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8일.(일요일)
1. 육신사를 다시 돌아보면서.
다시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의 충동으로 집사람과 함께 나들이 길을 선택하여 보는데, 금일은 옛날 내가 대학교 시절에 살았던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관광지를 탐방하여 보기로 하면서 왜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의 조상 뿌리가 이어져 오고 있는 '육신사(六臣祠)' 를 다시 찾아보기로 한다.
나는 지금으로 부터 약 12여 년(2009년 10월 10일) 전 육신사를 탐방하면서 육신사의 내력을 나의 블로그에 이미 기술하므로 인하여,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궁궁하여 재차 방문하는 방향으로 잡아본다.
육신사가 자리하고 있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묘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대구교도소 건물이 새롭게 건립이 되어 단장을 끝내고 현재 화원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을 이곳으로 이감(移監)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직도 이감이 이루어지지 않고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새롭게 건축한 교도소 건물 입구에서 왜관 방향으로 약간 올라가면 육신사를 알리는 이정표 따라 내부로 들어가면 야산이 360도로 감싸고 있는 중앙에 묘골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을 안길 따라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육신사 정문에 도착이 된다.
< '육신사' 입구에 있는 외삼문 >
이곳 묘골은 사육신의 한분이 되시는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 충정공파(忠正公派)의 집성촌이 되는데, 구한말 까지는 300여 호의 집이 가득차 들어 있었으며 광복이전 까지만 해도 10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 호만 남아 있다.
정문의 입구 왼편으로 해설사가 대기하고 있는 안내소로 들어가 팜플릿 한장을 획득하고 나서 안내소 앞에 있는 육신사에 관련되는 각종 설명문과 더불어 송덕사(頌德辭)를 읽어보는데, 중요한 부분의 내용은 나의 블로그에 이미 기술되어 있으므로 오늘은 사진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 '육신사' 을 알리는 안내문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육신사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외삼문(外三門)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작은 통로를 중심으로 왼편으로 연못이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하여 앙상한 잎과 줄기만 가득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향사(鄕祀) 때 음식을 만드는 숭절당(崇節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쪽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본채 건물이 되는 숭절당을 비롯하여 좌우로 동재와 서재 건물을 비롯하여 변소 건물이 함께 하고 있다.
< 외삼문 내부 통로 왼편에 있는 '연못' >
< 통로의 오른편 '숭절당' 으로 들어가는 쪽문 >
< 향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숭절당' >
다시 쪽문으로 나와 작은 통로로 들어가 앞으로 조금 걸어가면 몇단의 계단 위로 홍살문이 서 있으며 홍살문 뒤편으로 다소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의 중심에는 육선생사적비(六先生事蹟碑)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와 최규하 전 대통령 및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휘호(揮毫)가 자리하고 있다.
< 통로의 끝지점에 있는 '홍살문' >
< 마당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육선생사적비' >
< 사적비 뒤편 '박정희와 최규하' 전 대통령 및 '박준규' 전 국회의장 휘호 >
마당의 왼편에는 우물 및 사당 건립에 따른 헌금 또는 물품을 지원한 사람의 박명록(芳名錄)이 자리하고 있고, 마당의 오른편에는 보물 제554호가 되는 태고정(太古亭) 및 요사채 건물이 건축되어 있다.
< 마당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우물' >
< 마당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요사채' >
마당의 뒤편으로 일단의 축대 위로 내삼문이 되는 성인문(成仁門)을 비롯하여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내부에 사육신의 여섯분(성산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숭정사(崇正祠)'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마당의 뒤편 내삼문이 되는 '성인문' >
마당의 오른편 제일 끝에 보물 제554호로 지정이 된 태고정(太古亭) 또는 일시루(一是樓)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의 처마 밑에 한석봉 선생님이 쓰신 '태고정(太古亭)' 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 되시는 안평대군이 쓰신 '일시루(一是樓)' 이라는 현판이 나란하게 걸려있다.
< 보물 제554호로 지정이 되어져 있는 '태고정' >
태고정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정교한 초익공계(初翼工系)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른편은 팔작지붕으로 건축되어져 있고 왼편에는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으로 마감한 보기 드문 정자 건물이라 하겠다.
< 오른편 측면에서 바라보는 '태고정' 팔작지붕 >
< 건물의 왼편 '부섭지붕' 으로 마감한 모습 >
< '대청마루' 에 걸려있는 편액 >
태고정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朴壹珊)이 99칸의 종택을 세울 때 그에 딸린 정자로 지였는데, 일반적으로 정자에 거의 볼 수 없는 왼편 끝에 한칸의 온돌방과 더불어 뒤편으로 부엌을 두고 부엌의 오른편과 대청마루 사이에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 '태고정'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마당의 뒤편 일단의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성인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담장의 오른편에 있는 쪽문을 살짝 열고 내부로 들어가 보는데, 옛날에는 해설사의 안내로 숭정사 내부 까지 들어가 위패를 보면서 예의를 올렸지만 오늘은 숭정사 건물 사진만 남겨본다.
< 숭정사로 들어가는 '쪽문' >
<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정사' >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 마당의 왼편 돌 계단으로 올라가면 또 다르게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사당 한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사당에는 박팽년의 부친이 되시는 '박중림(朴仲林)' 선생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忠義祠)'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사당의 왼편 언덕 위에 별도로 구획하고 있는 '충의사' >
옛날 내가 방문할 때에는 이곳 충의사 건물이 건립하고 있어 그 때 까지 박중림 선생님의 위패를 사육신과 함께 숭정사 내에 모시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들과 다른 사육신 학자들과 분리하면서 독립된 공간에 위패를 모시므로 큰 위안이 되는 공간이라 하겠다.
