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시 문화와 산행.

2012년 6월 백봉회 산행은 경북 영주시 부석사를 품고 있는 "봉황산" 의 등반을 참석하면서.

용암2000 2012. 6. 11. 18:28

2012년 6월 9일 (토요일)

 

오늘도 백봉회 6월 산행은 영주 부석사를 품고 있는 "봉황산" 산행을 위해 9시까지 대구법원 앞 주차장에 나아가니, 반가운 얼굴 11명이 산행을 참석하기 위하여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한다.

언제나 백봉회 산행은 산의 위치에 상관없이 아침 9시에 출발하기로 거의 공식화하여 지다 보니, 좀 좋은 산세를 가지고 있는 전라도나 강원도의 원거리 산행은 불가능하게 만든다.

항상 경상도 인근지역에 있는 산으로 만 산행이 이루어지는데, 이제는 특별하게 산행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집행부 고민이 많이 발생하나 보다.

그래서 오늘도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소백산 끝자락에 있는 봉황산으로 발길을 잡아 보는데, 봉황산은 산의 명성보다는 부석사라는 명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나는 몇년 전 봉황산 뒤편에 있는 봉화군 물야면에 있는 생달마을에서 갈곳산으로 올라와 봉황산을 통과하여 부석사로 내려온 경험이 있는 산이라, 산행의 길은 내가 안내하도록 한다.

마이크로 버스는 고속도로 안동 휴게소에서 잠시 머물면서 불순물을 제거시키고 나서, 풍기 Toll gate를 벗어나 소백산 산자락을 돌아 들어가 11시 30분 영주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 부석사 앞에 있는 "폭포 공원" >

 

마이크로 버스를 주차장에 대기시키고 산행에 돌입하기 위하여 주차장 공원을 통과하여 부석사 매표소에 도착하는데, 봉황산은 입산통제 산이라 산행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 매표소 옆에 있는 "부석사" 조감도 >

 

매표소 입구에서 입산금지 법 수호를 위하여 옥신각신 하는데, 백봉회는 산행이 목적이므로 소백산의 다른 산으로 가자는 의견과 여기까지 왔으니 부석사 구경이나 한번 하고 다른 방향으로 결정하자는 의견의 충돌이 발생한다.

회장은 긴급하게 의견을 수렴하여 일단 부석사 경내를 구경하고 나서 다음 방향을 결정하기로 하여 표를 구입하고 천천히 사찰로 들어가는데, 나는 오늘 산행보다 몇 번이나 방문한 부석사를 한번 더 관광하고푼 마음이 앞선다.

 

< 부석사 경내로 들어가는 "은행나무" 길 >

 

이렇게 부석사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많은 이유는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경주 불국사 다음으로 최고의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로써, 5개의 국보와 4개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 보고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몇 번 방문을 통하여 문화재를 관람하여 보았지만, 유심히 살피지 않고 그냥 수박 겉 할키로 돌아본 것 만이 나의 기억에 머물고 있는 부석사이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의 증조가 되시는 "의상대사" 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전이다.

신라 불교는 처음 눌지왕 때 들어와 미미하게 연결되다가 법흥왕 때 크게 발전하였으며 중국 불교를 통하여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 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렸하고 종교의 성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대사의 화엄종이라고 하는데,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대사가 입적할 때 까지 이곳 부석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을 직접 제자들에게 전파하였던 중요한 사찰이다.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일주문을 통과하여 울창한 은행나무로 도열하고 있는 길 따라 올라가면 먼저 보물 제 255호 "당간지주" 가 길의 왼편에 높게 솟아있는데,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4.28m이고 지주 사이의 간격이 1m라고 한다.

 

< 소백산이나 봉황산도 아닌 "태백산 부석사" 명판을 가진 일주문 >

 

< 일주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보물 제 255호 "당간지주" >

 

당간지주를 통과하여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사찰의 2번째 문 사천왕문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4명의 사천왕에게 불순한 마음을 비워 달려고 간곡하게 기원하면서 문 앞으로 들어가 계단 따라 올라가면 새로운 문에 도착하며 이 문에는 아직도 명판도 없는 문이다.

