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 2021년 6월 23-24일.(1박2일)
1. 첫째날 : 6월 23일.(수요일)
1) 여행의 개요.
고등학교 및 백봉회 회원으로 구성하고 있는 4명이 충청북도 지역에 있는 관광지를 탐방하기로 하는데, 회원 중 한명이 베트남 참전용사에 따른 보훈 유공자 회원으로 등재되어져 있어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수룡봉황길 553-17 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충주 '보훈휴양원(報勳休養院)' 에서 1박으로 여행 계획을 수립하여 본다.
그래서 일행은 충청북도 지역에 있는 관광지를 탐방하기 위하여 아침 9시 30분 대구광역시 반월당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충주로 달려가는데, 12시 경 충주 Toll gate를 벗어난 일행은 탐금대를 첫번째 방문지로 선정하면서 탄금대교를 건너 탄금대 주차장으로 올라간다.
< '탄금대' 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입석 >
< 도로에서 '탄금대'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길 >
2) 탄금대를 거닐면서.
나는 지금으로 부터 약 20여 년 전에 탄금대를 한번 방문한 경험이 있는 유적지가 되었지만 그 동안 세월이 경과하므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데,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조감도를 보면서 방문의 동선(動線)을 만들어 본다.
< '탄금대' 를 나타내고 있는 조감도 >
주차장 주변에는 야외음악당을 비롯하여 충주문화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유적지로 들어가는 도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도로 입구에는 탄금대를 홍보하는 안내문과 더불어 안내문 뒤편으로 주현미 가수가 부른 '탄금대 사연' 이라는 노래비가 서 있다.
< 탄금대 주차장과 함께 하고 있는 '충주문화원' 건물 >
<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충주시' 조감도 >
< '탄금대' 로 들어가는 도로 >
< 주현미 가수의 노래 '탄금대 사연' 노래비 >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 탄금대(彈琴臺)는 명승 제42호로 지정이 된 곳으로 해발 약 108m 정도의 야트마한 대문산(大門山) 또는 태문사(太門山) 정상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유적지로써,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탄금대이라는 명칭은 악성 '우륵(于勒)' 선생님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것에서 부터 유래가 되는데, 우륵 선생님은 원래 가야국 사람으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지역을 차지한 후 사민정책에 따라 충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악성(樂聖) 우륵 선생님은 이곳의 풍치를 탐미하면서 산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었는데, 이곳이 바로 우륵이 '금(琴)' 을 탄 곳이라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 탄금대(彈琴臺)이라고 하겠다.
우륵 선생님이 연주하는 가야금의 미묘한 소리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하였고 곧 마을이 형성하였으며 탄금대 주변에는 지금도 가야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칠곡리(칠금동), 금뇌리(금능리), 청금리(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모두 가야금과 관련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선조 25년(1952년) 4월 임진왜란 때 충장공 '신립(申砬)' 장군은 탄금대에서 8천여 명의 병사들과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 小西行長)'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장열하게 전사한 옛 전쟁터 이기도 하다.
< '탄금대' 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도로 따라 내부로 조금 들어가면 먼저 충혼탑(忠魂塔)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충혼탑을 관리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가 6월 한달 동안 총혼탑 지하층에 있는 호국영령위패실(護國英靈位牌室) 문을 열어놓고 있다고 하여 해군 제독으로 전역한 친구와 함께 내부로 안내를 받으면서 참배하여 본다.
< 유적지의 중심 정도에 자리하고 있는 '충혼탑' >
< 충혼탑 뒤편 '호국영령위패실' 로 들어가는 문 >
충혼탑 내부에는 이곳 충주 및 중원지역의 장병과 경찰관, 군무원, 군노무자 등 1.932위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데, 전사자 위패의 이름 옆에 작은 글씨로 '일중(一中)' 또는 '2중(二中)' 이라는 계급을 표시하고 있어 지금까지 그러한 계급은 처음 대면하므로 함께 하는 해군 제독 및 아주머니에게 문의하여도 모르겠다고 한다.
< '충혼탑'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호국영령위패실' 내에 모시고 있는 위패 >
충혼탑 바로 옆으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하여 전사를 하신 8천여 명의 혼을 기리는 팔천고혼위령탑(八千孤魂慰靈塔)' 이 높게 서 있는데, 탑의 주변에는 조총으로 공격하는 일분군에 대비하여 칼로써 지휘하는 동상이 자리하고 있어 너무나 차별화를 느끼게 한다.
< '팔천고혼위령탑' 전경 >
이곳 위령탑 앞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따라 조금 걸어가면 3거리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는데, 왼편에는 열두대로 가는 길이고 오른편에는 화장실을 비롯하여 세계무술공원(世界武術公園)을 가르키고 있다.
< '열두대 및 세계무슬공원' 을 가르키는 이정표 >
< '열두대' 로 내려가는 오솔길 >
먼저 왼편의 열두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이내 '탄금대기(彈琴臺記)' 이라는 비석 한기가 서 있으면서 이 비석의 전면에 비석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곳 비석의 내용에는 최남선 선생님이 문장을 짓고 서예가 김충헌 선생님이 글씨를 썻다고 한다.
