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문화와 산행.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학봉 '김성일' 선생님의 종택 및 기념관을 돌아보면.

용암2000 2018. 10. 6. 19:39
2018년 10월 4일.(목요일)


1. 학봉 선생님 종택 구경.
2018 안동국제탈춤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메인공연장 일원에서 머물다가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하는 오후 까지 잠깐 동안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학봉 '김성일(金誠一)' 선생님이 살았던 종택(宗宅)을 방문하여 보기로 한다.
승용차는 낙동강번 따라 조금 내려가서 현재 경북도청 소재지가 있는 풍산읍과 예천군 방향으로 달려가다가 송야사거리에서 오른편 봉정사 9Km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들어가는데, 봉정사는 한 때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으로 너무나 유명한 사찰이 되어진 곳이다.
봉정사 방향으로 3Km 정도 올라가면 조그마한 개천을 건너면서 개천 옆으로 만들어져 있는 도로 따라 조금 들어가면, 학봉(鶴峰) 종택을 가르키는 이정표 따라 오른편 방향에 다소 넓은 주차장과 함께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 도로변 학봉 '종택' 을 가르키는 이정표 >


< 도로변에서 바라보는 '종택' 전경 >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하고 나면 야산 쪽 방향에는 기념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편 방향에는 종택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문 앞에서 종택을 관리하는 한분의 할아버지가 정원을 손질하고 있다.


< 솟을대문 앞에 있는 넓은 '주차장' >


< 종택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할아버지에게 종택을 좀 구경하겠다고 양해를 구(求)하니 흔쾌하게 방문하여도 좋다는 이야기로 솟을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는데, 넓은 잔디 마당과 함께 잘 가꾸어진 정원이 종택의 풍미(風味)를 가미시켜 준다.


< 종택 앞 잘 가꾸어진 '정원' >


잔디 마당을 지나면 2개의 작은 까치구멍 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 일자형(ㅡ) '대문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문채 건물의 중간지점에서 약간 오른편으로 치우치는 곳에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자리하고 있다.


< 잔디 마당과 함께 하고 있는 '종택' >


< 2개의 까치구멍 지붕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대문채' >


대문채 오른편으로 부섭건물과 같은 형태로 '사랑채' 건물이 연결하면서 건립되어져 있는데, 팔작지붕을 가진 사랑채에는 4칸의 방으로 만들어져 있으면서 방의 앞에는 툇마루가 놓여있다.


< 대문채와 일자로 연결되게 지어진 '사랑채' >


툇마루에는 누각의 난간(欄干)과 같이 계자각(鷄子脚) 난간으로 만들어져 있어 건물의 운치를 더하여 주고 있고, 각 방으로 들어가는 방문 위에는 한자로 쓴 4개의 현판이 붙어있다.


< '계자각' 난간을 가진 사랑채 >


< 사랑채 제일 오른편 방문 위에 있는 '현판' >


< 사랑채 중앙에서 오른편 방문 위에 있는 '현판' >


< 사랑채 중앙에서 왼편 방문 위에 있는 '현판' >


< 사랑채 제일 왼편 방문 위에 있는 '현판' >


대문채 중앙에 있는 대문을 통과하여 안채로 들어가 보면 북방 계통에서 흔히 불 수 있는 전 방향으로 막혀 있는 폐쇄형 'ㅁ자' 형태의 안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안채의 건물 처마에도 한자로 쓰여 있는 현판이 붙어있어 건물의 위용을 느끼게 만든다.


                                                                         < 안채 중앙 방문 위에 있는 '현판' >


< 안채 왼편에 있는 '건물 및 부엌' >


< 안채 오른편에 있는 '건물 및 방' >


안채에서 다시 밖으로 나와 잔디 마당의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마당의 가장자리에 울창한 소나무 숲과 함께 '풍뢰헌(風雷軒)' 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정자 건물도 매우 육중함을 느끼게 하는 건축물이 되어진다.


< 종택의 왼편 가장자리에 있는 '풍뢰헌' 정자 >


풍뢰헌 정자의 안쪽으로 학봉 선생님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전면에 있는 설명문에 따르면 운장이라는 말은 '저 넓디넓은 은하수(倬彼雲漢)가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爲章于天)' 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 풍뢰헌 안쪽에 있는 '운장각' >


운장각에는 경연일기, 해사록 등 학봉의 친필 원고와 사기(史記) 및 고려사 절의 등 조선시대 초기에 간행된 고서 56종 261점, 교지, 유서류, 고문서 17종 242점이 보물 제905호 및 제90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밖에 학봉 선생님이 사용한 안경 및 벼루를 비롯한 유품과 후손들의 서적과 고문서를 함께 보관하고 있지만, 굳게 잠겨진 문으로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게 한다.
이곳 운장각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당 영역이 되어지는데, 일단의 축대 위에 있는 쪽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학봉 선생님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사당 건물을 만난다.


