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문화와 산행.

대구박물관대학에서 교육 답사지로 선정한 "경주" 에 있는 문화재를 탐방하면서.(오전)

용암2000 2015. 6. 7. 16:21

2015년 5월 27일.(수요일)

 

* 오전 탐방 개요.

대구박물관 내에 있는 사단법인 "대구박물관대학(大邱博物館大學)" 에서는 1999년 제1기 대학생을 모집하여 지금까지 제19기 4903명이 졸업시켰다.

금년 2015년에는 제20기로 200명을 모집한다는 정보 입수와 동시에 나는 등록금 100.000원을 지불하면서 학생으로 등록한다.

 

< "국립대구박물관" 을 알리는 입간판 >

 

대학 개강은 2015년 3월 25일에서 부터 7월 1일 까지 15회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의 일정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부터 2시간 강의가 실시된다.

강사로는 전국에 있는 유명한 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비롯하여 박물관장 등 문화재를 연구하는 연구원들이 주축으로 이루어 진다고 한다.

총 15회 강의 시간 중 2회는 현장 채험을 통하여 지식을 얻는 교육 답사로 이루어 지는데, 나는 4월 29일 1차의 탑사 시간에는 제주도 여행으로 인하여 불참하고 5월 27일 2차 탑사에는 동행하기로 한다.

 

 < "대구박물관대학" 이 있는 본관 건물 >

 

대구박물관대학에서는 한반에 40명 씩 5개의 반(班)을 운영하고 있는데, 내가 소속하고 있는 4반과 더불어 5반을 하나의 Group으로 구성한다.

그래서 1차에는 임진왜란 전적지를 포함하여 상주박물관 방향으로 답사가 이루어졌고, 이번 2차 답사는 경주 일원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기로 계획이 수립된다.

아침 8시 10분 전 쯤 대구박물관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5대 버스가 기다리면서 회장님이 반별로 승차하도록 지시하는데, 나는 4호차에 승차하여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8시 정각 1호, 2호, 3호차는 상주방향으로 출발하고 4호 및 5호차는 경주로 떠난다.

 

< 상주지역 교육 탑사지로 떠날려고 하는 3대의 "버스" >

 

내가 탑승한 4호차에는 대구박물관대학을 총괄하는 회장이 직접 인술 및 해설을 담당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함께 동승하면서 아침식사를 거르고 달려온 학생에게 먼저 백설기 떡을 배분하면서 간단하게 식사에 대응하도록 한다.

몇명의 학생이 결석하므로 인하여 나와 같이 아침식사를 거른 학생에게 2개의 백설기 떡을 나누어 주는데, 그로 인하여 풍족한 아침식사가 된다.

이어 버스 속에서 회장이 금일 일정에 따른 탐방코스 설명서를 배포하고 내용을 읽어 보도록 하는데, 자신은 이 설명서에 나타나지 않은 Behind story(숨은 이야기)를 중점으로 해설하여 현지 해설사나 타 기관에서 운영하는 해설사 보다 더 생동감 넘치는 해설로 보답하겠다고 한다.

아울러 지금 까지 대구박물관대학을 운영하면서 꺽었던 사건 및 개인 신상과 더불어 에피소드(Episode)에 대하여 이야기가 이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제20기 학생들이 졸업하는 날(7월 1일)의 그 다음 주 수요일 부터 9박10일 일정으로 추진하는 티베트 "차마고도(茶馬古道)" 탐방 내용을 부언(附言)하여 설명한다.

이번 차마고도 탐방에는 전체 학생 200명 중 한대의 차량으로 운행하기 위하여 40명을 선착순 모집하여 직접 인술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회장은 졸업하는 매 기수마다 한번씩 차마고드를 인솔하므로, 현재 한국에서 차마고도에 대한 풍족한 지식과 더불어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칭한다.

소요 경비는 약 250만원 선으로 대구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비용, 현지의 숙박 및 음식, 차량, 제반 경비, 정말 군침이 솟아나게 만드는 탑사 코스 등 최상의 조건이면서 매우 저렴한 실비로 운영 할 것이라는 개략적인 설명을 한다.

나는 많은 기대를 가지면서 한번 동참하여 보고 싶은 코스가 되지만, 탐사경비를 충당하지 못하므로 그림의 떡이 되는 탐방하는 코스이다. 

