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들째 날.(8월 6일 : 월요일)
2. 세종대왕 유적지구 방문.(오후)
1) 개요.
신륵사(神勒寺) 관람을 끝내고 남한강 건너 영동고속도로 여주 Toll gate 인접지역에 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생가를 찾아갔지만 월요일 휴무로 관람이 불가능하여 다시 여주시가지로 돌아와 간단하게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진다.
다음 관광지가 되는 '영녕릉세종대왕 유적지구' 를 찾아가는데, 더위에도 불구하고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세종대왕 역사문화관(世宗大王 歷史文化館)으로 들어가 관람하기로 한다.
이곳 영녕릉세종대왕 유적지구 내에는 왼편 능선에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편 능선에는 효종대왕의 '영릉(寧陵)' 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양쪽의 왕릉을 연결하는 '왕의 숲길' 이 조성되어 있다.
< 영릉세종대왕 유적지구' 의 조감도 >
더불어 세종대왕과 효종대왕 두분의 일대기 및 치적(治績)을 홍보하고 있는 역사문화관은 세종대왕의 영릉 앞에 건립되어 있으면서, 전시실의 명칭을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이라고 칭하고 있다.
< 세종대왕 영릉 앞에 있는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
그런데 매주 월요일 두곳의 영릉과 더불어 역사문화관 모두가 휴관을 하지만 특별하게 여름방학 동안 학생들의 탐방을 많이 하기 위하여 월요일에도 오픈하고 있는데, 문제는 세종대왕의 영릉을 대대적인 보수로 2019년 12월 23일 까지 약 3년간 출입을 통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 '세종대왕 영릉' 의 공사를 알리는 현황판 >
2)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관람.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에는 2개의 전시실로 구획하고 있는데, 왼편에 있는 제1전시실에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일대기와 더불어 치적을 전시하고 있고 오른편 제2전시실에는 효종대왕(孝宗大王)의 일대기와 함께 그의 치적을 전시하고 있다.
먼저 왼편에 있는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보여주고 있는 제1전시실로 들어가 관람하여 보는데, 세종대왕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사이에 4남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을 '도(祹)' 이고 자는 '원정(元正)' 이다.
< '세종대왕' 일대기를 보여주고 있는 제1전시실 >
1418년에 왕세자로 책봉이 되고 같은 해 8월 10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는데, 세종대왕은 재위 32년 동안 정치, 사회, 경제 등에서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을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문화의 전성기를 마련한다.
< '세종대왕' 의 어진 >
그 중에서 한글의 창제(創製)는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몇일 전 서울 용산에 중앙박물관과 함께 하고 있는 한글박물관의 관람을 통하여 보았던 내용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지나 간다.
<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한글' 의 창제 >
< '훈민정음' 의 창제를 알리는 책 >
특히 세종대왕은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과학 기구를 발명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투자하였는데, 젊은 과학자를 양성하여 혼천의(渾天儀) 등 천문 관측기구와 시간을 측정하는 앙부일구(仰釜日晷) 등 해시계를 발명하였다.
< 세종대왕이 발명한 '과학 기구' >
더불어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대왕은 우리 만의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는데, 국가 제례에 사용하는 아악을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하여 선왕의 업적을 기리는 정대업(定大業), 보태평(保太平) 등 신악을 작곡하였다.
< 국가 제례에 사용한 '아악' >
편경(編磬) 등 당시에 만들어진 악기를 전시하고 있고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에 쓰이는 전통 악기들의 특징과 더불어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므로 전시실 한 구석이 작은 음악실이 된다.
< 종묘제례악에 사용한 '편경' >
다음 부스가 되는 제2전시실로 넘어가는 중간지점에 세계유산 조선왕릉의 실물을 제현하고 있는데, 현재 조선의 왕릉으로 남한에 40기와 북한에 2기를 보유하고 있어 총 42기가 된다.
< 양쪽 전시실 중간에 설치하고 있는 '조선왕릉" 실물 >
제2전시실로 들어가면 효종대왕의 일대기를 전시하고 있는데, 효종대왕은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 사이에서 둘쌔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호(淏)' 이고 자는 '정연(靜淵)' 이다.
< '제2전시실' 의 전경 >
1645년 효종대왕의 형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갑작스럽게 죽자 같은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649년 인조대왕이 돌아가시자 조선의 제17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효종대왕은 재위 10년 동안 전란으로 피폐(疲弊])하여진 민생을 복구하고자 온 힘을 쏟았는데,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 훈련의 강화에 힘썼으며 경제적으로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常平通寶) 등 화폐를 널리 쓰이게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효종대왕이 대군 시절 형이 되는 소현세자와 함께 불모로 청나라에 끌려가 8년간 생활하면서 국제경험을 쌓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북벌(北伐)을 계획하면서 군사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두었다.
효종은 정예화된 10만 명의 군대를 양성하여 기회가 발생하면 오랑케를 곧장 공격할려고 10년의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효종의 나이가 41세 되는 1659년에 갑자기 돌아가므로 계획이 무산된다.
< '효종대왕' 의 일대기 >
이 밖에도 네델란드에서 출발한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면서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군사, 교육, 무역 등 폭넓게 기록한 '하멜 표류기' 라는 책을 발행한 내용과 더불어 효종대왕의 비(妃)가 되는 인선왕후의 장례 때 사용한 국정도감의궤를 전시하고 있어 당시의 국장 의례를 알게하여 준다.
