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기타)

문화의 도시를 자랑하는 수원시 "화성 및 화성행궁" 을 해설사와 같은 동문과 함께 걸으면서.(2)

용암2000 2013. 7. 6. 10:24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화홍문에서 수원천변 따라 시원한 길로 10여 분 정도 걸어 수원화성 박물관 코너에서 서쪽 팔달산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화성행궁 입구 4거리에 도착하는데, 이 4거리 코너에 "여민각(與民閣)" 이라는 루각이 있으면서 루각 내에는 수원시민을 위한 종이 설치되어 있다.

 

< 화성행궁 입구 4거리에 있는 "여민각" >

 

여민각은 1796년 조선 정조대왕 때 화성을 축성 함과 동시에 화성행궁과 성신사 등을 건립하였는데, 화성행궁 앞 4거리에 설치한 시설물로서 정조대왕의 상왕(上王) 경영과 수원화성을 한양과 같은 도성 체제로 격상시키고자 설치한 역사적 상징물로써 "여민" 이라는 뜻은 "백성과 함께 한다" 는 내용이라고 한다.

 

2. 화성행궁.

여민각 4거리를 건너 넓은 공터의 광장을 통과하여 행궁방향으로 들어가면 행궁 입구에 하마비(下馬碑)와 함께 홍살문이 서 있고, 그 홍살문 뒤편으로 "화성행궁(華城行宮)" 을 만나면서 왼편 매표소에서 인당 1.500원의 입장권을 지불하고 화성행궁으로 들어간다.

 

< "화성행궁" 을 표시하는 안내판 >

 

< 화성행궁 입구에 있는 "홍살문과 하마비" >

 

거대한 화성행궁은 2개의 궁(宮)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혜경궁 홍씨의 거처를 중심으로 하는 "봉수당(奉壽堂)" 주변을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조대왕 영정을 모시고 있는 "화령전(華寧殿)" 주변을 사적 제115호로 지정 되어있다.

이러한 "화성행궁(華城行宮)" 은 팔달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처음 수원부 관아로 사용하던 자리에 1794년 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까지 약 2년 동안 건축되어진 행궁(行宮)이다. 

정조대왕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 의 원침이 있는 화산의 "융릉(隆陵)" 을 13차례 방문하여 참배 하였으며, 참배 기간 동안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던 곳으로 건립 당시에는 600여 칸 정도의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어져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행궁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낙남헌(洛南軒)" 을 제외한 대궐 건물 전부가 일본의 민족 문화와 역사(歷史) 말살 정책으로 살아진 행궁이다.

1980년 대 말 뜻 있는 지역 주민들이 복원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도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마침내 화성행궁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에 일반일들에게 공개되어진 장소이다.

 

< "화성행궁" 을 안내하고 있는 조감도 >

 

행궁을 구경하기 위하여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문에는 "신풍루(新豊樓)" 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신풍이라는 뜻은 "국왕의 새로운 고향" 이라는 내용으로써 정조대왕의 수원 사랑을 보여주는 문이며 이 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에 이르면서 마당 좌우로 궁궐 건물을 구획하는 토담으로 나누어져 있다.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

 

< 화성행궁 내에서 본 정문 "신풍루" >

 

넓은 마당을 지나면 또 다른 중간 영역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만나는데, 이 대문에는 "좌익문(左翊門) "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그 좌익문을 통과하면 행궁의 중앙에 있는 솟을대문 "중양문(中陽門)" 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중양문을 통과하면 화성행궁의 중심적 건물로써 정궁(正宮)의 "봉수당(奉壽堂)" 이 도착한다.

 

< 정문 다음에 나타나는 중문 "좌익문" >

 

< 화성행궁 중앙을 구획하는 "중양문" >

 

< 화성행궁의 정궁 "봉수당" >

 

봉수당은 정조의 어머님이신 "혜경궁 홍씨" 의 회갑연을 배푼 곳으로 유명한 장소이며 건물 내에는 4개로 구획하면서 여러가지 조형물을 비치하고 있는데, 중앙에는 임금님이 앉아 있는 어좌 및 그 좌우에는 회갑연을 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상 차림 등 다양한 모습으로 꾸며 놓아 옛 궁중의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 봉수당 내에 전시하고 있는 "제례상" 모습 >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심적 건물로써, 1789년 9월 25일에 완공되어 1794년에 지금의 규모로 중축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파손 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기술되어 있다. 