 

< 사천왕문을 지나 만나는 새롭게 건립하고 있는 무명의 "문" >

 

아마 새롭게 건축한 문은 금강문인 듯 하면서, 문의 내부에는 아직 아무런 부처님도 모시지 않고 빈 공간으로 남겨둔 문을 통과하면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만나면서 정원 좌우에 2기의 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 석탑 뒤편에 2층의 높은 루(樓)와 같은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 건물이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써 건물 처마에는 "봉황산부석사(鳳凰山浮石寺)" 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2층으로 건립되어 있는 "봉황산 부석사" 문 >

 

봉황산부석사 문을 통과하여 계단에 올라서면 높은 계단 뒤편에 마치 그림과 같은 2층의 건물이 나타나는데, 일층에는 "안양문(安養門)" 이라는 현판과 2층에는 "부석사(浮石寺)" 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2층 뒤편 처마에는 "안양루(安養樓)" 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아름다운 정원과 계단을 품고 있는 "안양문" >

 

안양문 건물 앞 먼 발치에서 2층 처마 밑을 바라보면 신비스런운 6분의 "부처님" 형상이 나타나는데, 무심코 한지점을 순간적으로 지나치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부처님이다.

 

< 2층 루각 기둥 뒤편에 나타나고 있는 6분의 "부처님" >

 

건물 위로 올라와서 보면 단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단순하게 조각한 건물의 처마인데, 이렇게 숨은 비경이 나타내는 조상님의 건축 기법을 보고 있으며 그저 선조의 손 재주에 감탄사만 일어난다.

이곳 안양문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코 앞에 아름다운 국보 제 17호 "석등(石燈)" 이 나타나는데, 이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이 되는 장방형의 배래석이 놓여 있다.

 

< 안양문을 올라서면 만나는 국보 제 17호 "석등" >

 

그 석등 뒤편 마당에 오늘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부석사 "무량수전(無量數殿)" 건물이 눈 앞에 머물고 있는데, 이 건물이 국보 제 18호이다.

무량수전은 한국의 최초 목조 건물로 내려오다가 수년 전 안동의 봉암사 "극락전" 에게 최초의 수식어는 넘겨 주었지만, 건물의 크기와 역사적 가치로는 비교가 되지 않은 건축물이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하고 있으며 기둥 사이의 주칸의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가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건축되어져 있다.

 

< 매우 안정감을 가지면서 건축된 국보 제 18호 부석사 "무량수전" >

 

지붕은 팔작지봉 형태로써 지붕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해 완만하며 예로 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아홉 량의 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 측면에서 보는 무량수전 "팔작지붕" >

 

오늘 내가 이 무량수전을 눈여겨 보는 것은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국립 중앙 박물관장을 역임하셨으며, 1984년에 작고한 고 "최순우" 씨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라는 소설을 대면하고 나서 더욱더 찾아보고 싶은 장소이다.

 

그의 소설 일부를 옮겨 보면

"소백산 기슭 부석서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숙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젖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운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의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 임이 틀림 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 만을 갖춘 필요 미(美)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 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젖하고도 너그러운 자체이며,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 주는 본보기라 할 수 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자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 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에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암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 이다."

-중락-

 

이렇게 무량수전을 극찬한 최순우씨 소설을 접하고 나서 비록 최순우씨가 머문 초겨울 계절이 아닌 초여름 계절이지만, 오늘 내가 그의 발자취를 만들고 간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먼산을 바라 보면서 그가 남긴 글을 회상하여 분다. 

 

< 최순우 산생님이 기둥에 기대서서 글을 쓴 부석사 "배흘림기둥" >

 

그리고 나서 천천히 걸어 무량수전 내부로 고개를 쑥 내밀어 무량수전 안에 모시고 있는 국보 제 45호 "아미타여래불" 을 바라보니. 한분의 불상을 모시고 있는 불단이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주불을 모시고 있는 불단은 사찰 중앙에 있으면서 좌우 협신불을 모시는 것이 상식이지만, 무량수전 불단은 내부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면 시야는 동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곳 아미타여래불은 높이 278Cm이며 광배높이가 380Cm로써 거대하며 일반사찰에서 만드는 부처님 재료가 청동이나, 돌, 혹은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무량수전의 주불로 만든 재료는 흙, 즉 소조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다.

