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회.(대학교 69학번 모임)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여행 : 경상남도 남해군에 있는 문학의 섬 "노도" 를 탐방하여 보면서.

용암2000 2010. 5. 4. 01:12

2010년 5월 1일.(토요일)

 

1. 여행의 개요.

이번 주말은 꾸준하게 다니던 산행길을 잠시 내려 놓고 여러 명의 친구들과 어울려 풍경이 있는 곳을 방문하기로 하는데, 방문하는 곳은 경상남도 남해군에 있는 "노도(島)" 이라는 섬이 되겠다.

아침 9시 정각 3대 승용차로 부부동반으로 총 12명이 대구시가지를 벗어나 구마고속도로 거쳐 남해고속도로에 올라 서니까 행락객의 차량이 고속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거북이와 같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전진하게 만든다.

화창한 봄 날씨가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것 보다 남쪽에서 거주하는 경남 및 부산 시민들이 동시에 나들길을 만들고 있다.

마산에서 부터 진주 까지 거의 1시간 동안이나 정체를 꺽은 후, 가까스럽게 정체가 풀리면서 사천 Toll gate를 벗어나 삼천포시가지를 통과하여 창선대교에 이른다.

나는 몇일 전 남해군 창선면 중앙을 연결하면서 솟아있는 대방산을 등산하기 위하여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통과하였던 다리를 오늘 승용차를 이용하여 건너가 보는데, 창선대교는 언제 보아도 교량 미(美)가 매우 아름다운 교각의 박물관이다.

창선도에서 남해섬으로 넘어가는 창선교를 지나자 마자 왼쪽 방향의 해안길 따라 야산으로 올라서니까, 죽방 멸치를 잡는 시설들이 바다 군데군데 놓여 있는 모습이 내려다 보인다.

 

2. 독일마을 견학.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에서 출발하는 3번 국도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는 해안길 따라 운전하다 보면, 눈 앞에는 파란색 바다가 내려보이는 아담한 야산의 기슭면에 구름과 같이 앉자있는 "독일마을" 이 나타난다.

 

< "독일마을" 로 들어가는 입구 >

 

< 독일마을에서 내려다 보이는 "파란색 바다" >

 

산기슭 따라 만들어진 도로 양쪽 방향에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조성된 그림과 같은 집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치 유럽의 작은 마을을 통째로 옮겨 놓은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 마을은 1970년 대 독일로 돈을 벌기 위하여 떠나간 간호원과 광부들이 타국에서 가진 고생을 하면서 자립에 성공하여 황혼기의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일부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모여 고국땅으로 다시 돌아와 해안가에 정착한 마을로써, 카페 또는 민박도 겸하면서 노후생활을 즐기며 오손도손 살아가는 은퇴촌이다.

 

<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독일촌 마을" 전경 >

 

오늘 독일촌 마을 내부를 돌아보면서 한때 내가 독일에서 산업연수 교육을 통하여 만난적이 있었던 한명의 간호원 처녀를 생각나게 만드는데, 그녀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라 하겠다.

1978년 5월 내가 독일로 연수를 갈 시점에 위장병으로 각혈을 할 정도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기술 전수를 받고 있었는데, 그 때 우연한 기회에 쾰른(Koln)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간호원을 만났다.

그녀가 가져다 주었던 약을 복용하여 건강하게 한국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한 여인이었는데. 그때 나는 이미 결혼한 상태라 꼬실 형편도 아니면서 오직 한국의 산뜻한 소식만 전하는 정도 밖에 되지않는 존재이었다.

어느날 다방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타고온 자전거를 분실하였는데, 경찰에게 신고하니까 경찰은 동양인이라고 깔보면서 훔쳐간 독일인 입장만 이야기하고 가는 경찰관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분통을 삭혔는지?

우리 열심히 일하여 잘 살아가는 민족이 되어 보자고 다심하면서 헤어진 그 여인.

그 시대 한국에서 생산하는 위장약은 겔포스가 최고의 약품이었는데, 독일에서는 벌써 "타가메트" 같은 제3세대 위장약이 실용화하고 있어 얼마나 의료의 선진국이었는지...

그때 독일에서는 현재 한국의 의료 System과 같이 의사의 처방전 없이 의약품 구입이 불가능하였고, 또한 고가의 약을 구입 할 형편도 되지 않은 나에게 다양한 상비약 까지 구입하여 줌으로 인하여 한국으로 돌아 올 때 약만 한 보따리 가지고 오는 행운을 가진 일이 있었다.

