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4-6일.(2박3일)
1. 첫째날 : 4월 4일.(화요일)
6) 오사카 성의 야경을 구경하면서.
오후 4시 20분 경 나라시(奈良市)에서 출발한 버스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1시간 20분 정도 달려 오후 5시 40분 경 오사카 성(大阪 城) 남쪽 방향에 있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하는데, 버스에서 내린 일행은 가이드 인솔에 따라 오사카 성으로 들어간다.

< '오사카 성' 의 조감도 >
주차장에서 조금 들어가면 전번 주 까지 벚꽃 축제를 하였던 포장마차와 더불어 아름다운 벚나무들이 도열하고 있는데, 벚나무에서는 비록 만개의 벚꽃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벚꽃 일부가 남아 있어서 그런지 많은 관광객들이 벚나무 아래로 거닐고 있다.

< 축제장 입구에 있는 '포장마차' >

< '벚꽃' 길을 걷고 있는 관광객 >

< 만개가 지나간 '벚꽃' 길 >
오사카 성의 형식은 윤곽식 평성(平城)으로 혼마루를 중심으로 외성(外城)을 동심원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내측 해자(垓字)와 외측 해자를 두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 시가지에서 천수각이 잘 보이도록 천수의 위치와 도로의 배열 등을 궁리하였다고 한다.
외성을 방어하기 위한 깊이가 약 20m에 넓이 50m 정도의 외측 해자와 더불어 그 뒤편으로 직각과 함께 곡선미(曲線美)를 가지면서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이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데, 성벽을 구경하면서 한 100m 정도 걸어가면 벚나무 길은 직각으로 꺽이면서 북쪽으로 이어진다.

< 외성과 함께 하고 있는 '해자' >

< 넓은 폭과 깊은 깊이를 가지고 있는 '해자' >

< 벚꽃과 함께 하고 있는 '해자' >
계속하여 벚나무 아래로 다시 200m 정도 걸어가면 포장 도로에 들어서면서 다시 포장 도로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외성(外城)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하는데, 현재는 성문(城門)이 파손이 되어서 그런지 작은 가름 막으로 성문을 표시하고 있다.

< 모서리를 꺽어면서도 연결하고 있는 '벚나무' >

< 포장 도로 끝지점에 있는 '가름 막' >

< 가름 막 끝지점에 있는 '석축' >
가름 막에서 부터 또 다시 왼편 직각으로 꺽어서 한 100m 정도 들어가면 이제는 내측 해자 옆으로 걸어가는데, 내측 해자 따라 100m 정도 더 들어가면 내성으로 들어가는 약간의 경사도가 있는 '사쿠라몬' 정문을 만난다.

< 내성 방향으로 걷고 있는 '관광객' >

< 내성 옆으로 만들어져 있는 내측 '해자' >

< 아름다운 곡선미를 가진하고 있는 '내성' >

< 다소 많이 메워진 내측 '해자' >

<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사쿠라몬' 정문 >
사쿠라몬 정문 입구에 기술하고 있는 오사카 성의 내력을 기술하여 보는데, 오사카 성(Osaka castle)은 우리나라 역사와 가장 밀접한 일본인을 꼽으라면 열의 아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를 떠오르게 만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급무사의 집안에서 태어 났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무사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의 하인이며 그는 추운 겨울에 오다 주군의 신을 가슴에 품고 있는 충성스러움으로 인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고 그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정권을 잡고 이듬해가 되는 1583년 11월 오사카로 본거지를 이전하였는데, 이때 부터 오사카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면서 오사카 성 축성이 이루어졌다.
1년 반에 걸친 대규모 공사로 완성된 오사카 성은 성벽 앞에 강물이 흘려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졌으며 규모 또는 지금의 '요도가와' 강 까지 이를 정도로 큰 성이었는데, 아직도 요도가와 강을 건널 때 오사카 성의 일부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2일 조선을 침략하였지만 이순신 장군과 조선 의병들의 저항에 밀려 1598년에 병사를 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에게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를 맡겨 그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정권을 이어간다는 명목으로 많은 권력을 쌓았는데, 1600년 패권을 잡은 그는 대부분의 지방 세력을 편입시키고 도요토미 가문과 추종 세력을 완전히 꺽고자 1614년 오사카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오사카 성에서 공성전을 준비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패하고 말았는데, 하지만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중 강화조약을 내세워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관심을 돌리면서 그 틈을 타서 성벽 앞에 강을 메운 후 성을 공략하여 드디어 1615년에 오사카 성을 점령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오사카 성은 162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이 되는 '도쿠가와 히에타다(德川秀忠)' 가 재건을 시작하여 1629년에 성을 완성 시키는데, 하지만 도요토미 가문에 축성한 이전의 오사카 성 잔재를 없애고자 규모를 4분의 1로 축소해서 처음의 거대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1615년 전쟁과 함께 유실된 '천수각(天守閣)' 건물은 1626년에 도쿠가와 가의 정권 교체의 상징으로 도요토미의 천수각 보다 더 큰 규모로 구축하였는데, 그러나 1665년 낙뢰로 인하여 불타 또 다시 유실이 되고 말았다.
이후 세번째 천수각은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이 도요토미의 것을 본떠 재건을 하였는데,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공격 목표가 되어 일부 소실되었다가 1958년에 다시 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1983년 부터 재건이 시작하면서 오사카 성을 복원하였고 주변으로 오사카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많은 관광객이 찾는 오사카 성은 '나고야 성(名古屋城)' 및 '구마모토 성(熊本城)' 과 함께 일본 3대 성으로 일본인의 상징이자 자부심으로 자리를 매기고 있다.
오사카 성의 볼거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천수각을 꼽을 수 있는데, 높이 35m의 5층 구조물로 원래는 목조 건축물로 건립을 하였지만 현재는 콘크리트 건물로 재건하면서 건물 내부에 엘리베이트를 설치하므로 옛 모습에서 너무나 반한(反汗) 건축물이라 하겠다.
내성이 문을 통과하면 전면으로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으면서 그 바위의 무게가 자그만치 108톤이 넘는다고 하면서 지금은 부분적으로 파손이 되어 수리 흔적이 남아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급무사 집안 출신이라 지방 성주들에게 크게 멸시를 당하였다.

