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행사.(경북)

경북대학교 기계공학과 대구에서 거주하는 동문 9월 모임은 서울팀과 함께 "동문 별장" 의 방문.

용암2000 2014. 9. 22. 21:39

둘째날 : 9월 17일.(수요일)

 

1) 철가방 극장 구경.

이제는 나이가 많아 잠이 없어서 그런지 모두 아침 일찍 기상하니, 창밖에는 보슬비가 내리므로 인하여 산중에 있는 펜션에서 적당한 아침을 해결하는 식당이 여위치 않아 TV를 의존하면서 머물고 있다가, 일단 펜션을 탈출하여 변화가로 내려가 청도의 별미 추어탕을 요리하는 식당을 찾기로 한다.

Check-out 하기 위하여 사무실로 들어가 추어탕 전문집 및 인접 관광지를 협의하여 보는데, 펜션 앞으로 만들어진 소로(小路)의 야산을 넘어 10분 정도 달려가면 한국 Comedy 계의 거장(巨匠) 역활을 하고 있는 "전유성" 씨가 운영하는 철가방 극장이 여기에서 바로 갈 수 있다고 한다.

 

< 코미디언 전유성씨가 운영하는 "철가방 극장" 가는 길 >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매우 불안전한 길 따라 야산을 넘어 조금 달려가면 경북 청도군 풍각면 성곡리에 높은 철가방 형태의 건물이 보이는데, 도로 변에 주차하고 나서 건물 마당으로 들어가 보니 현재 내부 수리 중이면서 10월 부터 Open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 "철가방" 모양의 코미디언 극장 >

 

이곳 철가방 극장은 코미디언 분야의 대부격인 전유성씨가 유명한 노래가수 "진미령" 부인과 불화로 인하여 전국을 배회하다가, 산 좋고 물 좋은 청도에 정착하면서 부터 후진 코미디언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극장을 겸한 아카데미 학원이다.

전유성씨는 대구 및 경북을 위한 홍보대사와 많은 기부문화를 통하여 지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고 있으며, 특히 신인 코미디언이 어려운 중앙무대에서 연기활동 하기에 높은 장벽으로 인하여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에게 힘과 희망을 주는 가교 역활을 하므로 인하여 돈과 백이 없는 초보 코미디언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장소이다.

 

< 철가방 극장 입구에 있는 "부속 건물" >

  

그러므로 신인 코미디언은 머나먼 이곳 청도 골짜기 까지 모여 합숙을 통하여 저마다 재능의 발굴 및 육성하여, 한국 코미디언 세계에 이름을 올리게 하는 실전(實戰) 무대가 되어지는 배움의 전당이라 하겠다. 

 

< 철가방으로 운반하는 각종 "음식과 소주" >

 

이렇게 후진을 위하여 노력하는 전유성은 1949년 1월 28일 서울에서 출생한 개그맨으로 서라벌 예술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였고, 1969년 MBC 개그 콘테스트를 통해 데뷔 하였으며 2000년 올해의 인터넷 연예인 상을 받았고 2004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2000년 6월 사이버윤리 홍보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2001년 11월 코미디 극단 전유성의 코미디 시장의 운영을 맡고 있으며, 개그분야 뿐 아니라 특유의 입담과 끼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아직도 서울과 청도를 왕래하면서 왕성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나는 벌써 뒷방 노인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2) 녹동서원 방문.   

철가방 극장을 구경하고 나서, 풍각면소재지 중심가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전일 밤새도록 먹은 숙취의 최상급 요리가 되어지는 청도의 명물 추어탕을 즐겨보는데, 너무나 좋은 맛을 가진 식사가 되므로 인하여 추가 추어탕을 요청하니 주인 아주머니가 공짜로 한 양푼이 추어탕 국물을 퍼주므로 인하여 정말 시골 인심이 묻어나는 식당이다.

그러고, 옛 청도에서 부족 나라 "이서국(伊西國)" 의 수도가 되어지는 이서면을 통과하면, 이내 전유성의 또 다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니가 쏘다쩨" 라는 레스토랑 앞으로 들어 가보니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문이 굳게 잠겨있다.

여기에서 대구로 들어가기 위한 팔조령을 넘어가기 전 달성군 가창면 우륵리에 있는 "녹동서원(鹿洞書院)" 을 관람하기 위하여, 녹동서원 주변 고향으로 귀촌하여 살고 있는 고등학교 한 동문에게 전화하여 서원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연락한다.

