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군 문화와 산행.

팔공산이 품고있는 문화유적지 "한밤마을" 과 제2석굴암, 한티 순교성지를 찾아보면서.

용암2000 2012. 2. 6. 19:12

2012년 2월 4일.(토요일)

 

금일은 대학교 한 동문의 자녀가 서울에서 결혼식을 가지는 날이지만 거리상 참석이 불가능하여 축의금을 전달하고, 오전 일과를 끝내고 Wife와 둘이서 팔공산 산자락 길로 드라이브 하다가 한티재에 이른다.

한티재 고개에 있는 휴게소에 들어 커피 한잔을 마셔보는 시간을 가져보는데, 이곳 휴게소는 몇일 전 고등학교 친구들과 파계사 주변의 산행을 때 능선에서 본 휴게소 건물이라 친근감이 묻어난다.

 

< 팔공산 종주길에 있는 "한티재" 휴게소 > 

 

휴게소에서 바라보는 팔공산 종주길에는 하얀 백설로 덮혀있는 설경으로 인하여 한폭의 동양화 그림을 형성하고 있어, 다시 한번더 걷고 싶어지는 종주길이다.

애마가 되는 모닝은 팔공산 뒤편에 있는 한밤마을과 제2석굴암을 돌아보기 위하여 도로 따라 내려가니, 재설작업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여 곳곳에 빙판을 형성하고 있어 거북이 같이 운전하여 천신만고 끝에 한밤마을에 이른다.

이렇게 불쑥 한밤마을 찾는 이유는 수십 년 간 사사건건 나와 의견 충돌로 인하여, 싸우면서 늙어가는 친한 벗 중에 한명의 고향이기도 한 때문이다.

 

1. 한밤마을의 탐방.

마을입구에 기술하여 놓은 한밤마을의 역사와 유래를 먼저 읽어보는데, 한밤마을은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자리한 전통마을로써 팔공산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한밤마을의 동쪽과 서쪽 양편에서 지나다가 북쪽에서 만나 남천(南川)을 이루고 있는 팔공산 산맥의 뿌리 비탈면에 둘려 쌓여있는 시골마을이다.

 

< "한밤마을" 내역을 기술한 안내문 >

 

이 마을은 950년 경 남양홍씨에서 갈려나온 "부림홍씨" 의 시조 "홍란" 이라는 선비가 입향하연서 약 200여 호의 촌락을 형성하고 있는데, 현 주민의 80%가 부림홍씨 집성촌이며 나머지 20%는 영천최씨, 전주이씨, 예천임씨 등이 혼재하면서 오손도손 살아가는 전형적 시골이다. 

원래 마을 이름은 심야(深夜) 또는 대야(大夜)라고 불려졌으나, 1390년경 홍씨 14대손이 되는 "홍로" 씨가 역학적으로 밤 야(夜)자가 들어가는 마을 이름으로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여 "대울(大栗)" 로 고쳐 불렸는데, 한밤은 그 대율의 이두식 표현법을 사용한 이름이라고 한다.

대율마을은 908번 지방도로 중앙으로 하여 대부분 왼편으로 형성하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식당, 교회, 여관 등 공공 건물이 있으며, 마을 중앙지점 도로변에 "대율(大栗)' 이라는 거대한 입석이 마을의 길잡이를 하고 있다.   

 

< "대율" 즉 한밤마을 나타내고 있는 입석 >

 

먼저 마을의 제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약 1.500평의 공한지에 150여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 솔밭을 이루고 있는데, 이 숲은 일명 성안숲이라고 불려지면서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전국 10대 마을 숲" 중 하나로 뽑힐 정도로 운치가 있는 숲이다.

이 숲에서는 임진왜란 때 이곳 한밤 출신으로 의병대장이 된 "홍천뢰" 장군이 사병을 훈련시킨 장소로 유명하며 이 숲은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 동안 숲속에 자생하고 있는 잡목 등을 제거하고, 연못과 함께 장군의 기념비, 진동단, 효자비각, 개천 등을 재 정비하여 마을의 쉼터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 마을 입구에 있는 소나무 숲과 "홍천뢰 장군" 기념비 >

 

이 숲을 가로질러 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소로길이 있으며 소로길 반대편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5그루가 자생하고 있는데, 수령이 약 150-200년이 된 나무로써 밑둥치 굵기가 2-3m에 높이가 10-15m가 넘은 고목에 낙옆이 다 떨어진 앙상한 모습으로 움추리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어린들이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와 더불어 휴식을 취하는 의자가 놓여 있고, 느티나무 중에 제일 큰 나무 가지에는 그네가 메어 있지만 겨울의 중앙이라 매우 을씨년스럽게 하고 있다.

