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3-24일.(1박2일)
1. 첫째날 : 6월 23일.(수요일)
6) 보훈휴양원에서의 숙박.
충주박물관을 떠난 일행은 한 10여 분 정도 운전하여 충주 '보훈휴양원' 으로 달려가는데, 보훈휴양원은 1996년 우리나라의 중심 고을 충주시 중앙탑면((忠州市 中央塔面) 내에서 국가 보훈처의 국비지원으로 건립되어 한국보훈복지 의료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콘도형 휴양시설이다.
< 충주시에 있는 '보훈휴양원' >
입구에 있는 다소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휴양원 건물로 들어가 1층에 있는 안내 데스크에서 예약의 수속을 체크하는데, 휴양시설에서의 숙박은 군경미망인을 비롯하여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 공무원은 물론 지역주민, 일반인 까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휴양시설로써 각각의 신분에 따라 요금의 폭이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 '보훈휴양원' 내부 전경 >
< 보훈휴양원 내에 있는 '도서관' >
우리 일행 중 한명이 베트남 전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국가유공자(國家有功者)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어 일반인 숙박비의 1/3 요금을 지불하고 방으로 입실을 하는데,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로 인하여 거리 띄우기 때문에 일행이 4명이지만 5인실로 배정하여 준다.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보훈휴양원 주변을 돌아보기로 하는데, 이곳 휴양원 전면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더불어 봉황자연휴양림이 자리하고 있고 계곡의 상부 따라 10여 분 거리에 앙성탄산온천지구가 함께 하므로 많은 관광객이 이동하는 곳이라 하겠다.
< 휴양원 앞으로 흐르는 '계곡' >
< 보훈휴양원 앞에 있는 '봉황자연휴양림' >
< 봉황자연휴양림 앞에서 바라보는 '보훈휴양원' >
7)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의 관람.
휴양원 주변을 거닐면서 간단하게 산책을 끝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하여 다시 중앙탑 앞에 있는 식당가를 찾아가기로 하는데, 중앙탑으로 가는 길의 중간지점에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高句麗碑 展示館)' 이 자리하고 있어 한번 방문하여 보기로 한다.
문제는 도착시간이 오후 6시가 조금 경과하므로 오픈 시간 6시에 전시관 문을 닫으므로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전시관 가장자리에 만들어져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 외곽을 구경하여 보기로 한다.
<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건물 >
전시관 앞에 고구려비가 있었던 장소와 더불어 석벽으로 만든 미로 탐방로가 자리하고 있는데, 탐방로 따라 걸어서 끝지점으로 나오면 그 앞으로 연꽃 단지가 조성되어 있지만 아직도 연꽃이 피지 않고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 '고구려비' 가 발견된 지점의 장소 >
<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미로 탐방로' >
< 미로 탐방로 앞에 있는 '연꽃 단지' > .
전망대에서 동쪽 방향으로 바라보면 넓은 들판과 함께 그 뒤편으로 중앙탑과 더불어 남한강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울창한 숲이 긴 줄을 형성하고 있고, 그 숲의 뒤편으로 충주시가지 아파트 빌딩들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중앙탑' 방향 >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국보 제205호로 지정이 되어진 충주 '고구려비(高句麗碑)' 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는데, 실물은 전시장 내부에서 관리하므로 관람이 불가능하지만 이 모형의 비(碑)를 보면서 고구려의 위상을 조명하여 본다.
< 모형으로 만든 '고구려비' 전면 >
고구려비는 총 높이가 203㎝이면서 비면 높이가 144㎝에 너비 55㎝로써 1979년 4월 충주 문화재 동호인의 모임이 되는 예성 동호회의 제보를 받은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의 조사에 의해 학계에 보고 되었다.
이 비석은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를 축소한 듯한 모양의 4면비(四面碑)가 되는데, 화강암의 표면에 3~5㎝의 크기로 글자를 새겼고 글자체는 예서체(隷書體)에 가까운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다.
발견 당시 전면(全面)에 바위 이끼가 너무나 많이 끼어 있었는데, 그래서 육안으로는 물론 탁본(拓本)을 하여도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방치가 되어져 있는 비석이라 하겠다.
마멸이 심해 앞면과 좌측 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판독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비 자체를 4면비가 아닌 3면비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단편적이지만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제관계 및 영역문제를 비롯해 고구려인의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비교적 많은 앞면의 경우 10행(行)에 각 행당 글자수는 23자(字)이고, 한쪽 옆면은 7행에 23자씩 이며 또 한쪽 옆면은 6행이 분명하며 뒷면은 너비로 보아 9행 정도로 추측된다.
<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은 '좌측 면' >
또한 우측 면과 뒷면은 글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총 글자의 수(數)를 산정하기는 어렵고 첫 머리에 '고려대왕(高麗大王)'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형, 주부, 대사자 등 고구려 관등이 자주 나와 이 비(碑)가 고구려에 의해 세워졌다는 증거가 된다.
< 마모가 심한 '우측 면' >
문헌적으로 고찰하여 볼 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북벌남정(北伐南征) 못지않게 장수왕(長壽王)은 남하정책을 단행하면서 평양성 천도를 비롯하여 한강 유역 까지 점령하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이곳 한강 유역을 따라 상류에 까지 척경(拓境)하고 그 기념적인 석비(石碑)를 세웠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래서 이 석비의 건립 연대를 5세기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의 고구려비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는데, 5세기 고구려 및 신라와의 관계 및 고구려 관등(官等)조직, 인명(人名)표기 방식 등 문헌에 없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오늘 실물(實物)의 비석을 보지 못하여 다소 아쉬움이 묻어난다.
8) 저녁식사.
다시 승용차를 운전하여 중앙탑 앞에 있는 식당가로 들어가는데, 낮의 점섬식사에는 메밀새싹물국수를 먹었으므로 저녁식사로는 낙지볶음으로 주문을 하면서 이곳 충주에서 만든 앙성막걸리를 겸하므로 취기를 느끼게 만든다. - 첫째날 5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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