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동문.(산행)

경북대학교 기계과 동문과 함께 경주시 "단석산" 산행과 영천시 "임고서원" 을 돌아보면서.

용암2000 2015. 8. 27. 21:12

2015년 8월 22일.(토요일)

 

1. 단석산 등산.

오늘은 대학교 동문 2명과 함께 3명이 대구에서 인접하게 있으면서 도시 국립공원이 되는 경주의 8개 지구 중, 단석지구에 있는 “단석산(斷石山)” 산행을 하기 위하여 길을 나서 본다.

아침 9시에 출발한 승용차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10시 경 건천 Toll gate에서 내려 10번 국도를 이용하여 청도군에 있는 운문댐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단석산(斷石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한대의 차량도 없어 산행 초입이 있는 오덕선원(五悳禪院) 앞에 있는 주차장까지 올라가 주차하기로 한다.

 

< 도로변에 있는 "오덕선원" 과 주차장 >

 

나는 이곳 단석산을 몇 번이나 산행하여 본 경험이 있는 산이 되어지지만, 산행한 시기가 너무나 오래 되어지므로 다소 아둔한 산이 되어진다.

이렇게 반복하여 단석산 산행을 추진하는 이유는 단석산 6-7부 능선 정도에 한국 최초로 만들어져 있는 국보 제199호가 되는 “마애불(磨崖佛)” 을 다시 관람하기 위함이라 하겠다.

산행 들머리에 있는 오덕선원은 최근에 조성 되어지고 있는 선원이라서 그런지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규모 면에 있어서는 어느 선원 보다 방대하게 조성하고 있다.

 

< 주불을 모시고 있는 "오덕선원 큰법당" >

 

< 큰법당 뒤편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 >

 

개울 옆 따라 만들어져 있는 시멘트 포장 길을 이용하여 조금 올라가면 국립공원 단석지구를 관리하는 안내소에 도착하는데, 안내원의 반가운 인사와 함께 단석산에 대한 산행에 따른 주의점을 설명하여 주므로 경청하면서 마음에 새겨둔다.

 

< 단석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 안내소" >

 

다시 시멘트 포장길 따라 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3거리에 도착하면서, 단석산 지구를 설명하는 안내문과 더불어 국립공원 경주에 대한 년중 행사 일정을 소개하고 있어 그 내용을 대충 읽어 본다,

 

< 3거리에서 만나는 "단석산" 조감도를 보면서 공부하는 2명의 동문 >

 

< "단석산" 산행 안내도 >

 

여기에서 부터 급경사의 오르막 길이 되어지므로 땀으로 범벅이 되는 몸으로 고도를 상승하면 신선사(神仙寺)를 알리는 입석과 더불어 조그마한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주차장까지 올라갈 수 있는 차량은 앞뒤 바퀴에 구동이 작동하는 RV 차종 만 가능하다는 안내문도 함께하고 있다.

 

< 급경사의 "오르막 길" 이 되어지는 길 >

 

< 작은 주차장 옆 "신선사" 를 알리는 입석 >

 

주차장에서 오솔길 따라 한 100m 정도 더 올라가면 "신선사(神仙寺)" 경내에 도착하여 지는데, 옛날에는 주불을 모시고 있는 한채의 건물만 있었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현재는 매우 짜임새가 있는 사찰로 변경되어 있다.

 

< 다소 짜임새가 있는 "신선사" 전경 >

 

경내 입구에는 요사채 건물과 더불어 요사채 건물 뒤편으로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대웅보전 왼편으로 우물과 더불어 산령각 및 또 다른 요사채가 되는 삼소굴(三笑窟)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신선사 경내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 >

 

< 대웅보전 왼편에 있는 "산령각과 삼소굴" 건물 >

 

대웅보전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높은 좌대에 앉아 있는 부처님과 더불어 다수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국보 제199호 마애불로 들어간다는 안내문과 더불어 나무테크 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 대웅보전 오른편에 있는 "부처님과 비석" >

 

< 마애불로 들어가는 "나무테크 길" >

 

나무테크 길 따라 산의 모퉁이 방향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바위 군락지를 보호하고 있는 철구조물이 나타나는데, 이 철구조물은 국보 제199호의 마애불이 비바람에 따른 마멸을 보호하기 위하여 건립되어진 구조물이라 하겠다.