 

< 어린이들을 떠나 보내야만 하는 고목의 나무 가지에 메여 있는 "그네" 모습 >

 

이 놀이터 건너편 대율초등학교 정문에는 방학이라서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 아쉽게도 정문 위쪽에 금년부터 폐교가 되면서 마지막 60회 졸업식이 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이렇게 학교 운동장과 주변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던 놀이시설에 뛰어놀았던 10여 명의 어린이 주인공들이 영영 떠나 가도록 만드는 숙명의 현수막이 주변 분위기를 더욱더 스산하게 만든다.  

 

< 마지막 졸업식을 알리는 "대율초등학교" 현수막 >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져야만 하는 "교정" 전경 >

 

숲에서 마을로 올라가면 도로의 중앙지점 정도에 대율마을의 랜드마크가 되는 "대청 및 상매댁" 으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 도로변에 설치하고 있는 "상매대 및 대청" 으로 들어가는 안내표시 >

 

여기서 부터, 한밤마을의 진가를 나타내는 돌담길이 이어지는데, 한밤마을에는 총 4Km의 고불고불한 옛 돌담길로 형성되어 있으며 새롭게 신축한 약 2Km의 돌담길을 포함하여 총 6Km의 명물 돌담이 약 200여 호 집과 집 사이로 미로와 같이 펼쳐진다.

 

< 대율마을의 상징이 되는 "돌담길" >

 

한밤마을은 팔공산이 토해낸 돌들로 만들어진 마을인데, 물줄기와 함께 마을 앞 하천에서 굴러온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담을 형성하고 있다.

하천뿐만 아니라 생업을 영위하기 위하여 일구는 밭에서 땅을 조금만 파도 돌만 출토되어 돌의 사용처가 없다 보니, 자연적으로 마을 담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수백년의 역사와 함께 돌담의 높이가 높아져 갔다고 한다.

이젠 그 돌담길이 마치 제주도의 돌담과 비유가 되면서 혹자는 한밤마을이 "육지 속의 제주도" 라고도 불려지고 있다고 하는데, 제주도 돌담과의 차별화는 제주도 돌담은 화산석으로 한 겹으로 쌓아 가지만 이곳 한밤마을의 돌담은 마치 성곽과 같이 폭을 넓게 쌓으므로 매우 튼튼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곳에는 폭이 1m가 넘어 그렇게 넓게 쌓은 이유는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 보다는 이 지역에 너무나 많은 돌이 돌출되어진 결과물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마을 내부로 들어가는 길은 물지게를 지고 다니기에도 비좁은 소로의 길이었지만, 1970년도 경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길도 넓히고 약 80%를 차지하고 있는 초가집도 기와집으로 바꾸므로 마을의 옛 정서가 소실되어 전통미가 많이 떨어진다.

특히 문화재청에서 마을의 돌담과 곡선미를 영구 보존하기 위하여 문화재 지정을 하기 위하여 주민 찬반 투표를 붙였지만, 반대표가 많아 부결되므로 전통의 보존보다는 개발을 앞 세우다 보니 문화적 가치가 많이 살아져 가슴 아푼 곳이다.

돌담길 따라 마을 내부로 들어가면 먼저 왼편에 "동천정(東川亭)" 이라는 재실를 만나지만 대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고 조금 더 내부로 들어가면 푸른색 기와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재실을 만나는데, 집 처마에는 "율리정사(栗里精舍)" 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마을로 들어가는 왼편에서 만나는 "동천정" 재실 전경 >

 

이 율리정사는 조선 정조 을해년(1779년) "남천(南川)" 공이 종친들과 힘을 모아 공단으로 건립하여 이숙(里塾)이라고 불렸는데, 이숙은 마을학교라는 뜻이다. 

