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 문화와 산행.

우중에도 불구하고 경상북도 고령군이 자랑하는 "우륵박물관 및 개실마을" 을 돌아 보고서.

용암2000 2013. 7. 10. 21:45

2013년 7월 7일 (일요일)

 

오늘 모든 사람이 좋아 한다는 숫자 Lucky seven Day 이지만, 아침 부터 집중 호우로 인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뉴스와 더불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B-777 아시아나 여객기가 추락하였다는 뉴스가 함께 흐르고 있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칠(7) 이라는 숫자가 5개나 겹치는 날이지만, 불길한 뉴스를 접하므로 아침부터 기분이 찜찜하게 하는 날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집안 4촌 형제로 구성된 "해심회(海心會)" 계 모임을 가지는 날이라, 모임의 장소와 시간은 고향 인접지역에 있는 성주군 용암면 및 고령군 운수면과의 경계 지점에 있는 이례재 고개 "알프스 가든" 식당에서 12시에 개최한다고 한다.

이례재 고개는 금년 4월 13일 백붕회 산행팀과 함께 "의봉산" 정상으로 올라본 산이며 식당은 의봉산의 지맥(枝脈)을 형상하고 있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대구에서 한 시간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출발하면 충분하게 도착이 가능하므로 천천히 운전하면서 출발하는데, 서울과 천안에 살고 있는 4촌 누나들이 벌써 도착 하였다고 성화의 전화가 온다.

약속 시간보다 다소 빨리 도착하여 즐거운 모임과 회의를 가짐과 동시에 오리고기로 점심식사를 가지고 오후 3시 경 모임을 종결하면서 내년의 만남을 기약하면서 각자 생활 터전으로 출발하는데, 나는 시간적 여유가 다소 발생하여 천안에 살고 있는 누나 집과 함께 고령군으로 들어가 우륵박물관과 개실마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1. 우륵박물관.

우륵박물관은 성주에서 고령읍으로 들어가는 33번 국도 변에 있는 고령중학교 입구에서 우측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아담한 야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박물관 전체 모습은 우륵 선생님이 12줄 가여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건물로 만들어져 있어 다소 이색적인 모양을 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 12줄을 표현하고 있는 "우륵박물관" >

 

< 주차장 입구에 있는 "악성 우륵상" >

 

맑고 깨끗한 가야금의 고장 우륵박물관은 고령군 고령읍 가야금리 98번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박물관에는 가야금을 창제한 악성 "우륵(于勒)"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 수집, 보존,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써 관람객들이 우륵과 가야금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건립한 "우륵과 가야금" 이라는 테마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우륵 선생님은 우리나라 박연, 왕산악과 더불어 3대 악성(樂聖) 중에 한 분으로 대가야 성열현에서 태어나, 대가야 "가실왕" 의 명을 받아 우륵박물관이 있는 이곳 정정골에서 가야금을 만들고 작곡, 연주를 하였다고 하는 장소이다.

현재 이곳 고령군에서는 가야금 12곡의 이름만 전하여 오고 있으나 악보는 알 수 없다고 하며, 우륵선생님은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에 신라로 망명하여 충주 탄금대 인근에서 살면서 신라 음악에도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한다.

박물관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므로 주변도 돌아보지 못하고 전시관으로 뛰어 들어가는데, 전시관 입구 안내 Desk에 한명의 남자분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안내 Desk에서 팜플릿을 챙기고 나서 출입문 입구에 가여금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목재와 명주실 등이 놓여 있어 먼저 구경하고, 천천히 전시실 내부로 들어가면 동상으로 만들어진 우륵선생님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 붙어져 있으며 더 내부의 전시실에는 벽면 따라 시대별 가여금 변천사와 모형들이 전시하고 있다.

 

< 박물관 입구에 전시하고 있는 "가야금 재료" >

 

< 전시실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우륵 동상" >

 

또한 다른 전시실 공간에는 가야금의 제작 및 가야금 12곡을 만들기 까지의 악기에 얽힌 흥미로운 내용을 전시하고 있어, 우륵선생님의 업적과 가야금 가치를 재 발견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명서로 기록하고 있다.

 

< "가야금의 변천사" 를 설명하는 안내문 >

 

< 고령지역에서 발굴한 "가야금" 유물 >

 

< 가야금 "제작과정" 을 설명하고 있는 설명문 >

 

특히 한국의 전통 악기이면서 궁중 음악에서 사용하는 거문고, 아쟁, 해금, 단소 등을 연주하는 악성의 연주 모습과 함께 소리를 녹음하여 놓아, 관람객이 원하는 스위치 버턴을 누르면 스피커를 통하여 연주하는 다양한 음색을 심취할 수 있도록 녹음 시설을 만들어 놓고 있다.

