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 문화와 산행.

시골버스를 타고 가는 고령군 문화재 "대가야 박물관 및 지산동 고분군" 을 찾아서 올라가보면.

용암2000 2010. 9. 26. 21:32

2010년 9월 23일 (목요일 : 추석 다음 날)

 

오늘.

추석 년휴 마지막 날이라 고향에서 차례를 지내고 난 모든 사람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많은 교통체증이 유발되어 다는 뉴스를 접하지만, 나는 집에서 차레를 모시다 보니 머나먼 곳까지 갈 필요가 없어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나 떠나 볼까 하는 마음으로 Wife와 둘이서 집을 나서지만, 자동차가 없어 지하철을 타고 대구 서부 정류장으로 들어가서 경북 "고령" 으로 가기 위하여 해인사 행 직행버스에 몸을 의존하여 본다. 

정류장에는 많은 노인과 외국인들이 혼잡 속에서 한참 기다림 후 버스에 올라타니, 이내 버스는 경로석으로 변하면서 만차가 되어지는데, 아직 한국에서도 차량도 없이 사는 사람은 실업자가 되어지는 우리집 부부와 농촌 노인들과 다수의 타국에서 온 외국인 뿐인가 보다.

해인사형 버스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승차 하는데, 년휴 동안 산사의 체험을 통하여 한국 전통문화와 더불어 사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활 예절이라도 느껴보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객인가 보다.

버스는 이내 88고속도로를 달려 "성산 Toll gate" 에서 내리면서 다소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약 30분 정도에 목적지 "고령시외버스 터미널" 에 도착하여 지므로 하차하여서 개나리 봇짐 하나를 지고서 천천히 고령 시가지를 걸어보는데, 고령 시가지는 거대한 무덤의 군락지가 있는 "주산"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인하여 포근 함이 묻어나는 고장이다.

고령군은 경상북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면서 경북의 성주군과 더불어 경상남도 합천군 및 거창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대구광역시와 직면하고 있다.
고령군의 서쪽에 있는 가야산에서 "대가천과 안림천" 의 물길이 시작하여 주변에 비옥한 평야를 만들면서 흘러내려 고령읍에서 합쳐져 "회천" 이 되어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처럼 고령군은 서쪽의 높은 산과 동쪽의 낙동강으로 보호되기 때문에 외적이 침입하기 어렵고, 한편으로 낙동강 뱃길을 이용하여 밖으로 쉽게 교역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대가야" 라는 부국이 탄생하면서 도읍지가 되어졌는 장소인가 보다.

시가지 중심으로 하여 지산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시내의 중심 4거리가 나오면서 "향교" 와 더불어 "대가야 박물관" 이정표가 눈에 들어오는데, 향교 방향으로 발길을 잡아본다.

 

1. 고령 향교를 돌아보면서.

향교 입구에 들어서니 아담한 정자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정자 내부에는 많은 노인들이 명절의 끝지점에서 명절 음식과 더불어 술과 함께 정담을 나누고 있는 습에 정겨움이 묻어난다.

 

< "고령향교" 를 가르키는표시석 >

 

정자 옆으로 이어지는 다수 많은 계단을 이용하여 야산 기슭에 올라가면, 울창한 숲 속에 넓은 공터가 이루어진 장소에 향교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 고령 "향교" 는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주산 아래 처음으로 건립된 것을 몇차례 옮겨졌다가, 숙종 28년(1702년)에 현재의 위치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 굳게 잠겨진 "향교" 의 솟을대문 >

 

현재 건물의 배치는 입구로 부터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동무와 서무, 빈홍재, 대성전 및 협문으로 건축되어 있으나 외삼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로 들어가 관람이 불가능함이 아싶다.

 

< 향교의 중심인 "명륜당" 전경 >

 

사당 정문의 오른쪽 방향으로 "대가야국성지(大伽倻國城址)" 라는 돌 비석 한기가 서 있는데, 이곳이 대가야의 발생지가 되었다는 뜻을 가진 장소인가 보다.   

 

< 향교 오른편에 있는 "대가야 발생지 표시석" >

 

향교를 나와 시내로 다시 한 100m 되돌아서 내려가면 4거리를 만나는데, 4거리의 오른편 방향이면서 해인사를 가르키는 이정표 따라 한 500m 정도 걸어가면 지산동 도로변에 거대한 "당간지주" 한쌍만난다. 

