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문화와 산행.

대구박물관대학에서 교육 답사지로 선정한 "경주" 에 있는 문화재를 탐방하면서.(오후)

용암2000 2015. 6. 12. 21:35

2015년 5월 27일.(수요일)

 

* 오후 탐방 개요.

오후 탐방코스의 첫 시작점이 되는 "소금강산(小金鋼山)" 지구에 있는 유적지를 방문하기로 하는데, 현재 경주 소금강산은 신라 때 부터 불려지는 금강산이 본 명칭이지만 북한에 있는 금강산에 대비하여 유명도가 떨어지므로 인하여 소금강산으로 격하되어졌다.

그것 마저 대부분 관광객은 오대산 소금강산과 거제도 해금강에는 많은 여행자들이 찾지만, 경주 소금강산은 존재도 모르고 지나가는 비운의 산이라 하겠다.

경주에 있는 문화재는 시가지를 제외하고 크게 8개의 지구(토함산, 남산, 소금강산, 단석산, 서악, 대본, 화랑, 구미산)로 구획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가 많이 집중하고 있는 남산과 토함산 및 서악지구 등 3개 지구를 관광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현실이라 하겠다.

진짜 경주 유적지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5개 지구도 함께 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경주를 알게 한다고 하는데, 오전 대본지구에 있는 이견대(利見臺)에서 부터 시작하여 오후 소금강산 지구를 방문하기로 한다.

소금강산 지구는 점식식사를 한 불국사 인근지역에서 부터 출발하는데, 보문호수를 지나 경주 시가지에서 포항 방향으로 들어가는 7번 국도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는 아담한 산이다.

이곳 소금강산 지구에는 해발 143m "소금강산" 과 해발 297m "금학산" 과 맥(脈)을 같이 하고 있는 산이고, 2개의 산맥을 연결하는 능선 따라 약 2시간 30분 정도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매우 낮은 산이라 하겠다.

최초 경주에는 토함산을 동악(東岳), 선도산을 서악(西岳), 남산을 남악(南岳), 낭산을 중악(中岳), 그리고 이 소금강산을 북악(北岳)이라고 하면서 경주의 5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 5악이 서라벌(徐羅伐)을 지키는 전초기지 역활을 하였던 산이라고 한다.

북악이 되는 소금강산에도 많은 신라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지만, 다른 지구에 비하여 유명도가 있는 문화재를 보유하지 못하므로 대부분 관광객은 소흘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곳이라 하겠다.  

금일 오후에 갈려고 하는 소금강산 지구 탐방코스는 201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에 갈 곳도 없었던 나는 친구와 함께 한번 방문하여 탐방한 코스가 되는데, 그래서 세부적인 내용 보다는 회장이 해설하여 주는 이야기에서 첨가(添加)하는 수준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4. 석탈해왕릉 방문.

경주시가지에서 포항 방향으로 왕래하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하고 나서, 일행은 회장의 인솔에 따라 석탈해왕릉 앞에 있는 안내판으로 이동하여 간단하게 석탈해왕의 탄생 이야기를 경청하기로 한다.

 

< 경주 소금강산 지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탈해왕릉" 전경 >

 

석탈해왕은 신라를 개국(開國)한 초대 박혁거세왕,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다음으로 제4대 왕으로 등극하는데, 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되는 석탈해는 당시 유명한 화백제도와 더불어 박씨(朴氏) 왕조의 아성을 깨뜨리고 왕으로 등극하는 기막힌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을 가진 왕이라 하겠다.

BC 57년에 왕으로 추대하여 BC 80년 까지 23년간 왕으로 재위하였는데, 출생의 비밀은 왜국(倭國)에서 동북 방향으로 일천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의 왕비가 잉태한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고 한다.

이는 성스럽지 못하는 일이라고 하여 그 알을 궤(櫃)에 넣어 바다에 버리므로 동해 아진포(阿珍浦)에 도착하였고, 바다가에서 거주하는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보고 어린 아이가 있으므로 거두어 키웠다고 한다.

이때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오므로 까치 "작(鵲)" 자에서 새 "조(鳥)" 자를 버리고 옛 "석(昔)" 자를 성(姓)으로 삼았고, 궤를 풀고 나왔다고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석탈해왕은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매우 늦은 나이가 되는 62세 때 왕위에 등극하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석탈해왕이 세상을 떠날 때 "성북의 양정(壤井) 언덕 위에 장사를 지냈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

삼국유사에는 "수장하였다가 뼈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동악에 모셨는데, 현재의 동악대신이다"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왕릉으로 들어가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석탈해왕 치적과 더불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가를 즐기다가 나는 왕릉 주변에 서식하고 있는 소나무를 관찰하기로 한다.