 

< 푸른 기와로 장식하고 있는 "율리정사" 전경 >

 

여기서 돌담의 코너를 돌아서면 마을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공터에 정자 하나를 만나는데, 이 정자가 "대청" 이라는 건물이다.

이곳 대청은 조선 전기에 지어진 건물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10년(1632년) 중창하였으며, 효종과 숙종 때 보수 한적이 있었고 1992년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일설에 의하면 대율마을 전체가 거대한 사찰이 있었던 장소이며 대청이 있는 장소에는 대범종이 있었던 자리이라고 하고, 대청 건물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우물마루로 만들어져 있어 여름에는 마루 밑으로 시원한 바람이 통과하므로 지나가는 여행들이 머물면서 지친 다리를 풀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 우물마루를 하고 있는 거대한 "대청" 정자 >

 

이 대청 옆으로 대율마을의 최고 고댁이 되는 "남천고댁(南川古宅)" 이라는 거대한 입석이 서 있으며 그 옆으로 들어가면 남천고댁의 대문채에 이르는데, 주인 양반의 안주인 친정 마을 택호를 따서 "상매댁" 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 "남천고댁" 을 알리는 입석 >

 

상매댁은 약 1.200여 평 대지 위에 100년 이상된 한옥이 20여 채 자리잡고 있는 한밤마을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가옥인데, 팔공산 뒤편에서 마을이 형성되다 보니 상매댁 건물은 전형적으로 북향의 건물이다.

조선 후기 1838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57호를 지정된 건물인데, 중문채와 아래채 등 3채의 건물이 철거되고 현재는 사랑채, 안채, 사당, 변소 등 만 남아있다.

사랑채 처마 밑에 쌍백당(雙栢堂)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그렇게 쌍백당이라고 불려진 이유는 250여 년 전 집을 지을 때 집의 뒤쪽, 즉 남쪽방향의 한 구석에 사당을 지으면서 사당 근교에 2그루의 잦나무를 심었다고 하여 쌍백당이라고 하며 현재도 그 잦나무에는 많은 열매를 생산하고 있다.

 

< 대문을 지나면 만나는 사랑채 "쌍백당" 고댁 >

 

< 약 300년 수령을 간직한 "잦나무" 와 상매댁 전경 >

 

쌍백당을 지나면 안채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면서 오목하게 "ㄷ자" 형태로 쌓여 있으며, 사랑채가 안채로 들어가는 북풍을 방어하는 모양이라 건물 전체 형태가 튼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 북향으로 ㄷ자 형태를 하고 있는 "안채" 건물 >

 

< 안채의 남향이 되는 "건물 뒤면" 모습 >

 

건물 내부에는 부림홍씨 제29대 손(孫)이며 이 집의 막내 아들 "홍석규" 씨가 대구에서 근무하다가 작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고택을 지키고 있는데, 그분에게 고댁의 역사를 많이 들어볼 기회를 가져본다.

고댁 사랑채에는 고댁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머뭄의 장소로 제공하는데, 먼 곳에서 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면서 오늘 저녁에도 서울에서 다수의 학자들이 방문한다고 하면서 손님이 머무는 사랑채에 군불을 지피기 시작하므로 대화가 길게는 이어지지 못하여 다소 아쉽다.

 

< 안채 앞에 있는 "장독대" >

 

< 고풍의 모양을 하고 있는 "뒷깐" 건물 >

 

홍석규씨 부친은 부림홍씨 12대 종손이지만 부림홍씨의 원종택은 제2석굴암 부근에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한밤마을로 옮겨온지 얼마되지 않아 집의 형태가 고댁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갖추지 못하다고 한다.

아울러 제2석굴암 옆에 부림홍씨의 서원이 있는데, 현재 보수하고 있으므로 출입이 되지는 않지만 그곳도 한번 방문 함을 추천하므로 최종적으로 생매댁 주변을 한번더 돌아보고 마을의 돌담길도 한번 더 빙돌면서 배회하지만 추위로 인하여 건성으로 지나친다.

한밤마을 돌담은 아직도 옛모습의 담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지만, 정비를 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담장도 삐뚤삐뚤하게 쌓여 있고 어떤 곳은 폭도 매우 좁다.