 

2. 지산동 당간지주를 지나면서.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사찰 전면에 위치하고 있으나 현재는 시가지 중심지에 자리하면서 사찰의 흔적은 완전히 살아졌지만, 이곳 당간지주는 보물 제54호 로써 통일신라 시대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314Cm 나 되는 거대한 "돌기둥"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시가지 중심지에 있는 보물 제54호의 "당간지주" >

 

지주와 지주 사이의 간격은 70Cm로서 안쪽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지만 바깥쪽으로는 양면 모서리를 죽이고, 가장자리에 부분적인 세로 띠를 조각하여 놓아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보물급 당간지주이지만, 시내 한 모서리에 방치하고 있어 매우 안스럽다. 

 

3. 대가야 박물관의 관람.  

당간지주가 있는 시가지에서 합천 방향으로 약 1Km 정도 걸어서 가면 대가야 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여 지는데, 주차장에는 수 많은 승용차와 더불어 년휴를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번잡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곳, 고령 문화재에서 2.000원 하는 입장권을 구입하면 "대가야 박물관"  과 인접하게 있는 "왕릉 전시관" 및 이곳에서 약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우륵 박물관" 까지 동시 관람이 가능한 Set 입장표가 주어진다. 

 

<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는 "대가야 박물관" 입구 >

 

대가야 박물관은 1층과 2층으로 구분되어 있으면서 대가야를 비롯하여 고령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전시하여 았는데, 찬란한 대가야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어린이들로 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현장 학습코스로 매우 좋은 관광지가 되어진다.

특히, 문화 해설사 한명이 구수한 농담과 더불어 대가야 역사와 더불어 대가야 문화가 일본으로 흘려갔던 과정 및 가야국들의 멸망 되어지는 내역지 도표를 이용하여 해설함으로 인하여, 이해의 폭을 높게 하므로 어린이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고 있다.

 

< 대가야 문화를 설명하는 "문화 해설사" 앞에서 경청하는 군중들 >

 

대가야의 발생 과정은 두가지 건국신화로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 선생님이 쓴 "석순응전(釋順應傳)" 을 조선시대(1481년)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대가야 중심의 건국 신화인 “가야산의 산신이 되어지는 정견모주(正見母主)와 하늘의 신 이비하(夷毗何)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이 되었다” 는 이야기가 되어지고,

또 다른 하나는 고려중기가 되어지는 1075-1084년 사이 김해 지방관으로 파견된 어떤 문인이 지은 "가락국기(駕洛國記)" 를 고려 후기(1281년)에 일연(一然) 스님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를 쓰면서 인용한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 신화 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6개 황금 알이 깨어 6명의 동자가 되었는데, 가장 먼저 깨어 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가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는 설화 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는 6가야는 고령의 대가야와 김해의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함안의 "아리가야", 창령의 "비화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로 대별하여 진다고 한다.

 

< "대가야" 와 나머지 가야국들의 분포도 >

 

이곳 박물관 측 관계자와 해설사는 가야국의 건국신화에 가깝게 기록한 신라 말 최치원 선생님이 저술한 "석순응진" 이 더 신비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또한, 가야국들의 멸망을 살펴보면 대부분 가야국은 각각 연맹체로 구성 되어지다 보니 상호 합병이 이루어져 멸망 시기가 불분명하지만, 김해지역에서 번창한 "금관가야" 는 서기 400년 무렵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은 뒤 쇠퇴하기 시작하여,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신라에 항복한다. 

아울러 "대가야" 는 5-6 세기까지 매우 번창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나,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오히러 대패하여 결국 신라 진흥왕 562년에 이사부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고서 항복하는데, 그때가 대가야의 16대 "도설지왕" 시대이라고 한다. 

특히, 대가야는 이곳 고령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면적의 1/2 정도 점유하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과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국가이다.

특히, 고령 땅 주위에서 나라를 형성하는 대가야는 이곳에 많은 철광석을 매장하고 있으므로 인하여, 일찍이 철기 문화를 꽃 피우는 민족이라 매우 부강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는 부족국가 이라 하겠다.  

대가야 박물관 전시실에는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많은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으나 전시하고 있는 금관의 진품은 다른 지역에서 보관하므로 인하여, 이곳에서는 현재 모조품을 전시하고 있어 박물관의 품위가 다소 떨어지고 있다.

 

<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 종류 >

 

세계에서 순금으로 만든 금관이 10개가 출토되었는데, 아프가니스탄에 1개, 스키타이에서 1개가 출토되어지고 있으면서 나머지 8개 금관 모두가 한국에서 출토되어지는데, 그 중에서 경주에서 6개가 출토 되어지고 나머지 2개는 이곳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어 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출토된 "꽃봉우리형 금관" 은 국보 제138호로 지정 되어지면서 삼성 "호암미술관" 에 보관되어져 있지만, 다른 한개의 "풀입형 금관" 은 일본 "오쿠라 콜렉션 박물관" 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니, 정말 슬픈 일이 되어진다.       

