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경남)

경상남도 함양군 상림공원과 함께 하고 있는 '최치원 역사공원' 을 탐방하면서.(4)

용암2000 2023. 10. 7. 10:43

2023년 10월 3일.(화요일)

4. 최치원 역사공원을 탐방하면서.

함양박물관에서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최치원 역사공원(崔致遠 歷史公園)' 이 자리하고 있는데, 최치원 역사공원 내에는 넓은 고운광장(孤雲廣場)을 비롯하여 '고운기념관(孤雲記念館)' 건물과 함께 하고 있다.

1) 고운기념관의 구성.

먼저 고운기념관을 돌아보기 위하여 넓은 잔디광장을 지나 일단의 계단 위로 올라서면 기념관을 구획하고 있는 2층의 '고운루(孤雲樓)' 가 자리하고 있는데, 고운루 1층을 통과하면 이내 넓은 마당이 도착한다.

 

< '고운기념관' 앞으로 펼쳐지고 있는 잔디광장 >

< '고운기념관' 의 전경 >

 

< 고은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고운루' >

마당의 왼편에는 역사관(歷史館) 건물 및 최치원 선생님 동상이 자리하고 있고, 마당의 오른편에는 상림관(上林館) 건물 및 '인백기천(人百己千)' 이라고 새겨져 있는 입석 한기가 자리하고 있다.

< 마당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관' >

< 마당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최치원' 선생님의 동상 >

 

< 마당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상림관' >

< 마당의 오른편 인백기천(人百己千) 이라고 새겨져 있는 '입석' >

(1) 고운기념관을 돌아보면서.

마당의 중앙에 있는 또 다른 계단으로 올라가면 솟을대문이 자리하고 있고 솟을대문 뒤편으로 2층의 거대한 고운기념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측면의 쪽문을 이용하여 내부로 입실하면 너무나 넓은 공간과 천정 높이로 인하여 아찔함을 느낀다.

 

< 마당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고운기념관' >

 

< 2층으로 건축되어져 있는 '고운기념관' 건물 >

고운기념관 내부 중앙에 만들어져 있는 닫집 아래 고운선생님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고, 좌측 입구에는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궁중 한복 한벌을 보관하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고운선생님의 동상과 더불어 약간의 전시품을 진열하고 있다.

< 넓은 공간과 높은 천정을 가지고 있는 '고운기념관' 내부 전경 >

< 닫집 아래에 모시고 있는 '최치원' 선생님의 영정 >

 

< 기념사진을 찍기 위하여 비치하고 있는 '궁중 한복' >

< 고운기념관 내부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최치원' 선생님의 동상 >

< 고운기념관 내부에 진열하고 있는 '전시품' >

(2) 역사관의 관람.

역사관 입구에 설치하고 있는 자동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고운선생님의 일대기를 기술하고 있는데, 고운선생님은 문성왕 19년(857년) 통일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 선생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 자동문을 열면 만나는 '역사관' 입구 >

< '역사관' 내부의 전경 >

< '최치원' 선생님이 저술한 책 >

친형 한명이 있었지만 일찍 출가(出家)하므로 인하여 고운선생님이 사실상 장남으로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있었는데, 고운선생님은 12살이 되는 경문왕 8년(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가게 된다.

 

< 천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신라' 이야기 >

당시 신라에서 1년에 216명이나 당나라 유학생으로 떠나는데, 그렇게 많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이유는 신라로 돌아오면 출세의 길이 보장되는 엘리트 코스가 열리기 때문이다.

떠나는 배 위에서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 급제를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래서 최치원은 '남이 백번을 노력하는 동안 나는 천번을 노력하겠다(인백기천 : 人百己千)' 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한다.

 

< '아버지' 와 약속을 기술한 내용 >

 

< '인백기천(人百己千)' 으로 약속하는 최치원 선생님 >

그로 인하여 당초 10년의 목표를 잡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지만 목표에서 4년이나 단축하여 6년 만에 18세가 되는 나이로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급제를 하는데, 그래서 최치원은 '공부의 신' 이라고 불려졌다.