< 내성의 출입문 입구에 있는 거대한 '바위' >
그래서 지방 성주들에게 막대한 세력을 뽐내기 위하여 거대한 돌을 옮겨와 성문 입구에 두었다고 하는데, 그 후로 부터 오사카 성을 방문하는 지방 세력들에게 무언(無言)의 힘을 과시하므로 원활하게 통치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 거대한 바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
성문을 통과하여 내성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3층의 옛 제4사단 사령부청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한 때 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가 박물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므로 현재는 선물을 판매하는 가게 및 카페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 내성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옛 '제4사단 사령부청사' >
옛 사령부 건물의 앞으로 나아가면 다소 넓은 공원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공원 중앙으로 타임 캡슐을 묻어두고 있는 원형의 구조물을 만나는데, 이곳 타임 캡슐은 오사카에서 1970년에 개최한 '세계 무역박람회(EXPO70)' 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한 조형물이다.

< 공원의 중앙 지점에 만들어져 있는 '타임 캡슐' >
이곳 조형물 내부에는 2단으로 캡슐을 묻어두고 있는데, 상부의 캡슐은 각 세기(世期)가 시작하는 년도에 개봉하고 하부에 있는 캡슐은 5.000년 후가 되는 서기 6970년에 개봉하여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 '타임 캡슐' 의 조감도 및 안내 설명문 >
이곳 캡술 조형물 뒤편 내성의 중심지 혼마루에 천수각(天守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 시각에서는 천수각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시간이 경과하여 내부 관람은 불가능하지만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관광객이 움직이고 있다.

< 혼마루 정점에 만들어져 있는 '천수각' >
가이드는 오늘 함께 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각자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우리부부도 이제는 두번 다시 이곳 오사카 성을 방문할 기회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기념사진 몇 장을 남겨본다.

< '천수각' 을 배경으로 >

< '천수각' 주변에 머물고 있는 관광객 >
7) 풍신수길 신사의 방문.
그러고 나서 천천히 걸어 내성을 벗어나면서 내성의 사쿠라몬 정문 앞에 있는 '풍신수길 신사(豊臣秀吉 神社)' 를 방문하여 보는데, 입구에 있는 도리이(鳥居)를 지나면 도리이 앞과 뒤편으로 간식을 판매하는 포장마차들이 도열하고 있다.

< 내성의 '출입문' 을 벗어나면서 >

< '풍신수길 신사' 입구에 도리이 >

< '풍신수길 신사' 입구에 있는 표시석 >
도리이를 지나면 다소 넓은 광장 중앙에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 한기가 자리하면서 동상에는 인상이 매우 험악한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서 있는데, 가이드는 이 세상에서 도요토미 히데오시 만큼이나 험상굳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한다.

< 신사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도오토미 히데요시' 의 동상 >
이곳 동상 뒤편으로 다시 도리이 한개가 서 있으면 그 뒤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 신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신사 건물은 일반적으로 일본 신사 건물과 유사하게 평범한 건축물이 된다.

< '풍신수길' 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신사 건축물 >

< 액운을 날려 보내기 위하여 부착하고 있는 '부적' >
하지만 이곳 신사 건물은 한때 육군 형무소로 활용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투옥된 건물인데,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본 전승축하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놈들에게 수류탄을 투철하여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래서 1932년 5월 25일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 군법회의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였고, 그해 11월 18일 윤봉길 의사를 일본 우편 수송선에 실려 상하이에서 '고베' 항을 거쳐 이곳 오사카 육군 형무소로 이감이 되었다.
한달 동안 이곳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다시 인접하게 있는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졌고 이틀날이 되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을 당하였는데, 그때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25살이라 하겠다.
문제는 이렇게 한국인들에게 치옥의 건물이 되지만 그러한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오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로만 부각하고 있는데, 비록 일본인들은 모른체하고 있지만 우리 국민들 필히 알아야 하는 장소가 되는 것 같다.

< 신사 뒤편에 있는 '도리이' >

< 달을 바라보며 '오사카 성' 을 떠나면서 >

< 불을 밝히고 있는 '포장마차' >
다소 늦은 시간 까지 오사카 성을 횡하니 돌아보고 버스에 올라 금일 하루밤을 유숙 할 호텔로 달려가는데, 호텔은 오사카에서 제일 번화가가 되는 도톤보리 거리에서 걸어 5분 정도 떨어져 있는 '사라사(SARASA) 도톤보리' 호텔이라 한다. - 첫째날 4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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