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및 트레킹.(대구팔공산)

십수년 만에 다시 찾아보는 대구광역시의 명산이 되는 '팔공산' 을 돌아보고서.

용암2000 2011. 10. 3. 21:44

2011년 10월 2일 (일요일)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 날씨가 화창하게 내리는 계절의 여왕 '가을'

평소 다른 지방에 있는 산 들만 찾아다니다 보니, 진정 나의 집 앞에 있는 "팔공산(八公山)" 을 소흘히 하여 어인 10여년 간 까마게 잃어버리고 지냈던 팔공산 풍경에 젖어보기 위해 길을 나서본다.

오늘 팔공산 산행은 목적도 없이 발 길 닿은 곳으로 나의 체력 한계에 이르는 시간까지 걷기 위하여 시내버스를 이용 할려고 주차장에 이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몇대의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시루떡이 되어 동화사 입구에 이른다.

동화사 초입 집단 시설지구에서 야영장 방향으로 서서히 발길을 잡으니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걷고 있으며, 가는 길이 너무나 잘 조성되어 있다.

 

< 잘 조성된 "팔공산" 산행 초입 길 > 

 

야영장 시설지구 내에는 인공암벽 등반 시설을 만들어 놓아, 한무리의 젊은이 들이 가느다란 Rope에 몸을 의존하면서 인공암벽을 올라가는 모습 한참 구경 하다가, 야영장 깊숙하게 이어지는 길로 산행에 임한다. 

 

< "인공암벽" 을 오르고 있는 산악인 >

 

< "야영장" 에서 캠핑을 즐기는 텐트 촌 >

 

팔공산 주변에도 지자체에서 "대구 올레길" 을 만들어 놓아, 아름답게 조성된 숲길 따라 무아지경으로 한참 올라가며는 숨이 가슴까지 차 오르는 "깔딱고개" 에 이른다.

 

< "대구 올레 길" 을 알리는 이정표 >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올레길을 거닐고 있어, 정체로 인하여 걷기가 많이 불편하여 지지만 건강을 찾아 삼삼오오 무리지어 걷는 사람 뒤편 따라 서서히 걷는 것도 마음의 수양이 되어진다.

 

< 울창한 숲속 길을 걷는 "올레길" 사람들 >

 

올레길 따라 한참 걷다보니, 올레길을 동화사 방향으로 꺽어 내려가고 염불암 방향으로 길을 잡는데, 올라가는 입구에 염불암을 알리는 입석과 더불어 2개의 입석이 더 서 있는데,  뒤편 입석 좌우에는 "입차문입(入此門入)와 막존지해(莫存知解)"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염불암" 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서 있는 입석 >

 

옛날, 문경 봉암사로 들어 갈 때 심정이 다시 생각나게 하는데, "이 문을 통과하며는 사람은 삼라만상의 아는 것 모두 잊어 버리고 들어가라" 라는 뜻이 생각난다.

오늘 과연 나의 머리에는 무엇을 내려 놓고 이 불정토의 땅 팔공산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자문하여 보는데, 원천적으로 배우고 아는 것이 적다보니 머리 속에 들어있는 것이 거의 없으니, 비워 놓고 갈 것 없어 마음이 홀가분하여 진다.

세멘트 포장길 따라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며는 기암괴석이 병풍같이 두루고 있는 "염불암(念佛庵)" 암자가 고즈늑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매우 포근함이 느끼는 암자이다.

 

< 팔공산 동봉 품에 자리잡고 있는 "염불암" 전경 >

 

잘 조성된 돌계단 따라 경내에 이르면, 아담한 "극락전" 사찰이 눈앞에 머물고, 그 사찰 앞에 파괴되어 탑신은 살아지고 탑의 머리 부분만 남은 10층의 청석(靑石) 탑이 유리관 속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청석 돌은 벼루를 만드는 "흑색점판암" 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 염불암 "극락전과 청석 탑" >

 

이 염불암 뒤편에 거대한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바위 경사면 2곳 중 서면에 새겨진 마애불 좌상은 아미타볼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남면에 새겨진 보살 좌상은 관세음보살로 추정되어 진다고 하며, 바위 앞에 있는 기도처에는 몇명의 신자들이 108배 절을 드리고 있다.

 

< 염불암 뒤편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좌상" >

 

경내를 잠시 돌아보고, 왼편으로 나 있는 오솔길 따라 산속으로 빠져 들며는 온몸에 땀으로 범벅되어 질 때까지 좀 걷다보며는 4거리 이정표에 이르는데, 여기가 케이블카 타고 올라오는 사람과 수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서로 합류되어 인산인해가 되어지는 갈림 길이다.

 

< 케이블카와 수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합류하는 "4거리 이정표" 지점 >

 

여기서 부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나의 의지와는 전연 상관없이 인파의 물결 따라 산행이 이루어지는 길이 되어지는데, 십수년 전 보다 산행 길이 잘 정비되어져 있어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어도 복잡함은 느껴지지는 않는다.