 

< "궁중 악기" 를 연주하고 있는 악성 >

 

다른 벽면에는 12줄의 가야금에서 25줄의 가야금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의 악기와 더불어 중국에서 사용하는 악기 등을 동시에 진열하고 있는데, 음악에 대한 많은 지식을 공부할 수 있는 박물관이라 하겠다.

 

< 12현에서 25현 까지 "가야금" 전시품 >

 

< 개량형으로 만들고 있는 "가야금" >

 

< 역대 "가야금 명인" 의 사진 >

 

전시실 밖으로 나오면 박물관 우측에 전문적인 장인(匠人)이 직접 만드는 가야금 공방을 운영하고 있어 가야금의 제작 과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별도의 건물이 보이지만,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하여 조급하게 박물관을 떠난다.

 

2. 개실마을.

고령읍을 통과하여 합천 방향으로 10여 분 정도 달려가면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마을에 도착하는데, 이 합가리(合伽里) 중에서 처음 만나는 마을이 "개실마을" 이라 하겠다.

 

< "개실마을" 알리는 입석 >

 

< 빗 속에 졸고 있는 "개실마을" 전경 >

 

개실마을은 총 62가구 158명이 거주하는 아담한 마을로써, 조선 전기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님의 후손들의 집성촌으로 300여 년 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민속자료 제62호의 "점필재 종택", 문화재 자료 제111호 "도연재", 유형문화재 제209호 "점필재 문적 유품" 등의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는 고을이다.

 

< 개실마을 입구에 있는 김종직 종택" 입석 >

 

1498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종직(1431-1492년) 선생님의 5대 손이 1650년 경 이 마을로 피신와 은거하며 살 때 꽃이 피고 매우 아름다워 골을 형성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아름다워 가(佳)" 와 "골짜기 곡(谷)" 자를 써서 가곡(佳谷)이라고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개화실(開花室)이라 하였는데, 개화실의 음이 변하여 개애실이 되고 현재는 개실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실에서 개실마을에 대한 안내 팜플릿 한장을 획득 함과 동시에 마을 입구에 있는 전체 조감도를 보면서 관람 코스를 훝어보고, 내리는 비로 인하여 조급하게 이동을 하면서 관광에 임한다.

 

< "개실마을" 의 조감도 >

 

먼저 마을 안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점필재 "김종직" 종택 건물에 도착하는데, 입구에 있는 솟을대문이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살았다는 고택(古宅)의 건물이 웅장 함을 보여준다.

 

< "김종직 종택" 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오른편으로 조그마한 쪽문이 있으면서 이 쪽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과 함께 한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건물 전면에 서림각(棲林閣)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그 아래에 조그만한 글씨로 김종식 서생님의 유품을 관리하는 건물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유품을 관리하는 "서림각" 건물 >

 

서림각 건물 앞의 마당 가장자리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님에 대한 사진과 더불어 중요 년대 순으로 일대기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그의 일대기를 요약하여 보면,

                                                                                         

< 서림각 마당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는 "김종직" 선생님 일대기 >

 

< 김종직 선생님의 "저서" 에 관한 설명서 >

 

김종직 선생님은 본관은 선산(善山)에 자는 효관(孝盥),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써, 세종 13년(1431년)에 밀양 대동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로 부터 길재의 성리학을 이어받아 훗날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에 이르게 된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어릴적 부터 총명하여 날마다 수십 자씩 기억해 갔다고 하며 동몽수지, 유학자설 등을 거쳐 소학, 효경, 대학 및 사서, 오경을 차례로 배웠지만, 특히 소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고 어릴 적 부터 시(詩)를 잘 지어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선생은 경기, 강원, 전라 3도의 관찰사, 한성좌윤, 형조판서, 지경연, 홍문관제학, 성균관사를 거쳐 성종 20년(1488년) 59세에 병환으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밀양으로 내려 갔다.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틈나는 대로 후학을 가르치니, 그 문하생으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조위, 남효온, 유호인 등 수 많은 문인, 학자, 정치가들을 배출하여 그의 이름이 전국에 자자하여 지는 인물이 된다.

그 중에서 역사적 문제가 되는 조의제문은 김종직 선생님이 세조 3년(1457년) 10월에 쓴 글로써,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이다.

