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행사.(충청도)

대학교 기계과 동문 2일차 방문은 백제 문화단지 내에 있는 "사비궁 및 백제 역사문화관" 관람.(B)

용암2000 2012. 3. 4. 01:23

 

* 백제 문화단지 개요.

 

각자 승용차에 분승하여 약 1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부여 IC에서 1차로 집결하는데, 이곳에서 부터 다 함께 백제의 역사를 관람할 수 있는 "백제 문화단지(百濟 文化團地)" 로 이동한다.

백제 문화단지는 찬란하였던 백제 역사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94년 부터 2010년 까지 총 17년간 역사적 대장정 끝에 충남 부여군 구암면 합정리 일원에 약 100만 평의 부지에 7.000여 억원의 자금을 투자하여 건립하였다.

백제 왕궁이 되는 사비궁(泗泌宮) 및 능사(陵寺), 계층별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생활문화 마을, 개국 초기 궁성이 되는 위례성(慰禮城), 묘제(墓祭)로 구획하여 꾸며져 있다.

 

< "백제 문화단지" 의 조감도 >

 

문화단지 입구에는 주차장과 더불어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백제 역사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문학관에서는 1.400년 전 문화대국이었던 백제의 모습도 함께 조명 할 수 있다.  

또한 백제 문화단지 주변에는 롯데 Group에서 골프장과 더불어 리조트, 아울렛, 스파, 위락시설, 숙박시설 등 종합 위락시설을 2013년 까지 완공하기 위하여, 토목 및 건축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라 중장비의 굉음소리가 진동한다.

 

6. 사비궁 관광.

먼저 사비궁을 관람하기 위해 매표소에서 인당 4.000원의 입장권을 구입하여 정양문(正陽門) 입구에 서면 규모에서 압도 당 할 정도의 크기를 가진 문인데, 입장권을 제시하고 정양문을 통과하면 거대한 사비궁 광장이 펼쳐진다.

 

< 사비성의 정문이 되는 "정양문" 전경 >

 

< 정양문을 통과하며 처음으로 만나는 "사비궁" 광장 >

 

일단 우측에 놓여 있는 거대한 북을 두두리면서 방문의 첫발을 알리면서 수백 메터(m)의 보도 블륵 따라 걸어가면 사비궁의 내삼문이 되는 천정문(天政門)에 도착한다.

한 여성 해설가가 한발 앞서간 관광객들에게 백제 문화를 해설하고 있는 팀과 합류하는데, 더욱더 세심하게 백제의 역사를 공부 할 시간을 가져본다. 

 

< 내삼문이 되는 "천정문" 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좌우 화랑 통로 건물 >

 

백제는 BC 18년 온조왕이 개국하여 AD 660년 의자왕 20년 까지 678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고대 국가로써, 고구려와 신라와 함께 3국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한 때는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하였다.

온조왕은 한강 하류가 되는 하남 위례성에서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설립하였는데, 1세기 부터 3세기에 걸쳐 한반도 중부의 소국으로 성장하였다가 4세기에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제13대 근초고왕(AD346-375년) 때에는 전라도 지역 대부분으로 장악하고 북쪽으로도 진출하여 고구려와 대립하였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살해하기도 할 정도로 국력이 막강하였다.

그러나 5세기 부터 역(易)으로 고구려에게 침공을 당하여 아신왕이 직접 항복하고 제21대 개로왕은 한강유역을 상실함으로 개로왕 2년(457년)에 수도를 위례성에서 "웅진" 으로 이전하지만, 그 후 고구려 군사에게 전사 당하는 수모를 당한다.

이어 백제 제26대 "성왕" 이 538년도 수도를 웅진에서 부여의 땅 "사비궁" 으로 다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 라고 하였다고 한다.

오늘 이곳에서 역사적으로 재현하여 놓은 사비궁을 관광하면서 그 때의 궁중의식을 의미하면서 한발한발 걸어보라고 해설이 이어진다.

