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0일.(일요일)
오늘은 금년들어 제일추운 날씨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집구석에서 딩구는 것 보다는 체력 단련이나 하여 보자는 생각으로 집 앞에 있는 분식집에 들려 2줄의 김밥 구입하여 배낭에 넣고,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대구의 명산 팔공산(八公山) 산자락에 있는 "갓바위" 시설지구에 이른다.
9시 40분 버스에 내리니 설한풍의 찬바람이 얼굴로 스쳐 지나가므로 몸이 잔득 움추려 지는데, 거의 월동 준비도 하지않은 상태에서 산행을 시작한다는 것이 조금 후회가 일어나면서 시설지구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갓바위 순두부 상가에서 김이 모락모락 품고 있는 식당촌 앞 지나갈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산행이 된다.
< "갓바위" 시설지구에서 올라가는 산행 초입 길 >
앙상한 가지에 몇 개의 단풍이 남아있는 나무 아래로 휘몰아치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옆을 발으면서 천천히 산행에 몰입하여 보는데, 이곳 갓바위 시설지구도 얼마나 오래만에 찾았는지 올라가는 길이 아련한 추억의 길로 이어진다.
< 떨어지는 낙옆 길을 걷는 "산행인" >
잘 다듬어진 도로 따라 한참 올라가니, 사찰 입구를 표시하는 입석 바위를 통과하고 조금 더 발품을 팔면 짜임세가 있게 만들어진 사찰 "관암사(冠岩寺)" 마당에 이른다.
< 팔공산 "관암사" 를 알리는 입석 >
관암사는 창건 당시에는 도로도 없이 부실한 건재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찰이 많이 훼손되어 허물어진 사찰이었는데, 제2대 주지인 "헤공스님" 이 2004년부터 10년 계획으로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2010년 5월 대웅전 등 주변 사찰을 새롭게 건립하여 가람의 규모를 간직한 사찰이다.
< 새롭게 조성된 "관암사" 전경 >
그런데 아쉽게도 사찰 뒤편에 있는 신라 오악의 중심 산이자 민족의 영산이 되는 팔공산 정기가 남으로 흘러모아 "관봉(冠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갓바위 "석조약사여래좌상" 이 본 사찰인 관암사 소속으로 되어 있었으나, 1970년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관리권이 관봉 뒤편에 있는 "선본사" 에 빼았긴 불운의 사찰이 되어진 절이다.
돌계단 따라 사찰 내부로 올라서니 옛날 보았던 사찰은 흔적도 없이 살아지고 매우 아담한 사찰이 자리잡고 있어, 역시 돈의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 현대의 사찰인가 보다.
이 관암사 절마당에서 갓바위로 올라가는 길이 2개로 나누어지는데, 왼편 골짜기로 올라가는 길은 짧지만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소 많은 힘이 요구 되는 길이다.
오른편 골짜기로 올라가는 길은 많이 돌아서 가는 길이 되지만, 가는 길 중간 중간에 많은 암자들이 자리잡고 있어 그들의 암자도 구경 할 요령으로 오늘의 산행은 오른편 길로 선택하여 본다.
< 관암사 내에 새롭게 조성된 "관음전" 전경 >
추위가 완전히 살아지도록 인내심을 발휘하여 땀이 올려 내릴 정도의 에너지를 허비하면서 너들바위 길 따라 약 30분 정도 올라가면 숨이 턱까지 멈추는 깔닥고개에 이르는데, 이 고개마루에는 통나무 의자와 더불어 막걸리를 판매하는 움막집에 있지만 추위로 인하여 휴식을 취하는 사람 한명도 머물지 않고 있다.
이 깔닥고개에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용주암" 이라는 암자가 100m 거리에 있다는 이정표가 있어 용주암 방향으로 길을 잡아보는데, 가는 길 옆 야산 기슭에는 전부 부처님 조각상을 진열하고 있어 매우 부유한 암자인 것 같다.