 

< 봉수당을 기술하고 있는 "설명문" >

 

다음 화성행궁의 부속 건물을 관람하기 위하여 남쪽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2층의 출입문 "경룡관(景龍館)" 문에 이르는데, 경룡이라는 뜻은 "제왕을 상징하는 큰용" 이라는 의미이고 경룡관 문을 통과하면 "장락당(長樂堂)" 에 도착하여 진다.

 

< "장락당" 위치와 안내문 >

  

장락당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 사용하였던 건물로써 1794년 화성 축성시에 새롭게 지었고, 정조대왕이 화성으로 행차 할 때 혜경궁 홍씨의 침전(寢殿)으로도 사용한 건물로써 봉수당 건물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 "장락당" 앞에서 해설하는 동문 >

 

정조대왕은 건물 처마 밑에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장락당(長樂堂)" 이라는 친필로 편액을 써서 걸어 놓았는데, 이곳에도 시녀들이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시중을 들고 있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장락당 내에서 혜경궁 홍씨에게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 >

 

장락당 뒤편으로는 시녀, 하인, 병사 등 화성으로 행차 할 때 함께 움직이는 궁중 여인들이 머물 수 있는 거실(居室)이 도열하고 있으며, 이 건물 남쪽 코너 방향으로 구분구분 담장으로 구획하면서 많은 전각들이 건립되어 있다.

 

< 시녀 또는 하인들이 기거하는 "거실" >

 

그래서 관람의 순서는 서쪽에서 동쪽 방향의 전각 구획으로 들어가 관람이 이루어 지도록하여 제일 먼저 "복내당(福內堂)" 건물을 만나는데, 복내당은 화성행궁의 내당(內堂)으로써 평상 시에는 화성을 관장하는 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한다.

 

< "복내당" 건물 내에 전시하고 있는 조형물 >

 

< 복내당 건물 화랑에 진열하고 있는 "대장금" 모습 >

 

복내당 앞의 다음 구획으로는 "유여택(維與宅)" 전각이 나타나는데, 유어택은 정조대왕이 화성 행차 중에 잠시 머물면서 신하들을 참견하는 장소이고 그 앞으로도 계속하여 외정리소,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의 전각들이 행궁 정문까지 건축되어져 있다.

 

< 정조대왕이 임시 집무를 보는 "유어택" >

 

< 궁중음악으로 사용하는 "악기" 보관소 >

 

< "사도세자" 의 죽음을 체험하는 뒤주 >

 

< "서리청" 에서 해설을 듣고 있는 학생들 >

 

다음 관람 코스로 화성 행궁의 정문이 되는 신풍루 까지 반대편 횡궁의 오른편으로 건축되어진 건물을 돌아보는데, 제일 먼저 북군영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집사청이 자리잡고 있다.

집사청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축대 위에 약 600년 정도가 된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풍파에 견디지 못하고 거의 고사하고 있는데, 오직 한 줄기 나무 가지에서 푸른색을 가진 잎들이 달려 있어 매우 애절 함을 느끼는 나무이고 나무 주변에는 소원을 빌기 위하여 글을 적어 놓은 햐안 종이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된다.

 

< 집사청 앞에 있는 "느티나무와 소원" 을 빌기 위한 종이 >

 

처음 걸었던 좌익문과 중양문을 다시 통과하여 봉수당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정조대왕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 노후 생활을 꿈꾸면서 건축하였다는 "노래당(老來堂)" 건물이 나타나고, 그 오른편 옆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파손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낙남헌(洛南軒)" 건물이 나타난다. 