 

< 사비궁에서 해설하고 있는 여성 "해설사" 모습 >

 

왕이 거닐었던 어도(御道) 길 따라 걸어가면 "천정전(天政殿)" 정면의 출입문에 이르는데, 천정전은 사비궁의 가장 중심 공간으로써 왕의 즉위 의례 및 신년 행사를 비롯하여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왕궁 내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천정전 내부로 들어서면 넓은 공간 중앙에는 붉은 색으로 단청이 되어진 닫집 아래에 임금이 앉자 계시는 어좌(御座)가 놓여 있는데, 주변에는 왕의 생활 의류 등을 준비하여 볼거리를 제공하여 준다.

 

< 천정전 닫집 아래에 있는 "어좌" 모습 >

 

< 천정전 내부에 진열하고 있는 "의류" 를 구경하면서 >

 

정문으로 다시 나와 화랑을 통하여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궁성과 연결 되는데, 그 궁성에서는 스크린 영화를 통하여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 스크린 영화를 통하여 천도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성왕" >

 

이 궁성에서 앞으로 나아가면 2개의 건물을 만나면서 하나는 동궁 정전이며 다른 하나는 동궁 외전이라고 하는데, 정전과 외전은 왕의 집무와 더불어 신하들과 정사를 펼치는 통치의 공간이라고 한다,

 

< 신하들과 정사를 나누는 "동궁 외전" 내부 전경 >

 

천정전 반대편에도 좌우 대칭의 건축물 서궁 정전과 서궁 외전이 있지만, 그 쪽 관람은 생략하고 동궁 외전 앞에 있는 현정문(顯政門)을 통과하여 옆으로 돌아서면 백제시대의 거대한 사찰 "능사(陵寺)" 정문에 이른다.

 

< 사비성 오른편에 있는 "능사" 전경 >

 

능사는 성왕의 아들이 되는 제27대 위덕대왕이 아버지 성왕의 면복을 빌기 위한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사찰로써, 유규가 발견된 곳으로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를 줄여서 능사라고 부르는 이름이다.

이 능사에 세워진 5층 목탑(木塔)은 서기 567년 사리(舍利)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축되었던 사찰로써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재현한 5층 목탑인데, 그 높이가 자그만치 38m가 된다고 한다.                                                    

이곳 능사에서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와 국보 제288호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橄)" 이 발굴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제작하는 과정도 함께 재현하고 있는 장소이다.

아담하게 만들어진 연못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먼저 "대통문(大通門)" 을 만나는데, 대통문에는 속세 인간에게 접근하는 모든 악귀(惡鬼)을 날려 보내기 위한 2분의 사천왕상이 험상 굳게 서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보는 "대통문" 과 5층 목탑 전경 >

 

이 대통문을 통과하고 나면 거대한 5층 목탑이 눈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데, 목탑으로 이렇게 큰 것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비슷하다.

팔상전 목탑은 너무나 크므로 건물 내부에서 탑돌이가 가능하고 부처님 일생을 그려 놓은 8상도 그림을 보며 그림 주변을 돌면서 불경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이 능사의 탑에서는 건물 외부에서 탑돌이가 가능 하토록 되어있다.

 

< 능사의 "5층 목탑" 의 전경 >

 

이 탑을 돌아 뒤편으로 나아가면 또 다시 2층의 거대한 사찰을 만나는데, 이 사찰이 능사 "대웅전(大雄殿)" 건물이다.

 

< 5층 목탑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 전경 >

 

대웅전 건물은 2층의 중층이고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으며 사찰 내부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좌우 협신불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로 두고 있다.

부처님이 나무로 조각한 목불(木佛)로써 독특한 색갈을 나타내고 있는데, 불자들은 신발을 신고 사찰 내부 까지 들어가 참배가 가능토록 한다.

 

< 대웅전 내부에 모시고 있는 독특한 모양을 가진 "삼존불" >

 

사찰을 나와 뒤편으로 돌아가면 불교 교리를 강의하는 강당을 비롯하여 숙세각, 결업각, 부용각, 향로각 등 여러가지 요사채 건물이 질서 정렬하게 건축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밀납과 인형으로 일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어 사찰 후문으로 나오면 야산으로 둘려쌓여 있는 넓은 공터에 백제 무덤이 만들어져 있는 고분공원을 만나는데, 백제 시대에 대표적 묘제를 보여 주는 곳으로 부여 지방에서 출토된 고분을 이전 및 복원한 것이다.

