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문화와 산행.

안동시에 있으면서 민족 정기가 살아있는 대한민국 구국운동 성지 '임청각' 을 찾아서.

용암2000 2018. 10. 10. 21:40
2018104.(목요일)


학봉 고택을 떠난 우리부부는 안동시가지 외곽으로 만들어져 있는 낙동강변 따라 안동댐 방향으로 달려가다가 법흥 6거리에서 안동역 방향으로 꺽자 마자 철로(鐵路) 뒤편으로 들어가면, 한국에서 구국운동의 성지가 되는 보물 제182호 '임청각(臨淸閣)' 건물을 만난다.

< 주차장 가장자리에서 부터 만나는 '임청각' 건물의 돌담 >
 
< 임청각 건물 오른편 옆 국보 제16호 '신세동 7층 전탑' >
 
임청각은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바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라고 표현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있는 한편의 싯구에서 나오는 '()' '()' 를 인용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의 저서 택리지에 따르면 '임청각은 귀래정(歸來亭) 및 영호루(映湖褸)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名勝)이다'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 임청각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 가장 큰 규모로 500여년 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이씨(固城李氏)' 용현공파의 대종택(大宗宅)이다.
다소 작은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서 철로 길 따라 종택 앞으로 걸어가면 임청각으로 들어가는 좁은 대문을 만나는데, 대문 오른편에 '국무령 이상룡 생가(國務領 李相龍 生家)'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임청각으로 들어가는 '대문' >
 
국무령은 일제 시대 때 만주 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떠난 사람들이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스리는 대통령을 말하는데, 이상룡 선생님이 초대 대통령이 된다.
좁은 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오른편에는 다소 넓은 잔디 마당과 함께 오른편 끝지점에 변소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왼편으로 13칸이 되는 기나긴 행랑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행랑채' 의 측면 방향 >
 
이곳 행랑채에는 많은 창고와 더불어 방이 함께 하면서 건물 중간지점에 안채의 축대와 가로지르는 쪽문의 자리하고 있는데쪽문의 위에 '임청각 작은 전시관'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행랑채 중간지점에 있는 '쪽문과 작은 전시관' 현판 >
 
 < '작은 전시관' 내부의 전경 >
 
열려있는 쪽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니 대구 모 교회에서 방문한 한무리 여성 신도들과 함께 해설사가 전심전력으로 해설을 하고 있는데나는 처음 부터 경청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들으므로 매우 안타까움이 발생하여 진다.
 
< '해설사' 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관람객 >
 
이곳 임청각 건물의 첫 주인은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 선생님의 여섯째 아들이면서 영산현감 '이증선생님이 안동지역의 아름다움에 매료가 되어 여기에 자리를 잡으므로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 선생님이 중종 14(1519)에 낙향하여 본채를 건립하였고, 후손이 되는 허주 '이종악(李宗岳)' 선생님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허주 선생님이 거주하였던 시절에 안동주변 인구가 5.000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임청각에서 일을 하였던 노비(奴婢) 숫자가 자그만치 4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 주변과 함께 안동지역 전체가 임청각 주인공의 땅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부자이었고, 99칸 저택을 보유하면서 철저하게 노블레스(Noblesse)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이라 하겠다
후손 가운데 독립운동가가 되어진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님' 은 1858년 12월 28일 임청각에서 태어나 학문을 연마하다가 1910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한인동맹을 이끌어 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투사들을 키우고 초대 국무령으로 취임을 한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석주 선생님은 아들과 동생을 시켜 몰래 재산을 매각하기 시작하였는데, 문중에서 임청각을 비롯하여 모든 재산을 매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금운동을 전개한다.
그래서 임청각을 재 매입하여 석주 선생님에게 돌려 줄려고 하였으나 석주 선생님은 일제시대에 실시한 호적 등재를 반대하므로 재산을 이관하지 못하고, 문중 친인척 3명 앞으로 등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 '임청각' 을 비롯하여 토지 및 산 등의 판매 위임서 >
 
석주 선생님은 생가를 떠나면서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깍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나의 처자(妻子)를 헤치려 하니 내 머리를 자를 수 있겠지만 무릎끓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다' 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만주로 떠나 최전선에서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가 1932년 6월 15일 73세의 연세로 이국의 땅 만주에서 순국을 한다. 


