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문화 및 박물관.

손녀 재롱을 보기 위한 가족 나들이 길에서 관람하여 보는 "수로왕릉과 김해박물관" 여행길.(2)

용암2000 2013. 7. 21. 20:59

2013년 7월 13일.(토요일)

 

 

4. 국립 김해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 터널을 지나자 마자 좌회전하여 해반천(海畔川) 따라 조금 내려가면, 구지봉이 병풍처럼 둘려쳐 있는 곳 "국립김해박물관(國立金海博物館)"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서 김해박물관 정문으로 들어가면 국기 게양대와 더불어 높다란 철구조물이 서 있고, 그 철구조물 전면과 좌우면에 "국립 김해박물관" 이라고 세로로 길게 쓴 글씨가 김해박물관의 랜드 마크가 된다.                                                                                                  

 

 

< 정문에서 바라보는 "국립 김해박물관" 조형물 >

                                                                                   

김해박물관은 약 17.000여 평의 대지 위에 3.000여 평의 본관 건물 및 2.000여 평의 교육관 건물로 나누어져 있는데, 좌측 본관 건물 1층과 2층에 유물을 전시하는 "상설전시실" 이 자리잡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교육관이면서 어린이 체험실이 있는 "가야누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 "국립 김해박물관" 조감도 >

 

상설전시실 건물은 가야의 철광석과 숯을 이미지화 한 검은색 벽돌을 사용하여 철(鐵)의 왕국 가야를 상징하는 건물로 건축가 "장세양" 씨가 설계하여 건립하였지만, 상설전시실이 금년 년말까지 내부공사로 유물 전체를 우측에 있는 가야누리 건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 정문 왼편에 있는 본관이면서 "상설전시실" >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가야누리 건물은 단순하고 기하학적 비례를 사용하여 박물관 본관과의 이질감을 줄이고, 하나의 배경 같은 요소로서 건축가 "공순구" 씨가 설계하여 신축한 건물이라고 한다.     

 

< 교육관 건물 앞에 있는 "가야누리" 입석 >

      

가야 역사는 2천년 전 남쪽 바닷가 지역에서 시작하였으며 1천 4백년 전에 북쪽 내륙지역에서 끝나는 토호국들의 집단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삼국유사를 저술했던 고려시대의 중 "일연(一然)" 스님의 생각이다. 

삼국지, 삼국사기, 일본서기와 더불어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고고학 유물과 자료에 의하면 가야는 12개 이상의 나라들이 각각 독립된 역사를 누렸음을 알게 되는데, 이 각각의 나라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무려 6백년 동안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독립국가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사(加耶史)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三國) 만이 교과서를 통하여 공부하여 왔기 때문에 승자(勝者)의 독식으로 인하여 가야사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매장되어 버렸고, 단지 무덤에서 나온 몇몇 유물을 분석하고 추정하여 역사를 다시 조명할 수 밖에 없는 비애를 가진 나라들이다.

오늘 내가 이렇게 먼곳에 있는 김해박물관을 방문하는 이유는 이곳 지역에 출토된 유물을 관람하여 보면서, 가야인들의 진정한 삶을 다시 한번 더 깨우쳐 보기 위함이다.

가야누리 전시실 입구로 들아가면 1층과 2층에는 어린이들의 공간으로 꾸며진 체험실, 영사관, 교육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층으로 올라가면 성설전시실에서 이전한 유물을 관람하는 Booth로 만들어져 있다.

 

< 가야누리 내부에 있는 "안내 Desk" 와 3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트 >

 

엘리베이트를 이용하여 3층에 내려 제1 전시로 들아가면, 어느 박물관 동일하게 석기시대에서 부터 청동기, 철기시대 순으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 김해박물관에서는 가야국을 중심으로 발굴되어진 유물과 더불어 해상교역을 통하여 얻어진 외국 유물도 함께 진열하고 있다.

 

< 이전 기간을 알리는 전시실 "안내문" >

 

< 제1 전시실 입구에 있는 "구지가" 설명서 >

 

좁은 전시설 구석구석 벽면 따라 진열하여 놓은 Section에는 다양한 보석, 토기, 항아리, 부장품, 갑옷, 칼, 말안장,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지만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오히려 고령의 대가야(大加耶), 함안의 아라국(阿羅國), 창녕의 비사벌국(比斯伐國), 고성의 고자국(古自國) 등 각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 상호 비교가 가능하게 만든 전시실이다.