 

< 백제의 무덤을 옮겨 놓은 "고분군" 전경 >

 

고분군은 사비성 시대 귀족 계층의 무덤인데, 백제 문화단지 화계조성부지에서 출토된 석실분 4기와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에서 출토된 석실분 3기 등 총 7기가 복원되어 있다.

 

< 고분군에서 바라보는 "능사" 전경 >

 

이 고분군을 관광하고 나서 사비성 뒤편의 야산으로 만들어진 돌계단으로 올라서면 "제향루" 라는 루각이 나타나면서 2층 루각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지나온 사비성의 모습이 한 눈에 다 들어오고, 앞에는 롯데에서 자연을 전부 회손시키면서 골프장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흉물스럽게 보인다.

 

< "제향루" 에서 바라보는 사비성과 공사중인 골프장 >

 

그 뒤편으로 휘미하게 높은 산맥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산맥 중앙에 보이는 흰 점이 백제의 마지막 비극의 산실이 되는 3천 궁녀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죽어간 "낙화암" 이라고 한다.

사비성 반대편 왼쪽 골짜기에는 기와집 및 초가집으로 되어있는 마을이 질서 정렬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 집들이 백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생활 문화마을과 위례성 토성 마을이다.

 

< 제향루에서 내려보는 "생활 문화마을" 전경 >

 

< 제향루에서 바라보는 "위례성" 토성  >

 

여기서 문화 해설자는 사비성의 종합적인 해설을 끝내고 개인적으로 야산을 내려가 마지막 생활 문화마을과 위례성을 돌아보고 입구에 있는 백제 역사문학관을 관람하는 것이 백제의 문화역사를 공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작별 인사로 대신한다.

천천히 야산을 내려서서 생활 문화마을을 돌아보는데, 입구에는 백제인의 귀족 가옥으로 구성된 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간지점에는 중류 계급과 서민들이 주로 주거하는 초가집으로 구성되어 있어 계층간의 생활 문화를 탐방하는 기회를 가져본다.

 

< 서민들이 살고 있는 "주거지역" 전경 >

 

입구에서 골짜기로 올라가면 제일 마지막에는 위례성 입구에 도착하는데, 위례성은 백제의 건국 초기 BC 18년 에서 AD 475년 까지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왕이 한성에서 자리잡고 있는 형제 비류왕의 미추홀을 통합하고 난 후 총 493년간 백제의 초기 수도로 정한 곳이다. 

이곳에서 재현하고 있는 위례성에는 그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복원하고 있으나 지금 서울 근교 하남 위례 신도시로 개발하고 있는 지역에서 복원되지 않고, 이렇게 먼 부여 지방까지 내려와 복원한 것은 지리적으로 다소 부적 함이 느껴진다.

물로써 성을 보호하는 해자를 건너 토성의 남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초기 백제 건국 당시의 생활 주거지를 복원하여 놓고 있다.

한채 한채 구경하면서 제일 뒤쪽에 이르면 2층의 초가집으로 만들어진 "위례궁(慰禮宮)" 이 나타나는데, 이 궁에 들어가면 영상 Sceen를 통하여 위례성 역사를 조명하여 주므로 다시 석두 머리를 굴려야 하는 고난의 시간이 지나간다.

 

< 해자를 건너 "위례성" 으로 들어가는 남문 >

 

< 위례성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타나는 건물 "위례궁" 전경 >

 

지금 까지 사비성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돌아보고 정문이 되는 정양문으로 다시 나오는데, 주변 매점에서 판매하는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잠깐의 휴식시간 가져본다.

 

7. 백제 역사문학관 관람. 