 

< 석탈해왕릉 앞에 있는 "소나무" 그늘 아래서 >

 

무덤의 주변에 있는 대부분 소나무들은 방향을 가리지 않고 햇빛이 잘 들고 있는 본봉 위로 나무가지가 기울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 석탈해왕릉 주변에 있는 소나무들은 무덤의 전면이 되는 서쪽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 또한 특색을 가진 무덤이라고 한다.

석탈해왕릉은 높이가 약 4.5m에 지름이 약 15.5m 이며, "굴식도방무덤(橫穴式石室墳)" 으로 둥글게 흙을 쌓아 만든 무덤이다.

무덤 주변으로 아무런 장식이나 석상 등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 박씨 왕조의 세도에 억눌려 기본적인 무덤만 조성되어진 상태이라고 한다.   

 

< 아무런 치장도 없이 단순한 "석탈해왕릉" >  

 

5. 먼 발취에서 바라보는 경주포암.

석탈해왕릉에서 석조 사면 불상에 있는 백률사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포항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중간 지점에 경주 이씨의 세거지가 되는 "경주표암(慶州瓢巖)" 이라는 사당을 만난다.

 

< "경주포암" 사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 >

 

< 담장 넘어로 바라보는 "사당" 내부 전경 >

 

이 표암이라는 바위 이름은 "박바위" 혹은 " 밝은 바위" 를 뜻하고 있는데, 신라 6촌 가운데 급량부(及梁部)이었던 알천(閼川)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공(李謁平公)" 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 포암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박바위" >

 

삼국유사에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데, "진한 땅에 여섯 촌이 있었으며 그 하나가 알천 양산촌(楊山村)이고 그곳의 촌장이 알평(謁平)이 잇었다.

그는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瓢巖峰)으로 내려와 급량부 이씨 즉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조상이 되었다고" 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신라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연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는데, 표암은 경주이씨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로서도 유명한 역사적 유래를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 경주이씨 시조가 되는 "알평" 을 기리는 추모비 >

 

< 사당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부속" 건물 >

 

사당을 들어가는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지만, 경주이씨의 후손이 되면서 한국 부(富)의 상징이 되는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의 기부금으로 인하여 너무나 잘 조성되어진 사당이다.

 

6. 경주 굴불사지 석조 사면 불상 및 백률사 탑방.

경주포암에서 다시 포항 방향으로 한 2-300m 정도 더 걸어가면 백률사 주차장에 도착하고, 이곳 주차장에서 야산 따라 조금 올라가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 굴불사지 "석조 사면 불상" 이 자리하고 있는 공터에 도착한다.

 

< 굴불사지 "석조 사면 불상" 으로 올라가는 길 >

 

이 불상 앞에는 경주의 시민에서 부터 많은 방문객들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그 기도처 뒤편으로 보물 제121호가 되는 "굴불사지 석조 사면 불상(堀佛寺址 石造 四面 佛像)" 이 자리하고 있다.

 

< 조그마한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사면불상" 의 전경 >

 

이곳 불상 높이가 약 3m의 거대한 바위로써 동서남북 4면을 돌아가면서 부처님이 새겨져 있는데, 동쪽면과 서쪽면에는 1명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남쪽면에 3명의 불상 및 북쪽면에 2명의 불상 등 총 7명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경주 남산에 있는 칠불암의 사방불(四方佛) 형태의 바위와 비슷하다.

바위 정면(正面)에 해당하는 서쪽면에는 1명의 아미타여래불상과 더불어 그 여래불상 좌우로 입석의 아미타여래불상이 서 있다.

왼편에 있는 아미타여래불상은 너무나 많이 파손 되므로 머리 부분은 거의 형태를 알 수 없고, 단지 파손 되어진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애초롭게 한다.

 

< 바위 정면이 되는 서쪽면에 자리하고 있는 "아미타여래불상" >

 

시계방향으로 돌아서 가면, 북쪽면에는 한분의 입석 부처님과 더불어 왼편에는 선각(線刻)으로 그려진 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보살상 얼굴이 모두 11개이고 팔이 6개가 달린 관세음보살 입상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모양이지만, 마멸이 너무나 심하게 일어나 선명하게 관람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북쪽면에 있는 입석 부처님과 왼편 "선각 보살상" > 

 

다시 동쪽면이 되는 뒤편으로 돌아가면 가부좌 자세를 하면서 앉아 있는 약사여래좌상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그 약사여래좌상의 끝지점에 서쪽면과 동일하게 2분의 입석 부처님이 있었다는 좌대가 있지만, 현재 부처님은 살아지고 없다.  