 

<삐뚤삐뚤하게 쌓인 "돌담길" 을 거닐어 보면서 >

 

하지만 거기에 세월의 흔적과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하는 돌담에 계절마다 이끼와 담쟁이들이 피고지고, 집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산수유와 능금꽃이 피는 봄과 은행나무 낙옆이 떨어지는 가을철에 변화하는 계절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철마다 찾아와 걷고 싶어지는 돌담길이 된다.

이렇게 주마간산 식으로 구경을 하고 나서, 애마는 한밤마을에서 한티재 방향으로 한 5분 정도 달려 제2석굴암 앞에 있는 "양산서원(陽山書院)" 에 이른다.

 

< 고목의 은행나무가 역사를 말하는 "양산서원" 전경 >

    

양산서원은 정조 10년(1786년)에 건립된 지방교육기관이며 성현을 존중하던 곳으로 이곳 부림홍씨의 세거지가 되는데, 고려말 충신 문하사인 "홍노" 선생님과 조선조 대제학을 역임한 "홍귀달" 선생님 및 이조좌량을 지낸 "홍인충" 선생님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서원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거 서원이 훼철(毁撤) 되어졌다가 1897년에 새롭게 건립하였으며, 1989년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 새롭게 보수하고 있는 "양산서원" >

 

건물 앞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원의 역사를 말하고 있으며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양산서원 건물을 만나지만 새롭게 보수하기 위하여 건물의 마당과 뒤담을 몽땅 헐어 놓으면서 서원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담장 넘어 고개를 쭉 빼고 서원을 관람하여 본다. 

 

2. 제2석굴암 관람.

제2석굴암의 정식명칭은 "군위 삼존석굴(軍威 三尊石窟)" 로써 국보 제 109호가 된다.

울창한 소나무를 형성하고 있는 숲을 지나 계곡에 걸쳐있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면 아담한 사찰을 만나고 그 사찰의 뒤편 학소대 암벽중간 하단부에 있는 자연 동굴이 보이는데, 그 동굴이 제2석굴암이라 하며 동굴 안에 모셔진 미타 삼존석불(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다.

 

< 제2석굴암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소나무" 숲 >

 

< 제2석굴암 앞에 있는 "사찰" 전경 >

 

이 석불사원은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국보 제 24호)보다 조성 년대가 약 100년 앞선 것으로 석굴사원의 효시(嚆矢)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경주 석굴암보다 많이 늦은 1927년 경 한밤마을 사람들로 부터 재 발견되다 보니 제2석굴암이라는 명칭으로 추락되는 비운의 석굴암이다.

 

< 자연 동굴 속에 숨어 비운의 석굴암이 될 수 밖에 없는 "군위 삼존석굴" 전경 >

 

석굴은 둥근 입구와는 달리 바닥은 평면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천정은 입구의 높이보다 더 파 들어간 유선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깊이 4.3m에 폭 3.8m, 높이 4.25m의 굴 전면에는 간단한 석축을 쌓아 의식 장소를 마련하였으며 안쪽으로는 턱을 만들고 그 앞에는 별도의 화강암으로 된 4각의 대좌를 놓고, 대좌 위에 아미타 본존불와 좌우 협신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신 석굴이다.

 

< 석굴 내부에 있는 "본존불과 협신불" 모습 >

 

본존불의 높이는 2.88m이고 머리에는 무수히 가늘고 얇은 음각의 선들이 나타내고 있고, 정상육계는 아주 크게 표현되어 있으며 좌우 협시 보살상은 입상으로 거의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이곳 석불은 손의 모양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로 7세기 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옛날에는 또 다른 작은 개울을 건너 한가닥 Rope를 타고 석굴 입구까지 올라가 의식 장소에서 부처님을 참배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석굴 입구까지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지만 입구에 철망으로 막아서 올라감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석굴로 올라 길을 차단한 "돌계단" 모습 >

 

참배를 원하는 사람은 석굴 앞에 있는 사찰의 마당 중앙에 있는 모전석탑 뒤편에 마련된 의식 장소에서 참배하게 되어 있는데, 추위로 인하여 어느 보살 한명이 삼배만 절하고 신속하게 자리를 일어선다.