사비궁 입장표로 백제 역사문학관은 연계 관람이 가능하므로 별도 입장료를 지불치 않고 문학관으로 들어가는데, 1층 입구 부스에서 부터 백제의 역사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문학관 입구에는 백제 문화단지를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총 공사기간 약 6.000일(16년 7개월) 동안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백제 역사문학관" 알리는 안내 > 

 

< "백제 역사문학관" 건물 외관 >

 

< 문화단지를 "6.000일" 동안 건설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표 >

 

전시관은 제1 전시실에서 제4 전시실로 구획하여 유물과 생활 도구 등 다양한 백제인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더불어 백제 문화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을 종합 전시하고 있는 건립 기념관, 백제관련 영상을 상영하는 금동대형로 극장, 백제관련 정보 자료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생활 도구" 를 전시하고 있는 전시물 돌아보면서 >

 

 < 전시실 내부에 진열하고 있는 "문화재" >

 

 < 전시실 내부에 전시하고 있는 "탑" > 

 

< 전시실 내부에 전시하고 있는 "어전 회의" >

 

전시실은 1층 에서 2층 까지 구성되어 있으며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진열하고 있지만, 시간의 제약으로 상세하게 관람이 불가능하므로 몇가지 중요한 문화재만 선별 관람하고 발길을 돌린다.

 

8. 쌈밥 정식.

부지런한 총무는 부소산성 앞에 있는 천년의 맛을 가진 "백제의 집" 식당을 예약하는데, 사전 예약손님의 폭죽으로 예약 좌석이 없으므로 13시 30분 까지 기다린 후에 도착하라고 한다.

여기 까지 와서 부여의 명물 쌈밥을 먹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꼭 그 집으로 가야 하니 기다리라는 명령으로, 문학관 앞에서 주린 배를 보충하기 위하여 약간의 간식과 물로써 긴급 처방하면서 버틴다.

 

< 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백제의 집" 전경 > 

 

이어 승용차는 10여 분 거리에 있는 부여시내 부소산성 앞에 있는 공용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도로 건너편에 있는 백제의 집으로 들어가 본다.

그 때까지 기다리는 앞 손님으로 전체 좌석이 없어 일행들은 몇 개의 Table에 분산하여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 시간을 가져본다.

 

< 많은 손님으로 겨우 자리를 찾지하여 먹어보는 "쌈밥" >

 

그런데 식당이 얼마나 바쁜지 식사를 할 때 까지 일부 반찬과 더불어 된장국이 나오지 않아 맨밥으로 식사하는 해프닝도 벌어지는 식당이라, 타지에서 오는 나그네는 부여군에 돈을 투자하면서 까지 수모를 당하는 식사를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반주로 부여군의 특산품이 되는 "알밤 막걸리" 를 시켜 보는데, 지금 까지 먹어본 막걸리 중 최고의 맛을 가지므로 정신없이 몇 잔의 막걸리를 연속으로 보충하고 나서야 비로써 젖가락을 놓는다.

 

9. 부소산성과 낙화암.

지금으로 부터 3-40년 전에 한번 방문한 장소이지만 도무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새로운 마음으로 부소산성 입구로 들어가 본다.

입구 양쪽에는 많은 상가들이 도열하고 있지만, 아직 추운 날씨로 움직이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많은 상가들이 문을 닫고 있어 분위기가 활발치 못하다.

 

< "부소산성" 으로 들어가는 한적한 상가 거리 풍경 >

 

< "부소산성" 입구를 알리는 입석 >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부소산문을 지나 산성 내부로 들어서니 왼편에는 옛날 백제의 왕궁 터가 있었다는 공터가 잘 정비되어 있는데, 발굴 당시에 많은 유물이 나왔으며 현재도 연못이 잘 정비되어 있다.

 

< 부소산성으로 올라가기 전 왼편에서 만나는 "왕궁 터" >

 

오른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백제 말 의자왕 시대에 폐망하고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끝까지 사수한 2명의 신하와 한명의 장수 영전을 모시고 있는 "삼충사(三忠祠)" 가 나타난다.

 

< 삼충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충의문" 전경 >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의열문(義烈門)이 나타나고 이어 정원을 지나면 또 다른 내삼문 충의문(忠義門)을 통과하면 아담한 삼충사 사당 건물에 이른다.

사당 내부에는 왼편으로 부터 문신이 되는 성충, 흥수 및 계백 장군의 거대한 영정 사진과 더불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다.

 

< 3분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삼충사" 전경 >

 

다시 잘 다듬어진 오솔길 따라 오른편으로 빙돌아 능선에 올라가면 아담한 정자 하나를 만나는데, 이 정자 이름은 영일루(迎日樓)라고 하며 이 누각에서 왕과 신하들이 계룡산 연천봉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하루의 일과를 계획한 곳이라고 한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거대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는 "군창지(軍倉址)" 를 만나는데, 군창지는 산성 내부에 있는 군사들의 양식을 보관한 창고로써 아직도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고 한다.  

