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문회와 산행.

경상남도 거제시의 부속 섬 칠천도 내에 자리하고 있는 '칠천량 해전공원' 의 관람.(3)

용암2000 2021. 12. 9. 00:31

 

2021년 12월 1-2일.(1박2일)

 
4. 칠천량 해전공원을 돌아보면서.
칠천량 해전공원 입구에 있는 대형 버스주차장으로 들어가 승용차를 운전하여 동산 위에 자리하고 있는 해전공원으로 올라가 보기로 하는데, 먼저 해전공원 입구 바다가에 거대한 한척의 배가 부두로 올라와 있어 해안가로 들어가 배를 구경하여 본다.
 
 
 
< 거제도 '칠천량' 주변의 조감도 >
 
 
배의 입구에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는데,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배의 명칭은 '선진호(先進號)' 로 배의 크기는 길이 34.5m에 폭이 15m이며 높이가 7.1m의 배로써 325 Ton(톤)의 무게를 가진다고 한다.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울산 현대중공업(주)에서 국내 최초이면서 세계 5번째로 개발된 반잠수(半潛水) 쌍동선형 해양시험선으로 일반 선박보다는 월등한 안전성과 내항 성능을 갖춘 특수형 선박이라 한다.
배에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개발한 해양무기체계(어뢰, 어뢰음향대항체계, 예인음탐기, 항만감시체계 등)의 성능시험, 함정음향측정 시험, 수중환경연구 등의 업무를 추진하기 위하여 지구를 6바퀴(240,000Km)이나 항해를 하였다고 한다.
국방과학연구소와 거제시(巨濟市) 간 우호협력의 상징이 되는 선진호를 세계적 선박 건조기술 및 해군의 무기체계 발전, 그러고 해양강국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하여 이곳에 연구적으로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 칠천량 해전공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선진호' >
 
 
< 배의 주변에서 바라보는 '옥계마을 및 옥녀봉' >
 
 
바다를 벗어나 해전동산 위로 올라가면 상부 승용차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어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시키고 나서 동산의 주변으로 만들어져 있는 공원을 돌아보는데, 공원의 정점에는 칠천량 해전공원 전시관 건물과 더불어 다양한 조형물 및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 '칠천량 해전공원' 조감도 >
 
 
< 공원의 정점에 자리하고 있는 '칠천량 해전공원 전시관' >
 
 
먼저 전시관 건물로 들어가 보는데, 이곳 전시관에서는 한 때 입장료를 징수하였지만 현재는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에 따라 입실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의 점검을 위한 신분 확인용 전화를 걸어준다.
그러고 나서 전시실으로 들어가면 전시실 입구에는 이곳 칠전량 해전에서 순국한 약 1만여 명의 원혼(寃魂)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바다' 가 설치되어 있는데, 간단하게 목례(目禮)로 예(禮)를 올리고 관람의 순서 방향 따라 전시실로 입실하여 본다.
 
 

< 전시실 내부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추모의 바다' >

 

이곳 전시실에는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칠천도 주변에 있는 칠천량 해전(漆川梁 海戰)에 관련되는 해전사를 기술하고 있는 전시실로 모두 8개의 섹션(Section)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 기술하고 있는 칠전량 해전을 간단하게 살펴 보는데, 이곳 칠전량 해전은 선조 30년(1597년) 7월 16일 '원균(元均)' 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으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明)나라와의 회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을 하였는데,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에서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민다.
당시 조정에서는 충신들이 당쟁(黨爭)에 휘말려 이순신 장군을 하옥시키고 원균을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로 임명한 상태인데,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 '요시라(要時羅)' 를 시켜 유혹한다.

이에 도원수 '권율(權慄)' 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 과 상의하여 원균에게 출전(出戰) 명령을 내렸는데,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하여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등을 잃고 되돌아 온다.

그리고 한산도의 본영(本營)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 이 웅천(熊川)을 급습하도록 하였는데, 배설이 전선(戰船)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笞刑)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고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할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閑山島)를 출발하였는데,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도착하였지만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加德島)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고, 원균이 칠천량(漆川梁 : 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상태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적은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일본 해군 '도도(藤堂高虎)' 와 '와키사카(脇坂安治)' 및 '가토(加藤嘉明)'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그리고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敵)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고, 이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수군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軾)' 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지만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고,. 경상우수사 배설 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졌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후 '우키타(宇喜多秀家)' 와 '고니시(小西行長)' 및 '모리(毛利秀元)'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 패전(敗戰)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水軍)을 수습하게 하였다.