< '탄금대기' 의 비석 >
< '탄금대기' 비석 전면에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 >
이 비석에서 부터 조금 하부로 내려가면 야산의 언덕 위로 '탄금정(彈琴亭)' 이라는 6각형 정자 한채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정자의 뒤편에는 강가로 내려가는 직벽의 나무테크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계단의 끝지점에 열두대라는 거대한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열두대 지명에 관한 유래는 확실하지 않는데, 바위의 층계가 12개이기 때문에 열두대라 하기도 하고 절벽 아래 물이 12번 돌기 때문이라는 설(說)도 있고 또한 임진왜란 당시 교전 중 달구어진 화살을 식히느라 12번을 오르내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 야산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탄금정' >
< 탄금정에서 부터 열두대로 내려가는 '나무테크' 계단 >
이곳 열두대로 내려가는 계단의 중간지점에 '신립장군순국지지(申砬將軍殉國之址)' 이라는 작은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비석의 내용에는 토씨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한자로 쓰여 있어 아둔한 머리로써 해석이 난분하게 만든다.
< '신립장군순국지지' 를 알리는 비석 >
다시 나무테크를 이용하여 조금 더 내려가면 열두대를 만나면서 열두대 가장자리 따라 만들어져 있는 안전 난간대에 기대서서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여 보는데, 상부 방향에는 충주시가지 빌당들이 보이고 있고 하부 방향에는 조금 전에 건넜던 탐금대교가 한폭의 수채화와 같이 머물고 있다.
<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열두대' >
< 열두대 상부 방향에 있는 '충주시가지' 빌딩 >
< 열두대 하부 방향에 있는 '탄금대교' >
눈 앞에는 남한강의 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으므로 그때의 신립장군을 회상하여 보면 신립장군은 이곳 열두대를 배수지진( 背水之陣)으로 삼았는데, 배수지진 전법(戰法)은 물러설 수 없도록 물을 등지고 적을 치는 전투의 하나로써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의 비유로 하는 말이다.
그러하면 신립장군은 누구일까를 생각하여 보는데. 그는 만주벌판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면서 기마병을 잘 활용하여 승리했던 인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번사(三道巡邊使)가 되어 충주로 출전하게 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왜 충주에서 자신의 주 특기가 되는 기마병을 활용하지 않았는데, 왜장(倭將)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산악 지형을 피한 이유에 대하여 여려 의문점이 남는게 사실이다.
신립장군은 1567년 무과에 급제하고 두만강 주변에 출현하는 여진족을 물리치면서 일약 스타(Star)덤에 올랐던 인물이지만 양반 집의 처녀들을 첩으로 삼는다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을 당하였고, 이유없이 부하를 참형에 처하여 탄핵을 받는 등 문란했던 사생활과 포악한 성격으로 개인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선조의 부름을 받았는지 아이러니칼(Ironical)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어찌하던 선조의 부름을 받은 신립은 8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왜군의 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수행원을 거닐고 문경새재 중에서 제일 요새가 되는 조령관으로 갔다.
그를 수행했던 김여물은 왜군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으니 직접 부디칠 수 없다고 하여 문경새재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게 적합하다고 간언을 하였지만, 신립은 이곳은 산악이라 기마병을 이용할 수 없어 들판에서 싸우는게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한편으로 신립장군의 첩 중에 한명이 원한으로 죽었는데, 그 첩이 신립장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하여 조령산 신령으로 변장하여 꿈에 나타나 이곳에서 싸움을 하면 불리하다고 조언하므로 장소를 변경하였다는 설도 함께 하고 있다.
아마도 신립은 자신의 주 특기가 되는 기마병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써 그로 인하여 조령관을 포기하고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충주지역은 들판이긴 하지만 갈대밭이라 기마병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또한 전날 많은 비가 와서 진흙탕이라 기마병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서 왜군들의 조총(鳥銃)에 군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또 많은 군사들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참패를 당한다.
어찌하던 열심히 싸우긴 했지만 열적 수세에 밀려 참패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신립은 왜군과의 전투에 패전(敗戰)하자 이곳에서 물결을 따라 내려가다 중앙탑면 창동 암벽에 자화상을 그려 놓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고 한다.
향년 47세로 자결한 후 시신을 찾지 못하다가 어느 날 낚시꾼이 잡은 잉어의 배에서 나온 옥관자가 신립장군의 것으로 판명되어 그 자손들이 안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오늘 내가 내려보는 남한강 물은 430여년 전과 동일하게 말 없이 흐르고 있다.
다시 탄금정으로 올라와 왔던길로 되둘아 가면서 이제는 세계무술공원 방향으로 들어가는데, 3거리에서 조금 만 걸어가면 야산의 언저리에 '감자꽃' 이라는 노래비 한기가 서 있으면서 노래비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 '감자꽃' 노래비 >
이곳 감자꽃 노래비는 동천 '권태응(權泰應)' 선생님이 쓴 동시(童詩)로써 유명한 노래가 되었는데, 동천 권태응 선생님은 이곳 충주 출신으로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공부보다 항일운등에 매진하다가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가 중에 한명이라 하겠다.
< 동촌 '권태응' 선생님의 내력을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 >
< 노래비 앞에서 '세계무슬공원' 으로 내려가는 길 >
이곳 노래비 앞에서 남한강 방향으로 내려가면 세계무술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점심식사 시간이 임박하지만 관람의 효율성을 제고(提高)시키기 위하여 무술공원을 돌아보고 나서 식당을 물색하기로 한다. -첫째날 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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