후에 제자가 되는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이 글을 시초에 적어 넣었는데,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 의 원인이 되기 시작하여 연산군 4년(1498년) 7월에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 된다.

성종대 이후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은 사람파가 중심이 되어 등용하면서 부터 유자광 등 훈구파와 대립이 심해지고, 이에 성종실록의 편찬 때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 이 계기가 되어 김일손 등 많은 사람들이 몰살을 당하면서 이미 돌아가신 김종직도 무덤을 파서 부관참시가 된다.

아들 숭년(崇年)은 화를 면해 고향 밀양을 떠나 잠시 합천에 머물다가, 그 후손들이 1650년 경 부터 이곳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개실마을로 옮겨와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고있는 곳이다.

다시 정문으로 나와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사랑채에 도착하는데, 사랑채는 조선의 아낙네들이 기거하는 내당을 바로 보여주기가 싫어 가로막 역활을 하면서 사랑채가 통행을 저지하고 있다.

 

< 내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억제하는 "사랑채" >

 

이 사랑채를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중사랑채에 이르는데, 중사랑채를 앞으로 들어가면 다소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건물이 지어져 "튼ㅁ자" 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중앙 2단의 축대 위로 1800년 도에 건립된 안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안채에는 아직도 사람이 기거하고 있어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 사람이 기거하고 있는 "안채" >

 

중사랑채에서 오른편 야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울창한 대나무 숲을 형성하고 있는 가곡 화개산(佳谷 花開山) 언저리에 점필재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건물이 보이고 있지만, 문이 잠겨져 있어 입구까지 들어갔다고 돌아서야만 한다.

 

< 김종직 종택 오른편에 있는 "사당" >

 

다시 마을 앞으로 나오면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정원 같은 조그마한 공원 속에 4개의 김씨 "세거지비(世居址碑)" 높게 서 있으며 그 뒤편으로 "도연재(道淵齋)" 라는 재실 건물을 만나는데, 이곳도 입구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고 또한 사람이 살지 않으므로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 도연재 앞에 있는 "세거지비" >

 

< "도연재"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문이 굳게 잠겨져 있는 "도연재" 정문 > 

 

도연재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태의 건물로써, 김종직 선생님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 유학자들이 조선 고종 원년(1886년)에 건립하여 유생을 기르키고 제사를 지내는 재실이다.

 

< 잡풀이 무성한 "도연재" 건물 >

 

그 옆의 돌담길 따라 내부로 들어가면 새롭게 건립한 "랑" 이라는 도자기 체험장 건물을 만나고 더 내부로 올라가면 고가의 집들을 도열하고 있지만, 모두 빈집으로 되어 한적 함이 묻어나는 골목이다.

 

< 도자기 체험실 "랑" >

 

<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빈" 집 >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과 함께 황토로 지어진 웅장한 한옥집 "화산재" 를 만나는데, 이 화산재는 전통혼례식을 거행하는 집이면서도 민박을 통하여 농촌 체험을 가지는 집이라고 한다.

 

< 전통혼례식을 거행하는 "화산재" 건물 >

 

< 화산재 건물 내에 있는 조형물 앞 "사촌누님 부부" 와 함께 >

 

다시 마을 입구로 나와서 마을 구석구석 한바퀴 돌아 다녀보면, 전통 한과를 만드는 마을 회관을 비롯하여 골목과 골목을 연결하는 전통 한옥들이 상호 지붕의 맞대고 있는 정겨운 시골의 풍경을 음미하는 곳이다.

 

< 한옥과 한옥을 연결 시켜주는 "돌담길" 을 걸어 보면서 >

 

< 한옥의 "지붕과 지붕" 이 마주 보면서 >

 

개실마을 앞으로 나와서 먼 발치에서 개실마을 전경을 구경하면 마을은 해발 194m "화개산" 이 병풍과 같이 빙 돌려쳐 있으면서 그 화개산에는 능선따라 걷는 트레킹 길이 만들어져 있고, 마을 앞에는 "잉어배미의 전설" 이 있는 연못과 논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가한 농촌 전경을 체험하는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 "개실마을과 논" 으로 구획하고 있는 마을 안길 > 

 

< 마을 뒤편을 병풍과 같이 두루고 있는 "화개산" 모습 >

 

< 마을 입구를 빛내고 있는 "무궁화" 꽃 >

 

우산을 쓰고 돌아보는 시골의 정감있는 풍경도 하나의 그림을 만들고 있어, 좋은 농촌 마을을 돌아보는 긴요한 시간이 되어 매우 유익한 투어(Tour)가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