 

< "녹동서원" 전경 >

                                                                                             

이곳 녹동서원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장군으로써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야가(한국명 : 김충선)" 장군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사당인데, 나의 고등학교 동문이 그의 후손이 되므로 인하여 현장에서 더 생생한 해설을 부탁하기 위함이다.

나는 이곳 우륵리 인접하게 있는 옛 대한중석 주식회사 에서 근무하였고, 또한 우륵리에 있는 "남지장사" 뒤편에 있는 산에 산행을 위하여 녹동서원 앞으로 자주 지나치므로 인하여 녹동서원에 안치하고 있는 주인공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동문들은 거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서원 앞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아가니, 아직 친구가 도착하지 않아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까 직접 농사 지어 수확한 과일로 청량 음료수를 만들어 허둥지둥 내려오는 친구와 도킹하여 서원 내부로 들어가는데, 아직 관리인이 출근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문이 잠겨져 있어 서원 건물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밖에서 해설이 이루어진다.

 

< 녹동서원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 담장 밖에서 바라보는 "녹동서원" >

 

< 동문을 위해 마호병을 들고 해설하는 "친구" >        

 

< 내삼문 내에 있는 "제향" 공간 >

 

< "문중회의 및 각종행사" 를 개최하는 충절관 >

 

이곳 우륵리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모하 "김충선(金忠善)" 씨는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장군으로, 몸의 일부분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으로 일본에서 조총와 화약을 만들고 있는 전문 기술자이라고 한다.

김충선씨는 한국을 침공하기 위하여 많은 야심을 품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로 들어가 조총과 화약을 제조하였으며, 한국을 침공하기 전 한국 지형을 염탐하기 위하여 삼남(三南)을 돌아 다니면서 한국문화를 대면하여 크게 감동 받고 귀화(歸化)에 꿈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친구의 해설과 안내로 서원 곳곳에 돌아 다니면서 관람하다가 정문 앞에 있는 안내문에 도착하여 기술한 내용을 읽어보고 또한 그 내용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는데, 안내문 내용은

 

<모하 김충선 선생님은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 의 시조이고, 본래 일본인으로 본 성명은 사야가(沙也可)이며, 그는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우선봉장으로 우리나라 침공시 앞장선 군인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불의의 침락 임을 이미 아는바 평소 흠모하였던 조선은 의관문물과 예의지중이 뛰어난 나라이라서 차제 귀의할 것을 의중으로 결단하고, 거느리고 있던 군사 3.000명을 설득하여 절도사에게 강화를 청하고 귀부하였다고 한다.

본시 공명을 원치 않는 바이나 이 나라 사직(社稷)의 위태로운 고로 칼날을 돌려 전장으로 나가 왜적을 크게 무찌르므로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뒤에 도원수 권률 장군과 어사 한중겸의 주청으로 조정으로 부터 "김충선(金忠善)" 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그러고 수하 군관인 김계수, 김계충 등을 시켜 조총과 화약 제조방법을 전수하므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비로서 조총이란 정예무기를 가지게 된 것이니, 결국 수복(收復)한 공은 그의 힘이 컷던 것이다.

선조36년(1603년)에 만주족이 해마다 국경을 침법한다는 말을 듣고 자원하여 나서 변방 10년 잉방(仍防)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니, 광해군은 후원에서 큰 잔치를 배풀면서 위로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내리고 교지에 어필로 "자원잉방기심가가(自願仍防其心可嘉)" 라는 8자의 글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인조2년(1624년) "이괄의 난" 에는 이괄의 부장 서아지를 잡아 참하니 조정에서는 사패지 칠읍(대구, 청도, 김해, 밀양, 창원, 영산, 경산)을 내려 그 공을 치하하니, 이를 극력하게 사양하고 수어청에 헌납하여 둔전(屯田)으로 삼아 군량으로 이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인조14년(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소명도 있기 전에 노구(당시 66세)를 무릅쓰고 광주, 쌍령으로 달려가서 싸워 오랑케 5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남한산성으로 인조 임금을 구하고자 달려 갔지만, 호병과 이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칼을 던져 통곡하며 춘추대의도 이제 끝났다 하여 이곳 우륵촌으로 돌아와 살면서 가훈, 향약 등을 지어 유계하고 후손에게 충효정신과 예의법도를 당부하였다고 한다.