< '하멜' 일행의 조선 체류 기간 >
< 인선왕후의 '국정도감의궤' >
3) 효종대왕의 영릉 탐방.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을 관람하고 나서 안내원에게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켜 달려고 하니 승용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 지방도로 333번을 이용하여 왼편으로 한 500m 정도 가면 효종대왕의 영릉을 가르키는 이정표와 함께 인접하게 주차장이 보인다고 가르켜 준다.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승용차를 운전하여 효종대왕의 영릉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서 안내소를 지나면서 영릉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재실(齋室)을 만나는데, 이곳의 재실은 거대한 돌담으로 구획하면서 매우 큰 저택이 된다.
< '효종대왕 영릉' 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안내소 >
< '효종대왕 영릉' 으로 들어가는 길 >
조선왕릉에 따르는 재실은 일제강점기 및 6.25 동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면서 원형이 훼손되었지만, 이곳 효종대왕의 영릉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를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탁월하여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었다.
양쪽으로 기나긴 건물을 거닐고 있는 솟을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고, 다시 쭉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제사를 지낼 때 제관(祭官)들이 머물었던 재방, 안향청, 제기고, 전사청, 행랑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기나긴 솟을대문을 가지고 있는 '재실' >
< 내부에서 보는 솟을대문과 함께 하는 '사랑채' >
< 고목의 느티나무와 함께 하는 '전사청' >
< 제사용 물건을 보관하는 '제기고' >
마당의 전면에 수령 300년의 회양목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회양목은 키가 적고 낮게 자라는 나무이지만 이곳에 있는 회양목은 보기드물게 키가 매우 큰 노거수로서 생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 천연기념물이 되는 '회양목' >
재실에서 울창한 숲길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왼편으로 세종대왕의 영릉으로 넘어가는 '왕의 숲길' 을 만나지만, 세종대왕의 왕릉 공사로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차단막이 가로 막고 있다.
< 세종대왕 영릉으로 넘어가는 '왕의 숲길' >
계속하여 내부로 올라가면 효종대왕 영릉의 초입이 되는 홍살문을 만나면서 홍살문에서 부터 멀리 정자각 까지 향어로(香御路)가 설치되어 있는데, 향어로 따라 조금 걸아가면 금천교(禁川橋)를 만난다.
< 효종대왕의 영릉 입구에 있는 '홍살문' >
< 금천교와 함께 하고 있는 '향어로' >
금천교를 지나 계속하여 걸어가다 보면 좌측에는 수라간 건물이 오른편 개울 건너편에는 수복방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계속하여 앞으로 걸어가면 왕릉의 전면에서 제사를 올리는 장소가 되는 'T자' 형태의 건물 정자각(丁字閣)이 자리하고 있다,
< 향어로 왼편에 있는 '수라간' >
< 향어로 오른편에 있는 '수복방' >
<건물의 뒤편 왕릉을 보면서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 >
정자각 우측 축대 위에 비각(碑閣)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비각 내부에는 효종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碑石)이 있고, 정자각 좌측 축대 위에 제사 때 사용한 축문 등을 태우는 예감이 자리하고 있다.
<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비각' >
< 정자각 왼편에 있는 '예감' >
이곳 정자각 뒤편 구릉(丘陵) 위로 효종대왕의 영릉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왕릉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따라 왕릉의 상부 까지 올라가 보는데, 극심한 가뭄으로 잔디를 살리기 위하여 물을 주는 호수가 어지럽게 놓여있다.
< 왼편 왕릉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영릉은 조선 제17대 왕이 되는 효종(孝宗)와 그의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무덤인데, 효종대왕이 1659년에 돌아가자 처음에는 구리시 동구릉에 릉(陵)을 조성하였으나 병풍석 사이에 틈이 발생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현종 14년(1673년)에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현종 15년(1674년)에 효종대왕의 비(妃)가 되는 인선왕후가 돌아가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구릉 아래에 조성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왕릉 중 최초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형식의 무덤이다.
< '동원상하릉' 으로 이루어져 있는 영릉 >
< 위엄을 갖추고 있는 '석물' >
영릉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曲墻)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하였고 나머지 석물의 배치와 규모는 동일하게 갖추었고, 봉분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 곡장으로 둘려 싸여 있는 '효종대왕' 릉 >
< 효종대왕 릉 앞에 있는 '인선왕후 릉' >
< 효종대왕 릉에서 바라보는 '인선왕후 릉' 후면 >
이상과 같이 왕릉 주변으로 조성하고 있는 오솔길 따라 관람을 끝내면서 천천히 왕릉에서 내려와 홍살문 앞에 서면서, 간단하게 목례(目禮)로서 인사를 하고 영릉을 떠나기로 한다.
< '목례' 로 인사를 하면서 >
올라왔던 길로 한참 내려와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무더위로 관광지를 더 돌아보는 것을 중단하기로 하는데, 오늘 휴관으로 관람을 실폐한 명성왕후 생가와 세종대왕의 영릉은 진달래 꽃이 피는 봄의 축제 때 다시 찾아 보겠다는 마음을 간직하여 본다.
승용차는 이내 여주시 외곽에 있는 서여주 Toll gate로 진입하여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대구광역시로 내려가기로 하는데, 금년 여름 춘천 아파트에서 8일간 머물면서 다양한 관광지 탐방한 내용을 기록하여 둔다. -끝-
'문화유산 답사기.(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 있으면서 한탄강 지질공원 내 '비둘기낭 폭포' 의 구경.(2) (1) | 2022.11.26 |
---|---|
부산 임시수도 시절에 사용하였던 '이승만 대통령 관저 및 기념관 전시실' 을 돌아보고 나서. (0) | 2019.05.28 |
경기도 여주시에 자리하면서 보물급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천년고찰 '신륵사' 의 탐방. (0) | 2018.08.29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탄생한 다산 '정약용' 선생님 유적지 및 생가를 돌아보고. (0) | 2018.08.18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정산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금정총림 "범어사" 를 돌아보면서. (0) | 2014.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