< 전시관 내부에 있는 석주 '이상룡' 선생님 사진 >
 
< '이상룡' 선생님의 독립운동 활동 무대 >
 
순국 전 그의 아들이 되는 이준형(李濬衡)에게 '독립이 되기 전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겼지만일제시대 때 아들은 유언과 같이 유해를 만주에 두고 유품만 정리하여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들 이준형은 일제의 고문 및 협박으로 인한 고충과 더불어 변질을 요구하는 끈질긴 요청으로 1942년 아버지 석주 선생님의 문집이 되는 '석주유고(石洲遺稿)' 를 정리하고 나서, 아들 이병화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 임청각 건물의 변천사 및 9명의 '독립유공자' 내력 >
 
이 밖에 외숙(外叔)을 포함하여 문중 사람 및 처가  20여 명의 일가 친척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므로 안동이 전국에서 제일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라 하겠다.
임청각 건물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의 아지트로 사용하였으며 해방이 된 후에는 철도청의 간사로 사용하였지만이상용의 후손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어진 건물이 되었다.
현재 이병화씨의 자녀 다수 명이 대구 또는 객지에서 근근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만등기가 되어있는 3분의 후손들이 토지 양도에 따른 동의가 원활치 못하여 임청각 건물이 공중에 떠 있는 무허가 건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국가보훈청 지정 현충시설(顯忠施設)로 되어 있는데, 학교를 정년 퇴임한 한분의 교장 선생님 부부가 건물을 관리하면서 고택(古宅) 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2017 8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때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선생님의 손부(孫婦)에게 독립유공포상을 내리면서 이제 부터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망한다' 는 말이 절대로 없도록 하겠다고 연설 내용을 들으니 억장이 무너진다.
동년 9월 '김부겸' 행안부장관이 도산서원 및 임청각을 동시에 방문하여 복원에 따른 지원 예산을 마련하여 보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깜깜 소식이라 한다.

다소 짧은 해설을 끝내고 나서 본채가 되는 안채 영역과 정자가 되는 군자정 및 사당을 관람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와 뒤편으로 올라가는데, 올라가는 방법은 안채 영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군자정으로 바로 올라가는 내문(內門) 2개의 길이 있다.

< 행랑채에서 안채 영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
 
< '군자정' 으로 바로 올라가는 내문 >
 
안채 영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이용하여 위로 올라가면 사랑채 마당에 도착되는데이곳 대종택 건물은 영남산(嶺南山)을 배산으로 하여 비탈면에 자리하면서 건물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 영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임청각' 전경 >
 
건물 형태는 하늘에서 내려보면 한자 '쓸용()' 자를 누워 놓은 형태로 설계하므로 인하여 매우 큰 저택이 되지만, 일제의 만행으로 인하여 건물 바로 앞으로 철도를 부설하므로 사랑채에 딸린 건물 모두가 철거 당하므로 현재는 70여 칸의 주택이 남아있다.
해설사는 이곳 저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밀폐형이 되는 큰 'ㅁ자' 로 건립이 되어져 있는데, 오늘 많은 관람객으로 사람이 기거하는 안채로 들어가지 않고 사랑채만 관람하겠다고 한다.
사랑채 대청마루 안쪽 구석자리에 있는 방은 정승이 태어난다는 '우물방' 이라고 불려지는데, 천지(天地)의 기운이 모인다는 우물방에는 3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유래 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 우물과 함께 대청마루 구석에 있는 '우물방' >
 
< 대청마루 가장자리 따라 진열하고 있는 '생활도구' > 

우물방은 진음수가 나는 용천(龍泉)이 바로 방 밑에서 솟는다고 하여서 불려지는 이름인데, 실제로 석주 이상룡 선생님을 비롯하여 임청각 출신 9명의 독립유공자 모두가 이 방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임청각 건물 모양의 용(用)자는 '날일()' 자 및 '달월()' 자를 합한 것으로 하늘의 해와 달의 지상으로 불러 천지의 화합된 정기를 받고자 하는 기원이 숨겨져 있는데우물방은 용자의 작은 ㅁ과 같이 밀폐형이면서 건물의 중심에 있는 방이.
대청마루 앞 구석자리에 우물 한기가 자리하고 있는데이 우믈은 밖에는 우주를 나타내고 있는 원형이지만 내부는 땅을 나타내고 있는 정4각형으로 형성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마실 수 있는 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 밖와 다르게 내부가 정4각으로 되는 '우물' >
 
