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경남)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평사리에 있는 '박경리문학관' 및 '최참판댁' 을 돌아보면서.(4)

용암2000 2021. 11. 6. 00:06

 

2021년 10월 29-30일.(1박2일)

 

2, 둘째날 : 10월 30일(토요일)

 

2) 박경리문학관의 관람.

형제봉에서 바로 내려오면 박경리문학관 및 최참판댁으로 들어가는 마을 안길에 도착하는데, 안길에서 오른편에 있는 '박경리문학관(朴景利文學館)' 을 먼저 관람하기 위하여 넓은 마당으로 들어가 본다.

 

< '박경리문학관' 을 가르키는 이정표 >

 

잔디로 잘 가꾸어진 마당으로 들어가면 넓은 석판(石板)의 표면에 문학의 한 소절을 새긴 긴 돌과 함께 마당 오른편 한쪽 가장자리에 박경리 여사가 책을 들고 있는 동상을 먼저 만나는데, 다수의 방문객들이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박경리문학관' 으로 들어가는 길 >

 

< '문학의 한 소절' 을 새긴 긴 석판 >

 

< 책을 들고 있는 '박경리' 여사의 동상 >

 

< 문학관 마당에서 내려보는 '평사리 들판' >

 

그러고 나서 'ㄱ자' 형태로 건축한 박경리문학관 건물로 들어서면 입구에 문학관을 건립한 배경을 기술하고 있는데, 박경리문학관은 소설 '토지' 의 배경이 되는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작가 박경리의 삶과 문학을 되새기고 기억하고자 2016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 박경리문학관' 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

 

대하소설 '토지(土地)' 는 1969년에 집필(執筆)을 시작하여 1994년에 탈고(脫稿)한 소설로써 만 25년의 창작 기간을 거쳐 완성된 책으로 원고지 약 3만 1천 200여 장에 전체가 5부 25편 362장의 규모로 약 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한다.

박경리문학관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解放)과 전쟁(戰爭)을 관통한 작가 박경리 여사의 삶과 4반 세기에 걸쳐 이루어 낸 생명의 창조물(創造物) 토지를 담아낸 공간(空間)이라 하겠다.

문학관 내부로 들어가면 전시실이 3개의 섹션(Section)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출입문을 중심으로 전시실 중앙으로 매우 긴 진열장이 놓여 있으면서 진열장에는 박경리 여사가 저술하여 출판한 다양한 책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 전시실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긴 '진열장' >

 

전시실 오른편 섹션의 벽면에는 토지에 관련되는 내용에서 부터 등장 인물을 도표식(圖表式)으로 만들어져 있고, 측면의 벽면에는 김봉준 선생님의 '토지 흙으로 춤추다' 와 더불어 뒤편의 벽면에는 김억 선생님의 작품 '하동 평사리 전경' 및 토지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초상화가 붙어있다.

 

< 벽면에 부착하고 있는 토지의 '작가 세계' >

                                                                                           

< 김봉준 선생님의 작품 '토지 흙으로 춤추다' 조각품 >

 

< 김억 선생님의 작품 '하동 평사리 전경' 그림 >

 

< 토지에 나오는 주인공의 '초상화' >

 

전시실 왼편 섹션의 벽면에는 '토지의 서문(序文)' 을 비롯하여 원고를 직접 써 보는 체험장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다수의 관람객들이 직접 소설의 한 페이지(Page)를 작성하고 있다.

 

< 전시실 왼편 섹션 까지 이어지고 있는 '진열장' >

 

< 체험장에서 '원고' 를 쓰고 있는 관람객 >

 

'ㄱ자' 형태의 건물 왼편 구석 섹션에는 박경리 여사의 일대기를 기술하고 있는데, 박경리 여사는 1926년 12월 2일 경남 통영시에서 출생하여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으나 6·25 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후 딸과 함께 생활하였다.

 

< '박경리' 여사의 일대기 >

 

1970년 대 후반에 강원도 원주시로 거처를 옮기고 창작 활동에 전념하여 1994년 8월 대표작 대하소설 '토지' 를 완결 하였는데, 토지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은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인물들이다.

유방암 선고와 사위 김지하의 투옥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지를 집필하여 그녀는 윤씨부인 - 별당아씨 - 서희 및 그 자식들의 세대에 이르기 까지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恨)을 새롭게 부각시켰고, 이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 박경리 여사가 사용한 '국어사전' >

 

< 박경리 여사가 사용한 '유품' >

 

박경리 여사는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하였으며 1999년 강원도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세웠고 2008년 5월 5일 83세 때 폐암으로 사망하였는데, 박경리 여사의 무덤은 그녀의 출생지가 되는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 박경리 여사의 일대기를 방영하고 있는 '영상물' >

 

문학관 내부를 구경하고 있는 사이 승용차를 몰고 형제봉에서 내려온 동문들이 최참판댁 앞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였다고 연락이 오는데, 문학관으로 올라오라고 하니 입장료 까지 지불하면서 관람하지 않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3) 최참판댁의 관람.