< "용주암" 으로 들어가는 야산에 진열하여 놓은 부처님 >
야산 모퉁이를 돌아서니 암자의 입구에 거대한 탑이 서 있으면 그 옆으로 아담한 암자가 나타나는데, 암자가 원만한 사찰보다 규모가 더 크게 자리잡고 있어 눈이 휘둥굴 하게 만든다.
< 용주암 입구에 세워진 "탑" >
< 산의 골짜기에 점유하고 있는 "용주암" 전경 >
암자를 돌아보고 되돌아 나오니, 관봉 끝자락에 있는 갓바위 앞 참배당 건물이 새의 둥지와 같이 높이 솟아 있어 한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
< 용주암 마당에서 올라 본 한폭의 그림과 같은 "관봉" 전경 >
용주암에서 관봉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 새롭게 건립하고 있는 암자가 도로 아래에 있지만, 그냥 지나쳐 산의 한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또 다른 "약사암" 이라는 암자를 만난다.
< 약사암 마당에 새롭게 세워진 "약사여래불상" >
이 암자는 옛날 부터 있었던 암자이지만, 여기도 암자 건물을 새롭게 건립되어져 있으며 산뜻한 건물 앞에는 벌써 공짜로 공양하여 주는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 약사암 마당에서 점심 공양하고 있는 "신도와 산악인" >
약사암에서 갓바위가 있는 관봉까지 급경사의 계단길로 만들어져 있어, 한 계단 계단 심호흡을 가다 듬으면서 고행의 길을 한 20여분 정도 올라서면 산행 초입에서 만난 관암사에서 양쪽으로 분산하여 올라오는 사람들이 상호 접선하는 지점에 11시 10분 경에 이른다.
이 지점이 갓바위 초입이며 행정구역 상으로 대구가 아닌 경상북도 경산시에 소속되어 있어, 경상시에서 붙여놓은 현수막에 한가지 소원이 꼭 성취 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관봉" 정상에 있는 갓바위가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현수막 >
몇일 전 수능 시험이 끝났으므로 다소 사람이 적게 올라왔겠지 하는 기대가 완전히 기우에 불과하게 만든다.
거대한 바위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석조약사여래좌상" 이 내려보이는 발 아래의 기도 도량처에 이르면 넓게 조성된 건물 위 기도처에서 부처님에게 인사드리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어 내부로 들어가기도 힘이 든다.
< 인자한 얼굴하고 있는 갓바위 "석조약사여래좌상" >
빈틈하나 없는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가지 소원을 빌고 있는데, 이 석조약사여래좌상은 꼭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속설로 아무리 추위가 엄습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는 곳이다.
< "갓바위" 앞에서 기도드리는 인파들 >
특히 약사여래좌상이 바라보는 곳이 울산과 부산 방향이라고 하여 그곳 출신의 아줌마들이 대구 사람보다 더 많이 찾는다고 하니, 현재 절을 하고 있는 사람 반은 아마 부산과 울산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
< 갓바위 앞으로 펼쳐지는 "부산 또는 울산" 시가지 모습 >
갓바위 위력이 얼마나 크며 하루에 공양 용으로 십식일반으로 지고온 쌀이 수백 가마니가 넘고, 일년에 시주하는 쌀과 돈의 합계가 수백억 원이 넘어 몇십년 전 소유권 다툼의 중심이 되어, 서울 조계종 본사에서 중재하는 안이 자기의 소속인 "조계사" 에서 직접 운영 및 관리한다는 것이다.
갓바위는 경북 경산시 팔공산 남쪽 관봉(冠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물 제431호 로써 통일 신라시대에 조성된 부처님이며, 정식 명칭은 "경산 팔공산 석조여래좌상" 이나 머리 위에 마치 갓을 쓴 듯한 자연판석이 올라져 있어 속칭 "갓바위 부처님" 이라고 더 알려지고 있다.
불상과 대좌가 모두 하나의 돌 즉 매우 큰 덩어리의 바위로 조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부처님으로, 귀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으며 굵고 짧은 목에 3줄의 주름이 되느 삼도(三道)가 표시되어 있다.