 

< 소나무 사이로 발굴된 "군창지" 모습 >

 

여기에서 잘 조성된 숲속으로 이어지는 길 따라 조금 내려서면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이 전망대 이름이 "반월루(半月樓)" 이다.

이곳 누각에 올라서면 부여읍시가지가 발 아래에 머물고 있는데, 부여읍시가지를 휘감고 돌아가는 백마강이 아른하게 눈에 들어온다.

 

 < 부소산성 내에 있는 "울창한 숲" 길로 걷고 있는 일행 >

 

< 부여시가지를 보는데 최고 조망을 가지는 "반월루" >

 

 < 반월루에서 바라보는 "부여시가지와 백마강" >  

 

산의 한 모퉁이를 돌아 내려서면 상가 건물과 더불어 산성의 중심지 4거리에 이르는데, 4개 방향으로 걸으면서 산책이 가능한 지점이다.

 그 중에 낙화암 방향으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해발 106m "부소산(扶蘇山)"  정상에 있는 사자루가 눈에 들어온다.

사자루를 옆으로 하여 울창한 숲속으로 몇 걸음 걸어가면 왼편으로 한 그루의 "연리지(連理枝)" 소나무를 만나는데, 이렇게 낙화암을 눈 앞에 두고서 만나는 연리지는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늙어서 함께 걷고 있는 부인과 백년회로 하면서 나무와 같이 손을 절대로 내려놓지 말고, 꼭 잡고 낙화암으로 걸어가라는 무언의 압력인가?

 

< 낙화암 근교에서 만나는 "연리지" 소나무 >

 

어찌하던 연리지 나무 밑으로 조금 내려가면 3거리에 이르는데, 왼편으로 낙화암 바위 낭터리지 위에 보이는 정자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면 먼저 거대한 소나무 한그루를 만난다.

이 소나무가 천년송이라고 하면서 천년송은 백제 마지막 의자왕의 3천 궁녀들이 꽃 잎처럼 줄줄이 떨어져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킬려는 백제 여인들의 순결 역사를 알고나 있는지?

 

< 3천 궁녀의 역사적 사건을 보증하고 있는 낙화암 위에 있는 "천년송" 소나무 >

 

천년송 뒤편으로 새롭게 건축되어진 "백화정(白花亭)" 정자는 유유히 흘려가는 백마강 물결을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나룻배에서 울려펴지는 "추억의 백마강" 노래에 심취하고 있다.

 

< 낙화암 정점에 있는 "백화정" 정자 >

 

 < "추억의 백마강" 이라는 노래와 더불어 관광객을 싣고 떠나는 배 >

 

백화정 앞으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3천 궁녀가 치마를 덮어쓰고 백마강으로 떨어지는 최종 지점이 60m의 거대한 암벽 위에 있다는 안내문이 관광객에게 홍보하고 있다.

그 주변에 나무로 만든 테크가 만들어져 있어 모든 관광객들이 백마강 바로 위 60m 지점 까지 내려와 도도히 흘려가는 물을 보면서, 마지막 백제의 역사를 음미하는 장소로 재 탄생하고 있다.

 

< "낙화암" 바위가 강의 수면 위 60m 이라고 알리는 안내판 >

 

< "백마강" 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장 > 

 

전망대에서 백마강을 배경으로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3거리로 되돌아 나와 반대 방향의 길로 더 강가로 내려서면, 낙화암과 조화를 이루는 "고란사(皐蘭寺)" 사찰이 낙화암 바위 허리 춤에 자리잡고 있다.

 

 < 낙화암 바위 틈에 자리잡고 있는 "고란사" 전경 >

 

고란사 사찰은 백제 말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건립 년대나 만든 사람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의 사찰이지만, 사찰 뒤편에 있는 낙화암 바위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 와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고란정" 약수물로 더 유명한 곳이다.   

고란정 우물은 아득한 옛날 주변 소부리 마을에서 살고 있는 금슬 좋은 노 부부가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한번 더 회춘하여 아기를 가지기를 원했다.

