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 문화와 산행.

따뜻한 남쪽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으면서 제2의 청와대 모습을 하고 있는 "신성일" 의 한옥 집 방문.

용암2000 2009. 10. 4. 18:58

2009년 10월 4일 오늘,

 

약간의 단비가 오락가락 하는 짓궂은 날씨에 한 때 유명한 배우이자 국회의원으로 명성을 날렸다가 지금은 경북 영천시 괴연동 "채약산" 산기슭로 귀촌하여 여유로운 삶으로 살고 있다는 "신성일" 씨의 전원 같은 집을 방문하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애마가 되는 나의 모닝은 경부고속도로 영천 Toll gate를 나오자 마자 우측 입구에서 바로 180도 꺽어 고속도로 다리 밑을 지남과 동시, 남쪽 방향의 지방 공단을 통과하면서 한 10여 분 정도 달리면 조그마한 저수지를 만난다.

이곳 저수지로 부터 도로는 매우 좁은 1차선으로 되어있어 차량 교행에 신경쓰면서 한 5분 정도 올라가면 고즈넉한 마을 하나가 나타나는데, 이 마을의 중간지점 담벼락에 "사생활 보호를 위하여 출입을 금지 함" 이라는 조그만한 안내문이 붙어있다.

승용차를 동네 어귀에 두고 마을 안길을 걸어 90도 정도 꺽어 돌아가면 동네 끝부분 부터 포도밭이 나오면서 한 500m 전방에 파란색 청기와 지붕 한옥 한 채가 그림과 같이 앉아있는데, 이 집이 바로 신성일씨의 한옥이다.

 

< 채약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신성일" 씨 집 >

 

약 300m 정도 비포장 도로 따라 걸어 올라가면 먼저 우편물을 수령하는 부엉이 우체통을 만나고, 그 옆에 또 다시 최종적으로 "출입을 금지하여 달라는 내용의 안내문" 에 사람의 발길을 주춤하게 한다.

 

< 집 입구에 있는 "부엉이 우체통" >

 

신성일씨가 처음 혼자 귀촌 했을 때 아마 마음도 적적(?) 하였고, 또한 지역 발전을 위하여 집을 개방하여 하루 평균 100-200명이 방문하여도(지금까지 누적 방문객이 2만명이 넘었다고 함) 가능한 손수 커피와 음식(된장 찌게를 끓이는 솜씨가 수준급이라고 함)을 대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방문객들이 무분별하게 마루에 올라가 방문도 열어 보고, 변소도 사용하고 아무 곳이나 쓰레기를 버리면서 집의 안 밖을 배회하는 등 곤욕이 일어나다 보니, 감당이 불가능이라 금년 초 부터 출입을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라 방문을 통제하는 안내문을 내어 걸었다고 한다.

 

< "성일가(星一家)" 를 알리는 입석 >

 

그래서 출입을 자제하면서 먼 발치에 서서 그의 집을 구경하여 보니 구석구석 상세하게 볼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요약하여 보면, 집터는 집으로 들어가는 출구 방향을 제외하고 채약산 능선이 병풍과 같이 둘려쌓여 있는 야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집 앞으로 펼쳐지고 있는 야산과는 다소 거리가 떨어지면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아침에 창문만 열면 천연의 숲을 정원으로 삼아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 전개되어 최상의 수채화 그림이 펼쳐진다. 

 

< 남쪽 제2의 청와대로 칭하고 싶은 "신성일" 씨 가옥 >

 

옛날 이 집터가 있는 자리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덮혀 있으며 그 대나무 숲 주변에 민가 5가구가 자리하고 있었던 작은 동네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여기에 거주하는 주민들 하나 하나 떠나갔다.

그 후 모든 것이 자연(自然)으로 돌아가면서 단지 지적도(地籍圖) 상 대지(垈地)로 되어 있는 것을 어느 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신성일씨가 이곳을 지나 가다가 마음에 들어 주변 땅 전부를 구입하였고, 또한 집을 건축하기 시작 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동네를 위하여 많은 자선사업과 더불어 기부 행위를 하므로써 함께 거주하는 동민들은 신성일씨의 귀촌(歸村)과 선행에 대하여 많이 칭송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집의 구조는 기엌자(ㄱ)로 건축되어진 한옥이라서 좀 먼 곳에서 바라보면 그 자태의 풍광이 환상적으로 보인다.