 

< 당나라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 선생님 >

벼슬은 당 황실을 호위하는 번진에서 감찰과 문헌을 맡고 있던 고운선생님의 활약상을 신라 사신들을 통하여 신라 왕실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최치원은 다른 당나라 유학생과 달리 10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면서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고운선생님은 당나라 희종 6년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키자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을 지어 그의 이름을 중국 천하에 떨쳤다고 한다.

< '토황소격문' 을 소개하고 있는 안내문 >

당시 신라 헌강왕은 선왕이 되시는 경문왕을 이어 유학을 진흥하고 유학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 시킬려고 노략하였는데, 이 떄 최치원 선생님은 헌강왕 10년(884년) 28세 때 당나라 벼슬을 사임하고 금의환향(錦衣還鄕)의 길을 선택한다.

 

< '신라' 로 귀국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하지만 패망(敗亡)하고 있는 신라에서 크게 벼슬을 하지 못하고 태인, 함양, 서산 등에서 태수로 근무를 하였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합쳔 해인사로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는 일화를 내려오고 있는 인물이다.

 

< 관직을 버리기 전에 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 >

(3) 상림관의 관람.

상림관도 입구에 설치하고 있는 자동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내부에는 최치원 선생님의 애민정신(愛民精神)과 상림(上林) 숲을 기술하고 있는데, 고운선생님은 전성여왕 8년(894년)에 이곳 함양 태수로 부임한다.

< '상림관' 내부의 전경 >

당시 함양은 신라와 후백제의 국경이 맞닿은 군사적 요충지대가 되는데, 최치원 선생님은 후백제를 방어하기 위하여 방로태감과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태수로 1년 넘게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다.

특별하게 위천강이 함양시가지 중심지를 관통하고 있어 많은 홍수 피해를 꺽고 있었는데, 이에 최치원 선생님은 물길은 함양시가지 외곽으로 돌리고 제방을 쌓고 제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특히 상림 숲에는 도토리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이는 치수(治水)와 방풍(防風)의 목적 이외에 흉년에 백성의 배고품을 해결하려는 최치원 선생님의 애민사상(愛民思相)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최치원 선생님의 '애민정신'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전시실 내부로 이동하면 상림의 설화 및 상림에서 서식하고 있는 식물도감(植物圖鑑) 등을 전시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강의실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한명의 탐방객이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있다.

 

< 상림에서 살고 있는 '식물도감' >

< '강의실' 내부에서 공부하고 있는 탐방객 >

2) 고운광장을 거닐어 보면서.

최치원 역사공원 앞으로 고운광장이 펼쳐지고 있는데, 광장에는 진입광장을 바롯하여 주광장, 보조광장, 야외무대, 어린이 놀이기구, 정자, 연못, 불로폭포, 산삼 주제관, 산책로, 다양한 조형물 등이 자리하고 있다.

< '고운광장' 을 알리고 있는 입석 >

< 광장 가장자리에 설치하고 있는 '야외무대' >

< 광장 가장자리에 만들어져 있는 '정자' >

 

< 광장 가장자리에 설처하고 있는 '어린이 놀이터' >

< 광장 내에 만들어져 있는 '조형물' >

특히 불로폭포(不老瀑浦)는 높이 20m에 폭 50m 정도의 크기를 가진 폭포가 되는데, 폭포 대상지 주변은 약 1.100여년 전 하천이었다고 구전(口傳)되고 있는 곳으로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듯 땅을 파면 하천 돌과 모래가 나온다고 한다.

 

< 광장 가장자리에 설치하고 있는 '불로폭포' >

< 광장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산삼주제관' >

 

< 불로폭포 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함양시가지' 전경 >

폭포 위로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산책길 따라 걸으면서 폭포 위로 올라가 상림공원 전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나는 폭포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인접하게 만들어져 있는 '산삼주제관' 을 구경하기로 한다. - 4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