어찌하든 나의 건강을 위하여 다양하게 약을 빼돌려 가지고 나오는 대담한 행동과 더불어 자전거 분실 등 물질적인 손해까지 감수하면서도 오직 고향소식 한 토막 들어보기 위하여 약 2개월간 종종 만남을 가진 여인이다.

현재는 그녀의 고향(충청도 or 전라도?)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아마 그때는 알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완전히 까마게 지워진 여인. 

나의 뜻이 하늘에 빌면서 그녀가 이곳 독일촌에서 생활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나의 블로그(Blog)에 들어와 나의 글을 보고 있다는 연(連)이 닿으면 그때의 은혜에 대하여 수십배 보답을 하겠는데....

독일마을 뒤편 언덕의 고개를 넘어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서니까 "원예 예술촌" 마을 초입에 도착하는데, 이곳 원예 예술촌의 풍경도 매우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 독일촌 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원예 예술촌" 주차장 >

 

문제는 원예 예술촌을 관광하기 위해서는 입장료 5.000원을 요구하면서 적어도 1-2시간의 관람 시간이 필요하게 만드는데, 배 속에 거지 소리가 난다는 열화와 같은 요청에 따라 내부로 들어가는 입장은 생략하고 한국에서 아름답기로 이름이 난 "미조" 항구로 내려가기로 한다.

 

3. 미조항에서의 점심식사. 

미조항은 남해의 "나폴리" 이라고 불려지는 항구로 야트마한 언덕을 사이에 두고 남항과 북항으로 구분되어 자리하고 있는 어촌이다.

야산 언덕에서 내려보면 항구의 중앙에 혹과 같이 돌출되어 있는 육지 속 항구가 숨어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특히 번잡한 북항은 여인의 자궁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 스러운 형상과 유사하여 아무리 강한 태풍이 불어와도 파도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항구이다.

부두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배들이 정박하고 있는 부두 길 따라 걸어보는데, 부두에 정박하고 배들은 어선 보다 대부분 낚시 배와 유람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곳은 어촌이라기 보다는 휴양과 더불어 여가를 즐기는 장소로 변모하고 있는데, 그래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항구이다.

 

< 바다와 산이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는 "미조항" 전경 >

 

북항 중심지에 있는 한 횟집으로 들어가니 넓은 횟집 홀에서 많는 사람들이 회를 먹고 있어 일행도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아본다.

다양한 종류별 회를 주문하여 먹어보니 회가 정말 싱싱하면서 남해가 자랑하는 햇 마늘의 쫑과 함께 먹는 재미가 쏠쏠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수 많은 빈 소주병이 창출하게 한다.

 

< 싱싱한 "바다 회" 를 즐기고 있는 일행 >

 

오후 4시 까지 주린 배속을 꽉꽉 채우고 나서야 비로써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는데, 다음 코스는 상주해수욕장을 지나면서 남해가 자랑하는 금산의 8-9부 능선 정도에 자리하고 있는 선이 굵은 암봉과 더불어 보리암 및 미륵불을 바라보면서 고불고불한 산길로 만들어져 있는 도로 따라 일주하여 본다.

 

4. 서포 김만중 선생님의 유배지 노도 섬의 탐방.

한 10여 분 정도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달려가면 거대한 "앵강 만" 바다가 보이는데, 도로 가장자리에 "벽련마을" 이라고 표시된 거대한 입석에 세워져 있는 마을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 이정표 언덕 아래 방향으로 조그만한 어촌(漁村)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도로에서 마을이 전연 보이지가 않아 조금만 방심하면 그냥 지나쳐 버리기가 십상의 어촌이라 하겠다. 

 

< 앵강 만을 품고 있는 언덕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벽련마을" 전경 >

 

벽련마을 앞 방파제에서 조그마한 조각배를 타고, 서포 "김만중" 선생님이 유배되어 살다가 돌아가신 섬 "노도" 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노도로 들어가는 정기적인 배는 없고 수시로 고기잡이를 하는 낚시배를 불법으로 운행하여 들어가야만 하는데, 부두가에는 어선의 전화번호가 붙어있다.

이곳 항구에서 노도 까지 운행하는 배의 요금은 별도로 지정된 금액이 없고, 여름 성수기에는 인당 최고 10.000원 정도를 받지만, 지금과 같이 비수기에는 흥정이 최고의 미덕이라 하겠다.