<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 >
< '박중림' 이조판서를 기리는 비석 >
이 충의사 마당에서 앞으로 내려보면 묘골의 마을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고 마을 앞 까지 매우 낮은 앞산이 자리하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도 트인 곳이 없이 완벽하게 '회룡고미형(回龍顧尾形)' 이 되는데, 회룡고미형은 거대한 룡(龍)이 자기의 꼬리를 되돌아보는 형상으로 매우 길지(吉地)이라고 한다.
< 충의사 마당에서 내려보는 '육신사' 전경 >
< 충의사 마당에서 내려보는 '묘골' 전경 >
2. 박두을 여사 생가 방문.
육신사에서 미을의 중앙도로 따라 한 100m 정도 내려오면 마을의 제일 중앙지점에 '박두을' 여사의 생가(生家)가 자리하고 있는데, 박두을 여사는 한국에서 최고의 재벌로 성장을 시킨 삼성그룹의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 부인이라 하겠다.
< 마을의 중간지점에서 '박두을 여사' 생가를 가르키는 이정표 >
생가에는 안채와 더불어 사랑채로 구성하면서 마당의 앞에는 넓은 공터가 함께 하고 있는데, 공터를 포함하여 약 400여 평 정도의 땅을 가진 집이지만 현재는 누구도 거주하지 않아 빈집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 '박두을 여사' 생가 전경 >
< '박두을 여사' 생가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3. 육신사기념관의 관람.
마을의 입구에 넓은 공터와 함께 'ㄱ자' 형태의 육신사기념관(六臣祠記念館)이 자리하고 있는데, 관람을 위하여 기념관을 찾았지만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라 문이 잠겨져 있어 관람이 불가능하여 왜관으로 올라가 다수의 관광지를 구경하고 나서 오후 4시 경 다시 찾아와 관람을 시도하여 본다.
< '육신사기념관' 전경 >
해설사 건물에 머물고 있는 한 중년 부인의 안내를 받으면서 기념관으로 입실을 하는데, 기념관 입구에는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선생님의 국가표준 지정 영정사진과 더불어 몇 점의 유품과 더불어 일대기를 기술하고 있다.
< '육신사기념관' 옆에 있는 해설사 집 >
< 기념관 입구 '박팽년' 의 국가표준 영정 >
박팽년은 태종 17년(1417년) 충청도 회덕(懷德)의 출신으로써 자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인데, 박원상(朴元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안생(朴安生)이고 아버지는 박중림(朴仲林)이며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세종 14년(1432년) 약관 15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세종 16년(14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세종 20년(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케 하던 휴가 제도)를 하였다.
세종 19년(1437년)에 문과중시에서 을과(乙科)로 다시 급제을 하였으며 단종 1년(1453년)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는데, 그 뒤 세조 1년(1455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등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당대 이름이 높은 선비들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술(經術)과 문장 및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단종 3년(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지만 성삼문(成三問)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하였는데, 이 때 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는데, 그 해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 유응부, 박쟁(朴崝)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지만, 그 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해 뒷날 관가(觀稼 :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 때로 다시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는데, 박팽년은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지만, 그런데도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박팽년은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 :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으므로 세조가 분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臣)’ 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고 하자 박팽년은 '나는 상왕(上王 :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 한번도 신(臣)자를 쓴 일이 없다.' 라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살펴보니 모두가 '거(巨)' 자로 되어 있어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는데, 박팽년은 서슴없이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김문기(金文起), 성승, 유응부. 권자신(權自愼), 송석동(宋石同), 윤영손(尹令孫), 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버지 박중림(朴仲林)이라고 대답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세조 2년(1456년) 6월 7일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을 당하였는데, 아버지도 능지처사가 되었고 동생 박대년(朴大年)과 아들 박헌(朴憲), 박순(朴珣), 박분(朴奮)이 모두 처형되어 3대가 참화를 입었으며 여자들 모두가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에서 많은 피해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고 하는데, 이분들이 사육신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 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여 오다가 마침내 숙종 7년(1691년) 이들의 관직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 뒤 영조 34년(1758년)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사육신 모두가 동일하게 이조판서에 증직이 되었으며, 정조 15년(1791년)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 에 올랐다.
그러나 3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 : 가문이 없어짐)이어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는데, 다만 '추강집(秋江集)' 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나 다른 글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집대성’ 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그러나 문집이 전하지 않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박팽년 가계(家系)는 3대의 참화(慘禍)로 인하여 어떠한 유품이나 저서 등 한권의 책도 남아 있지가 않는데, 그러므로 이곳 기념관에는 현존하고 있는 보물 제554호 '태고정' 의 건축물 구조 등 매우 제한적인 전시품으로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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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내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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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정' 현판에 관련되는 편액 >
< '태고정의 건축적 특징' 의 안내문 >
< '묘골' 마을 전경의 모형도 >
<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져 있는 '영상 비디오' 장치 >
오늘 나는 나의 조상 뿌리에 대하여 세심하게 전시품을 구경 할 생각으로 기념관을 찾았지만, 기념관 내부의 전시품 대부분이 어린이 교육용으로 만들어져 있어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관람을 끝내고 묘골을 떠나기로 한다. - 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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