 

< 흙으로 만들어진 국보 제 45호 "아미타여래불" >

 

부처님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손의 모양은 향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 손가락 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이 큼직하고 얼굴이 둥근편이다.

양쪽 귀는 매우 긴편이고, 잘록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게 보이는 고려 초기의 불상인 것으로 추정 된다. 

흙으로 불상을 만들기에는 매우 탁월한 기법이 요구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불상을 만들기 위하여 흙을 불에 넣어 조소할 때 균열에 의한 파손으로 만들기가 매우 어렵고 만든 후에도 온도와 습도 관리에 조금만 소월하면 균열이 발생하고 또한 곤충의 침입에 따른 파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특별 관리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무심코 바라본 문화재들이 오늘은 그들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조금 인지하고 바라보니 더욱더 친근감이 묻어나므로 부처님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치루고 나서, 건물 축대를 내려서서 무량수전 왼편에 있는 "부석(浮石)" 바위로 이동하여 본다.

 

< 많은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부석" 바위 >

 

전설에 의하면 부석 바위는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 머물면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올 때 의상대사를 사모하는 "선묘" 라는 낭자가 의상대사를 찾았으나, 벌써 배를 타고 귀국길로 떠나므로 바다에 몸을 던져 용(龍)이 되어 의상대사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토록 도와준다.

그러고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전파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사찰을 건립 할려고 하니 많은 이교들이 방해하자 선묘신의 용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에 둘어올려 물리쳤다고 하여 부석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어 마당을 통과하면서 부석사의 문화재를 한번 더 감상하면서 부석사 오른편에 있는 3층석탑으로 올라가 보는데, 이 석탑은 보물 제 249호로 높이가 526Cm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이라고 하며 주변 조경공사로 많이 혼잡스럽다.

 

< 무량수전 앞에 있는 "석등과 안양루" 를 한번 더 감상하면서 >

 

< 무량수전 오른편에 있는 보물 제 249호 "3층석탑" >

 

이 석탑 뒤편으로 연결되는 울창한 숲속으로 만들어진 돌계단 따라 조금 올라가면 아담한 건물 한채를 만나는데, 이 건물이 국보 제 19호 "조사당" 건축물이다.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전각으로써,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진입하면서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 국보 제 19호 "조사당" 건물 앞에서 >

 

이 조사당 건물 처마 밑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를 꽂은 나무가 살아난 "선비화" 라는 꽃나무가 2중 철재 속에서 자라고 있다.

이 선비화는 지붕 아래에 있다보니 아침 이슬이나 빗물이 전연 떨어지지 않고, 또한 물기가 전연 없는 집 뜰에서 자라고 있다니 너무나 신비스러운 나무이다.

 

< 2중의 철제망 속에서 살고 있는 "선비화" >

 

선비화는 일명 골담초라는 약용 나무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선비화 나무의 잎과 꽃을 따 먹으면 장수한다는 속설로 인하여 나무가 고사 됨을 방지하기 위하여 2중 철재 울타리를 만들어 그속에 가두어 버렸는데, 완전히 동물원 원숭이가 되면서 내부를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는 천연기념물 급 보호수 이다.   

이 조사당 벽면에는 벽화 6점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조사당 벽화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국보 제 46호 "조사당 벽화" 이다.

벽화는 범천,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상을 그린 것으로 이 사찰의 창시자이면서 주인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조사당에서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사당 벽화와 보물 제 735호 "고려각판" 은 부석사 초입에 있는 사천왕문 오른편에 있는 박물관으로 이관 보관하고 있는데, 올라 올 때 그곳으로 들리지 않고 바로 올라옴으로 관람하지 못 함이 애석하다. 

이 조사당 건물에서 왼편으로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가면 2개의 건물이 나타나는데, 앞의 건물은 "응진전" 이고 뒤편에 있는 건물은 "자인당(慈忍堂)" 이라는 건물이다.

 

< 2개의 건물 중에 먼저 만나는 "응진전" >

 

이 자인당 건물 내부에는 2기의 "석조여래좌상" 이 놓여 있는데, 이 좌상이 보물 제 220호 불상으로써 9세기 후반기에 유행하였던 비로자나불상으로 당시 불교 사상의 특징과 더불어 불교 양식을 알려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고 한다.