 

< 전망대 모양의 "ㄱ자" 형태의 집 >

 

기둥은 평균 500-1,000 만원하는 울진 금강송 30여 개로 골격을 세우고 벽은 황토로 집을 지어 친환경적인 건물로 건축 하였으며, 집안 구조는 조그만한 방 2개와 부엌 및 화장실, 대청 마루로 이루어진 아주 단순한 형태의 전통적인 한옥 집이라고 한다.

 

< "배흘림" 으로 만들어져 있는 기둥 >

 

건물 앞으로 넓은 정원을 거닐고 있으면서 정원 끝부분 가장자리에 아담한 정자 1개가 서 있고 정자 주위에 조그마한 연못 속에 비단 잉어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데. 정자 주위 작은 계곡에서 흐르는 시내물이 정자를 휘감아 돌아가고 있다.

 

< 마당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원두막 형태의 "정자" >

 

<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연못" >

 

마당의 좌측으로 넓은 승마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승마장 앞에 승마를 감상하기 위하여 또 다른 작은 구조의 2층 정자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 승마장 앞에 있는 "2층 정자" >

 

< 말이 보이지 않은 모습의 "승마장" >

 

집에는 관리인 1명이 상주하면서 3마리의 말과 5마리의 풍산 개를 사육하고 있는데, 1주일에 한번 씩 대구에 살고 있는 그의 형수 이OO씨(경북여고 출신으로 73세 동갑이라 함)가 평소 송이 버섯을 좋아하는 시동생을 위하여 송이로 만든 기본 반찬을 만들어 놓고, 집안 정리 및 청소를 겸하여 돌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최고의 조경시설을 간직한 "신성일" 집을 다시 보면서 >

   

현재 신성일씨는 학교 강의와 더불어 대구 경북지역의 문화예술(文化藝術)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개별적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100주년 기념으로 "동방의 빛" 이라는 기획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분주한 사회 생활을 하고 있어 이곳에 기거하는 시간이 다소 적지만, 집으로 오는 날에는 평소 취미 생활로 즐기는 승마에 많은 시간을 할애 한다고 한다.

 

나의 대학교 선배 한 분이 2-3년 전 잘 운영하고 있었던 회사를 정리하고 시골로 들어가 조그마한 언덕 위에 300여 평의 밭을 일구면서 농부의 길로 들어가고 있는데, 밭의 한 구석 가장자리에 황토집을 지어 생활의 터전을 삼고 농촌으로 완전히 이주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텃밭을 가꾸면서 꽃와 채소 및 과일 등 약 100여 종류의 식물과 나무를 키우면서 사시사철 성장하는 과정을 보고, 또한 수확하는 재미에 푹 빠져 세월의 흐름이 완전히 멈추었다고 한다.

오늘 이곳 신성일씨 집을 직접 방문하여 보니 정말 용기가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며 앞으로 이곳 한옥이 영천의 명물과 더불어 명성이 있는 관광지가 되고, 또한 어느 시점에 한국 문화유산(文化遺産)으로 등록 되어질 것이 자명하게 만들고 있다.

두분의 모습을 보고 있으며 어찌 그렇게도 부귀영화를 한 순간에 벗어 던지고 가감하게 농촌으로 낙향이 가능하면서 생활을 영위하는지 궁궁하여 지는데, 반대로 나는 쥐뿔도 없는 실업자 주제에 그들의 삶에 부려움만 가지고 하염없이 내리는 단비를 맞으면서 발길을 돌리는데 핑게지만 돈이 왠수다. 

 

추신 : 2012년 11월 21일 재차 방문하여 사진도 추가로 찍어 보완 하였는데, 

신성일씨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포도밭 주인 집에서 월동 준비를 하고 있는 부부와 대화하여 보는데, 신성일씨가 연극을 위하여 방금 집을 나아갔다고 하면서 한 2-30분 정도 일찍 방문하였다면 직접 만날 수 있었는데 아싶다고 한다.

일년에 한두 번 신성일씨의 단짝이 되는 "엄앵란" 씨가 출입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그의 아들과 2명의 딸은 영화사업 및 집안 일로 지금 까지 한번 출입한 것 이외에는 거의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어 궁궁한 것을 더 이야기하여 보았는데, 동네를 감쌓고 있는 마을 뒤산 명칭은 탐약산이 아니고 채약산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여 본문(本文)을 정정하였으며 현재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은 떠나 갔다고 한다.

더불어 키우는 말도 전부 처분하였으며 집을 지키는 풍산 개도 3마리가 있다고 하지만, 막상 집으로 들어가 보니 한마리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쓸쓸한 가옥으로 변화가 발생하고 있어 다소 한적함이 묻어나는 집으로 변모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