전시관 내부에는 토기문화에서 철기문화까지 발전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는 전시품 보고 있으며, 비록 대가야는 기록문화가 거의 남겨지지 않아 문헌을 통하여서는 알 수가 없지만, 발굴된 유물을 통하여 가야문화를 직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도 다행이라 하겠다.

 

< 대가야 고분군에서 발굴된 "토기류" >

 

아울러, 박물관 내부에는 이 지방 쌍림면 개실마을 출신이면서 양남학파의 종조부라고 하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님의 업적과 더불어 서술한 많은 책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아울러 김종직 선생님은 "무오사화" 의 중심에서 얼마나 곤욕을 치르고, 부관참시 된 사연을 볼 수 있는 전시실도 만들어 놓으므로 인하여 눈으로 볼 수 있어 조선시대의 "사화" 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이다.

1층과 2층을 오르 내리면서 전시물을 직접 체험하면서 관람을 통하여 대가야 문화를 한 수 배우고 나서, 대가야 박물관 옆에 있는 "왕릉 전시관" 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4. 왕릉 전시관의 입실.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殉葬) 무덤이 되어지는 "지산동 44호 고분" 내부를 원래 모습과 실물 크기로 동일하게 만들어진 "왕릉 시관" 속으로 들어가면, 묘한 느낌이 엄습하여 온다.

 

< 지산동 고분 44호를 재현하여 놓은 "왕릉 전시관" 전경 >

 

무덤 속에는 방문자들이 가장자리를 빙돌아 가면서 내부 구조를 구경할 수 있는 통로와 통로 주변에 발굴 당시 출토 되어지는 과정을 영상화 하여, 관람객이 지나가면 자동적으로 방영되도록 하고 있다.

방영 내용은 무덤 축조 방법, 주인공과 순장자(殉葬者)들의 매장 모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 등을 기술하여 놓았으며, 무덤 곳곳에 실물 크기의 납으로 만든 사람 모형들이 그 시대에 매장된 상태로 누워 있어, 대가야 시대의 순장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 지산동 고분 44호 내부 "순장자" 모습 >

 

순장이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행위" 를 말하는데, 사람을 죽여서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 집단의 지배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고대 세계에서는 리 성행한 풍습이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삶을 계속한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계세사상(繼世思想)에 따라 이승에서의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누리라는 미에서 행한 것이다.

특히 30대의 남자와 8세 정도 여아가 함께 묻혀 있는 모습과 더불어 10대 소녀 2명이 나란이 묻혀 있는 모습 등 30여명의 생사람이 동시에 순장 되어졌다는 무덤 내부 형태를 보고 있으니, 순장이 얼마나 잔인한 무덤인지 소름이 끼친다.

 

< 실물크기 "순장자" 및 내부 유물 분포 모습 >

 

순장된 유골을 조사하여 보니 두개골 뼈가 파손되어져 있어 먼저 사람을 살해하고 나서 동시에 순장 되었다고 역사학자는 추정하고 있는데, 주인을 위하여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순장의 재물이 되어진 어린이게 너무나 애절함이 묻어난다.

무덤 내부를 돌아보고 나오면 왕릉 전시관 좌측편으로 만들어져 있는 "지산동 고분군" 으로 형성하고 있는 고분을 직접 탐방하기 위하여, 숲속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따라 산행을 시작하게 한다.

  

5. 지산동 고분군에 오르면서.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 최고의 "고분군" 이다.

 

< "지산동 고분군" 의 전경 >

 

고령읍을 감쌓고 있는 "주산" 은 해발 311m 로서 남동쪽 능선 위에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가 되어지는 지산동 44호와 45호 고분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무덤 20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대가야 양식의 토기와 철기, 말갖춤, 금관과 금동관, 장신구 등 최고급 유물이 발굴된 무덤들이 주산의 능선따라 거대한 동산을 이루고 있다.

능선에 올라서며는 오솔길 좌우측으로 작은 무덤이 먼저 나타나면서 점점 거대한 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무덤 중간 지점에 무덤의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문 하나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고분 속으로 길이 이어진다.