 

< 동쪽면에 자리하고 있는 "약사여래좌상" 과 부처님이 서 있었던 좌대가 있었던 흔적 >

  

마지막이 되는 남쪽면으로 돌아서 가면 3명의 입상 불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오른편 부처님은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지만 중앙에 있는 부처님은 머리가 없고 왼편에 있는 부처님은 전체가 마멸되어 형상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 남쪽면에 자리하고 있는 3분의 "부처님" >

 

그러므로 이 석조사면 불상에는 총 11명의 부처님이 있었다고 하나 동쪽면에 있는 2분의 입석 부처님이 분실 되므로 현재 9분의 부처님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부분 많은 마멸로 인하여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 문화재가 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 석조 사면 불상에는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아 왔을 때, 땅 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오므로 땅을 파 보니 거대한 바위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각면에 불상을 새기고 그 옆에 사찰을 건립하여 "굴불사(堀佛寺)" 라고 하였지만, 현재 사찰을 없어지면서 많은 주축돌이 발굴되므로 "굴불사지 터" 이라고 한다.

이 굴불사지 터에서 소금강산 방향으로 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백률사 경내에 도착하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백률사는 "자추사(刺楸寺)" 이라고 추정도 한다고 한다.

자추사는 신라 법흥왕 14년(527년)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삼도록 순교한 "이차돈" 선사를 기리기 위한 절로써, 이차돈은 새남터에서 참수 당하여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 사찰을 건립한 장소이라고 한다.

경내로 들어가면 먼저 범종각 건물을 만나고 한단의 축대 위로 올라가면 요사채 건물과 함께 대웅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웅전 건물 뒤편으로 돌아서 가면 또 다른 높은 축대 위로 삼성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백률사 경내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범종각" >

 

< 한단의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 >

 

이곳 대웅전 건물에는 한 때 국보 제28호가 되는 "금동약사여래입상" 과 더불어 이차돈 선사가 참수 당하는 모습과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육면의 "순교비(殉敎碑)" 가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이진 현재 2개의 유물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데, 아쉽지만 이곳 경내에는 모형의 문화재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 대웅전 건물 내부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 >

 

< 대웅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삼성각" >

  

경내를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관람을 끝내고 경내 뒤편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요사채 건물과 더불어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으로 경내로 올라오는 세멘트 포장도로가 울창한 대나무 숲을 파괴하면서 관통하여 만들어져 있는데, 자연을 파과하면서 까지 만든 도로이라 다소 거부감이 일어난다.

 

< 새롭게 건립하고 있는 "요사채" >

 

< 요사채 건물 앞으로 "대나무 숲" 을 파괴하여 만들어진 도로 >

 

출발지점이 되는 굴불사지 석조 사면 불상이 있는 굴불사지 터로 내려가는데, 더워로 인하여 그곳에서 머물고 있는 사람과 더불어 먼저 도착한 일행들과 조우를 이루면서 후미 팀과 함께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한다.  

 

7. 국립경주박물관 관람.

오늘의 마지막 관람지가 되는 "국립경주박물관" 을 관람하기 위하여 버스는 경부고속도로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울산으로 내려가는 4거리 오른편 경주시가지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이내 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한다.

 

< 4반 학생을 위하여 고생하고 있는 "탐방 버스" >

 

유네스코가 지장한 세계문화유산의 보고가 되는 경주역사 유적지구 내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의 궁궐 터가 월성과 월지 및 신라의 능묘가 밀집하고 있는 대능원 인접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대가람이었던 황룡사지 등과 이웃하고 있는데, 남쪽으로는 한국 불교 미술의 보고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남산을 바라보고 있는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 경주박물관은 다소 자주 방문하는 곳이라 친근감을 가지면서 내부로 들어가는데, 일전에 방문할 때에는 박물관 중심건물이 되는 신라역사관 건물 내부공사로 인하여 특별전시관에서 전시실로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에는 모든 공사를 끝내고 나서 유물을 신라역사관 건물로 이전하였고, 반대로 특벌전시관에는 다시 내부공사를 하고 있다.

 

< "신라역사관" 앞으로 움직이고 있는 관광객 >

 

회장은 먼저 많은 어린들이 관람을 즐기고 있는 "선덕대왕 신종" 방향으로 인솔하여 신종 앞에서 해설하기 시작하는데, 단체로 관람을 즐기는 다른 팀의 해설사와 이야기가 혼돈되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도통 알아들 수 없다.