 

< 잘 조성된 "나무계단" 길 >

 

오늘 산행은 먼저 "동봉" (일명 : 미타봉)으로 향하여 보는데, 이곳도 옛날과 달리 나무계단으로 길을 잘 만들어져 있어 올라가는 시간이 많이 절약되어 정상에 이르니, 정상 입구에 아줌마 한명이 무겁게 지고온 시원한 아이스케키를 판매하고 있어, 재법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장사가 매우 잘 되어지는 것 같다.

동봉 정상석 주변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어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사람들 바지 가랭이 속으로 겨우 정상석만 한장 찍어본다.

 

< 수 많은 인파 속에 찍어보는 "동봉" 정상석 >

 

아울러 주변을 돌아보며는 눈 앞 동쪽으로는 거대한 산맥 사이로 동화사 사찰과 더불어 팔공CC가 머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구시의 아파트 빌딩들이 햇빛에 반사가 되어 눈이 부신다.

한 때, 해발 1167m 인 "동봉" 이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명실 상부한 팔공산의 정상이었지만, 현재는 팔공산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1192.8m "비로봉" 이 팔공산의 최고 봉우리로 환원 되어지며, 그 정상에 있는 통신 기지구 시설과 군사 시설로 인하여 출입이 제한 되어진 곳에 2009년도 하반기 대구시와 방송국 사이 협정에 의거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팔공산이라, 거대한 방송국 송출력 안테나 사이로 개미와 같이 한줄의 안파들이 오르내리고 있는 모습도 눈 앞에 머물고 있다.

 

< 동봉에서 바라보는 "비로봉" 정상에 있는 방송국 통신 타워 >

     

한번도 발길이 닿지 않는 비로봉을 대면하기 위하여 에둘러 하산하여 비로봉 방향으로 길을 잡는데, 먼저 비로봉과 동봉 사이에 거대한 "석조약사여래불상" 부처 바위가 서 있어 그곳을 구경하고자 잠시 머물어 보는데, 불상 주변에 점심식사 하는 무리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 동봉과 비로봉 사이에 있는 "석조약사여래불상" 앞에서 >

 

안테나 사이로 이루어진 길 따라 비로봉 정상에 올라가니, 정상에는 정상을 알리는 아무런 표시도 없이 거대한 방송국 안테나 시설을 보호하기 위하여 철조망 속에 작은 돌무덤 만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어 실망 덩어리이다.

 

< 비로봉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팔공산 제천단" 입석 >

 

< 방속국 시설 보호용 철조망으로 쌓여 있는 "비로봉" 정상 >

 

차라리 옛날 같이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드라면, 동경과 상상의 생각으로 정상을 가슴에 품고서 지내가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 

 

< 팔공산 "비로봉" 정상을 배경으로 >

 

정상 돌무덤에 앉자 팔공산 유래를 살펴 보는데,

팔공산은 대구광역시의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지점에 병풍처럼 웅장하게 솟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진산으로,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비로봉과 동봉, 서봉 등 3개의 봉우리가 높이 30여m 이내 차이로 이루어진 산이다.

팔공산은 예로부터 영험한 산이라 시인, 묵객과 더불어 수도자들이 많은 찾는 산이라, 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은해사, 갓바위, 제2 석굴암 등 한국의 종단을 호령하는 사찰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불정토의 산이다.   

오늘 팔공산 산행은 승용차를 가지지 않아 아무 곳으로 하산이 가능하여 짐으로 인하여, 이곳에서 동화사 방향으로 바로 하산하는 생각을 접고 팔공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서봉까지 정복하여 보기 위하여 서봉 방향으로 길을 잡아본다.

서봉으로 가는 길 중간 지점에 50m 위쪽으로 "팔공산 마애약사여래 좌상" 이 있다는 이정표가 있어 그 방향으로 올라가 보는데, 옛날 이 길로 몇번이나 다녔지만 무심코 그냥 지나첬는데, 지금은 팔공산 곳곳에 안내 표시판과 설명서가 매우 잘 기록되어 있어, 팔공산에 산재하고 있는 구석구석의 문화재를 빠짐없이 찾아보면서 공부하는 자료를 많이 만들어준 지자체에게 감사 드려본다.                                                                                            

 

< 비로봉과 서봉 사이에 있는 "팔공산 마애약사여래 좌상" >

 

마애약사여래 좌상은 오른손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약병을 들고 있는 모습하고 있는데,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들어진 약사여래 좌상이라 매우 정교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어 국보급으로 승격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불상이다.   

다시, 능선길로 내려서서 서봉으로 가는 팔공산 종주길로 걸어 해발 1153m "서봉"(일명 : 삼성봉) 방향으로 길을 잡아 걷는데, 기력의 한계점 선상에서 걸어본다,

서봉 정상에 올라가며는 2개의 거대한 돌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뒤편 돌 위에는 "삼성봉" 이라는 정상석이 있고, 앞에 있는 돌 봉우리에는 "서봉" 이라는 정상석이 산행인들을 볼려 모우고 있지만, 동봉과 같이 혼잡하지 않고 다소 한적한 봉우리이다.