 

< 지산 중간지점에 설치된 사적 제 79호 "지산동 고분군" 설명서 >

  

이 고분군이 사적 제 79호로 지정이 되어져 있으면서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쓰기 위하여 잔디가 살아진 부분에는 파란색의 비닐로 덮어 잔디 성장을 보호하고 있으나, 보기가 무척 억망이라 실망으로 빠져든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거대한 소나무 몇 그루가 외롭게 서 있는 나무 밑에 휴식을 취하기 위한 의자들이 놓여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주변 풍경을 즐기면서 여가의 시간을 가진다.

 

< 고분군 사이에 있는 "소나무와 휴식처" >

 

소나무 옆 왼편에 많은 유물이 발굴된 "지산동 제44호" 고분이 나타나면서, 고분 앞에는 명찰과 같은 고분 내역을 설명한 안내판 2개 붙여는데, 그 내용에는 지산동 44호 고분은 주산 구릉의 맨 꼭대기에서 열지어 늘어선 5기의 대형 고분 중에서 남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경사면에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77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이 고분은 지름 27m, 높이 6m 규모로서, 안에는 3기의 대형 돌방과 이 돌방을 둘러 싸듯이 배치되어 축조된 32기의 소형 순장돌 덧널이 들어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었지만 남은 것으로 금귀걸이, 금동그릇, 은장식쇠창, 야광 조개국자 등이 있어 원래는 아주 다양하고 많은 껴묻거리가 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특히, 오키나와(冲繩)가 원산지인 야광 조개국자가 발굴 되어져서, 대가야와 일본과의 원거리 교역 활동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면서 고분의 입지, 규모와 구조,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이 고분은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고분 중 최고의 위계(位階)를 가진 왕릉으로 보인다.

 

< 많은 유물이 발굴된 "지산동 고분 44호" 전경 > 

 

지산동 45호 고분은 지산동 44호 고분에서 산 위쪽으로 60m가량 떨어진 능선 급경사 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계명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되었는데, 규모는 지름 22-23.5m, 높이 2.85m로서 중앙부에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돌방 2기 나란히 설치하고, 그 주위에 11기 돌 덧널을 원을 그리듯이 돌아가면서 배치한 여러 덧널 무덤이다.

이 고분에는 무덤 주인공 이외에 12인 이상이 순장되어 있었는데, 으뜸 돌방인 1호 돌방에는 2명, 딸린 돌방인 2호 돌방에서 1명이 순장되어 있었으며, 주변 11기의 돌 덧널에서 9인 이상의 순장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더 상부로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39년도 발굴된 "지산동고분 제47호" 가 나타나는데, 본봉 직경이 49m이고 석실의 크기가 8m * 1.8m 정도로 고분 중에 제일 큰 고분이고, 수 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지만 발굴된 유물 모두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되어지는 유물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몰래 반출되어지다 보니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빈껍데기만 보고 있으니, 주권을 상실한 한민족의 서러움이 여실이 나타나는 곳이다.

 

< 1939년도 일본인들이 도굴한 "지산동 고분 47호" 전경 >

 

이곳에서 부터 주산의 정상이 보이는 능선으로 아직도 많은 무덤이 이어지지만 특별한 특색이 보이지 않아 되돌아서 내려오니까, 아담한 고령 시가지가 발아래 머물고 있고, 반대편으로 "가야대학교" 의 거대한 건물들이 숲속에 자리잡고 있어, 아름다운 풍광도 겸하여 볼 수 있는 곳에 고분군이 존재함으로 참 많은 사람들이 산책도 겸하며 올라오는 관광코스로 새롭게 부각되어지고 곳이다.

고분군을 내려와서 "우륵 박물관" 으로 갈려고 차량 편을 알아 보았으나, 마땅한 버스가 디니지 않아 대가야 박물관 도로 건너편에 있는 "대가야 역사테마 관광지" 발길을 돌리기로 한다.  

 

6. 대가야 역사테마 관광지의 구경.

대가야 역사테마 관광지 앞에는 아담한 연못 1개가 조성되어 있는데, 연못 주위에 산뜻한 정자와 더불어 분수대에 내어 뿜고 있는 물줄기가 지막 기성을 부리는 더위를 날려 보내기 위하여 힘차게 공중으로 솟아 오르면서 아름다움 분수 쇼를 연출하고 있다.

 

< 대가야 역사테마 관광지 앞에 있는 "분수대" >

 

이 연못 뒤편으로 2층의 "대가야 역사테마 관광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데, 들어가는 입장료가 3.000원을 요구하므로 뭐가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반신하면서 불만을 가득 품고서 내부로 들어가 본다.