  

3. 한티 순교성지의 방문. 

다시 대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한티재로 올라와 급커브 내리막 길로 한 모퉁이만 돌아서면 "한티 순교성지" 라는 거대한 표시석을 만나는데, 대구에 인접하게 있는 한티 순교성지는 몇십 년 전 성지가 조성되기 전 몇 번 방문한 경험이 있다.

 

< "한티 순교성지" 를 알리는 입구 >

 

< 새롭게 조성한 "한티 순교성지" 전경 >

 

이곳 한티 성지는 조선말기 국가로 부터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한티마을에 모인 수십 명의 신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현재 군데군데 신자들의 묘지가 조성하고 있다.

한티마을은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가 되는 1815년 을해(乙亥)박해와 1827년 정해(丁亥)박해 후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마을에 와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지에 들어서면 먼저 산속으로 순교자 묘역 순례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순례길 입구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상이 높게 만들어져 있는 동상 주변에 37인의 순교자 무덤이 곳곳에 분산되어 묻혀있다.

 

< "순교자 묘역" 으로 올라가는 입구 표시석 >

 

< 묘역 내에 있는 "예수" 상 >

 

제1처 무덤은 계곡의 바위 사이에 조성되어 있으며 제2처 무덤은 다소 음달진 비탈면에 묻혀 있는데, 이렇게 하여 제37처 까지 묘역이 한티 순교성지 주변 곳곳에 묻혀 있으므로 다 돌아 봄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 암벽 사이에 있는 제1처 "무덤" >

 

< 비탈 사면에 있는 제2처 "무덤" >

 

묘역을 내려서서 다시 성지 한쪽 도로 따라 올라가면 순교자들이 살았던 초가 집들로 만들어진 한티마을(옛공소)에 이르는데, 옛날에는 허름한 집에 사람이 거주한 것 같은 생각이 아련하게 하면서 기억 저편에 머물게 한다.

 

< 순교자들이 거주하는 "옛공소" 전경 >

 

< "한티마을" 의 조성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눈이 쌓여 있는 정원을 지나면서 위로 올라가면 왼편 산속에 아담한 건물 한채를 만나는데, 이 건물이 "영성관" 으로써 대구가톨릭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이 1년간 머물면서 공동 생활과 더불어 공부하는 곳이라고 한다.

 

< 가톨릭 학생들이 공부하는 "영성관" 전경 >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면 "피정(Retreat)의 집" 에 이른다.

 

< "피정의 집" 들어가는 입구 >

 

피정의 집은 지금까지 가톨릭 신자들만 기도, 묵언, 수양을 통하여 피정하는 곳이었지만 현재는 신앙이 없는 사람 모두에게도 문을 개방하고 있는데, 평균 2인 1실 또는 1인 1실로 이루어지면서 하루에 머무는 비용이 3식을 포함하여 1실에 4-5만원 정도이며 총 60여 개의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 한티 "피정의 집" 전경 >

 

종교를 믿지 않는 비신도 중에도 사업에 실폐한 사람, 가정적으로 불화를 꺽고 있는 사람, 정신적으로 심신이 미약한 사람, 머물고 싶은 사람들의 만남, 대화, 사색 하기에 최상의 장소를 제공하여 주고 있는 집이라고 한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피정을 하고 있으므로 내부 출입은 금하지만 특별히 허락을 득하여 1층 회의실에 진열하여 놓은 대구 이문희 교구장이 기증한 천주교 관련 기념품 및 천주님 조각상을 관람하고, 아울러 2층에 있는 소성당에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 "이문희" 교구장이 기증한 기념품 >

 

< 천주교 신부님들의 "서명" >

 

< 2층에 있는 "소성당" 전경 >

 

< 피정의 집 내부 "복도" 전경 >

 

피정의 집을 탈피하고, 건물 앞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길을 한번 빙돌아서 산책을 겸하여 천천히 주차장으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승용차에 오른다.

 

< 가산산성 능선 아래  별장촌 내에 있는 "장모님 가족 합동 묘" 전경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사람의 긴급 제의로 가산산성 산자락에 잠들고 계시는 장모님 묘소에 잠시 돌아보고 가자고 하여, 그 방향으로 방문하여 보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