< 종택 오른편 제일 구석자리 '사당' 으로 올라가는 쪽문 >


< 학봉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


이상과 같이 간단하게 학봉 선생님이 거주하였던 종택을 구경하고 나서 다시 솟을대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와, 종택의 왼편에 건립되어 있는 기념관(記念館)을 관람하기로 한다.


2. 학봉 선생님 기념관 관람.
기념관 입구에는 학봉 선생님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병 하였을 때 진주에 있는 촉석루에 오르니 성(城)이 텅비어 있으면서 강물만 흐르고 있어 서글품을 가눌 수 없어 지은 시(詩)가 붙어있는데, 학봉을 따르는 2명의 장수와 함께 나라를 지키겠다는 삼장사(三壯士) 결의가 묻어난다.


< 종택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학봉 기념관' >


< 기념관 입구에 있는 삼장사 결의문 '시' >


내부로 들어가면 학봉 선생님의 일대기를 기술하고 있어 그 내용을 요악하여 보면, 학봉 김성일(金誠一)은 1538년에 청계 '김진(金璡)' 공과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에 5남 3녀 중에 4자(子)로 의성김씨 종택이 있는 안동 임하면 내앞(川前)에서 출생하였다.


< 년도별 '학봉' 선생님의 연역 >


1556년 19세 때 퇴계 이황(李滉) 선생님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선조 1년(1568년)에 문과에 급제를 하였고, 그 후 이조와 호조의 낭관을 거쳐 선조 10년(1577년)에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明) 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간, 홍문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선조 12년(1579년)에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나가 6진(鎭) 등 국경지대를 살펴 보았고, 선조 15년(1582년) 현재의 위치가 되는 안동 금계리로 이거(移居)하여 세거지로 삼았다.
선조 16년(1583년)에 다시 황해도 순무어사로 나가 군정과 부역의 잘못과 백성의 삶을 살폈고, 이를 바로 잡을 '대동법(大同法)' 을 시행하여야 한다는 7개 조항의 상소문을 올린다.
선조 23년(1590년)에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 등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가 다음 해 일본에서 돌아온 황윤길은 현지의 분위기를 볼 때 일본이 침공해 올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당파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 의견으로 보고를 한다.
 
황윤길 외에 다른 수행원들도 일본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했으나 조정은 김성일 보고를 믿는 우(愚)를 범하는데, 이듬 해가 되는 선조 25년(1592년) 일본이 침공해오자 선조 임금은 김성일의 처벌을 명했으나 김성일과 동문수학을 하였던 유성룡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김성일은 경상도 병마절도사, 초유사(招諭使)로 임명이 되어 함양, 죽산 등에 격문을 띄웠으며, 관군과 의병의 통합 조직을 만들면서 곽재우의 도움을 받아 경상도 지역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이어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어 관내 각지를 순행하면서 독전(督戰)을 하였으나, 진중에서 얻은 전염병으로 인하여 이듬 해가 되는 선조 26년(1593년) 4월 29일 향년 56세로 진주공관에서 순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의 발생 예측을 잘못한 허물로 인하여 세인(世人)들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지만, 전란 중 보여준 뛰어난 활약상으로 인하여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하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더불어 학봉 선생님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적통(嫡統)으로 이어 받았던 대학자이고, 임금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현신이면서 아울러 진정으로 민생을 염려했던 정치인으로 그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 '퇴계' 학파의 계통도 >

전시실 곳곳에 학봉 선생님은 의병과 교우한 흔적을 상세하게 기술하므로 우리의 역사에서 배웠던 내용과 너무나 차별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하여 주는 기념관이 되어진다.


< '전시실' 내부의 모습 >


< 임금으로 부터 받은 '교지' >


< 학봉 선생님이 사용하였던 '유물' >


< 학봉 선생님의 '생가 및 서원' >


< 학봉 선생님이 저술한 '책' >


< 퇴계 선생님이 '학봉' 선생님에게 내린 글 >

이렇게 간단하게 학봉 선생님의 종택 및 기념관을 관람하고 나서 다시 안동시가지로 나오는데, 이제는 안동댐 바로 아래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항일운동의 선구적 역활을 하신 석주 이상룡 선생님의 생가 임청각' 을 구경하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