 

< 마애불을 보호하고 있는 "철구조물" >

 

이 구조물 속에는 높이 약 10m가 되는 거대한 암석이 “ㄷ" 자 형태로 갈려져 있는 바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 이른바 석불법당(石佛法堂)을 만든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이 되어진다.

 

< "ㄷ" 형태의 마애불 조감도와 설명서 >

 

갈려져 있는 바위 틈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거대한 바위가 남쪽과 동쪽으로 “ㄱ" 자 형태로 한개의 바위가 되고, 북쪽 방향으로 2개의 바위가 서 있으며 앞면이 되는 서쪽 방향으로는 바위가 없으면서 입구가 되는 형태의 모습이다.

이 바위 동쪽면에는 새겨져 있는 관음보살상은 정면 좌우로 거대한 불상을 거닐고 있는데, 남쪽면 바위에 새긴 지장보살상 안쪽으로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곳이 신선사(神仙寺)이라는 글씨가 있다고 한다.

 

< 동쪽 바위면에 있는 "관음보살상" > 

 

< 남쪽면 바위에 새겨진 "지장보살상" 과 명문 >

 

이 관음보살상 앞으로는 북쪽 면에 2개의 바위가 서 있으면서 앞에 서 있는 바위에는 미륵 본존불이 새겨져 있는데, 그 높이가 일장육척인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인 것으로 밝혀졌다.

북쪽면에서 또 다른 바위가 되는 바위 하부 표면에는 오른편으로 한명의 반가유상과 함께 3명의 삼존불상이 있는데, 이 삼존불상은 왼손으로 동쪽을 가르키고 있어 미륵 본존불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 북쪽면 바위에 새겨져 있는 "반가유상과 삼존불상" >

 

이 북쪽면 바위에 새겨져 있는 삼존불상 밑으로는 버선 같은 모자를 쓰고 손에 나무 가지와 향로를 든 공양상 2구가 있으며, 더 아래 방향으로 한명의 부처님이 새겨져 있어 이곳에 있는 바위 군락지에서는 불상 및 보살 등 총 10구가 돋음 새김 되어있다.

 

< 버선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2명 "공양상" >

 

< 공양상 하단에 있는 "부처님" >

 

이 마애불은 7세기 전반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석굴상(石窟像)으로 신라 불교문화와 신앙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 되어지면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이라고 한다.

서쪽이면서 정문 형태가 되는 문으로 돌아서 바위 군락지로 들어가니, 한명의 스님과 함께 보살 한분이 열심히 불경을 외우면서 기도 정진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므로 감히 접근하여 미륵 본존불과 더불어 석굴상을 상세하게 관찰하면서 사진 촬영을 포기하고 돌아서야 한다.

 

< 서쪽에서 들어가는 정문 형태에서 바라보는 국보 제199호 "마애불" 과 불경을 드리고 있는 스님과 보살 > 

 

< 마애불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장 >

 

마애불 앞면으로 만들어져 있는 오솔길 따라 돌아서 가면 길의 가장자리에 단석산 정상까지 1Km 거리가 되어진다는 이정표가 붙어있고, 여기에서 부터 다소 급경사의 능선길이 되어지므로 본격적인 산행이 된다.

 

< 마애불에서 단석산 정상까지 알리는 "이정표" >

 

< 산행길에서 만나는 "노송" >

 

그래도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인하여 힐링(Healing) 하기에 최적의 산행길이 되어지므로 무아지경으로 약 1시간 정도 고도를 상승하면 해발 827m “단석산(斷石山)” 정상에 도착하여 지는데, 정상에는 넓은 공터와 함께 산불감시초소가 자리하고 있다.

