는 승방 건물 터가 자리하고 있으며 제일 상단에는 본찰의 금당(金堂) 터가 자리하고 있는 구역이고, 마지막으로 사찰의 서남편 야산 속에 조사당 건물 터로 구획하고 있다.
< 금당터에서 내려보는 "요사채와 승방" 영역 >
영암사지 본당으로 이동하면 무단출일을 통제하기 위한 낮은 철제 울타리가 쳐 있는데, 이 울타리 내부 가장자리에 영암사지를 대표하고 있는 쌍사자석등과 3층석탑에 관련 되어지는 안내문이 있어 그 내용도 읽으면서 먼발취에서 폐사지를 관람하여 본다.
그러고 나서 폐사지를 구경하기 위하여 중간영역을 표시하고 있는 석축 위로 걸어보는데, 축대를 형성하고 있는 돌의 대부분은 옛 돌이 되지만 나머지는 새로운 돌과 혼용하여 축대를 형성하므로 인하여 다소 빛바랜 석축이 된다.
아울러 석축의 중간중간 돌출되어져 있는 석축이 보이고 있는데, 이렇게 돌출하면서 쌓은 석축은 경주 불국사와 감은사 석축이 돌출 형태를 하고 있어 경주의 가람과 많이 연계가 되는 사찰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 영암사지를 구획하고 있는 "석축" >
석축 난간에 서서 상단에 있는 금당 방향으로 바라보면 3층석탑과 더불어 쌍사자석탑이 일직선을 유지하면서 그 뒤편으로 화강암으로 형성하고 있는 기암괴석의 황매산 지맥의 모산재 골곡(滑谷)이 한폭의 그림과 같이 머물고 있어, 만약 금당 건물들이 폐사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가진 사찰인가를 상상도 할 수 없는 명당이다.
< "3층석탑과 쌍사자석등 및 금당터" 와 모산재 기암괴석이 일직선을 형성하고 있는 영암사지 >
일단의 축대를 빙돌아서 본당의 마당에 되는 곳으로 올라가면 마당의 중앙에 보물 제480호가 되는 "3층석탑(三層石塔)" 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3층석탑은 가운데 몸돌이 무너져 있으면서 1차 금당지 앞에 있었던 탑을 1969년에 복원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 영암사지의 중간지점에 있는 "3층석탑" >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겨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고 1층 몸돌은 약간 높은 편이지만 2층과 3층의 몸돌은 비래하여 축소하므로 전체의 군형미를 잘 살리고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씩으로 만들어 지면서 처마 밑은 평면이고,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려 내리면서 4개의 귀퉁에는 약간씩 치켜 올라가면서 아름다움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2층과 3층 지붕 모서리 마다 치켜 올라가는 부분이 전부 파괴 되고 탑의 머리 장식부분이 모두 살아지므로 균형미를 상실하고 있다.
< "3층석탑"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3층석탑 뒤편으로 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자리하고 있는데, 계단은 산성의 치(雉)와 비슷하게 전면으로 돌출 되어지므로 인하여 올라가는 계단이 치의 양쪽으로 만들어져 있으면서 그 계단에는 통돌을 깍아서 무지게 모양을 하면서 매우 아름다운 곡면을 이루면서 그 곡면 위로 6단의 층계를 파 놓고 있다.
< 산성의 치와 같이 돌출하고 있는 "계단" >
< 통돌을 깍아서 "무지게" 모양으로 만든 계단 >
이 돌출하고 있는 치(雉) 위에 보물 제353호가 되어지는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마음되로 가지고 갈려고 하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다가 1969년 본래의 자리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 금당 앞에 있는 "쌍사자석등" >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쪽으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틀을 얹어 놓고 있는데, 쌍사자를 배치하고 있는 중간 받침대 돌을 제외하고 각 부분이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가 되어지는 8각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제일 아래에 있는 기초 받침돌에는 연꽃을 조각 되어있고 그 위에 있는 중간 받침돌은 두 마리의 사자가 배를 맞대고 서 있는데, 사자의 뒤발은 아래 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 위의 받침돌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머리와 꼬리도 앞발과 함께 위쪽 방향으로 치켜들고 있다.
< 배를 맞대고 있는 "쌍사자" >
< "꼬리" 를 올리고 있는 사자 >
이 사자는 갈퀴와 꼬리 및 다리의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면서, 아울러 상부 화사석 4개의 면에는 창(窓)이 있으면서 다른 4개의 벽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틀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면서 8곳의 귀퉁에는 조그마한 꽃조각이 새겨져 있어, 보은 법주사 마당에 있는 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과 국보 제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현재 광주박물관에 보관)와 비교가 될 정도의 걸작품이라 하겠다.
< 화사석 벽면에 새겨져 있는 "사천왕상" >
< "쌍사자석등"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이 쌍사자석등 뒤편으로 영암사의 본찰이 되어지는 금당이 자리하고 있었던 4각의 터를 만나는데, 금당터의 기단은 화강암, 지대석, 면석, 갑석을 비교적 잘 갖춘 양호한 모양으로 사방으로 사람이 이동하게 하는 계단이 한개씩 남아 있다.