 

< 대가야 역사테마 관광지 "출입구" 전경 >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이 지방 학생들이 만들어 놓은 가야 문화 변찬사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아 이해를 도우고 있어 한번 돌아보고 나서, 산의 구릉지 따라 조성된 야외 정원 속으로 들어간다.

 

< 역사 테마를 조성하고 있는 "야외공원" 을 배경으로 >

 

공원으로 들어서자 마자 왼편으로 원형의 "대가야 입체 영상관" 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별도의 또 다시 3.000원의 입장료를 요구하므로 인하여 기분이 상하여 지므로 대가야 후손들은 돈에 한장한 사람들만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 가며는 "고대 가야촌" 과 "대가야 유물 체험관" 만난다.

체험관은 독립된 건물마다 테마별 주제를 선택하여 전시하고,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므로 인하여 학습에 많은 도움이 얻어지는 곳 이라 하겠다.

 

< 테마별로 체험을 할 수 있는 "역사관" >

 

이곳을 지나면 어린들의 천국이 되어지는 "물놀이장 및 바닥 분수대" 를 만나고 왼편 야산 기슭에는 "대가야 탐방숲길" 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어린이같이 미로의 길로 들어가 탈출구를 찾는데 머리도 굴려보면서 체험의 길을 거닐어 본다.

 

< 어린이 용 "물놀이 시설"  >

 

< 퀴즈로 문제를 풀면서 찾아가야 하는 "미로 길" >

 

이어서, 폭포가 흐르는 "물레방아간" 을 지나면 아담한 "팬션" 촌이 나타나는데, 년휴 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흔적이 보인다.

 

< 물레방아와 "팬션" 촌의 건물 전경 >

  

이 팬션 촌에서 부터 약간 야산 길로 올라가며는 "전망대" 에 이르는데, 전망대 내부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48 Page 동양화로서 신선놀음을 즐기고 있어 젊이 혈기가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조금 전에 힘들게 올라갔다가 내려온 주산의 정상과 더불어 지산 고분군 전체 형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최상의 장소가 되어지면서, 가야인의 막강 함을 다시 한번 더 회상하게 만든다.

 

< 전망대에서 본 주산의 정상과 "지산 고분군 및 역사 테마 관광지" 전경 > 

   

전망대 위쪽에 2개 Dome형 임종 체험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뒤편에 있는 Dome은 사람이 죽으면 들어가는 나무관이 몇개 놓여 있으므로 한 나무관에 들어가 누워보니 조금 전까지 보고온 지산동 고분군 주인공들의 삶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므로 인하여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관 뚜껑을 덮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관 앞에 써 놓은 "공수래공수거시인생(空手來空手去是人生)" 라는 뜻이 무엇인지 알송달송하여 지는데, 아마 "공짜로 이 세상에 태어 낳으니 공짜로 돌아간다는 것이 인생이다" 는 뜻인가?

 

< Dome형 임종 체험관 내에 있는 "나무관 및 글씨" >

 

테마 관광지 전부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비싼 입장료로 인하여 상한 기분이 싹 살아지면서, 되돌아 내려오면서 아름답게 성하여 놓은 테마별 과제를 다시 한번더 구경하면서 매표소 입구 왼편 산 속에 있는 "상설 분재전시관" 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거대한 비닐 하우스 속에 기기묘묘한 분재가 수천 본이 성장하고 있어 지금까지 많은 분재를 보았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이곳에서 보는 분재숫자와 모양이 환상적으로 가꾸어지고 있어 관람을 끝내고 나니, 2배의 입장료를 더 지불하여도 아깝지 않는 관광지가 되어진다.

 

< 다양한 나무를 키우고 있는 "분재실" 내부 > 

 

평균적으로 50년- 300년이나 되어진 분재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으면서 판매가격은 일반적으로 3천만원-1억까지 가격이 형성 되어진다고, 관리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실업자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나의 신세가 실의로 빠져 맥이 풀린다.

 

< 1억을 호가하는 150년 수령의 "소나무" 분재 >

 

< 300년 수명을 가지면서 성장하고 있는 "주목나무" 와 관리인 > 

 

< 350년의 수령을 간직하고 있는 "모과나무" > 

 

나는 몇 백만원짜리 승용차 한대도 구입 할 형편 못 되고, Taxi 비용도 없어 지금까지 수십 Km 걸어서 이곳 고령군에 있는 대가야 박물관 및 분재 전시장 까지 와서 구경하고 있는데.....

다시 제일 위쪽에 있는 Dome 임종 체험관으로 돌아가 나무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면서, 나는 지금까지 무엇하면서 거지같이 살아 왔는지? 한심한 인간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