사랑채 마당에서 오른편으로 있는 쪽문을 통하여 외부로 나가면 임청각의 많은 건물 중 정자가 되는 '군자정(君子亭)' 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모양은 '천간 정()' 자를 옆으로 누인 '점복()' 자 형태를 하고 있다.
 
< 사랑채에서 군자정으로 넘어가는 "쪽문' >

건물 왼편에는 온돌방 4칸이 연접하여 만들어져 있고 오른편 2칸은 큰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건물 내부에 군자정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현판 글씨는 퇴계 이황(李滉)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 'ㅏ자' 형태의 군자정 건물 >
 
< 퇴계 산생님의 글씨 '임청각' >
 
군자정은 목조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 때 파괴되지 않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건물인데건물 전면에 과객들의 손을 씻는 4각형 석조 그릇과 함께 좁은 돌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돌계단을 이용하여 쪽마루로 올라가면 이곳 쪽마루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으로 만들어져 있어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하여 주고 있는데쪽마루에 서면 눈 앞으로 일제의 만행이 되는 철로(鐵路)가 눈에 가시와 같이 자리하고 있다.

< '계자각' 난간으로 설치되어 있는 군자정 >

< 군자정 후면 까지 연결하고 았는 '계자각' 난간 >
 
철로 바로 뒤편으로 멀리 태백시 황지 연못에서 발원하여 흘러 내려가고 있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 강변에는 멀리 부산에서 배들이 올라와 정박하는 낙동강의 마지막 나룻터가 자리하고 있어 모든 물류의 출발지점이 임청각이 되었다고 한다.

< 임청각 대문 바로 앞으로 지나가는 '철로' 와 < '철로' 뒤편의 낙동강 >
 
닫혀 있는 문을 살짝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나무로 되어있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으면서 벽면 전체에 한시(漢詩)를 비롯하여 많은 훈장이 걸려 있는데, 한 벽면에는 이현보(李賢輔) 등의 시판(詩板)도 걸려있다.
 
< 대청마루 내부 벽면에 붙어 있는 '한시 및 상장' >
 
< 국가에서 내린 각종 '훈장' >
 
군자정 오른편으로 연못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연못도 음양오행설에 부각하는 4각형 연못으로 내부에 원형의 동산이 있어지만 동산은 파괴가 되어 현재는 원형의 작은 돌로 대신하고 있다.
 
< 군자정 오른편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연못' >
 
이곳 연못 오른편으로 또 다시 일단의 축대 위로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그곳으로 올라가면 단촐한 사당 건물을 만나는데, 건물 내부에는 조상의 위패(位牌)를 모시지 않고 있다고 한다.
 
< '사당' 으로 올라가는 쪽문 >

이상룡 선생님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 라고 하면서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으므로 인하여, 현재는 봉안되어진 신위(神位)도 없는 비극적 사실을 대면하는 건물이다


< 위패도 없는 '사당' 건물 전경 >

독립운동을 위하여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가 되어진 이상룡 선생님의 일생을 대면하여 보는데, 대궐 같이 크고 아름다운 건물 임청각 까지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지만 광복 이후 희생의 대가는 친일파에 의한 폭압과 가난 뿐이라고 한다.

그 동안 구천에 떠도는 이상룡 선생님 유해는 19909월 하얼빈에 있던 유해를 대전 현충원으로 모셔왔고 1996년 다시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하였지만, 2009년에서야 비로써 국적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해설사는 본인이 오늘 해설을 하고 있지만 만약 자기가 그러한 처지가 되면 절대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귀전에 두고, 오전에 잠시 돌아보았던 안동국제탈춤 페스티벌 행사장으로 달려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