 

< "자인당" 건물 옆에 기술하고 있는 보물 제 220호 "비로자나불" 석상 설명서 >

 

여기 자인당 건물을 끝으로 12시 30분 경 부석사 관람이 종결되고 자인당 옆으로 봉황산 등산로가 폐쇄된 길이 보이는데, 나는 그 길을 잘 알기 때문에 법을 어기면서도 처음 계획한 되로 산행길로 들어 가기로 의견을 다시 모은다.

 

< "봉황산" 입산금지를 알리는 현수막 >

 

한 때 입산금지 구역인 지리산 뱀사골 이끼폭포로 들어갔다가,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곤역을 치룬 경험이 주마등 같이 머리에 스쳐지나 간다.

울창한 숲으로 이어지는 산행길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길에는 잡목이 침입하여 산행하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선명한 길 따라 고도를 상승하기 시작한다.

한 10여 분 정도 올라가니 산을 잘 걷는 일행 중 5명은 화살 같이 먼저 가 버리고 2진이 되는 6명이 뒤로 쳐지면서 휴식 겸 막걸리 한잔 하기 위하여 자리를 잡는다.

오늘도 불로 막거리 대표가 보내어 준 막걸리와 더불어 총무의 특허품 돼지족발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갈증도 해소시켜 본다.

 

< 울창한 숲속에서 "돼지족발과 막걸리" 파티를 하면서 >

 

이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덮혀있는 오솔길 따라 20여 분 정도 더 올라가면 산의 능선에 도착하는데, 걷는 길이 다소 완만하여 진다.

천천히 고도를 상승하면서 1시간 정도 산행하면 해발 819m "봉황산" 정상에 이르는데, 정상에는 아무런 시그널이나 정상석도 없이 단지 산 봉우리만 조금 오뚝하게 솟아 있어 앞서 간 일행들이 머물면서 점심을 먹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나무 사이 좁은 공간에 자리를 잡고 예전과 동일하게 무겁게 지고 온 막걸리를 주전자에 붙고, 건배 부터 먼저 한잔하면서 몇 순배 술잔과 더불어 돼지족발이 춤을 춘다.

 

< "봉황산" 정상에서 막걸리 부터 한잔 >

 

이어 각자 가지고 온 점심을 먹으면서 추후 산행 일정을 이야기 하는데, 아직 해가 중천에 남아 있으므로 계속 앞으로 전진하여 갈곳산까지 가서 종주하여 보자는 의견과 당초 계획되로 여기 봉황산에서 되돌아 가자는 의견이 또 대립되면서 옥신각신 한다.

난상토론 결과로 회장이 갈곳산 방향으로 종주하는 길을 선택 함으로써 길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앞장서서 숲길로 들어가는데, 가는 길이 아무도 걷지않는 원시림으로 변화가 가져와 너무나 황홀한 길이 된다.

 

< 폭신한 나무 잎으로 이어지는 "산행길" >

 

먼곳에서 울려오는 새소리에 장단 맞추어 한 40여 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해발 966m "갈곳산" 정상에 오후 2시 50분 도착된다.

 

< "갈곳산" 정상 이정표를 배경으로 먼저 한장 >

 

갈곳산 정상에서 백봉회 제 242회 정기산행 행사를 간단하게 실시하고 나서, 정상 이정표를 배경으로 단체사진 한장을 찍어본다.

 

< 갈곳산 정상에서 "교가" 를 불려보고 >

 

이 갈곳산은 백두대간의 한 점으로써 소백산 마구령에서 올라와 태백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산으로, 여기서 부터 길이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면서 이정표도 잘 되어 있다.

 

< "갈곳산 정상" 에서 단체 사진 한장 >

 

이어 하산길로 들어서는데, 이곳 갈곳산 정상에서 부터 "늦은목이" 재 까지 거리가 1Km 이지만, 급경사로 내려가는 길이라서 10여 분 만에 늦은목이 재에 도착한다.

이 재에서 부터 선달선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는 백두대간 길과 생달마을로 내려가는 3거리 지점으로써, 금년 3월 11일 봉화군 "외씨버선길" 을 도전하기 위하여 3거리로 올라와 선달산까지 도전하였다가 실폐한 길이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길이다.

