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행사.(전라도)

전라남도 해남군의 유명한 사찰 '대흥사' 및 북미륵암의 국보 '마애여래좌상' 을 돌아보면서.(7)

용암2000 2020. 7. 17. 12:45


3. 셋째날 : 7월 5일.(일요일)



1) 금일의 여행 개요.
셋째날은 전라남도 남쪽에 있는 해남군와 강진군, 영암군, 화순군 등 드라이브(Driver)도 하면서 관광지를 구경하기로 하는데, 마지막으로 광주광역시로 올라가 일전의 여행과 동일하게 광주 인근에서 마지막 밤을 유숙하고 넷째날 일정은 계약 시간 11시 20분 까지 승용차를 반납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립하여 본다.


2) 대흥사 및 북미륵암을 찾아서.
아침에 일어난 일행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하여 해남읍사무소 주변을 돌아보아도 적당한 식당을 찾지 못하여 대흥사(大興寺) 입구에 있는 식당 촌으로 들어가기로 하는데, 대흥사로 가는 길은 어제 저녁에 구경하였던 녹우당 앞을 통과하여 10여 분 정도 더 남쪽으로 내려간다.

넓은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아침식사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 경내로 들어가는데, 경로(敬老)의 혜택으로 승용차 주차비만 지불하고 대흥사 입구에 있는 몇 개의 주차장에서 사찰에 제일 가까운 주차장으로 올라간다.
일주문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하고 나서 일주문을 통과하면 그 뒤편으로 부도탑 군락지를 만나는데, 부도탑 군락지에는 너무나 많은 부도탑이 세워져 있어 대흥사가 얼마나 역사가 깊고 유명한 승려가 많이 배출한 사찰인지를 간접적으로 알게 만들어 준다.


< '대흥사' 로 들어가는 일주문 >  


< '부도탑' 의 군락지 >


나는 이곳 대흥사를 까마득한 옛날에 한번 방문하였고, 2007년 3월 17일 55번 국도에 있는 쇠뇟재에서 출발하여 위봉과 두륜봉을 통과하여 두륜산 정상 해발 703m '가련봉' 을 찍고 오심재로 하산하여 북미륵암을 지나 대흥사로 내려온 종주의 산행을 하였던 경험이 있는 산이다.
두번의 방문을 통하여 대흥사를 관람하였지만 나의 블로그를 작성(블로그와의 첫 만남 일자 : 2009년 3월 15일 부터)하기 전에 관람한 사찰이라 다시 한번 더 기억을 더듬은 차원에서 관람하겠다는 심정으로 경내로 진입한다.
그 때 대흥사에는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우리나라 사찰 내에서 사당(祠堂)이 되는 표충사(表忠祠)가 혼존하고 있다는 것,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 현판의 글씨 및 용마루 중앙에 있는 한장의 청(靑)기와, 초의선사(草衣禪師)와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님과 다(茶)의 이야기 등 너무나 유명한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사찰이라 하겠다.
부도탑 군락지에서 조금 걸어서 경내로 올라가면 사천왕문(대흥사에서는 해탈문이라고 함)을 만나고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넓은 광장에 도착하는데, 대웅보전의 수리로 인하여 광장의 가장자리에 임시로 만든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다수의 불자들과 함께 스님이 법회를 드리고 있다.


< 대흥사의 두번째 관문 '해탈문' >


< 해탈문을 지나면 만나는 '광장' >


<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임시 '대웅보전' >


대흥사(大興寺)의 창건 설은 다양한 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을 하였고 자장(慈藏)스님과 도선(道詵)스님이 계속하여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정설로 보고 있지만, 정확한 창건 시점으로 따르기에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한 천년 고찰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의 호국도량은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는데, 해남 두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 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고, 한국 불교의 종가집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사찰이라 하겠다.
풍담(風潭)스님으로 부터 초의(草衣)스님에 이르기 까지 13대 '대종사(大宗師)' 가 배출하였고, 만화(萬化)스님으로 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 까지 13대 '대강사(大講師)' 가 이곳 대흥사에서 배출하였다고 한다.
또한 대흥사 경내 및 산내 암자에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데,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 1개의 국보와 6개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더불어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더불어 대흥사 전체가 사적 명승 제9호로 지정되어 사찰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
넓은 산간 분지에 자리하고 있는 대흥사는 크게 4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람의 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당우들이 자유롭게 배치하고 있는 독특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계곡 따라 흐르고 있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먼저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으로 나누어 지는데, 남원에는 또 다시 천불전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 영역과 표충사 영역 및 동국선원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 경내로 흐르고 있는 '금당천' >