어느 날 할머니는 금성산의 도사님으로 부터 고란사 뒤편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 틈에서 나오는 약수가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날 남편을 보내어 약수물을 먹게 하였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찾아가니 약수물 한 바가지 먹으면 3년이 젊어진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할아버지는 너무나 많은 약수물을 먹다 보니,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안고 와서 고이 길렸는데, 그 후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 시대에 최고의 벼슬이 되는 좌평까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는 물이다.  

사찰 뒤편으로 돌아가 고란정에서 흘려 내리는 약수물을 한 바가지만 떠서 먹어 보니 맛이 별로 인 것 같지만, 전설과 같이 너무 많이 먹어 회춘이 되면 곤란 할 것 같아 한 바가지만 마시고 돌아선다.

 

 < 한 바가지 물이 3년 젊게 만드는 "고란정" 우물 >

 

사찰에서 되돌아 나오면 바로 밑으로 백마강에 유람하는 돛단 배를 운행하는 선착장이 있지만 시간 관계로 매표소로 나오면서 주차장에서 상호 인사로 2012년 대학교 동창회 모임이 종결하는데,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간다.

 

10. 궁남지와 정림사지 방문.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고 모두가 자기 갈길로 떠난 후 Wife와 둘이서 부여시가지를 돌아 나오다가, 부여 남쪽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궁남지(宮南池)" 방향으로 5-6분 정도 운전하여 궁남지 제1주차장에 도착한다.

돈도 없는 실업자라 언제 돈을 벌어 이곳까지 다시 방문 할 형편이 되지 못 함을 비관하면서 연못가에 도착하는데, 계절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 그런지 다소 적은 사람들이 호수변을 산책하고 있다.

 

<   부여시가지 남쪽 방향에 있는 "궁남지" 연못의 전경 >

 

궁남지는 삼국시대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 20여리 밖에 물을 끌어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성인이 사는 곳"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궁남지는 백제 무왕 때 만든 왕궁의 정원 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든 것으로 삼국 중에서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이 연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온 한 여인이 혼자 살면서 용(龍)과 교통하여 낳은 아이가 자라서, 후에 백제 제30대 무왕이 되는 "장(璋)"이라는 어린 아이인데, 장이 성장하여 신라로 건너가 선화공주와 염분을 만들면서 결혼하여 백제로 돌아온다는 "서동요(署童謠)" 의 설화가 서려 있는 연못이다.

연못 주변에서 한국에서 최고로 많은 연꽃이 자라므로 구름과 같은 많은 아마추어와 프로 사진 작가들이 머물면서 출사하는 장소이라, 여름에는 수 많은 인파로 발길도 들리기가 힘든 곳이지만 오늘은 한가롭게 연못 주변을 거닐면서 산책하는 행운을 가져본다,

 

< 연못 주변에 있는 "연꽃" 단지 모습 >

 

< 죽은 연 줄기가 만든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 >

 

연못 중앙에 있는 정자로 들어가는 구름다리 위에서 물을 내려다 보니 물 속에는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금붕어들이 많이 보이는데, 금일(3월 1일)부터 실업자로 전략한 신세가 처량하게 만든다.

 

< 포용정으로 들어가는 "구름다리" >

 

< 포용정 정자 마루에 붙어있는 "서동요" >

 

금붕어야, 너는 실업자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니??????

 

< 아무런 걱정도 없이 물 속을 노닐고 있는 "금붕어" > 

 

이어 이미 늦은 시간이라 오기가 발동하여 부여시가지 방향으로 다시 돌아와 "정림사지" 절터로 운전하여 주차장에 주차하고, 정문으로 들어가니 입장료 1.500원 내라는 안내문이 크게 붙여있다.

 

< 입장료를 내라고 강조하는 "정림사지" 입구 >

 

그런데 나의 호주머니 열어보니, 실업자라서 그런지 돈이 하나도 없는데, 총무는 최후의 실업자 회원 한명까지 보살피며 입장표를 구입하여 주고 살아져야지 그낭 뺑소니 치면 되겠는가?

언제 총무님에게 1.500원의 Double로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머리에 가득 채우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대구로 돌아가가기로 한다. - 2일차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