경주로 내려가는 시간 동안 다양한 대화를 나누면서 경주 Toll gate를 벗어나자 마자 첫번째 탑사코스가 되는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 있는 이견대로 달려간다.

감포읍으로 넘어가는 옛길은 보문단지와 덕동댐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넘어가는 도로가 유일 하였지만, 현재 불국사 옆으로 새롭게 개통되어진 토함산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내 이견대가 있는 동해 바다에 도착한다.

 

1. 이견대 및 문무왕릉이 되는 대왕암 견학.  

울산에서 포항으로 올라가는 31번 국도 변에 자리하고 있는 "이견대(利見臺)" 는 경주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대종천과 만나는 지점과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혼(魂)이 깃든 대왕암(大王岩)을 바라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 이견대 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견정" >

 

정자 마루로 올라가 전방을 주시하면 동해 바다의 가장자리에 있는 대왕암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금일 해설을 담당하고 있는 회장이 직접 핸드 마이크(Hand mike)를 잡고 해설하기로 한다.

 

< 신을 벗고 정자로 올라가는 늙은 "학생들" >

 

< 핸드 마이크를 들고 해설하고 있는 "회장" >

 

< 정자 마루에 서서 "해설" 을 경청하고 있는 학생 >

 

먼저 이견대를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문왕(神文王)은 681년에 왕위로 즉위하여 호국(護國)의 용(龍)이 되신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

용(龍)이 되시는 아버지가 다닐 수 있도록 대종천 따라 동해의 바다로 향하여 감은사 법당 아래에 구멍 한개를 뚫어 두었다고 한다.

다음해 감은사 앞 바다에 작은 산이 떠 내려오자 신문왕이 이곳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 보았는데, 몇일 뒤 신문왕이 그 산으로 들어가 용을 만나 검은 옥대(玉帶)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신하를 불려 산 위로 올라가 대나무를 베도록 하였는데, 그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바로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한다고 하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으로 그 후에 나라의 보물로 삼았다고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에 의하면 이견대라는 명칭은 중국 주역에 있는 글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 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있어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것이라 하겠다.

신문왕이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1970년 대 발굴 및 조사 할 때 건물지(建物地)를 확인하였는데, 1979년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현재의 건축물이 되는 "이견정(利見亭)" 이라는 정자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 "이견정" 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 >

 

아울러 눈 앞으로 펼쳐지고 있는 문무왕 수중 릉(水中 陵)이 되는 대왕암을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회장이 대구에서 처음으로 스쿠버 다이빙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1970년 도 초반 대왕암의 발굴 및 조사에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대본해수욕장에서 부터 약 200m 떨어져 있는 대왕암 구조를 도면으로 도색하여 생동감 있는 해설이 이어진다.

 

< 이견정에서 바라보는 "대왕암" >

 

그 당시 까지만 하여도 대왕암이 문무왕 수중 릉이 아니고 단순하게 해수욕장 앞에 떠 있는 작은 바위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들의 출입과 더불어 많은 낚시꾼들이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까지 경주 불국사 앞에 있는 괘릉에 연못을 매립하여 왕릉을 만들었기 때문에 괘릉이 문무왕의 능(陵)이라고 알려졌으나, 괘릉의 발굴 및 조사에서 나타난 유물로 인하여 괘릉 주인공이 원성왕으로 밝혀지므로 새롭게 대왕암을 발굴 및 조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발굴 조사팀으로 참여한 회장은 세부적인 도면을 작성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수중왕 릉의 내부 모습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물길이 만들어져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물길을 만들어 놓아 사통팔방으로 물이 흐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양 물길이 만나는 중심에 길이 3.6m에 너비 2.9m 및 두께 0.9m의 판석(板石)이 덮혀 있는데, 이곳 대왕암을 형상하고 있는 바위는 화산이 발생하여 바다에서 솟아 오르므로 화산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판석은 토함산 인접지역에서 많이 출토 되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문무왕 본인의 유언과 같이 자신을 화장하여 판석 위에 인골을 뿌리므로 그 당시 동해로 많이 출몰하여 노락질을 일삼는 왜놈들의 침입하는 것을 막아내는 호국의 용으로 화신한 곳이라 하겠다. 