먼저 북원을 구경하기 위하여 계곡으로 내려가니 공사로 인하여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어, 오늘 내가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청기와 및 대웅보전의 현판을 보지 못하여 너무나 아쉬움이 일어난다.


< 공사로 인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북원' >


먼 발취에서 북원을 내려보는데, 북원은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청운당, 대향각, 선열당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곳 대웅보전의 현판에 대한 이야기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님이 그렇게도 높은 벼슬을 하면서 글씨의 대가로 알려졌는데, 어찌하여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길에 이곳 대흥사에 들려 대웅보전에 원교 '이광사(李匡師)' 선생님이 쓴 현판을 보고 저렇게도 글씨를 못 쓴 것을 붙였다고 욕을 하면서 현판을 내리고 자신이 쓴 현판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고 제주도로 내려가 많은 글씨를 연구하여 추사체(秋史體)를 만들고 나서 약 9년 간 유배 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를 들렸는데, 그 때 본인이 쓴 현판을 바라보니 글씨가 너무나 억망이라 바로 내리게 하고 본래의 현판을 가져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때 내린 현판이 자기가 제주도에서 9년간 연구한 추사체 보다 월등하게 우수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현판을 바꾸고 자기는 대웅보전 앞에 있는 백설당 건물에 무량수전(無量壽殿) 이라는 현판을 써서 붙었다고 하는데, 오늘 대웅보전 수리로 인하여 2분의 명필을 한 곳에서 관람 할 기회를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고 대웅보전 용마루에 있는 청기와 1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든 청기와가 되는데, 대웅보전으로 들어설 떄 제일 먼저 청기와가 눈에 들어오면 한가지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이야기하여 준 그 때의 스님을 아련하게 회상하게 만든다.
이어 남원을 돌아보는데, 남원에는 천불전(千佛殿)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적묵당, 세심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당 그리고 종무소 등의 전각 및 요사채가 또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면서 배치되어 있다.


< 다양한 전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남원' 영역 >


먼저 천불전으로 들어가 보는데, 천물전 앞에 기술하고 있는 해설판에 따르면 이곳 천불전의 현판은 그렇게도 내가 찾았던 원교(圓嶠) 이광사 선생님이 쓴 글씨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현판을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아도 추사 선생님의 글씨와 큰 차이점을 느끼기 못하게 만든다.
글씨에 대하여 멍통이 되는 나의 실력으로 불 때 천불전에 붙어있는 현판의 글씨는 일반적으로 사찰의 있는 현판의 글씨와 큰 차별을 알지 못하게 만드는데, 추사 선생님이 왜 그렇게 고개를 숙였는지 모르겠다.


< 원교 '이광사' 선생님이 쓰신 천불전 현판 >


또 다시 남원의 오른편 위쪽에 있는 서산대사의 사우가 되는 표충사(表忠祠) 영역으로 들어가 보는데, 표충사를 비롯하여 부속 건물이 되는 비각, 조사전, 의중당, 강례재, 명의재, 보련각 그리고 최근에 증측 및 개축한 성보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 '표충사' 영역으로 들어가는 호국문 >


< 호국문 앞 '초의선사' 동상 >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스님들이 불현듯 일어나 나라를 위하여 싸운 스님들 중에서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서산대사 및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祠堂)이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사찰 내에서 3곳의 표충사 사당이 있다.
제일 먼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밀양에 있는 표충사(表忠寺) 내에 있는 사당(祠堂)과 합천 해인사 홍제암(弘濟庵) 내에 있는 사당 및 이곳 대흥사 내에 있는 사당이라 하겠다.
유물전시관이 되는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병풍 등의 많은 문화재가 전시하고 있지만, 이곳도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를 피해 가지는 못하는지 문이 잠겨져 있다.
마지막 영역으로는 표충사 뒤편에 있는 동국선원(東國禪院) 영역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고, 대광명전 앞에는 거대한 문수전(文殊殿)와 보현전(普賢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대흥사는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만든다.


