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대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최정산 지맥에 자리하고 있는 '남지장사' 를 방문하면서.

용암2000 2021. 8. 30. 19:04

 

2021년 8월 27일.(금요일)

 

청도군 이서면에 있는 청도박물관을 떠난 우리부부는 대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달성군 가창면 최정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남지장사(南地藏寺)' 을 방문하여 보기로 하는데, 나는 옛날(2012년 5월 13일) 백봉회에서 최정산 산행을 하기 위하여 남지장사 앞에서 산행의 출발지점으로 선정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는 많은 동문들과 함께 산행을 하기 위하여 남지장사 앞으로 통과하였는데, 동문 모두가 사찰을 구경하지 않고 바로 산행을 추진하므로 나혼자 번개와 같이 경내를 잠깐 돌아보면서 몇 장의 사진을 찍어본 경험이 있는 사찰이다.

오늘은 시간적으로 많은 여유를 가지면서 경내의 앞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애마 모닝을 주차시키고 나서 천천히 경내로 올라가는데, 경내로 올라가는 입구에 높은 돌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다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경내의 마당에 도착한다.

 

< '남지장사' 앞에 있는 주차장 >

 

< '남지장사' 경내로 올라가는 돌계단 >

 

마당의 입구에는 출입문과 같이 생긴 3칸 구조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의 전면에는 '최정산남지장사사문(最頂山南地藏寺沙門)'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후면에는 '광명루(光明樓)' 이라는 현판에 붙어 있으면서 오른편 한칸에는 범종(梵鍾)이 설치되어 있다.

 

< 경내 입구 3칸 구조의 건물 '광명루' >

 

남지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가 되는 동화사(棟華寺)의 말사로써 신라 신문왕 4년(684년) 양개(良价)스님이 창건하였고, 고려 원종 4년(1263년)에 일연(一然)스님이 중창하였다.

신라 때에는 왕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고 지방 유지들이 많은 시주를 하므로 인하여 사세(寺勢)가 매우 컸었는데, 한 때는 8개의 암자를 비롯하여 수도하는 승려만도 3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 유정(惟政)스님이 남지장사를 승병의 훈련장으로 이용하였는데, 왜군들이 사찰을 점령하면서 그의 보복으로 불을 질려 사찰 모두 전소(全燒)를 시켰다.

그래서 효종 4년(1653년)에 인혜(印惠)스님이 다시 중건하였고 영조 43년(1767년)에 모계(慕溪) 및 풍흡(豊洽)스님이 중창하였는데, 팔공산 내의 북지장사와 서로 대칭되는 곳에 위치한 절이라 하여 남지장사이라고 명명 하였다.

남지장사 건축물(建築物) 배치는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중앙에 5층석탑 한기가 서 있고, 그 뒤편 일단의 축대 위로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大雄殿) 및 극락보존(極樂寶殿) 건물이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다.

 

< 5층석탑 뒤편에 있는 '대웅전 및 극락보전' >

 

대웅전 건물 앞에 경내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에 대하여 설명하는 안내문 2개가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대구 유형문화재 제88호 '석조지장보살좌상' 이고 다른 하나는 대구 유형문화재 제89호 '석조석가여래삼존좌상'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 >

 

< 대구 유형문화재 제88호 '석조지장보살좌상'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안내문을 정독(精讀)한 후 일단의 축대 위로 올라가 대웅전 건물 내부를 돌아보는데, 내부에는 안내문에서 설명한 석조(石造)로 만든 부처님은 없고 청동(靑銅)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고 있어 매우 의아심을 가지게 만든다.

 

< 대웅전 내에 모시고 있는 '삼존불' > 

 

혹시나 하여 옆에 있는 극락보전 내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을 관찰하여 보니 이곳에도 청동으로 제작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엿장수가 본인 마음대로 엿을 주듯이 이곳 남지장사도 주지스님 마음대로 부처님을 모시고 있나 보다.

 

< 대웅전 건물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극락보전' >

 

< 극락보전 내에 모시고 있는 '아미타불' >

 

문제는 북지장사에는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과 별도로 지장전(地藏殿) 건물을 옆에 두면서 중생들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이곳 남지장사에는 지장사(地藏寺)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지장전 또는 지장전을 대신하는 명부전도 보이지 않고 있다.

많은 의문을 간직하면서 스님을 만나면 문의(問議) 하겠다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사찰의 다른 전각들을 구경하여 보는데, 현재 당우로는 삼성각, 요사채, 솔향원, 종무소 건물과 더불어 사찰의 뒤편으로 수목장(樹木葬) 묘지가 조성이 되어져 있다.

 

<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삼성각' >

 

< 마당의 가장자리 왼편에 있는 '요사채' 건물 >

< 마당의 앞 가장자리 왼편에 있는 '종무소' >

 

< 마당의 앞 가장자리 오른편에 있는 '솔향원' >

 

< 마당의 중앙에 있는 고목의 '벚나무' >

 

이곳 남지장사 수목장에서 평균 수령 100여 년이 넘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곳 수목장은 대구광역시에서 최초로 수목장 허가를 획득하여 많은 망자(亡者)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 사찰의 뒤편에 자라고 있는 '수목장' 용 소나무>

 

< 수목장을 향하여 예를 올리는 '분향소' >

 

이곳의 문제는 수목장을 운영하는 업자(業者) 및 주지스님이 결탁(?)하여 현금에 대하여 많은 횡령사건이 발생시켰는데, 그로 인하여 조계종 종단 및 본사가 되는 동화사에서 감사를 착수했다는 뉴스를 접한 기억이 살아나게 만든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은 사찰이라고 생각하면서 스님을 못 만나고 경내를 벗어나기로 하는데, 남지장사는 사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청련암(靑蓮庵) 및 서쪽으로 백련암(白蓮庵)이라는 2개의 암자를 거닐고 있어 떠나는 길에 있는 백련암을 돌아보기로 한다.

암자 입구에는 일반적으로 백련암으로 쓰는 것이 옳은 것 같은데, 이곳 암자에는 두음법칙(頭音法則)을 적용하여 백연암이라는 표시석(標示石)이 자리하고 있어 여기에도 스님 마음대로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숲속 길 따라 한 100m 정도 올라가면 암자를 만난다.

 

< '벽연암' 이라 쓰여 있는 표시석 >

 

< '최정산백련암사적지' 를 알리는 입석 >

 

이곳 백련암에는 다소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3층석탑 한기가 서 있으면서 마당의 가장자리 따라 주불을 모시고 있는 관음전(觀音殿) 건물과 함께 보살님이 거주하는 요사채 건물로 구성하고 있다.

 

< 3층석탑과 함께 하고 있는 '백련암' 전경 >

 

< 주불을 모시고 있는 '관음전' >

 

마침 보살 한분이 신도와 함께 나오므로 목례로써 인사를 나누고 나서 방금 남지장사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대화하여 보는데, 대웅전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이 청동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니까 그래도 국가 전문가들이 검증 및 지정한 문화재인데 그럴 수 없다고 하니 정말 미치고 환장하게 만든다.

현대의 시절에는 도금(鍍金) 기술이 너무나 발달하여 석조 부처님 위에 개금(改金)을 하므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오늘 나는 이곳 남지장사를 방문한 결과에 따라 석조와 청동도 구분 못하는 인간 쪼다 병신(病身)이 되는 것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것 같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