 

< '칠천량 해전'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전시실에는 제1섹션 : 임진왜란 속으로(역사의 메아리), 제2섹션 : 조선수군을 만나다(기억의 메아리), 제3섹션 : 칠천량 해전의 배경(회한의 메아리), 제4섹션 : 칠천량에서의 패배(아픔의 메아리), 제5섹션 : 칠천량 해전의 결과(부할의 메아리)로 꾸며져 있다.

 

< '전시실' 내부의 전경 >

 

<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조직표 >

 

< 조선 수군을 식별하게 하는 '호패' >

 

< '판옥선' 의 내부 구조 >

 

< '판옥선' 의 구조 및 설명문 >

 

< '칠천량 해전의 배경'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일본군의 복수' 를 준비하는 내용 >

 

< '선조의 오판' 을 나타내고 있는 모형 >

 

< '불길한 전조' 를 나타내고 있는 전투 >

 

< 패장이 되는 '원균' 의 전략 >

 

< 치열하게 '해전' 을 하는 장면 >

 

< '유린당한 백성' 의 최후 >

 

더불어 전시관 왼편으로 제6섹션 : 아이라이너 영상관(칠천의 메아리)을 운영하고 있고 전시관으로 들어올 때 예를 올렸던 제7섹션 : 추모의 바다(치유의 메아리)가 만들어져 있고, 밖으로 나오면 마당의 중앙에 제8섹션 : 평화의 바다(희망의 메아리)로 구분하고 있다.

 

< 영상관에서 체험용으로 비치하고 있는 '옷' >

 

< 야외에 전시하고 있는 '평화의 바다' 조형물 >

 

각 섹션 따라 실내 전시실을 먼저 관람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여 보는데, 한 때 그렇게도 치열하게 해전(海戰)이 일어난 칠천량 바다가 고요 속으로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면서 평화롭게 머물고 있다.

 

< '칠천량 해전' 이 일어난 바다 전경 >

 

5. 외포항에서 저녁식사를 즐기면서.

칠천량 해전공원을 관람하고 있는 사이 종주 산행을 추진한 일행들이 섬의 반대편에 있는 도로변에 도착하였다는 연락으로 승용차를 운전하여 일행을 싣고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의 인접지역에 있는 외포항(外浦港)으로 달려간다.

 

< '외포항' 부두가에 있는 식당가 >

 

이렇게 외포항으로 달려가는 이유는 이곳 외포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대구(大口)' 이라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어장으로 유명한 항구가 되는데, 오늘 저넉식사로 시원한 대구탕을 먹기 위함이다.

 

< 부두가에서 건조를 시키고 있는 '대구' >

 

나는 부산에서 살고 있는 큰 아들 부부와 함께 몇년 전 이곳 외포항을 한번 방문한 곳이라 다소 눈에 익숙한 항구가 되는데, 부두가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대구탕을 주문하여 본다.

문제는 식당 주인장은 아직 대구가 많이 잡히지 않아서 대구의 가격이 매우 높게 거래가 된다고 하면서, 가격표(價格表)에 제시하고 있는 대구탕 가격 일만오천원 보다 더 비싼 이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만약 대구의 물고기 가격이 비싸 대구탕 가격을 더 받겠다고 하면 종이 등 다른 방법으로 임시 가격표를 부착하여 손님들에게 대구탕 선택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상도덕(商道德)이라고 생각이 든다.

다소 불쾌하지만 대구탕을 먹기 위하여 이곳 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없어 '울며겨자 먹은 심정' 으로 대구탕을 주문하여 보는데, 그 대신 주인장은 대구탕을 많이 주겠다고 위안의 말을 전한다.

 

< 풍족한 량으로 대신하여 주는 '대구탕' >

 

< 식사 후 '외포항' 을 떠나면서 >

 

주인장 이야기와 같이 다소 많은 량의 대구탕을 먹고 외포항과 인접하게 있는 한화리조트 거제 벨버디어로 돌아가는데, 금일 하루 동안 다소 무리한 여정을 소화하므로 피곤의 엄습으로 이내 꿈나라로 달려간다. - 3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