< 불상과 대좌가 한개의 돌로써 구성된 "갓바위" >
무릎 위에 올라진 두손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닮은 "향마촉지인" 을 하고 있지만, 불상의 왼손 바닥에 조그마한 약함을 들고 있어 이 불상의 존명을 석조약사여래좌상 이라고 한다.
< 부처님 발 아래 있는 바위에 "동전" 을 붙이면서 소원 비는 사람들 >
참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지만 갈길이 너무너 멀어 간단한게 묵념만 들리고 나서 불상의 뒤편으로 내려서니, 언제부터인지 여기에도 새롭게 사찰이 건립되어 있다.
< 갓바위 뒤편에 새롭게 건립된 "사찰" >
이 사찰 마당을 통과하여 조금 더 내려서면 옛날 배고푼 시절 갓바위에 올라오면 꼭 공양하고 가는 갓바위 암자가 있지만, 오늘은 공양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냥 통과하여 본격적으로 팔공산 능선으로 들어선다.
< 몇십년 전 부터 점심 공양하는 갓바위 "암자" >
벌써 산행길에는 얼음이 얼면서 길가에는 낙옆 밑으로 서리가 내려 있으므로 안전을 우선으로 하여 천천히 팔공산 암릉길로 들어서는데, 옛날 보다 나무테크 길을 많이 만들어져 있어 산행의 속도가 예전에 대비하여 많이 단축된다.
< 갓바위 뒤편 "팔공산 관봉" 의 암릉 >
< 새롭게 건립된 "철제와 나무테크" 계단 올라가면서 >
능선길 좌측 발 아래에는 "대구 팔공CC" 에서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노오란 색 잔디 밭에서 카트를 몰고 다니는 모습과, 아련하게 보이는 대구시내의 흰색의 아파트 빌딩도 한폭의 그림과 같이 자리하고 있다.
< 팔공산 자연경관을 아름답게 하고 있는 "팔공CC" 전경 >
오른편으로는 갓바위의 관리 사찰인 "선본사" 가 첩첩산중 계곡 사이에 고즈늑하게 자리잡고 있어 매우 아름다운 풍경 자랑하고 있으며, 고개를 조금 들면 오늘 나의 걷는 길 종착지점이 있는 "은해사" 사찰이 아련하게 보이는 듯 하다.
< 갓바위를 관리하는 "선본사" 전경 >
바위로 형성된 능선길을 오르내리면서 거의 한시간 정도 씨름하여 12시 20분 경 팔공산의 동봉으로 가는 길과 은해사로 내려가는 고개길 "능선재" 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는 장소이다 보니 함께 걷는 이름도 모르는 한 산행인과 함께 자리를 잡고 간단하게 점심식사에 동참하여 본다.
< 많은 산행인들이 휴식를 취하는 "능선재" 3거리 이정표 >
이어 오늘의 목표지점이 되는 은해사 방향으로 내려서는데, 가는 길은 수북하게 쌓인 낙옆을 발으면서 천천히 걸어 은해사의 암자 중에 하나가 되는 "중암암(中巖庵)" 뒤편 바위 군락지에 이른다.
먼저 바위 터널을 지나가면 거대한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만년송" 소나무 한그루를 만나는데, 나무가지에는 온통 솔방울로 장식하고 있는 소나무가 만년이나 살고 있다니 정말로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사를 느끼는 나무이다.
< 거대한 바위 사이에 생존하고 있는 "만년송" >
이 나무 앞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서 신라의 장수 "김유신" 이 무예를 연마한 곳이라고 하는데, 나무의 수명이 매우 오래 되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름과 같이 만년은 안되어도 오래 됨이 자명한 것은 신라 시대에 벌써 크게 성장하고 있는 소나무라고 한다.
<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가지고 놀았던 바위 >
암굴을 돌아 나오면 "삼인암(三印岩)" 이라는 거대한 3개의 바위가 나란하게 놓여 있는데, 이 삼인암 바위에도 하나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옛날 부자집으로 시집간 한 여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여 지나가는 한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 바위까지 올라와 치성을 드려 3명의 자녀를 생산하였다고 하여 삼인암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 3명의 아이를 잉태하게 한 "삼인암" 바위와 글씨 >
아기자기한 바위 군락지와 바위 암굴을 통과하면서 중암암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3층석탑" 한기를 만나는데, 이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건립된 높이 3m에 하층기단 갑석의 폭이 1.46m 로 매우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는 탑이다.
