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문화와 산행.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에 있으면서 순천박씨 판윤공파의 종택 '죽백고택' 의 관람.

용암2000 2020. 7. 31. 19:17

 

2020년 7월 26일. (일요일)

 

1. 순천박씨 판윤공파의 종택 죽백고택을 찾아서.

덕천서원을 떠난 우리부부는 다시 사우당 방향으로 돌아와 사우당 종택 오른편에 있는 순천박씨 판윤공파(順天朴氏 判尹公派)의 종택이 되는 죽백고택(竹栢古宅)을 돌아보기로 한다.

죽백고택은 윤동마을에 입향 후 600여 년간 이어온 가옥이지만, 최초 건립 년도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 보수와 개축을 거쳐 현재에 이루고 있다.

택호 죽백(竹栢)은 순천박씨 성주 입향조(入鄕祖)로써 개성판윤을 지낸 '박가권(朴可權)' 선생님을 칭하고 있는데, 박가권 선생님은 순천박씨의 시조가 되는 '박숙정(朴淑貞)' 선생님의 4대 손이면서 판윤공파의 시조가 된다.

박가권 선생님은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 시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남쪽으로 내려와 윤동마을에 입향하는데, 그 후 가옥 주위에 대나무와 잣나무 등을 많이 심어 가꾸면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죽백선생(竹栢先生)이라 불렸던 것으로 부터 유래한다.

판윤공파에서는 대사헌 '박이장(朴而章)' 및 임진왜란 때 김면(金沔) 장군의 진(陣)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성주 가천(伽川)에서 전사한 의민 '박이현(朴而絢)', 이괄의 난 때 도원수의 선봉장으로 황주(黃州)에서 순절한 충장공 '박영서(朴永緖)'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 '죽백고택' 을 설명하고 있는 현황판 >

 

고택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기본적인 구성 형태가 되는 사랑채와 안채, 대문채, 고방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우측에도 건물이 있어 튼 'ㅁ' 자를 이루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 현재 남아 있는 '죽백고택' 전경 >

 

< '사랑채' 의 모습 >

 

< '안채' 의 모습 >

 

또한 안채의 우측 뒤편으로 높은 축대 위에 사각형의 토석(土石) 담장을 둘린 일곽 내에 사당(祠堂)이 위치하고 있는데, 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의 관람이 불가능하여 다소 아쉬움이 발생한다.

 

< 입향조 '박가권'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

 

죽백고택은 보수와 개축 등으로 건축물 등의 년원(年源)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입향한 당대에 건립된 이후 600여 년 동안 세거(世居)한 역사를 담고 있는데, 안채의 건너방 우측에 퇴간을 설치한 평면적인 특징 및 살림채 보다 건립 년대가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건물은 역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특별한 역사성을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윤동에서 600여 년 동안 세거하여 온 순천박씨 판윤공파의 종택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여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60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충신문을 돌아보면서,

사우당 고택 앞에 있는 충신문(忠臣門) 건물은 순천박씨 성주 입향조이면서 고려 개성판윤 박가권(朴可權)의 7세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의민공(毅愍公) 박이현(朴而絢) 선생님과 이괄의 난 때 순국한 그의 아들 충장공(忠壯公) 박영서(朴永緖) 선생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각(旌閣)이다.

 

< '박이현 및 박영서' 선생님의 충절을 기리는 충신문 >

 

건물은 정면 2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건축물인데, 인조 10년(1692년)에 두 사람에게 내려진 정려(旌閭)를 편액하기 위하여 숙종 18년(1692년)에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가권 선생님의 7세손 박이현 의방장은 남명 '조식(曺植)' 선생님의 문인으로써 임진왜란 때 고령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김면(金沔)의 의병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성주군 가천면에서 전사하였는데, 그 공으로 공조참의에 추종되었다.