 

< 백두대간 소백산과 선달산으로 가는 3거리 "늦은목이" 재 >

 

그 때는 백설로 인하여 아이젼을 의존하면서도 걷기가 어려워 엉금엉금 긴 길이었는데, 오늘은 녹음이 우거진 길로 변모하여 푸른 산천을 구경하면서 걷기의 천국이 된다.

천천히 나무계단과 오솔길 따라 하산하다 보면 산행길은 봉화군에서 관리하는 울창한 잦나무 단지를 통과하면서, 나무에서 뿜어내는 테르핀이라는 방향성 물질을 흡수하는 보너스도 얻는다.

 

< 잘 만들어진 "나무테크" 길 >

 

< 울창한 "잦나무" 사이 길도 걸으면서 >

 

약 30분 정도 걸으면 산행길은 끝나고,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 서면서 한참 걸어 내려가면 길가에는 찔래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으며 산딸기도 지천에 깔려 있어 하산길이 다소 늘어진다.

 

< "찔래꽃" 도 화사하게 피어있는 길 따라 >

 

한 20여 분 정도 걸어 팬션 마을에 도착 함과 동시에 부석사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는 마이크로 버스가 이곳으로 이동시키므로, 고불고불한 산행길 따라 곡예 운전하면서 올라온다.

무사히 산행을 끝냄에 대한 보답으로 하산주 한잔을 즐기기 위하여, 버스는 물야 저수지를 돌아 인접하게 있는 "오전약수터" 로 올라가 본다.

 

< "오전약수터" 를 알리는 입석 >

 

< 약수물을 먹고있는 "오전약수탕" 전경 >

 

< 꽐꽐 흐르고 있는 "오전 약수물" >

 

약수물 한잔씩 하고 나서 하산주 한잔을 하기 위하여 약수탕 주변의 한 백숙집으로 들어가 약수물 백숙 몇 마리를 주문할려고 하니, 백숙이 너무나 고가이라 포기하고 되돌아 나와 영주에 있는 선비촌의 먹거리 마을로 들어간다.

 

< 영주시에 있는 "선비촌" 입석 >   

 

< 영주 선비촌 "안내도" >  

 

< 선비촌 입구를 지키는 "선비상" >

                                                                                 

해물 파전과 더불어 순흥의 명물이 되는 도토리묵을 안주로 삼아 영주의 특산품 "생순흥 막걸리" 몇 병을 마시면서 갈증을 해소시키는데, 오늘 막걸리 대금 결산은 회장이 쏜다고 하니 빈털털가 되는 나는 맨날 얻어만 먹다보니 많은 미안 함이 묻어난다.

 

< 먹거리 촌을 형성하고 있는 "저작거리" 풍경 >

 

6시 50분 하산주를 마시고 나오니 주막 주인장이 방금 선비촌 폐장 시간으로 인하여 3.000원의 입장료 없이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잠시 들어가 구경하여 보라고 권 함으로, 선비촌으로 들어가 본다.

선비촌은 5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자작거리" 와 더불어 제일 위쪽 "한국 선비문화수련원", "한국 선비촌", "소수박물관" 및 "소수서원" 으로 구획된다.

다른 곳은 문을 잠그므로 불 수 없고 단지 한국 선비촌 내부만 들어가 보는데, 선비촌은 옛 선비들이 생활한 주거공간의 고가(古家) 건물들이 만들어져 있어 고가를 구경하면서 조금 배회하다가 어둠이 내리므로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 "선비촌" 을 형성하고 있는 돌담 풍경 >

 

< 선비촌 내에 있는 "한옥집" >

 

< 선비촌을 형성하고 있는 "기와집" >

 

< "소수 박물관" 입구를 표시하는 입석 >

 

오늘 산행은 백봉회 주 특기가 되는 늦고 짧게 산행하는 것이 일반적 산행이라서 약 3시간 정도 봉황산 산행을 선정하였는데, 중간 몇 번 산행코스를 변경 함으로 예상시간 보다 훨신 초과한 약 5시간 30분 정도 산행시간이 이루어진 하루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