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문화와 산행.

청도군 금천면의 또 다른 명소가 되는 "대비사" 및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 을 돌아보면서.(3)

용암2000 2017. 4. 13. 00:14

2017년 4월 5일.(수요일)

 

1. 대비사 경내를 거닐면서. 

 

운강고택이 있는 신지리 마을 중앙에는 4거리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이곳 4거리 중에서 북쪽 방향이 되는 6Km 지점에 "대비사(大悲寺)" 와 더불어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는 이정표 따라 대비사를 방문하여 보기로 하는데, 나는 처음이지만 함께 여행을 즐기는 2명의 동문은 한번 방문한 사찰이라고 한다.

 

 < 신지리 마을 중앙 4거리 "대비사" 를 가르키는 이정표 >

 

사찰의 이름을 "대비사(大悲寺)" 라고 불려지는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뜻에서 유래되어진 것이라고도 하고, 일설(一說)에서는 당시 신라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사찰로 들어와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도 한다. 

대비사는 청도군에 속하는 운문산 지맥의 호거산(虎踞山)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신라 진흥왕 27년(566년)에 신승(神僧)이 처음 건립하였으며, 진평왕 22년(600년)에 원광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 "대비사" 를 안내하는 홍보물 >

 

이 사찰은 고려시대 이전에는 원래 박곡리 부락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는데, 대비사를 관람하기 위하여 먼저 박곡리에 있었던 옛 대비사 터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당을 먼저 구경하고 나서 대비사를 관람하는 것이 순서이라 하겠다.

그러나 오늘은 대비사를 먼저 관람하는 것의 좋겠다는 의견으로 승용차는 많은 물을 저장하고 대비 저수지를 빙돌아 저수지의 끝지점이 되어지면서 호거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대비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여 진다.

주차장에서 부터 대비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사찰의 경내를 표시하는 일주문 또는 사천왕문은 없지만, 사천왕(四天王)을 새긴 돌이 일렬로 나열하고 있는 길 따라 조금 들어가면 새롭게 건립되어진 2층의 누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누각에는 "용소루(龍沼樓)" 라는 현판 글씨가 이색적이다.

 

< 대비사 입구에 있는 "사천왕" 상 >

 

<대비사의 첫관문이 되는 "용소루" >

 

누각 아래로 만들어져 있는 통로를 이용하여 위로 올라가면 넓은 마당과 함께 마당의 뒤편 가장자리에 대비사 "대웅전(大雄殿)" 건물이 자리하고, 마당의 좌측에는 향로각 건물과 더불어 오른편에는 종무소 및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용소루 뒤편에서 바라보는 보물 제834호 "대웅전" >

 

  < 대자비 좌측에 있는 "향로각" >

 < 대웅전의 오른편에 있는 "종무소 및 요사채" >

 

2단으로 축조되어져 있는 돌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대웅전은 잡석의 기단 위로 자연석 주축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의 머리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고 있다.

특히 보물 제834호가 되는 대웅전 건물은 조선 숙종 11년(1685년)에 중건 하였는데, 건축 양식을 잘 갖춘 건물로서 전체 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공포(栱包)도 견실하게 짜여져 있다.  

 

< 짜임새가 있는 "공포" 로 건축되어진 대웅전 >

 

대웅전 내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경내가 너무나 조용하여 내부를 돌아보지 않고 대웅전 오른편으로 이동하면 돌에 새겨져 있는 부처님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편에 있는 삼성각(三聖閣) 건물 앞을 지나 대웅전 건물 뒤편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새겨 놓은 용두관세음보살을 한번 돌아보고 나서 경내로 내려온다.  

 

< 대웅전 건물 오른편 돌에 새겨져 있는 "부처님" >

 

< 돌에 새긴 부처님 뒤편에 있는 "삼성각" >

 

< 대웅전 뒤편에 있는 "용두관세음보살" >

 < 용두관세음보살 앞에서 내려보는 "대비사" 전경 >

 

그러고 나서 개울 건너편에 있는 부도탑을 보기 위하여 작은 다리를 건너 가는데, 부처님을 새겨진 거대한 바위 앞에 11기의 "고승대덕(高僧大德)" 의 부도가 놓여 있어 대비사가 한 때에는 얼마나 큰 사찰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 개울 건너편에 있는 "부도탑" 군락지 >

 

함께 관람하고 있는 동문이 5-6년 전에 방문하였을 때 경내 주변 전체가 야생화 단지를 꾸며져 있어 많은 불자들이 방문한 사찰이었는데, 현재는 그 많은 야생화는 흔적도 없이 살아지고 사찰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하여 곳곳에 공사장으로 변모하고 있어 매우 실망이 큰 사찰이라고 한다.

 

< "야생화 단지" 를 제거시키고 공사를 하고 있는 경내 >

 

2.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 구경.

 

대비사 관람을 끝내고 나서 다시 대비 저수지를 지나 조금 내려오면 이내 박곡리(珀谷里) 마을에 도착하면서 마을 중앙 앞에 있는 도로변에 보물 제203호가 되는 "석조석가여래좌상(石造釋迦如來坐像)" 있다는 안내문 따라 도로변에 승용차를 주차한다.

 

<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 을 설명하는 안내문 >

 

좁은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작은 공간의 미륵당 절터 중앙에 허물어져 가는 2층 석탑과 더불어 그 뒤편 마당의 한 구석에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머리 뒤편에 두르고 있는 광배석(光背石)이 놓여 있다.  

 

 < 미륵당 마당 가운데 있는 "2층 석탑" >

 

 < 미륵당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광배석" >

 

이 광배석 뒤편으로 매우 작은 미륵당 건물 속에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불상은 상, 중, 하대로 구분 되어지는 8각의 연꽃 모양의 좌대 위에 앉아 있으면서 전체 높이가 276Cm가 되어진다고 한다.

이곳 부처님은 몇 차례의 화재와 인위적인 파손을 당해 원래의 모습을 완전하게 잃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도 예술적 안목과 세련된 솜씨가 월등하나 얼굴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도록 망실되어 있다.

그래도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도 박력 있는 모습과 힘찬 어께와 당당한 가슴 및 몸에 밀착한 법의 등에서 강건하면서도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통일 신라시대의 석굴암 불상 양식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불상으로서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 보물 제203호 "석조석가여래좌상" >

 

이렇게 처음 대면하는 대비사 및 석조석가여래좌상의 관람을 끝내고 나서 원점이 되는 신지리 마을 4거리로 내려와 임당리 김씨고택을 방문하기 위하여, 임당리 동네를 가르키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