낙남헌은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 기간 중에 과거시험과 양로연(養老宴) 등 여러가지 행사를 치루었던 루각의 건물인데, 많은 학생들이 앉아서 문화 해설사를 통하여 역사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 "낙남헌" 마루에서도 해설을 듣고 있는 학생들 > 

 

노래당 뒤편으로 "득중정(得中亭)"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득중정은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안에서 활을 쏘신 장소으로 활을 쏘면 모두가 명중되므로 득중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까지 사적 제 478호 화성행궁의 영역이고 이 득중정 뒤편으로 하여 100m 정도 북쪽 팔달산 기슭로 들어가면 영조대왕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화령전(華寧殿)"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이 화령전 영역이 사적 제 115호로 지정된 "영전(影殿)" 지역이다.

 

< "화성행궁과 화령전" 을 구획하는 그림과 운한각 설명서 >

 

화령전은 순조 원년(1801년) 에 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곳으로, 정조대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과는 달리 영전은 보통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생전에 계실 때와 같이 봉안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화령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화성행궁 밖으로 나아가 외삼문과 내삼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리를 위하여 화성행궁에서 쪽문을 통하여 들어가는데, 제일 먼저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 건물을 만나고 그 옆으로 본당인 "운한각(雲漢閣)" 에 이른다.

 

< 화령전 좌측에 있는 "전사청" > 

    

< 영조대왕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운한각" >

 

축대 위에 지어진 운한각은 화령정의 정전(正殿)으로 정조대왕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써, 운한(雲漢)은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를 올릴 때 불려졌다는 "시경" 의 시구(詩句)에서 따 왔다고 한다.

 

< "정조대왕" 의 영정 >

 

< 영정 옆에 전시하고 있는 "가마" >

 

운한각 건물은 "이안청" 이라는 건물과 화랑으로 연결되는데, 이안청은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운한각이 화재 또는 홍수 등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긴급하게 어진을 옮겨서 별도로 관리하는 집이라고 한다.

그 밖에 주변으로 "풍화당" 외 다수의 건물이 더 보이고 있지만 전체 관람을 더하기에 시간적 제약으로 화성행궁을 떠나는데, 이 화령전 내에는 초등학교 건물이 깊숙하게 침범하고 있어 화성행궁이 반쪽의 터가 되어짐이 아싶다.

 

< 운한각 오른편에 있는 "풍화당" 건물 >

 

고등학교 친구와 저녁식사 약속으로 화성행궁을 벗어나기 위하여 초등학교 뒤편의 화서문 방향으로 나아가니, 화령전 북편 담 모퉁이에 당대의 대표적 화가이면서도 소설가 "나혜석(羅蕙錫)" 씨가 살았다는 생가 터와 설명문이 세워져 있다.

 

< "나혜석" 씨의 생가 터를 알리는 입석 >

  

나혜석씨 설명문에 기술한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나혜석씨는 1896년 4월 28일 이곳 수원에서 탄생하여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명여고에서 1등으로 졸업한 수제로써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동경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고 한다.

1921년 우리나라 최초로 양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남편 김우영씨와 함께 세계 여행을 하면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미술계를 직접 체험하면서 배우고 돌아와 용주사 수원 포교당에서 개인전을 열므로 근대 미술사의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문필가로서 자서전 소설 "경희" 와 여성 계몽적 시(詩) "인형의 집" 을 발표하여 진보적 사회 사상가로써, 스스로 실천적인 여성 해방운동을 펼쳤던 선각자로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1919년 3. 1 독립운동 참가자로 5개월 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으며, 1923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의열단의 폭탄 반입 사건" 의 주동자들이 거사(擧事)를 성공하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가를 도우는데 헌신적으로 일한 여성이라고도 한다.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말년에는 불우한 인생을 살다가 1948년 12월 10일 52세로 서울 원효로에 있는 "시립자제원" 에서 무연고자로 사망하는 비운의 여성 "선구자" 라고 기술되어 있다.

 

< 나혜석씨의 일대기를 기술하고 있는 "설명문" >

 

오후 6시 경 수원역 인근지역에 있는 한 식당에서 친구들과의 만남을 가지기 위하여, 오늘 트레킹의 첫 출발점이 되는 장안공원으로 다시 나아가 해설사 친구와 작별하고 택시를 이용하여 수원역으로 떠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