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시 문화와 산행.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과 함께 하고 있는 '금성대군신단' 을 구경하면서.(5)

용암2000 2022. 1. 5. 11:31

 

2021년 12월 27-28일.(1박2일)

 

2. 둘째날 :12월 28일.(화요일)

 

3) 금성대군신단을 관람하면서.

선비촌 주차장에 주차한 승용차를 운전하여 소수서원 바로 뒤편에 있는 영주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 을 방문하여 보기로 하는데, 선비촌 주차장에서 한 1분 정도 운전하면 금성대군신단 앞에 있는 작은 주차장에 도착이 된다.

 

< '금성대군신단' 에서 선비촌 까지의 거리 >

 

이곳 신단 주차장 주변으로 매우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으면서 공원의 중앙에는 8각형으로 만들어져 있는 초가(草家) 모습의 정자 한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 까지 많은 정자를 대면하여 보았지만 지붕을 초가로 올려져 있는 정자는 처음인 것 같다.

 

< 공원 내에 있는 초가지붕으로 만들어진 '정자' >

 

공원을 지나면 이내 신단의 입구에 있는 정문에 도착하면서 금성대군신단의 관련되는 현황판이 붙어있는데, 신단은 사적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세조 때 단종임금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 '금성대군신단' 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정문 >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이름은 이유(李瑜)이며 세종임금의 여섯째 아들이고 단종의 숙부이면서 수양대군(후 : 세조임금)의 넷째 동생이 되는데,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거사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義士)들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조선 세조 원년(1455년) 단종임금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일파는 금성대군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먼저 삭령(朔寧)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를 시켰다.

이듬 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단종(端宗)복위 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을 당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으로 유배가 되면서 위리안치(圍籬安置)가 된다.

금성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와 의기(意氣)가 통하여 단종복위를 위한 격문(檄文)을 짓게 하여 은밀히 순흥고을로 모여들게 하였고,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면서 군사를 조련하여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임금 복위를 꾀하였다.

하지만 거사가 무르익어가던 세조 3년(1457년)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官奴)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 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 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廢府)가 된다.

그로 부터 200여 년이 지난 숙종 9년(1683년)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하면서 다시 순흥도호부가 되었고, 이어 숙종 45년(1719년) 고을사람 이기륭(李基隆)이 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알려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영주에서 내려오는 야사(野史)에 따르면 금성대군이 거처하는 이웃에 아름다운 처녀 한명이 살았는데, 그 처녀는 한양에서 유배가 되어 내려온 늠늠한 왕족의 총각을 연모(戀慕)하게 되어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금성대군은 눈길도 한번 주지 않으면서 거사(擧事)에 매진하는데, 애가 타는 처녀는 거사에 참석하는 사람들 이름 전부를 기재하여 관노에게 전달하므로 거사가 실패하면서 순홍도호부가 쑥밭이 되었다.

전일 부석사를 관람하면서 보았던 부석바위에 대한 전설을 만든 '선묘(善妙)' 라는 낭자와 이곳 순흥에 살고 있는 처녀와는 너무나 차별화가 발생하는데, 비록 야사로 내려오는 이야기라 하겠지만 정말 여자의 치마바람 하나가 고을의 흥망으로 나누어지는 땅이라 하겠다.

금성대군신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2년) 경상감사 심성희(沈聖熙)의 소청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단소를 정비하고 중앙에 금성대군 위(位)와 오른쪽 편에 부사 이보흠 위(位) 및 왼편에 무명 의사들의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 '금성대군신단'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신단의 입구에 있는 정문을 통과하면 작은 마당의 좌우로 제사를 모시는 제청(祭廳)과 제사를 준비하는 주사(廚舍)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양쪽의 건물을 통과하면 제단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내삼문에는 금성단(錦城壇)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정문 안쪽 오른편에 있는 '제청' 건물 >                                                                                        

 

< 제단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내삼문' >

 

< 내삼문 앞 오른편을 지키는 '소나무' >

 

< 내삼문 앞 왼편을 지키는 '소나무' >

 

내삼문을 통과하면 정사각으로 구획하고 있는 담장 내부에 제단이 만들어져 있으면서 제단 위에는 한자의 '품(品)' 자와 같이 3개의 좌판(坐板)이 놓여 있는데, 중앙에는 금성대군을 위한 좌판이고 오른편에는 순흥부사 이보흠의 좌판이며 왼편에는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직한 의사들의 좌판이 된다.

 

< 한자 '품(品)' 자 모양으로 놓여있는 좌판 >

 

< 중앙 '금성대군' 을 모시는 좌판 >

 

< 왼편 '순국의사' 들을 모시는 좌판 >

 

금성대군 좌판의 오른편에 순의비 한기가 서 있는데, 이곳 비문(碑文)에는 '유명조선 단종조충신(有明朝鮮 端宗朝忠臣)' 및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人神壇之碑)' 이라는 2줄의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 '금성대군' 을 기리는 순의비 >

 

제단 앞에서 간단하게 목례(目禮)로써 예(禮)를 올리고 나서 금성대군신단을 떠나기로 하는데, 순흥면을 떠나기 전 영주 소백산 주변으로 유명한 고냉지 사과를 좀 구입하여 간식으로 먹으면서 다음 관광지를 탐방하기로 한다. - 둘째날 3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