 

< 먼저 만나는 서봉의 한 봉우리에 설치된 "삼성봉" 입석 >

 

< 다른 바위에 놓여 있는 "서봉" 정상석 >

 

여기서 보는 조망도 또 다른 팔공산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방금 지나온 동봉과 비로봉의 높은 방송통신 안테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머물고 있고, 동봉 끝에는 단풍의 물결이 살짝 내리고 있다.

 

< 서봉에서 바라보는 "비로봉과 동봉" >

 

< "동봉과 팔골CC" 의 전경 >

 

몇명의 산행인들은 능선길 따라 더 걸어 "파계재"  방향으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체력 한계로 인하여 서봉에서 거의 직벽으로 내려가는 "부인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급경사의 비탈길에 만들어진 나무계단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며는 바위가 병풍같이 둘려쳐 있는 아담한 집터가 나타나는데, 한 때 이 집터에는 사찰이나 암자가 있었던 장소이지만, 지금 문화재 흔적은 온데 간데 없이 살아지고 정자 한채가 사찰 터를 점유하고 있어 실망이 앞 선다.

 

< 서봉 바로 아래 사찰 터에 조성된 "정자" >

 

여기서, 급경사의 내리막 길 따라 1시간 정도 걸어 내려가며는 야산 기슭에 약간의 산을 개간하여 삶을 영위하고 있는 채소 밭과 움막집 한채가 나타나는데, 집에서 사육하고 있는 한마리의 개가 사람의 발소리에 응답 하듯 무조건 짖어되므로 인하여 신경이 날카로워 진다.

 

< 팔공산 풍경을 다소 흐리게 하고 있는 "움막집" 과 채소 밭 >

 

이 움막집 바로 앞, 옛날에는 없어 그냥 지나간 또 다른 마애불 이정표가 있는데, 움막집 마당을 통과하여 한 10여분만 움막집 뒤산으로 올라가며는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 입상" 을 만난다.

 

< 약 60-70도 기울어진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 입상" >

 

이 마애불상도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새겨진 불상으로, 바위가 세로로 길게 2개로 분리되어 지면서 약 60-70도 정도 기울러져 있는 모습이 애초롭게 보인다. 

다시, 움막집을 통과하여 한참 더 내려서며는 대구 올레길의 제 8코스인 "수태지 계곡길" 를 만나는데, 울창한 숲속으로 길이 이어지므로 인하여 발걸음도 가볍게 무아지경으로 걷는 산책코스가 되어진다.

 

< 다시 만나는 대구올레 제 8코스 "수태지 계곡길" >

 

몇개의 능선을 넘어서며는 "이말재" 라는 고개에 이르면서 이 고개 중간에 벼락맞는 나무 한그루가 외초롭게 서 있는데, 나무의 70-80%가 고사하고 한가지의 줄기에서만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처절한 삶을 보여주는 모습, 인간에게도 삶의 소중 함을 일깨워 주는 교훈의 나무가 되어지는 것 같다.

 

< 이말재 고개에서 만나는 "벼락맞은 나무" >

  

약 20분 정도 더 오솔길 따라 내려서며는 팔공산이 품고 있는 "부인사" 마당에 이르는데, 이 부인사는 몇년 전 돌아 보았을 때 아무 것도 없는 공터의 사찰이었지만, 근래에 복원되어지거나 아직도 신축중인 사찰 주변을 돌아보니, 그 규모를 보고 쌍전벽해의 사찰이 되어지고 있다.

 

< 팔공산 순환도로변에 "부인사" 를 알리는 입석 >

 

입구 삼광루에서 부터 본당인 대웅전과 그외 부석 건축물이 너무나 웅장하게 건립 되어져 있어, 벌어진 입이 다물지 못하게 되어진다.

 

< 부인사로 들어가는 "삼광루" 문 >

 

부인사 역사는 신라 선덕여왕(644년)이 건립한 사찰로써, 전성기 부인사는 39동의 부속 암자와 더불어 2천여명의 승려가 수도하였으며, 전국 유일의 승시장(僧市場)이 열린 곳이라고도 한다.

또한, 해인사 8만 대장경 보다 200년 앞 선 고려시대 1011년부터 1087년까지 각인한 "초조대장경" 을 모신 사찰이지만, 고려 고종 9년(1232년)에 몽고족이 2차 침입시에 불타 버린 비운의 사찰이다.

이렇게 유명한 사찰이 최근까지 불탄 공터로만 존재하다가 근래 Hard-ware 측면인 사찰 건물은 일부 복원되었지만, 진정한 사찰의 보물인 초조대장경이 복원되지 못함이 아쉬운 사찰이 되어진다.   

 

< 새롭게 복원한 부인사 "대웅전" >

 

< 대웅전 왼편 옆에 있는 "기도도량" >

 

사찰을 나와 부인사 앞 팔공산 순환도로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기다려 보는데,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크게 곤역 치루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도착되어지는 하루가 된 산행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