 

< 산불감시초소와 함께 하는 "단석산" 정상 >

 

약간의 심호흡을 가다듬과 나서 일단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장을 찍을려고 하였으나, 우리 일행 말고는 한명의 사람도 산행을 하고 있지 않아 각자 돌아가면서 개인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 단석산 "정상석" 을 배경으로 >

 

< 단석산 정상석 뒤편에 있는 "시" >

 

그러고 나서 정상 주변으로 구경하여 보면 정상석 뒤편으로 다소 큰 바위 한개가 두개로 갈려진 상태로 놓여 있는데, 그렇게 갈려진 이유는 신라를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화랑시설 이곳까지 올라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면서 칼로 바위를 내려쳐서 갈려진 바위이라고 한다.

 

< "김유신" 장군이 칼로 2개의 조각으로 만든 바위 >

 

그러고 주변 풍경을 구경하여 보니 눈 앞에는 건천시가지와 더불어 경부고속도로에는 많은 차량이 움직이고 있지만, 운무로 인하여 멀리 포항시가지까지 조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정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여가를 즐기다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잡목 그늘 아래로 들어가, 반주와 더불어 간단하게 준비한 점심식사 시간을 가지도록 한다.

충분한 음식과 더불어 휴식을 가지고 나서 하산하기로 하는데, 하산 길은 올라온 길의 반대가 되어지면서 다소 돌아서 가는 "OK그린 연수원"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지점에서 오른편에 있는 사잇길로 내려가기로 한다.

 

< "사잇길" 로 내려가는 길 앞에 있는 이정표 >

 

문제는 이 사잇길이 국립공원의 보호차원에서 폐쇄가 되어지므로 거의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급경사에 매우 미끄러운 길이 되어지므로 몇 번이나 넘어지면서 한 20분 정도 하산하면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 바위 앞에는 토속신앙을 믿는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다.

 

< 무속인의 기도처로 사용하는 "바위" >

 

이 바위 앞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다랭이와 같은 층층계단으로 이루면서 텃밭을 거닐고 있는 몇 채의 양철집을 만나는데, 그 양철집 제일 아랫집에 할아버지 한분이 마루에 앉아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 텃밭과 함께 하는 위쪽 "양철집" >

 

< "할아버지" 와 함께 하는 아랫집 >

 

< 할아버지 집의 뒤편 "부엌" >

 

할아버지는 너무나 골짜기에 살면서 사람이 그리워서 그런지 반가운 인사와 함께 할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하여 보는데, 할아버지는 금년 나이 91세로 이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층계 제일 위쪽에 있는 집과 함께 2가구의 집이 살았지만 현재는 모두가 떠나가고, 할아버지의 유일한 벗이 되어지는 할머니도 7년 전에 돌아가므로 지금은 이 산골에서 외롭게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모두 2남 3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그 중에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은 이곳에서 다소 가까운 울산에서 살고 있으며 1명의 딸은 부산에서 나머지 1명의 딸을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5명의 자녀들이 일주일에 한번 정도 방문하므로 그렇게 외롭지는 않다고 말은 하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쓸쓸함이 묻어나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의 최대 근심은 2명의 아들 모두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으므로 후대를 잊지 못하고 혈통이 끊어진다는 것이 다소 아쉬움이 발생하는데, 아마 이것은 자기의 팔자이라고 체념을 하고 살아간다고 하면서 나의 인생과 너무나 유사하여 동정심 발로가 극(極)에 달하여 진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현재 그 연세(年歲)로써 눈, 귀, 정신, 말, 잇빨 등이 너무나 선명하고 튼튼한 몸을 유지하므로 나의 신체 보다 훨씬 더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된다.

 

<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할아버지" >

 

젊은 때에는 부산에서 그런대로 살았지만, 종사하는 일 모두가 잘되지 않고 자신의 주변으로 항상 호랑이 등 짐승들이 함께 하므로 본인 팔자는 산 속에서 살아가야만 만사 형통하여 진다는 많은 계시(啓示)를 받았다고 한다.

