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대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있는 경주최씨 집성촌이 되는 "옻골마을" 을 탐방하면서.

용암2000 2017. 10. 25. 12:33

2017년 10월 23일.(월요일) 

 

금일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집성촌이 되는 "옻골마을" 을 돌아보기 위하여 길을 나서 보기로 한다.

갑자기 옻골마을을 방문하는 이유는 일전 옻골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한 지인의 노후에 대한 삶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고향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래서 옻골마을을 한번 방문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결과이라 하겠다.

옻골마을은 대구공항 뒤편에 자리하므로 나의 집에서 목적지 까지 찾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녹녹하지 않은 길이 되는데, 네비게이션을 의존하면서 대구 도시지하철 1호선 방촌역 1번 출구 까지 찾아간다.

방촌역 1번 출구에서 부터 대구공항 뒤편으로 조금 들어가면,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면서 팔공산 산자락을 의존하고 있는 동네이라 하겠다.

주차장 가장자리에는 옻골마을의 자랑이 되는 돌담 길이 등록문화재 제266호로 관리하고 있다는 입석과 더불어 해설사가 머무는 탐방안내소가 자리하고 있다.

해설사에게 해설을 부탁하니 방금 동네를 다녀 왔다고 하면서 2시간 후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오후 1시 부터 해설이 가능하겠다고 하는데, 대신 팜플릿 한장을 주면서 혼자 탐방하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 주차장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옻골마을" 돌담길 홍보 입석 >

 

< 해설 대신 안내 팜플릿을 제공하여 주는 "탐방안내소" >

 

그래서 팜플릿을 대충 읽어보고 도로 따라 조금 들어가니 왼편으로 높은 둑을 형성하면서 그 둑에는 수령 약 350여 년 에서 부터 400여 년이 되는 버드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들 버드나무를 "비보숲" 이라고 하는데, 이곳 옻골마을의 터가 주변보다 다소 높아 금호강 지류가 휜히 내려보여 나쁜 기운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고자 심었다고 한다.

 

< "옻골마을" 로 들어가는 입구 >

< 수령 약 400여 년 정도 "비보숲" 의 버드나무 >

 

< "비보숲" 을 알리고 있는 입석 >

< 비보숲의 "용도" 설명서 >

 

이 경계숲을 지나면 왼편으로 옻골마을을 병풍과 같이 감쌓고 있는 팔공산 지맥이 되는 해발 464m "대암봉(臺巖峰)" 으로 올라가는 산행길이 보이고 있다.

마을의 뒤편으로 거대한 거북이 한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입향조가 되시는 대암 "최동집(崔東㠍)" 선생님이 이곳에 세거지(世居地)로 삼았다고 한다.

 

< 옻골마을 뒤편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산 >

 

등산로 입구에는 인공으로 만든 연못을 비롯하여 방문객의 쉼터를 가질 수 있는 정자 한채가 자리하고 있고, 이곳에서 부터 조금 더 내부로 들어가면 마을 앞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다리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옻골마을로 진입하게 한다.

 

< "대암봉" 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

 

< 등산로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 >

 

이곳 옻골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지형은 남쪽을 제외하고 3개의 방향에 산으로 둘러쌓여 오목하다고 하여 옻골이라고 불러졌다는 이야기와 주변의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골이라고 불러졌다는 두가지 유래가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옻칠(漆) 및 시내계(溪) 자를 써서 "칠계(漆溪)" 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전하여 내려오고 있는데, 후자의 옻나무에서 유래가 되어진 것으로 추측하게 만든다. 

 

< 3개의 방향에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옻골마을" 전경 >

옻골마을은 광해군 8년(1616년) 조선 중기의 학자 대암(臺巖) "최동집" 선생님이 이곳으로 들어와 살면서 경주최씨의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마을의 일부 주택은 현대식으로 개축을 하였지만, 그래도 대부분 고택과 옛길 및 전통 양식의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먼저 마을 입구에는 다소 넓은 공터와 함께 수령 약 350여 년이 되는 2그루의 회화나무가 자리하고 있는데, 회화나무 아래에는 방문객을 위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다.

 

< 2그루의 "회화나무" 아래에서 쉼을 가지고 있는 관광객 >

    

이곳 회화나무 뒤편으로 전통주와 더불어 고향의 맛을 낸다는 "돌담집" 이라는 식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매월 둘째 및 넷째 월요일에 휴무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으면서 금일이 넷째 월요일이라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 옻골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돌담집" 식당 >

< 둘째 및 넷째 "월요일" 에 휴무를 알리고 있는 안내문 >

 

오른편으로 개울과 함께 하는 마을 중앙길 따라 내부로 들어가면 왼편으로 다양한 한옥들이 자리하고 있고, 중앙길 오른편으로 정려각(旌閭閣) 한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정려각에는 영남의 대학자이면서 효(孝)를 덕목으로 정하고 부모의 병을 극진히 돌보는 등 효행으로 유명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선생님의 실천 철학을 기리기 위하여 1789년 조정의 령(令)에 따라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

 

< 중앙길 왼편으로 펼쳐지는 "한옥촌" >

< 중앙길 오른편 개울 옆에 자리하고 있는 "정려각" >

 

최흥원 선생님은 둔산동 옻골마을의 입향조가 되는 대암 최동집 선생님의 5대손으로 1705년에 태어나고, 82세 까지 사는 동안 학문을 정진하면서 130여 명의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향약을 실시하는 등 백성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데 평생을 받쳤다고 하는데, 잠겨 있는 문 사이로 내부를 살펴보니 비석(碑石)은 없고 빈 건물만 외롭게 자리하고 있다. 