 

< 벽련마을에서 본 "노도" 전경 >

 

선착장에 메어 놓은 여러 낚시배 중 한채의 배 앞에 적어 놓은 전화번호로 연락하니까 1-2 분 정도 기다림을 가지고 나니 선주가 나타나 배에 시동을 거는데, 우리 일행은 단체로 왕복 5만원으로 계약하고 배에 승선하기로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배가 접안하여 있는 곳으로 가니까 배를 타기 위하여 건너가는 길이 너무나 위험한데, 여자 몇명은 안가겠다고 줄행낭을 쳐 버린다.

할 수 없이 몇명을 부두에 남겨두고 자가용과 같은 배에 올라 타고 바다로 나아가는데, 채 5분도 안되면서 노도선착장에 도착한다.

 

< 문학의 섬 "노도" 안내 표시판 >

 

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별천지 같은 세상으로 흡수 되는데, 방파제로 둘려쌓여 있는 항구를 중심으로 산기슭에 기대면서 건축된 13가구 아담한 집들이 비탈면 따라 동백나무 그늘 아래에서 고즈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 부두에서 바라보는 "노도마을" 전경 >

 

< 마을 뒤편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노도마을" 전경 >

 

노도마을을 통과하여도 개가 짖는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 참 조용한 곳인데, 문명의 이기는 전연 존재하지 않은 안락한 어촌이라 하겠다.

한때 초등학교 분교가 있을 정도의 번잡한 마을이었는데, 학교는 폐교가 된지가 몇 십년이 되어 남해군 지자체에서는 폐교 자리에 서포 선생님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비용 문제로 무한정 연기 되고 있다고 한다.

집 마당에서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 몇명의 할머님들이 어디서 왔는지 궁궁하다면서 말을 걸어오는데, 이곳 노도섬에는 할머니 13명 및 할아버지 4명 등 총17명이 살고 있으므로 할머니 혼자 생계를 유지하시는 분만 9명이 된다. 

일찍 지아비를 바다에 묻었는지 아니면 세월이 잡아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얼마나 사람이 그리워 했으면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유일한 락(樂)이 되겠지만, 반대로 뭍에서 들어온 나그네들은 주어진 시간 내로 섬을 돌아보고 떠나야 하는 긴박한 사정이라 이해를 하리라.

마을 중앙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 따라 올라가면, 오솔길은 이내 산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방향으로 길이 이어진다.

 

< 거대한 "동백나무" 밑으로 지나가는 마을의 안길 > 

 

가는 길가에는 이름도 없는 야생화가 만발하게 피면서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데, 일부 아낙네들의 걷는 걸음이 억망으로 늘어지면서 꽃에 도취되어 있다.  

 

< 망중한으로 걷고 있는 "아낙네" >

 

이곳 노도에서는 건너편에 있는 남해까지 바다를 가로질려 고압선이 지나가고 있는데, 섬과 섬 사이에는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마주보고 있어 멀리뛰기를 좋아하는 운동선수는 바로 뛰어 넘어 가겠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겠다.

산의 허리를 돌아 10여 분 정도 걸어가면 3거리 안부를 만나는데, 위쪽의 길은 서포 선생님의 "허묘" 가 있다는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고 아래쪽 방향의 길은 유배지가 자리하고 있다고 표시를 하고 있다.

먼저 유배지 쪽으로 내려가면서 또 다른 산자락을 한바퀴 돌아서 가면 다소 큰 골짝이가 나오면서 안내문 한개가 서 있는데, 안내문에는 나그네들이 여기까지 열심히 땀 흘리면서 방문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 서포 "김만중" 선생님이 유배가 되었던 사연을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 >

 

골짝이 조금 위에 동백숲으로 돌려 쌓여 있는 초옥 한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초옥의 옆 야산에는 서포 선생님이 직접 발견했다는 아담한 우물 한개도 보인다.

일행은 마루에 앉자서 서포 선생님의 생활상(生活相)을 그려보는데, 서포 선생님이 얼마나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면서 초옥에서 갇혀 살았겠나?

 

< 서포 선생님이 머문 "초옥" 마루에 앉자서 >

 

< 서포 선생님이 발견하여 만든 "우물" >

                                                    

현재 MBC에서 인기리 방영하고 있는 "동이" 이라는 연속극도 이야기하여 보고 앞으로 서포 선생님의 역활 여부도 응급하여 보는데, 서포 김만중은 붕당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던 17세기 이름난 "광산김(光山金)" 씨의 명문가 후예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탓에 어머니 윤씨 만을 의지하면서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책을 구하는데 값을 따지지 않을 정도로 아들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 결과로 서포 선생님은 29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뒤 대제학 을 비롯하여 의금부 판서 등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숙종 임금님이 가장 사랑한 애첩 "장희빈" 에게 농락 당하면서 머나먼 남도의 섬 노도 까지 유배되어 위리안치를 당한 인물이다.