 

< 제1 전시실 내부를 구경하는 "관람객" >

 

< "석기시대" 에 사용한 돌 >

 

< 가야인들이 사용한 "청동기" 제품 >

 

< 가야인 무덤에서 발굴한 "새" 모양의 토기 >

 

< 함안 고분에서 발굴한 "수레바퀴토기" >

 

< 창녕 "비사벌국" 에서 발견한 토기 >

 

< 창녕 교동에서 발굴한 "유물과 뿔잔" >

 

< 고성 "고자국" 에서 발굴한 토기 >

 

중간 휴식처에서 잠시 휴식을 가지고 나서 제2 전시실로 들어가면 해상왕국(海上王國) 금관가야가 타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거래하였던 과정과 더불어 그 때에 교역한 외국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어, 국제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제2 전시실" 내부 진열 모습 >

 

< 가야인들이 사용한 "장신구" >

 

< 일본 "야요이토기" 전시품 >

 

< 가야인들의 토기에 새겨진 "문양" >

 

< 가야인들의 토기에 새겨진 "문자" >

 

< 가야인들이 사용한 "칼" >

 

< 가야인들이 "제철" 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제련 도구 >

 

< 가야인들이 사용한 "말 안장과 무기" >

 

< 가야인들이 입었던 "투구" >

 

< 가야인들이 사용한 "부장품" >

 

전시실 전체를 통하여 김해박물관에서는 국가가 지정하는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文化財)가 한점도 없는 빈약한 박물관이 되어지지만,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서울 중앙박물관이나 경주 경주박물관 보다 훨씬 더 오래된 선사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역사적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기회의 박물관이라 하겠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면 가야인들의 생활과 사용한 도구를 중심으로 체험실을 만들어 놓아, 어린이들에게 직접 체험을 통하여 고대 인류의 생활상을 공부하는 장(場)으로 이루어져 있어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 어린이들과 함께 체험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 1층에 있는 "어린이 체험실" 입구 >

 

< "체험실" 내부에서 연구하고 있는 어린이들 >

 

< 그림을 그리고 있는 "외국인" >

 

주마간산 식으로 구경하고 건물 밖 마당으로 나오니 김해박물관에서는 시원한 그늘 밑에서 직접 장승을 깍고 만들어 보는 체험과 더불어 김해 공인(工人)들이 만든 도자기에 무늬를 그려서 가져가게 하는 선물을 제공하는데, 조그마한 시골 박물관에서도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제고(提高)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 마당에서 "장승" 을 만드는 어린이 >

 

일반적으로 가야사는 서기 400년 경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가야를 공략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누어 지는데, 전기가야는 경남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이 중심이 되고 후기가야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이 되었으며 경남 함안의 아라국은 전기와 후기 모든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기가야는 남해안을 중심으로 동래, 김해, 창원, 마산, 함안, 고성, 사천, 진주 등이 남해 바다를 통해 전해지던 선진문물을 바탕으로 번성하였으며, 후기가야는 고령, 합천, 창녕, 함안, 의령, 산청, 거창, 함양 등의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가야 문화가 꽃을 피웠다고 본다. 

그래서 이곳 김해 박물관은 전기가야 중에 금관가야에 속하므로 후기가야에 속하는 고령 "대가야 박물관" 이나 함안 "함안 박물관" 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보다 시기적으로 많이 앞서 있으므로 출토되는 유물도 미약하다고 하겠다.

더욱더 금관가야 전성시대에 출토되어진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이 김해시 별도의 장소에서 "대성동고분박물관" 을 만들어 전시하므로 유물의 분산으로 인하여 더욱더 단촐함이 느끼게 하는 박물관이다.

 

< 김해박물관을 떠나면서 바라보는 "조형물" 측면 모습 >

 

아울러 대성동고분박물관과 고대 가야인들의 주거지, 바닷물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하여 축성된 호안시설 및 호수 등 가야의 유적을 잘 만들어 놓은 "봉황대" 까지 연계된 관람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애석하게 만드는데, 더위로 인하여 일찍 김해를 떠나 손녀가 기다리는 부산으로 달려가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