< 표충사 뒤편 '동국선원' 영역 표시석 >


< 공사 중에 있는 '문수전과 보현전' >


동국선원 앞에서 두륜산의 정상 가련봉으로 올라가는 포장길 따라 한 500m 정도 올라가면 3거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오른편 포장길은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산실로 만든 일지암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 비포장길은 북미륵암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다.  


< '북미륵암과 일지암' 으로 올라가는 길 >


일행 3명은 먼저 일지암으로 올라가므로 나는 혼자서 북미륵암을 선택하여 죽을 힘으로 걷고 있는데, 한줄기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은 날씨로 인하여 너무나 높은 습도가 산행을 방해하고 있다.


< 북미륵암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이름 > 


더불어 산행 길 전부가 너덜바위 길이라 무릎으로 느끼는 통증으로 무척이나 고전하여 한 30분 이상을 소비하여 겨우 북미륵암에 도착하는데. 먼저 경내에 있는 우물로 가서 한 바가지의 물을 마시면서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 이윽고 도착한 '북미륵암' 요사채 >


< '북미륵암' 의 유래 >


문제는 옛날 이곳 방향으로 내려올 때 마애여래좌상이 산행 길 옆에 있어 찾기가 무척이나 쉬웠는데, 오늘은 아무리 찾아도 마애여래좌상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면서 암자 주변으로 만들어져 있는 나무테크의 길 따라 오른편 능선에 올라가니 동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 북미륵암에 있는 '동3층석탑' >


다시 암자로 내려와 용화전(龍華殿) 처미 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등산객 부부에게 마애여래좌상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까 이 용화전 건물 내에 있는데, 문이 잠겨져 있다고 하면서 문을 여는 방법 등을 친절하게 가르켜 준다.


< 안개 속에 묻혀있는 '북미륵암' 전경 >


< '마애여래좌상' 이 숨어 있는 용화전 >


그래서 등산객 부부가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 목례로써 예(禮)를 올리고 나서 찬찬히 마애여래좌상을 감상하여 보는데, 이곳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약 4.2m로써 신라 후대(850-932년) 무렵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 국보 제308호 '마애여래좌상' >


이 마애여래좌상은 본존불(本尊佛)을 중심으로 좌우상하 사방에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이 새겨져 있는데, 분존불의 존상(尊像)은 후덕하고 원만한 체모(體貌)를 가지고 형형한 눈매는 근엄하고 위의(威儀)가 넘치면서 두툼한 입술과 살이 오른 양 빰은 자애로움이 가득하다.


< 좀 확대하여 보는 '마애여래좌상' >


이 마애여래좌상은 옛날에는 용화전이라는 건물도 없이 노천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최근에 국보 제308호로 지정되므로 용화전이라는 건물로 보호하고 있어 주변에 등산객이 없었다면 찾지 못하고 그냥 하산할 뻔 했다.


<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의 설명문 >


용화전 바로 앞 서쪽에 서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서3층석탑은 보물 제301호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동3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지 못하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5호로 지정이 되어 다소 아쉬운을 느끼게 만든다.


< 용화전 마당 서쪽에 있는 '서3층석탑' >


< '서3층석탑' 의 설명문 >


스님을 비롯하여 등산객도 없는 사찰을 혼자 구경하고 있으니 동문들이 어디에 있는지 궁궁하다는 전화가 도착하므로 긴급하게 하산하여 경내로 내려가는데, 차와의 인연이 많은 대흥사에서 차를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동다실(東茶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 광장의 가장자리에 있는 '동다실' >


< 다실 내에 전시하고 있는 '기념품' >


너무나 긴급하게 하산하므로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한잔의 차를 시켜놓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데, 다실 내에는 아름다운 기념품을 많이 전시하고 있어 이 또한 구경거리를 만들어 준다. -셋째날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