위리안치는 다른 사람과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가시덩굴을 심어 출입을 통제가 되어질 정도의 중(重) 죄인으로 취급을 하는데, 현재 초옥은 가시덩굴은 고사하고 동백나무로 둘려쌓여 있으면서 초호화판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나 보다.

섬 사람들이 서포 김만중을 "노자묵고 할배" 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놀면서 먹기만 하였던 할아버지" 라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그 시절 어촌에 사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여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시절에 한양에서 내려온 한 노인이 초옥을 짖고 책만 읽으면서 살고 있었으니, 그들의 눈에는 아마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년한 현실 일 것이다.

어찌하든 서포 선생님은 이곳에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윤씨행장" 등 우리나라 국문사에 기억되는 소설과 시를 쓴 인물이다.

특히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아 구운몽(九雲夢) 이라는 소설을 만들었고, 더불어 어머니의 삶과 성품을 그린 윤씨행장(尹氏行狀)도 만들어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배생활 4년 만에 숙종18년(1692년) 나이 56세에 이곳 노도에서 죽음을 직면하는데, 오늘 새롭게 만든 초옥 마당에 서 있으니 참 고독한 생활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에 젖어본다.

 

< 초옥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작은 "바다" >

 

초옥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서 북향을 보고 있으면서 뒷산이 너무 높아 햇빛도 일찍 넘어가는 곳에 자리 하면서 초옥 앞에는 좁은 시야의 바다만 조금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곳이 천혜의 외로운 귀양지가 되는데, 한양에서 높은 벼슬에 떵떵거리며 생활하다가 말년에 홀로 생활하는 신세로 전락되었으니 얼마나 적적하였겠나?

 

5. 서포 선생님의 무덤에 올라보면서.

되돌아 나오면서 서포 선생님의 허묘(墟墓)로 올라가는데, 허묘가 100m 전방에 있다고 하는 이정표 따라 올라가지만 길의 전부가 돌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무덤 까지 올라서니까 온몸에 땀으로 번벅이 된다. 

 

< 3거리 안부에서 "허묘" 를 가르키고 있는 이정표 >

   

허묘 위에는 벌초를 하지 않은 죽은 풀이 조금 남아 있으며 그 앞에 비석 한기가 서 있는데, 비석 내용은 서포 선생님이 작고한 후 시신을 이곳에서 약 6개월 간 안치되었다가 후손들이 육지로 이장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 서포 선생님의 약 6개월간 묻혀 있었던 "허묘" 전경 >

 

아쉬운 길을 되돌아서 선착장에 내려오니까 배가 떠나지 않고 그대로 정박하고 있는데, 부두에는 할머니 몇 분이 바다가 방파제 위에서 저물어가는 햇살에 의존하면서 미역을 손질하고 있으면서 자주 놀려오라고 다시 여운을 남긴다.

 

< 노도를 떠나는 "동진" 호의 선장님 > 

 

앵강만을 가로 질러 배를 타고 나오니 앞에는 해발 681m 남해의 진산이 되는 금산의 수 많은 바위들이 저물어가고 있는 햇살에 반사되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또한 왼편의 바다의 끝에는 해발 488m 설흘산의 높은 봉우리에 햇님이 걸려 있는데, 그 아래 방향에는 유명한 가천 "다랭이논" 이 희미하게 보인다.

 

6. 여행을 끝내면서.

남해도에 무사히 도착한 일행은 약간의 간식을 보충하면서 일몰을 보기 위한 다음 방문지를 설명하니까 모두가 피곤하니까,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므로 이제는 나이 앞에 장사가 없나 보다.

본래 계획과 같이 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데, 산이 저렇게 푸르고 바다가 저렇게 반짝이고 있으므로 오늘 다 못한 일정은 차후에 다시 시도하면 되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품으면서 남해를 떠나기로 한다.

일단 창선도 중간에 있는 창선대교 휴게소에서  다시 모여 코에 바람도 한번 넣고 또한 요강도 비우고 2차로 현풍휴게소에서 다시 집결하기로 한다.

운전자에게 충분한 휴식도 겸한 안전운전이 이루어 지도록 운행계획을 추진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는데, 다시 진주 Toll gate르 진입하여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대구 방향으로 달려간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선대교 휴게소" 에서 >

 

오늘 다소 빡빡한 스케줄(Schedule)의 여행이 되었지만, 그래도 짧은 봄날 하루 동안 충분하게 스트레스(Stress)를 날려보내는 여정이라 하겠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