꿈에서도 종종 산신(山神)이 나타나서 이곳 단석산을 점지하면서 안내하므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들어와서 마애불을 친견하고 나서 부처님의 은총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그러하여 40세 전 후에 마애불이 있는 골짜기와 한 능선 넘어 있는 이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와서, 손수 집을 짖고 텃밭을 일구면서 정착한지가 벌써 50년이라는 세월이 주마등 같이 흘려 갔다고 한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이런 첩첩산골에서 혼자 짐승을 벗으로 살고 있지만, 현재 할아버지가 심고 가꾸고 있는 농작물에 대하여 짐승들이 일절 해침 없이 잘 성장하도록 보호하여 주는 것은 전생에 대한 타고난 운명의 윤회를 믿고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 인생을 듣고 있다 보니까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므로 다음에 다시 찾아보겠다는 거짓 인사를 나누면서 하산 할려고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되돌아 보고 또 되돌아 보는 무거운 심정으로 발길을 돌린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중 오래 사는 것은 결국 행복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제는 인생의 손을 놓고 싶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은데. 할아버지 그런 생각하지 말고 만수무강(萬壽無疆) 하시기를 이 블로그를 통하여 기원하여 봅니다.

할아버지 집에서 도로 따라 내려가니까 도로는 사람의 왕래가 없어서 그런지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므로 거의 길이 살아지고 없어도, 할아버지는 자녀들이 운행하는 RV 차량을 이용하여 쌀과 부식을 가지고 찾아오는 것을 락(樂)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울창하게 자란 풀을 헤치고 한 20분 정도 내려오면 마애불로 올라갔던 원점의 3거리를 만나고, 이곳 3거리에서 올라왔던 길로 한 10여 분 정도 내려가면 아침에 만난 국립공원 관리안내소를 지나면서 승용차가 기다리는 오덕선원 입구에 도착하면서 단석산 산행을 종결한다.

 

 

2. 임고서원 방문. 

단석산 산행을 끝내고 나서 다소 시간적 여유가 발생하여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서 경북 영천시 임고면에 있는 “임고서원(臨皐書院)” 을 방문하기로 하면서 운전하여 찾아가는데, 이곳 임고서원도 몇 년 전 방문한 곳으로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님의 역사적인 내역을 한번 더 조명하여 보기로 한다.

 

< 영천시 임고면에 있는 "임고서원" 전경 >

 

임고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8년(1553년) 부래산에 창건하여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년)에 현 위치에 중건하면서 재 사액되었다.

인조 21년(1643년) 여헌 “장현광” 선생님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년)에는 지붕 “황보인” 선생님을 추향하였고, 고종 8년(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1965년에 복원하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님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년) 현재의 영천시 임고면 우황리에서 일성군 "운관" 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외교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지조로 추앙되었고 시문 및 서화에도 뛰어났고, 야은 "길재(吉再)" 선생님 및 목은 "이색(李穡)" 선생님과 함께 고려 3은(三隱)의 한사람이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 4년(1392년) 선죽교에서 피살 되었으며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영의정에 추종되었고, 익양 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문충의 시호가 내려졌다고 한다.

몇 년 만에 찾아보는 임고서원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 놀램이 발생하여 지는데,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라는 거대한 입석이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 임고서원 입구에 있는 "동방이학지조" 의 입석 >

 

이 입석을 통과하여 내부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하고 나서 서원의 바운다리가 되는 정문으로 내려와 서원을 관람하여 보는데, 임고서원 정문 가장자리로 시냇물이 흘러가는 도랑과 더불어 선죽교 다리를 만들어 놓고 있으며 이 다리를 건너가면 임고서원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 임고서원 입구에 있는 "선죽교" >

 

< 임고서원을 알리는 "안내문" >

 

이 안내문 왼편으로 임고서원의 역사가 되는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은행나무의 높이는 20m에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95m가 되어지고 수령 약 500년이 되는 은행나무는 생육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노거수이며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약 22m에 남북방향으로 약 21m가 되어진다고 한다.