정려각 뒤편으로 민박을 운영하고 있는 새로운 집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그 건물 뒤편에서 마을 중앙길에서 왼편으로 90도 꺽이는 소로(少路)의 길을 만난다.

이 소로의 길 모퉁이에서 왼편으로 종택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 따라 하나의 집을 건너가면, 또 다시 북쪽 방향으로 가는 소로의 중앙길을 만나면서 기나긴 돌담길로 이어진다.

 

< 중앙길 오른편 정려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민박집" >

 

이곳 옻골 돌담길은 흙다짐에서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土石) 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마을 안길의 대부분 돌담은 직선화(直線化)를 이루고 있다.

그로 인하여 질서 정렬함을 느끼게 하는 담장이 되는데, 20여 채의 전통 한옥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고풍적인 반촌(班村)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 기나긴 "토석" 담으로 이루어져 있는 옻골마을 >

< 직선화를 이루고 있는 "골목길" >

 

기나긴 토석담 따라 내부로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수구당(數咎堂) 건물을 만나는데, 수구당은 백불암 최흥원 선생님이 제자들과 강학(講學)을 하던 곳으로 후에 살림집으로 개조하면서 안채와 사랑채가 되는 2개의 동(棟)으로 단순화 되어진 건물이다.

 

< "수구당" 의 사랑채 >

 

< 사람이 기거하고 있는 "수구당" 의 안채 >

 

수구당을 지나면서 마을 제일 안쪽으로 경주최씨의 종택이 되는 백불고택의 대문 앞에 도착하는데, 백불고택은 입향조 최동집의 손자가 되는 최경향 선생님이 1694년에 지은 고택이다.

이 고택은 대구지역 가옥 중에서 가장 오랜된 건물이 되는데, 대구시 민속자료 제1호에서 2010년에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61호로 승격 지정이 되어진 건축물이라 하겠다.

 

< 마을 제일 뒤편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백불고택" 으로 들어가는 굽은 돌담길 >

< 백불고택으로 들어가는 "대문" >

 

"백불" 이라는 이름은 "백불지 백불능(百弗知 百弗能)" 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불(弗)에는 부(不)의 뜻이 있어서 "하나도 알지 못하고 하나도 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알고 모르고 하고 안 하고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뜻" 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백불고택의 구성으로는 "ㅁ자" 형태로 건축되어져 있는 안채 및 사랑채, 사랑채 오른편 방향으로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보본당, 2개의 동이 되는 사당,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포사, 각종 보존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숭모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려 있는 대문을 통과하면 다소 넓은 마당과 함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사랑채에는 "백불고택(百弗古宅)" 이라는 현판이 붙어다.

건물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인데, 왼편으로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부섭 건물을 덧 붙여서 한쪽 솟을지붕 형태로 건축되어진 희귀한 건축물이 된다.

 

< 대문을 통과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랑채" >

 

백불고택의 사랑채는 원래 최흥원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한 동산서원이 1868년 훼철 되므로 그곳에서 발생하는 자재를 이용하여 건립한 건축물이다.

금일 대청 마루에는 다수의 많은 중학교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백불고택의 종손으로 부터 예절 교육을 받고 있는데, 학생들은 교육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 학생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있는 "종손" >
 

사랑채 왼편 모퉁이로 돌아서 가면 일단의 돌계단 위에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대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 본다.

안채는 아담한 마당을 중심으로 정남향 "ㄷ자" 형태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안채는 종손이 기거하면서 생활 도구들이 가지련하게 정리 정돈이 잘 되어있다.

 

< 사랑채의 왼편 모퉁이에 있으면서 "안채" 로 들어가는 대문 >

 

< "ㄷ자" 형태의 안채 >

 

< 안채에서 바라보는 "사랑채" 후면 >

 

안채 대문을 나오면 고택의 제일 남쪽 구석에 "숭모각(崇慕閣)" 이라는 새로운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에는 종가댁에서 내려오는 각종 제기(祭器)를 비롯하여 반계수록의 초고(草稿), 퇴계 선생님의 성학십도 병풍, 고서, 호패 등 다양한 문화재를 진열하고 있지만 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안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숭모각" >

< 숭모각 마당에서 바라보는 "사랑채" 전경 >

 

< 뒤편 담장 밖에서 바라보는 "백불고택" 전경 >

 

다시 사랑채로 들어와 이제는 오른편으로 돌아서 가면 사랑채 바로 옆으로 문이 잠겨져 있는 한채의 사당 대묘(大廟) 건물이 자리하고, 그 옆으로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보본당(報本堂)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자리하고 있다.