< 몸집이 작은 사람만 통과가 가능한 "극락굴" 입구 >
< "극락굴" 로 들어갈려고 시도하는 아줌마 >
< 중암암 뒤편에 있는 "3층석탑" >
이 탑에서 한 걸음만 내려서면서 천왕문이라는 암굴로 들어가면 거대한 바위 속에 제비집 둥지와 같이 아담한 중암암 암자가 걸려있는데, 이러한 곳에 암자를 건립하기 위한 자재를 어떻게 운반하였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중암암" 으로 들어가는 천왕문 >
< 천왕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중앙암" >
그래서 이 사찰을 바위의 구멍 속에 있다고 하여 은해사의 말사인 중암암 보다는 "돌구멍절" 로써 더 알려져 있는 암자이지만, 이 돌구멍절이 더욱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 절의 자랑인 재래식 "해후소" 이다.
< "해후소" 로 들어가는 돌구멍과 안내문 >
옛날 통도사와 해인사 및 돌구멍절에서 수행하는 3명의 스님이 만나 각자 자기 절 크기를 자랑하는데, 양산 통도사의 스님이 통도사 법당 문이 얼마나 큰지 한번 열고 닫으면 문지방 고리에 있는 장석에서 1말 3되의 쇠가루가 떨어진다고 문의 크기를 자랑한다.
옆에 있는 해인사 스님은 해인사에서는 동짓날 팥죽을 쓸 때 배를 띄워서 팥죽을 저어야 한다고 하면서 스님이 많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자랑하고 있으니, 옆에 듣고 있는 돌구멍절 스님이 절의 크기를 자랑 할 것이 없다보니 해우소를 이야기한다.
돌구멍절의 해후소에서 정월 초하루날 볼 일을 보면, 그 해 년말인 섣달 그믐날이라 떨어지는 소리 들을 수 있다는 화장실의 크기를 설명하였다는 해후소가 거대한 바위 속으로 돌고 돌아서 들어가야만 만나는 곳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 돌구멍에서 돌구멍을 통과하여야 만나는 "해후소" 문 >
이 밖에 암자 주변에 건들바위, 극락굴, 장군수 등이 주변에 산재하고 있지만, 그곳을 다 돌아보기에는 짧은 초겨울 날씨의 시간적 여유가 충분치 않아 발길을 돌려 암자 아래 방향으로 내려서니 까마득한 바위 위에 해후소가 희미하게 보인다.
< 까마득한 바위 위에 걸쳐있는 "해후소" 전경 >
여기서 부터 시멘트 포장길 따라 내려서면 옆으로 겨울이지만 풍족한 물이 흐르고 있는 개울 따라 걸어가니 다소 발걸음도 가벼워 지지만, 걷는 길이 너무나 길어 죽눅이 드는 산행길이 이어져 기력이 완전히 소진하게 만든다.
< 초겨울에도 많은 물이 흐르고 있는 "중암암 계곡" >
약 30분 정도 걸어가면 "묘봉암(妙峰庵)" 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데, 금일 묘봉암에서 산사 음악회 등 행사를 하다보니 많은 차량이 내려오니 더욱더 짜증이 나는 길이다.
여기서부터 또 30분 정도 더 내려서면 쌍 갈래 길을 만나면서 반대편 계곡 산자락에 고찰의 사찰을 만나는데, 이 사찰이 은해사의 또 다른 암자 "백흥암(百興庵)" 이다.
< 고찰의 모습하고 있는 "백홍암" 전경 >
백홍암 암자 문 앞에 이르니 문이 굳게 닿혀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이 백홍암은 비구니 스님의 수도도량으로써 일년에 2회 부처님 오신날과 백중일만 일반에게 출입이 허용된다고 한다.