판윤공파의 8세손 박영서 창성부사는 무과에 급제한 후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선봉장이 되어 남이흥(南以興)와 정충신(鄭忠臣) 등과 함께 황주 신교(薪橋) 전투에 참가하여 싸움의 와중에서 순국하였는데, 그 후 병조판서로 증직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 '충신문' 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현황판 >

 

이곳에 건립된 충신문(忠臣門)은 비교적 건립 시기가 매우 빠르지만 그래도 원형으로 잘 유지하고 있는데, 이곳 건물과 관련되는 주인공 '박이현과 박영서' 부자의 충절에 기여한 공으로 인하여 역사적 교육장으로 널리 활용하고 있다.

 

3. 순천박씨의 근원을 부언(附言)하여 보면.

오늘 우연하게 방문한 사우당 건물 앞에 있는 순천박씨 박이현 및 박영서 선생님의 충절을 기리는 '충신문(忠臣門)' 을 돌아 보았는데, 현황판에 기술하고 있는 내용에서 나와 같은 본(本) '순천박씨(順天朴氏)' 에 대한 내역을 알았기 때문이다.

순천박씨 시조는 승주 사람 '박영규(朴英規)' 선생님이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가 되었지만,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책록 되었고 좌승(左丞)에 올라 승주군(昇州君)에 봉해졌다.

후손의 계대(系代)에 대한 기록에서 박영규 선생님 이후 4세대가 실전(失傳)되고 후손 박난봉(朴蘭鳳)이 고려 10대 임금 정종 때 과거에 등과하여 정승으로 역임하였고 평양 부원군(平陽 府院君)에 봉해지자 그를 득관조로 하였는데, 평양은 순천의 옛 이름이다.

그러나 박난봉 이후의 1세대가 다시 실전되고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엮임한 '박숙정(朴淑貞)' 선생님을 제1세조(第一世組)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후손의 번창으로 인하여 증시조 박숙정 5세손에서 종파(宗派) 및 지파(支派) 등 19공파로 나누어지는데, 공파는 문숙공파(文肅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경력공파(經歷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충정공파(忠正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검열공파(檢閱公派), 전직공파(殿直公派), 인의공파(引儀公派), 부위공파(副尉公派) 등으로 되었다.

나는 이 중에서 박숙정 선생님으로 부터 5세손이면서 사육신 중에 한분이 되는 '박팽년(朴彭年)' 선생님의 후손이 되는데. 국가에서 박팽년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하사(下賜)하므로 19공파 중에서 충정공파(忠正公派)로 명명 받았다,

또한 나의 노(魯)자 항렬은 박숙정 선생님으로 부터 '순천박씨 26세손' 이 되고 박팽년으로 부터 '순천박씨 충정공파 22세손' 이 된다.

참고로 박씨의 원(元) 시조가 되시는 박혁거세(朴赫居世)로 부터 30세대에 이르러 밀양박씨를 비롯하여 고령, 함양, 죽산, 상주, 전주, 순천, 월성, 울산 등 9개의 본으로 나누어진다.

순천박씨의 원(元) 시조가 되시는 박영규 선생님에서 부터 증시조 박숙정 까지 총 5세대가 실전되고 득관조 1명을 포함하면 총 6세대가 되는데, 그래서 박헉거세로 부터 총 계대를 계산(30+6+26=62) 하면 전체로 '박혁거세 62세손' 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곳 윤동마을에서 내려오는 판윤공파는 박숙정 선생님을 시조로 하여 나의 선조가 되는 19공파 중 하나가 되시는 충정공파 보다 1세손 앞선 4세손에서 분파가 되므로 같은 본(本)이 되지만, 파(派)가 다소 앞선 친족(親族)이라 하겠다.

 

<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윤동마을' 전경 >

 

현재 윤동마을에는 약 100호 정도 주민이 살고 있지만 입향조가 되는 순천박씨는 대구 및 서울 등 타지로 거의 다 이사를 가므로 현재 3-4가구만 살고 있다,

반대로 타성(他姓)이 되는 성주이씨 몇 가구를 제외하고 순천박씨 보다 훨신 뒤에 윤동마을로 입향한 의성 김씨들이 집성촌으로 형성하고 있는데, 그로 인하여 순천박씨에서 보면 매우 아쉬움을 느끼는 마을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