쪽문 앞에 이곳에서 실학자 유형원의 저서 "반계수록(磻溪隧錄)" 을 교정하였다는 설명문이 붙어있는데, 그래서 이 건물은 역사적(歷史的) 의미가 매우 깊다고 보아야 하겠다.

 

< 사랑채와 보본당 사이에 있는 "대묘" >

 

이곳 보본당에서 반계수록을 교정한 이유는 1670년 반계수록을 완성한 "류형원(柳馨遠)" 선생님이 저술을 마친 후 불과 3년 뒤 세상을 떠난다.

그로 인하여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약 78년간 묻혀 있다가, 1748년 이곳 옻골의 최흥원 선생님이 류형원의 아들에게 책을 빌려 읽게 되었다.

책을 읽어본 최흥원 선생님은 뛰어난 개혁론에 찬탄하여 직접 붓을 들고 전문을 필사본으로 만드는데, 이 사실을 인지한 영조는 경상감사에게 반계수록을 책으로 출간하라는 명령으로 여러 선비들이 최흥원이 적임자라고 강력하게 추천을 한다.

그리하여 최흥원 선생님은 이곳 보본당에서 반계수록을 교정하기 시작하였다가 후에 대구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에서 설치한 교정소에서 저술을 마무리 하였다.

저술 후 100년이 지난 1770년에 반계수록을 대구감영에서 발간하여 세상에 널리 펴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최홍원 선생님으로 인하여 반계수록이 빛을 보게 되었다.      

   

< 보본당 입구 "반계수록" 의 교정 장소가 되었다는 설명문 >

 

작은 쪽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보본당 건물을 만나는데, 이 건물은 백불암 최흥원 선생님의 5대조가 되는 대암 최동집 선생님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영조 29년(1753년)에 건립하였다.

이곳 건물의 중앙 대청 마루에도 고택 체험을 하기 위한 어린이들이 색동옷을 입고 있는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 "보본당" 마루에서 예절 체험을 하고 있는 어린이 >

 

보본당 건물의 오른편에 있는 동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보면 또 다르게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마당 가장자리에 한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사당과 재실에서 제사를 올리기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한 '포사(哺舍)" 의 건물이라 한다.

 

< 보본당과 포사 사이에 있는 "동문" >

< 보본당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포사" 건물 >

 

이렇게 백불당 고택을 구경하고 나서 중앙길 따라 조금 내려오면 동계정(東溪亭) 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동계정은 백불암 최흥원의 아들이 되는 동계 "최주진(崔周鎭)" 선생님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진 건물이다.

이 고택도 백불고택 사랑채와 함께 1868년 훼철되어진 동산서원의 자재를 사용하여 1910년에 세웠는데, 건물의 용도는 주로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키는 장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 마을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동계정" >

 

동계정은 옻골마을에 있는 수구당, 보본당과 달리 대청 마루가 건물의 중심에 있지 않고,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건축물이다.

현재 이 건물에는 옻골마을에서 개발하고 있는 다양한 전통 문화의 체험실로 운영하고 있는데, 많은 관람객이 찾아오는 장소가 된다.

 

< 건물 왼편에 "대청 마루" 가 있는 동계정 >

 

오늘도 두개의 팀으로 학생들이 나누어 체험하고 있는데, 한팀은 뒤뜰의 나무 아래에는 사물놀이를 체험하는 한무리의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다.

 

< 건물 뒤뜰에서 "사물놀이" 를 체험하고 있는 학생 >

 

다른 한팀은 동계정 건물 내에서는 다도회를 비롯하여 예절 교육을 체험하고 있는데, 많은 학생들로 인하여 매우 분주한 장소가 된다.

 

< 동계정 건물 마당에서 "전통 예절" 을 체험하고 있는 학생 >

 

< "다도" 체험을 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대청 마루 >

< 동계정 오른편으로 흐르고 있는 "동계" 개울 >

 

이 밖에 옻골마을에는 다양한 한옥들이 중앙길 중심으로 양쪽에 자리하면서 한옥과 한옥을 연결하는 돌담길이 약 2.5Km 정도 형성하고 있는데, 돌담길 따라 무아지경으로 걸으면서 사색(思索) 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되는 마을이라 하겠다.     

 

<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폐가" >

 < 마을 앞 야산에 만들어져 있는 "연자방아" >

< 전통 한옥과 함께 하고 있는 "현대식" 건물 >

 

일부 한옥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숙박시설로 운영하지만, 대구시가지와 너무나 인접하게 자리하여서 그런지 아니면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적막감이 흐르는 담장길 따라 횡하니 돌아보고 다음 관광지로 떠나기로 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