< "백홍암" 문을 밀고 들어가 사진 한장 찍어보면서 >
또 다시 시멘트 포장길 따라 원도 한도 없이 걷다보면 아담한 저수지가 있는 3거리 길을 만나는데, 이 저수지 주변으로 하여 오솔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 템플 스테이 하는 사람들의 산책길로 사용하고 있으며 저수지의 다른 방향으로 "운부암(雲浮庵)" 으로 올라가는 이정표와 산의 능선 방향으로 "인조" 의 태실이 있다는 안내도가 서 있다.
< 저수지 3거리에서 각 방향의 길을 안내하는 "입간판" >
이 3거리에서 부터 암자로 올라가는 차량의 통행이 다소 많은 넓은길 따라, 한 모퉁이를 돌아서면 현존하는 8개의 암자와 더불어 50여 개의 말사를 거닐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 교구 본사 "은해사(銀海寺)" 입구가 되는 보화루(寶華樓)에 이른다.
< 은해사 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보화루" >
보화루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 양쪽으로 도열한 건물의 중앙에 높의 10m의 거대한 '향나무" 한 그루가 은해사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으며, 그 뒤편에 은해사의 본찰이 되는 "극락보전(極樂寶殿)"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 넓은 마당 구석에 자라고 있는 "향나무" 와 은해사 전경 >
십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은해사가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이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 먼저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온데 간데 없어지고 대웅전 현판 자리에 극락보전이라는 금색의 다른 현판이 붙어있다.
< "극락보전"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은해사 본당 >
대웅전이 극락보전으로 변경된 사연을 알기 위하여 사찰 앞에 있는 안내판을 읽어보는데, 안내판 제목이 옛날에 쓴 글씨를 지우고 그 위에 정정한 글씨가 붙어있다.
< 은해사 사찰 역사를 설명하면서 오류 투성인 "안내도" >
그래서 그러한 사유가 있겠지 하면서 세부적으로 내용을 읽어보니, 내용 중간에 "19세기에 건립된 것을 추정되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지붕의 팔작지붕으로...." 이라면서 대웅전을 극락보전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여 있다.
그래서 종무실에 가서 내용을 물어보니 옛날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지만 본존불로 모시는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어, 대웅전에서 극락보전으로 현판을 수정하였다고 한다.
< "아미타불" 을 모시고 있는 은해사 본당 >
참, 기가 찰일이다.
내가 본 옛날 현판에는 대웅전의 한자에 영웅 "웅(雄)자" 한자의 획수가 삼각형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지나가는 주지스님에게 물어보니 우물쭈물 하드니, 오늘은 아에 간판을 없엤다고 하니?
조계종 제10 교구 본사가 엿 장수 가위소리 보다 더 쉽게 변경하다니.......
본당 옆에 건립된 지장전을 돌아보고 나서 새롭게 건립된 "성보 박물관" 에 들어가서 불교 문화에 심취하여 보지만, 본당 현판에 대한 미련으로 박물관 내부를 건성으로 돌아 본다.
< 본당 옆에 자리잡고 있는 "지장전" 전경 >
< 새롭게 건축된 은해사 "성보박물관" 입구 >
성보 박물관에는 은해사에서 배출한 큰 스님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새벽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대사, 조계종의 종신이신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집필하신 일연스님, 조선시대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 성규스님 등을 비롯하여 최근까지 향곡, 운봉, 성철, 일타 등의 큰 스님들이 수도 증진한 곳이다.
< 박물관 내에는 큰스님들의 "영정" 모습 >
< 박물관 내부의 전경 >
많은 아쉬움을 간직한체 은해사를 나와 사찰 앞으로 내려가니 이곳 은해사에도 명성이 자자한 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어 부도탑이 질서 정렬하게 모셔져 있어 잠시 돌아보고, 오솔길 따라 더 내려가면 사찰로 입장하는 매표소가 있는 일주문에 도착한다.
< 은해사 초입에 있는 "부도탑" 모습 >
< 은해사로 들어가는 "매표소" 전경 >
여기서 마을까지 더 걸어서 내려가니, 약 2시간 간격으로 들어온 시내 버스를 한없이 기다리는 고통과 추위가 나를 기다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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