 

< 확대하여 보는 "대왕암" >

 

이렇게 이견대 및 이견정 앞에 펼쳐지고 있는 문무왕 수중 릉을 감상하는데, 그 시대 모든 부귀 영화를 누린 왕들은 하나 같이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위세를 과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무왕은 다른 왕들과 차별나게 직접 불교식 화장문화를 직접 참여하는데, 백성을 지키기 위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바다에 안장하게 하는 특출한 왕(王)이라 하겠다. 

 

2. 감은사지 관람.

이견대 인접지역에 있는 "감은사지(感恩寺址)" 를 방문하기 위하여 대종천 따라 토함산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는데, 오른편으로 논을 가로 질려 마을방향으로 들어가면 야산 기슭에 높은 2개의 석탑이 보인다.

 

< 2개의 석탑이 보이고 있는 "감은사지" >

 

석탑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하고 나서 회장은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안내소에 머물고 있는 문화 해설사에게 해설을 부탁한다.

물론 직접 해설하는 것 보다 다소 차별화가 있겠으나 만약 해설에서 빠진 내용이 발생한다면, 해설 후 보충하여 설명하여 주겠다고 한다.

측면을 통하여 감은사지로 올라가면 밑에서 본 2개의 거대한 석탑을 만나는데, 동쪽 방향에 있는 동탑 뒤편에 한그루 느티나무가 서 있는 그늘 아래에 집결하면서 해설사 내용을 경청하기로 한다.

 

< 감은사지로 올라가면 만나는 2개의 "3층석탑" >

 

< "느티나무" 아래에서 해설을 경청하고 있는 학생 > 

 

먼저 해설사 인사와 더불어 함께 방문하는 인솔자가 너무나 자주 방문하므로 해설하기에 두렵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조금 전 이견대에서 회장이 이야기한 내용을 중심으로 감은사지의 내용을 첨가하면서 해설이 이어진다. 

감은사지는 사적 제31호로 지정 되어진 곳으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절을 짖기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 해 신문왕 2년(682년)에 완성한 사찰이다.

금당(金堂) 기단 아래의 동쪽 방향으로 구멍을 두어 대종천 따라 이곳으로 해용(海龍)이 되신 문무왕이 들어와 머물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 바다에 있는 대왕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 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 충정에 감사하여 "감은사(感恩寺)" 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1960년에 서탑의 해체 보수와 1979년 및 1980년에 사찰 터의 발굴조사를 통해 두개의 탑식 가람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回廊)의 길이가 길다고 조사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 구조가 "H" 자형 받침석과 보(湺)를 돌다리 처럼 만들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석재 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고 한다.

 

< "H" 자 모양의 받침석 > 

 

이 우물마루 위에 건립한 금당 사찰은 원래 앞면 8칸에 옆면 4칸의 건축물로 지어졌고, 금당의 뒤편에 있는 강당은 후대에 내려와서 앞면 8칸과 옆면 4칸의 건물을 앞면 5칸과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 졌지만 모든 사찰 건물은 임진왜란 때 전소 되어졌다고 추측한다고 한다.

 

< 받침석 위에 놓여 있는 금당 "기초석" >

 

특히 현존하여 남아 있는 2개의 석탑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3층 석탑으로 높이가 13.4m 이면서 위에 있는 철심(鐵心)의 높이도 3.5m가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철심이 유지되는 것은 신라가 철(鐵)을 다루는 기술도 뛰어나지만, 철심의 약 1m가 탑속으로 묻혀 있으므로 오래 동안 보전이 되었다고 추측한다.

 

< 사리함구 등 많은 유뮬이 출토되어진 "동탑" >

 

< 동탑과 거의 같은 모양의 "서탑" >

 

이 2개의 동탑과 서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 되어져 있으면서 양 석탑은 규모와 형식은 동일한데,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있다.

 더불어 지대석, 중석, 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층 기단에는 3개 및 상층 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다.

다수의 해채 복원을 통하여 많은 유물을 발굴하였는데, 동탑에서 출토되어진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각 외함과 그 안에 들어있던 사리기(舍利器), 사리병(舍利甁) 등이 출토 되어 보물 제366호로 지정하여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개략적인 해설을 끝내고 나서 해설사의 인솔 하에 직접 체험의 시간을 가지는데, 먼저 본찰이 있었던 금당으로 올라가 직사각형 석주가 놓여 있는 금당터를 한바퀴 돌아가면서 구경한다.