마을 안길의 반대편이 되는 왼편으로 넘어가면 매우 넓은 마당의 한쪽 면으로 이곳 평사리에서 촬영한 영화의 포스터(Poster)를 전시하고 있는데, 촬영한 편수(編修)가 너무나 많아서 몇 개의 포스터를 보고 건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 마당 가장자리 따라 전시하고 있는 '영화' 포스터 >

 

<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는 '최참판댁' >

 

나는 이곳 최참판댁은 옛날에 한번 방문한 경험이 있는 곳이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문을 위하여 간단하게 사진만 찍고 바로 떠나기로 하는데, 최참판댁으로 들어가는 문이 2곳으로 나누어진다.

 

< 건물의 좌측에 있는 문간채로 들어가는 '문' >

 

< 사랑채 건물에 있는 '솟을대문' >

 

최참판댁의 구조는 담장으로 3개의 영역으로 구획하고 있는데, 중앙 영역에는 안방마님 윤씨 부인이 기거하는 '안채' 가 자리하고 있고 왼편에는 별당아씨가 거주하는 '별당채' 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바깥주인 최지수씨가 거주하는 '사랑채(앞채와 뒷채)' 가 자리하고 있다.

 

< 건물의 제일 중앙에 있는 '안채' >

 

< 안채의 왼편에 있는 '별당채' >

 

< 안채의 오른편에 있는 '사랑채(앞채)' >

 

< 안채의 오른편에 있는 '사랑채(뒷채)' >

 

안채의 건물 앞으로 다소 넓은 마당과 함께 마당의 앞에 또 다른 역(易)의 'ㄴ자' 형태의 '중문채' 가 자리하고 있는데, 안채와 중문채가 미로와 같이 바람도 한점 들어갈 수 없는 튼 'ㅁ자' 형태로 건축되어 있다.

 

< 안채의 앞에 있는 '중문채' >

 

이 중문채 앞으로 나아가면 기나긴 '행랑채' 가 자리하고 있고 중문채의 왼편으로 '문간채' 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2개의 건물 행랑채와 문간채에는 중문채로 들어오는 2개의 대문을 만난다.

일반적으로 최참판댁의 관람 동선(動線)은 문간채의 문으로 들어가 내부에 있는 중문채, 안채, 별당채, 두채의 사랑채를 구경하고 나서 중문채의 문과 사랑채에 있는 솟을대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오는 관람의 동선을 많이 이용한다.

이 밖에도 안채의 뒤편에 있는 사당(祠堂), 초당(草堂), 문화 및 생명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는 관람객들은 구경하지만 나는 관람을 생략하고 동문들과의 약속을 위하여 긴급하게 최참판댁을 떠나기로 한다.

최참판댁의 앞에는 관광용으로 만든 다양한 '초가집' 이 자리하고 있고, 다른 한편의 초가집에는 전통 공예품을 판매 및 전시하는 상가와 더불어 체험실로 꾸며져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움직이고 있다.

 

< 최참판댁 앞에 있는 관광용 '초가집' >

 

< 각종 '공예품' 을 판매하는 상가 >

 

초가집을 통과하고 나면 이내 마을 안길의 좌우로 다양한 상가 및 음식점이 도열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머물고 있는데, 특히 이곳 악양면에는 '대봉' 감나무를 많이 키우므로 감을 많이 진열하고 있다.

 

< 마을 곳곳에서 만나는 '대봉' 감나무 >

 

< 마을의 안길 따라 도열하고 있는 '상가 및 식당' >

 

이곳 상가지역을 통과하면 승용차들이 주차할 수 있는 제1 및 제2 주차장이 연속적으로 마련되어 있지만, 다소 작은 주차장에는 너무나 많은 차량들이 주차하고 있어 우리 일행 차량을 한참 동안 찾게 만든다.

 

< 마을의 입구 '주차장' 을 가르키는 지시판 >

 

오늘 우리 일행은 정상적으로 점심식사를 하지 못하고 작은 간식으로 대신한 결과에 따라 다소 배가 고파서 그런지 대봉 감을 구입하여 먹고 있는데, 나도 한개를 얻어서 먹어보니 너무나 맛이 있는 감이라 하겠다.

감으로 다소 허기진 배를 채우므로 여기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것 보다 하동군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해대교 아래에 있는 횟집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도 겸하면서 푸짐한 식사를 하자는 의견으로 남해대교 방향으로 달려간다. - 둘째날 2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