< 영암사지 본찰이 있었던 "금당터" >
< 금당터 왼편에 있는 "독체의 기초석" >
< 금당터 전면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
그 계단 중 정면의 계단 소맷돌에는 용, 좌우 측면 계단의 소맷돌에는 가릉빈가를 조각하였으며, 뒤면을 제외한 3면의 기단 면석에는 계단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사자상을 조각하였고 나머지 기단 면석에는 안상(眼象) 문양을 새겨 놓았다.
< 금당터로 올라가는 전면에 있는 계단의 측면 "용" 소맷돌 >
< 금당터로 올라가는 측면의 돌계단에 있는 "가릉빈가" 소맷돌 >
< 금당터로 올라가는 왼편의 "돌계단" >
< 금당터로 올라가는 오른편의 "돌계단" >
< 금당터로 올라가는 뒤면의 "돌계단" >
< 금당터 면석에 있는 "사자상" >
< 금당터 면석에 있는 또 다른 "사자상" >
< 금당터 면석에 있는 "연꽃" >
금단터 상부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는 기초석을 두줄로 두고 있는데, 바깥쪽의 낮은 기초석이 오래된 것이고 안쪽의 높은 기초석은 후대의 것이라 판단 되어지므로 인하여 금담이 두번 이나 건립 되어졌다는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게 한다.
< 금당터 상부에 있는 "기초석" >
중앙에는 H자형으로 불상 지대석이 드러나 있으며 불상 지대석은 8매의 장대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장대석의 표면에 팔부 중상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고 하지만, 마멸이 심하여 정확하게 구별하기가 난이하게 만든다.
< 금동 불상을 안치한 "H자 지대석" >
이렇게 난잡하게 배열하고 있는 기초석들의 배치 방법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듯 태양은 모산재 고개로 넘어가면서 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어, 조급하게 관람을 하기 위하여 금당터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이곳에도 새로운 금당터가 자리하고 있지만 아직도 기초석을 배열하지 않고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 메인 금당터 오른편에 있는 또 다른 "금당터" >
그래서 영암사지는 3차에 거쳐 금당이 지어졌다는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굴조사를 통하여 밝혀 졌다고 하며, 이 오른편 금당터 뒤편으로 한개의 당간지주와 더불어 통돌에 홈을 파서 만든 물통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으로 아직도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흔적들이 산재하고 있다.
< 새로운 금당터 뒤편에 있는 "당간지주" >
< 통돌을 파서 만든 "물통" >
< 새로운 금당터 뒤산에 "발굴조사" 하고 있는 현장 >
< 새로운 금당터에서 바라보는 "영암사지" 전경 >
<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기초석" >
다시 금당터를 통과하여 왼편에 있는 남서쪽 방향의 야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또 하나의 동향(東向)의 독립 되어지는 조사당 터가 나타나는데, 조사당 터에는 넓은 마당의 후면에 자리하고 있다.
< 남서쪽 방향 "조사당" 터로 올라가는 숲길 >
조사당 터에는 정면 3칸에 측면 1칸 규모의 기초석이 놓여 있으며, 1984년 발굴조사 당시에 통일신라시대 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각종 와편(瓦片)과 토기편 및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된 터가 되어진다.
< 앞에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는 조사당 터 "기초석" >
이 건물터 좌우에 거대한 두마리의 거북 모양 "귀부(龜趺)" 가 자리하고 있는데, 양 귀부는 보물 제489호로 비(碑)의 몸통과 머리 장식은 살아지고 동쪽에 있는 귀부는 목을 바로 세운 매우 힘찬 모습과 더불어 귀부는 겹줄로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진 등에 다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강인성과 더불어 율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 조사당 터 좌우에 있는 "귀부" >
< 조사당 터 오른편에 있는 "귀부" 전면 >
< 조사당 터 오른편에 있는 "귀부" 옆면 >
< 조사당 터 오른편에 있는 "귀부" 후면 >
반면에 서쪽에 있는 귀부는 크기도 작으면서 움추린 목에 등도 평평하게 만들어지므로 인하여, 두개의 비석 모두가 신라말기 또는 고려초기에 만들어졌지만 동쪽에 있는 귀부가 다소 일찍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어진다고 한다.
< "귀부"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이렇게 늦은시간 까지 영암사지를 돌아보고 있으니 산 넘으로 다소 빠른 어둠이 내려지므로 긴급하게 영암사지 오른편에 새롭게 건립한 "영암사(靈巖寺)" 를 돌아보기로 하는데, 새로운 영암사의 규모가 대단히 큰 사찰이 되어진다.
합천군 문화재 담당부서는 영암사지에서 살아진 목조 건물을 복원하지 않고 발굴하고 있는 상태의 사지(寺址)를 원형으로 보존하므로 무한정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경내를 떠나 집으로 달려가기로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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