또한 금당의 동쪽 방향에 아주 적은 구멍 한개가 보이고 있는데, 그 작은 구멍으로 해용으로 변신한 문무대왕이 다녔다는 통로이라고 한다.

 

< 해용이 다녔다는 "용혈" >

 

또한 이 직사각형 석주 위에 건물을 안치하는 기초석이 놓여 있는데, 이곳 기초석의 배치 간격이 매우 좁아 금당의 건물이 작고 아담하게 건축 되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감은사지 앞으로 내려가면 옛날에는 이 감은사지 앞으로 바다와 대종천 물이 들어왔던 곳에 배를 메어 두었던 나룻터 석축을 들아보면서 가라는 인사와 함께 이별을 가지는데, 나무테크 따라 감은사지 앞으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

 

< 석축으로 부터 배를 메었다고 돌출하고 있는 "돌" >

 

나무테크 계단 아래에 있는 전망대로 들어가 회장이 보충하여 설명이 이어지는데, 이 앞으로 흐르는 대종천이라는 이름은 옛날 토함산 기슭에 있는 한 사찰에 거대한 종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놈들이 그 종을 훔쳐 배에 싣고 대종천 따라 내려가다가 종을 물이 빠뜨려 분실하므로 크다는 "대(大)" 와 쇠를 나타내는 "종(鐘)" 자를 써서 "대종천(大鐘川)" 이라고 불려진다고 하는데, 회장이 어릴적 이곳 대종천에는 많은 물이 흘려내렸다고 한다. 

 

3. 괘릉의 방문. 

다시 버스는 토함산 터널을 통과하여 불국사 방향으로 넘어가 경주에서 울산으로 내려가는 국도 7호선 따라 조금 내려가면, 다시 왼편 토함산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괘릉 주차장에 도착한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괘릉은 사적 제26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의 무덤으로 경주시내에서 울산방향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회장은 버스 속에서 괘릉에 대하여 간락적으로 설명을 부언하는데, 조금 전 탐방한 대왕암 수중 릉이 문무왕의 능으로 판명되기 전 까지 이곳 괘릉 연못에 안장하므로 문무왕의 무덤으로 추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괘릉이 신라의 고분 중에서 제일 잘 조성되어 있으므로 경주시에서 3-4년 전 까지 무덤 주변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입장료 2만원을 징수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하게 능을 보기 위하여 경주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이곳 까지 방문하여 비싼 입장료까지 지불하면서 찾아오는 탐방객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문화재청 및 경주시가 협의하여 울타리를 철수 함과 동시에 입장료 징수를 철회하였지만, 그래도 너무나 외진 곳에 단독의 문화재로 존재하면서 홍보 부족으로 아직도 거의 관광객 발길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좁은 도로 따라 토함산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왼편으로 이어지는 야산 언저리에 넓은 주차장과 변소 및 탐방안내소가 자리하고 있지만, 개미 새끼 한마리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적막감이 흐르는 사적지가 된다.

 

< "괘릉" 의 전경 >

 

그런데 이곳 괘릉 입구에도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회장은 해설을 부탁하므로, 한명의 여성 해설사가 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해설을 하기 시작한다.

 

<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해설사" >

 

이곳 왕릉은 몇년 전 까지 문무왕릉이라고 추정하고 있어던 무덤이었지만, 문무왕릉이 감포 앞 바다에 있는 대왕암으로 판명 되면서 부터 새롭게 발굴 및 조사에 따라 신라 제38대 원성왕(이름 : 김경신, 재위기간 : 785-798년)으로 판명되었다.

원성왕은 선덕왕이 자식도 없이 죽자 태종 무열왕의 6세 손이 되는 "김주원(金周元)" 과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김주원과의 왕위 계승 다툼에 대한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데, 당시 김주원은 김경신 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다고 한다.

김경신은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면서 12 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餘三)의 해몽을 듣고 비밀리에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마침 선덕왕이 죽자 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했으므로 신하들이 김경신을 추대하므로 왕이 되었다.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양자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 원성왕의 치적으로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는데, 원성왕 3년(788년)에는 독서 삼품과(讀書 三品科)를 설치하였다.