 

< 많은 관광객과 학생들이 찾고 있는 "성덕대왕 신종" >

 

< 신종 무게에 따른 안전을 위하여 "각목" 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 >

 

< 신종 표면에 조각되어 있는 "비천상" >

 

대충 몇장의 사진만 남기고 나서 주어진 한시간 동안 각자가 박물관 유물을 알아서 관람하기로 하는데, 이곳 경주박물관에는 상설전시관으로는 신라역사관, 신라미술관, 월지관 등 3개의 전시관 및 별도의 특별전시관 건물을 비롯하여 야외전시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모든 것을 관람하기에는 몇 일을 요구하므로 중요한 국보급 문화재만 찾아보기로 하면서 새롭게 단장한 신라역사관으로 들어가 유물을 감상하기로 하는데, 이곳 전시관에는 제1 전시실에서 제4 전시실 까지 구획하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제1 전시실에는 구석기 시대에서 부터 6세기 초 신라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기 까지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고, 제2 전시실에는 신라의 4세기 중반에서 부터 마립간이라는 지배자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어진 왕조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제3 전시실에는 지증왕에서 부터 503년 나라의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나서 부터 신라의 영역의 확대 과정에서 출토 되어진 유물을 전시하고. 제4 전시실에는 신라의 통일과정에서 부터 멸망하기 까지 발굴되어진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제1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는 "유물" >

 

< 신석기 시대의 유물 "도자기" >

 

< "오리" 형상의 유물 >

 

< "청동기시대" 의 유물 >

 

< 국보급 유물 "금관" >

 

< 잘 정리하고 있는 "유물" >

 

< 황금으로 만든 "술잔" >

 

< 국보급 유물이 되는 "허리띠" >

 

< 다양한 "보석" 으로 장식하고 있는 유물 >

 

< 백률사에서 옮겨진 이차돈의 "순교비" > 

 

< "금강장사" 를 나타내고 있는 유물 >

 

이어 신라미술관 건물로 이동하여 1층에 있는 불교 미술실을 구경하여 보는데, 이곳 미술실에는 찬란하였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불교 미술품을 시기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국은 기념실" 과 더불어 황룡사 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출토되어진 유물을 전시하고 있어 관람하여 본다.

 

< "신라미술관" 으로 들어가는 입구 >

 

< 국은 기념실에 전시하고 있는 "석조" 불상 >

 

< 국은 기념실에 전시하고 있는 "불상" >

 

< "국은 기념실" 을 관람하고 있는 관광객 >

 

< 백률사에서 옮겨온 국보급 "금동약사여래입상" >

 

< 국보급 유물이 되는 "기마인물형 각배" >

 

< "황룡사" 의 모형 >

 

< 황룡사 건물에 사용한 처마 "망세" >

 

또 다시 넓은 잔디광장을 지나 박물관의 서편에 있는 월지관으로 이동하여 월지(月池)에서 출토되어진 유물을 감상하여 보기로 한다.

이곳 월지관에서는 일반적으로 무덤에서 출토되어진 것과 달리 통일 신라시대에 궁중 생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유물이 출토 되어짐에 감탄사가 발생하게 한다.

 

< 월지관 내에 자리하고 있는 "월지" 모형도 >

 

< "월지관" 내부 전시실의 전경 >

 

< "월지" 에서 출토되어진 유물 >

 

< 월지에서 출토된 "금동판삼존불상" >

 

< 월지에서 발굴된 "장신구" >

 

마지막으로 박물관 곳곳에 전시하고 있는 야외전시장 유물을 구경하다가 주어진 시간에 따라 입구에 있는 주차장으로 나아가는데, 대부분 늙은 학생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일행이 집합하므로 대구로 출발하기로 한다.  

 

< 야외 잔디광장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 >    

 

< 야외전시장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급 "고선사 삼층석탑" >

 

< 박물관 광장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전시물" >

 

* 탑방 후기.

이번 대구박물관대학에서는 교육시간의 연장으로 2번째 야외 문화탐방 시간을 가졌지만, 앞으로 졸업하고 나면 매월 한 차례씩 국내 유적지 탑사를 통하여 우라나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제고(提高) 시키는데 선두에 서겠다고 한다.

아울러 회장은 1년에 한 두번의 기회를 만들어 해외 유적지를 돌아보는 시간도 함께 하므로 동급간의 우애 증진과 함께 사회 인문학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데, 많은 협조를 부탁 드린다는 이야기로 종결한다. - 오후 탐방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