인조20년(1642년) 9월 30일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나므로 그의 유택은 녹동서원 뒤편에 있는 삼정산(三頂山)에 자리하고 있으며, 슬하에 5남 1녀를 두어 번창하여 그 후손 7.500여명이 우륵을 비롯하여 청도, 김해, 밀양, 장수, 금산, 서울, 부산, 대구 등 각처에 살고있다.  

그러고 사성(賜姓), 사관(賜貫)에 대하여는 그의 본성인(스나, 사)임을 고려하여 모래 중에서는 사금이 으뜸이라 하여 김씨(金氏) 성(姓)을 하사 하였고, 금(金) 중에는 해중(海中) 금이 으뜸이라 하여 김해(金海)라는 관직을 내렸다고 한다. 

1776년 영조 때 삼남 유생들이 춘추대의에 대한 은공을 상소하였고, 정조18년(1794년)에 "녹동사(鹿洞嗣)" 를 지었으며, 고종29년(1892년) 8월 20일 도(道) 유생들과 예조에서 선생의 충의에 대하여 임금에게 상재하므로 고종으로 부터 "병조판서(兵曺判書)" 라는 벼슬을 추종하였다고 한다.

고종30년(1893년) 3월에 정부사판서 김수현이 교지대로 묘지에 증직비(贈職碑)를 세웠으며 유림 현사들이 구름같이 모여 추모하는 글을 올리면서 대장공의(大張公議) 하여 "모하 김선생(慕夏 金先生)" 으로 위패로 받들어 이곳 녹동서원 우편 녹동사에 봉안하고 매년 음력 삼월 중정에 유림항례를 거행하고 있다. >

라고 기술하고 있다.

 

녹동서원 뒤편으로 돌아가면 서원에서 김충선 장군 무덤까지 300m 이라는 이정표가 있어 친구의 안내로 아침부터 산행길로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가는 길은 울찬한 소나무 숲으로 인하여 삼림욕 하기에 최상의 길이 되어진다.

 

< 서원에서 "묘소" 로 올라가는 초입 길 > 

 

몇번의 휴식을 가지고 나서 삼정산 5부 능선 정도에 자리하고 있는 묘소에 도착하면, 몇기의 산소 제일 상부에 김충선 장군의 무덤이 있어 가장자리를 통하여 무덤 앞으로 올라가서 간단한 예의 표시와 함께 무덤에 대한 해설을 들어본다.

 

<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쌓여 있는 "김충선 묘소" >

 

묘소에는 3기의 무덤이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제일 좌측 김충선 장군의 무덤과 함께 중앙에 정실부인 무덤, 제일 오른편에는 후실부인 무덤으로 되어있고, 중앙에 있는 좌판에는 글씨가 모두 지워져 있는 것이 특색이 되어진다.

 

< "김충선 장군" 과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는 부인 묘소 >

 

< "병조판서" 벼슬을 하사한 내역이 새겨진 비석 >

 

친구가 이렇게 글씨가 지워진 내력을 설명하는데, 정실부인 보다 후실부인에서 먼저 자손들이 출생함과 동시에 많이 번성하므로 인하여 세력에 따른 가문의 오점도 그대로 남겨두고, 일본인의 후손이라는 것도 많은 방문객들에게 숨김없이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한 후손임을 자부한다고 한다.

 

< 묘소 앞 글씨가 지워진 "좌판" >

  

< 묘소에서 서원으로 내려가는 "소나무 길" >

 

마지막으로 이곳 녹동서원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사야가" 후손들이 매년 많이 방문함과 동시에 물질적인 지원을 받으므로 인하여 정부의 지원 없이 자력으로 서원 확충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다음 계획을 위하여 황급하게 서원을 떠나기로 한다.

 

3) 모임의 종결.

녹동서원을 떠나 대구시내 방향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는 가창면사무소 인접지역에 있는 찐빵 촌에 정차하여 간식용으로 약간의 빵을 구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방문한 몇몇 동문들은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부산으로 내려가고 다른 한 동문은 부모님 묘소를 찾아가기 위하여 고향으로 이동하므로 여기에서 헤어짐을 가지는데, 점심식사는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