그러고 나서 유교 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능한 왕이라 하겠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면으로 먼저 화표석(華表石)이 서 있으며 그 뒤편으로 왜국에서 용병으로 차출하여 기용한 무인석(武人石) 및 문인석(文人石)이 양쪽으로 서 있다.

그 다음으로 몸통을 전방 또는 남쪽으로 보고 있지만, 머리를 동서남북 방향으로 보면서 왕릉을 지키는 돌사자 4마리가 좌우 2쌍식 앉아 있다.

 

< 왕릉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화표석와 무인석 및 문인석, 사자상" >

 

< 왕릉의 왼편에 앉아 "동쪽" 을 지키고 있는 돌사자 >

 

< 왕릉의 오른편에서 앉아 "서쪽" 을 지키고 있는 돌사자 >

 

< 왕릉의 왼편에 앉아 고개를 돌리면서 "남쪽" 을 지키고 있는 돌사자 >

 

< 왕릉의 오른편에 앉아 고개를 돌리면서 "북쪽" 을 지키고 있는 돌사자 >

 

넓은 잔디광장을 지나 왕릉으로 올라가면, 왕릉 앞에는 높은 제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좌판과 더불어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무덤의 크기는 밑둘레가 70m에 지름이 21.9m 및 높이 7,7m로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돋을새김이 되어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 "잔디광장" 으로 들어가고 있는 늙은 학생 >

 

< 잘 조성되어 있는 "원성왕릉" >

 

< 돋을새김을 하고 있는 "십이지신상" >

 

< 왕릉 뒤편으로 돌아보고 있는 늙은 "학생" >

 

본봉 주변으로 울창한 안강송(安康松)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데, 이곳 소나무의 모습들이 많은 굴국을 가지면서도 무덤을 보호하고 있다.

이곳 안강송은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그래서 사진 작가들이나 화가들의 화폭에 많이 담아보는 곳 중 하나이라고 한다.

 

< 구불구불하게 성장하고 있는 "안강송" >

  

"괘릉(掛陵)" 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이 고여 있는 연못에서 무덤으로 장사를 지낼 수 없어 관(棺)을 걸어서 묻었다는 뜻이 있는 걸을 "괘(掛)" 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불려졌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곳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 제도를 본 받았으나 둘레석,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난간, 석물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한 형식을 가진 무덤이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우수하게 평가하는 왕릉이라고 한다.

다시 입구로 내려와 회장이 부언하여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무덤을 지키는 입상은 단순하게 서역인라고 해설하고 있는데, 입구 처음에 있는 무인석은 키르키스탄에 용병으로 차출되어진 "소기도" 민족이다.

왼편에 있는 입석은 왼손 주먹을 쥐고 있는 왼손 잡이고,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오른손 주먹을 쥐고 있는 오른손 잡이로 적이 전면으로 쳐들어 오면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 왕릉의 왼편을 담당하고 있는 "무인상" >

 

< 왕릉의 오른편을 담당하고 있는 "무인상" >

 

그 뒤편에 있는 입석에 대하여 안내문과 팜플릿에는 문인석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몇년 전 사학자들의 연구한 결과에 따라 이 석상도 무인석으로 판명하였는데, 사람의 형상을 잘 관찰하여 보면 이 석상도 용병으로 차출되어진 "위그로" 족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 무덤의 왼편에 서 있는 "문인상" >

 

< 무덤의 오른편에 서 있는 "문인상" >

 

그런데 해설사와 달리 그가 입은 옷을 잘 관찰하면, 앞면에는 도포 자락 아래로 칼을 숨겨져 있고 뒤면에는 갑옷을 입고 그 위로 긴 댕기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자치하면 문인으로 오해를 가질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므로 많은 혼돈을 야기시키도록 되어 있다고 설명하여 준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진실은 1-2년 후 문화재청에서 확정 발표가 있을 때 까지 기다는 것이 상책이 되겠다는 생각하면서, 괘릉을 떠나 인접하게 있는 불국사 앞에 있는 식당촌으로 들어가 맛 있는 산채정식으로 점식식사를 하기로 한다. - 오전 탐방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