 

< 임고서원과 함께 하는 수령 500년 "은행나무" >

 

이 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浮來山)에 있었을 당시 그곳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옯겨심은 것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이 은행나무 뒤편 야산 비탈면으로 옛 임고서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임고서원은 일렬로 외삼문과 강학당 건물 그 뒤편으로 내삼문과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매우 단촐한 서원이 되어진다.

 

< 임고서원 왼편 야산에 있는 "옛 임고서원" >

 

현재는 이 옛 서원 오른편으로 새로운 서원을 건립하여 있는데, 서원의 입구에 정몽주 선생님이 지은 단심가 등의 시비(詩碑)가 만들어져 있고 이 시비의 뒤편 계단 위에 새로운 서원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이 되는 2층 누각의 건물 영광루(永光樓)가 자리하고 있다.

 

< 임고서원 입구에 있는 "단심가" 시비 >

 

< 임고서원 외삼문이 되는 "영광루" >

 

이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고, 또 다시 한단의 축대 위로 올라서면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마당 중앙에 임고서원 주 건물이 되는 강학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강학당 앞 마당 가장자리에 동재와 서재 건물이 함께 하고 있다.

 

< 영광문 왼편에 있는 "신도비" >

 

< 임고서원 중심 건물이 되는 "강학당" >

 

< 강학당 앞 오른편에 있는 "동재" >

 

< 강학당 앞 왼편에 있는 "서재" >

 

이 강학당 건물 마루에서는 다수의 관람객들이 해설사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임고서원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매우 진지함이 묻어나므로 함께 이야기를 듣다가 자리를 조용히 일어서서 나머지 서원을 돌아보기로 한다.

 

< 강학당 마루에 앉아 해설하고 있는 "해설사" >

 

강학당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음식을 준비하는 전시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강학당을 가로질려 왼편으로 넘어가면 제사용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 건물이 건축되어 있다.

 

< 강학당 옆 오른편에 있는 "전시각" >

 

< 강학당 옆 왼편에 있는 "전사청" >

 

강학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높은 돌계단 위로 내삼문이 되는 유정문(由正門)이 자리하고, 그 뒤편으로 포은 정몽주 선생님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문충사(文忠祠)라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내삼문이 되는 "유정문" >

 

어느 서원과 같이 사당은 특별하게 배향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문을 굳게 잠겨 있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여 임고서원을 떠나기로 하는데, 서원의 정문을 나와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서원을 관리하는 거대한 관리사 건물이 한 울타리를 형성하면서 자리하고 있다.

 

< 서원을 관리하는 "관리사" 건물 >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도로 건너편에는 정몽주 선생님의 업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포은유물관(圃隱遺物館)" 이 자리하므로 내부로 들어가면, 입구에 정몽주 선생님의 상반신 그림과 더불어 정몽주 선생님이 지은 시(詩)들이 함께 자막으로 흐르고 있다.

 

< 정뭉주 선생님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포은유물관" >

 

< 정뭉주 선생님의 "상반신 그림과 시" >

 

오른편 제1전시실이 되는 포은관으로 들어가면, 정몽주 선생님의 일대기와 더불어 나라를 위하여 활동한 모든 내역을 일목요약하게 진열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있다.

 

< 정뭉주 선생님의 "일대기" >

 

< 제1전시실 내부를 관람하는 "관광객" >

 

전시실 왼편이 되는 제2전시실의 임고관으로 들어가면, 임고서원에 대한 건물 모형도와 더불어 영천이 배출한 선현들이 TV 모니터를 통하여 소개하고 있어 서원을 관람하기 전 사전 공부가 되도록 하여 준다.

 

< 제2전시실에 진열하고 있는 "전시물" >

 

이 밖에도 전시실 오른편 언덕 위에 서원을 내려 볼 수 있는 정자와 더불어 전시실 뒤편으로 충효문화수련원 건물이 너무나 잘 조성되어 있어, 수련원에 머물면서 충(忠)과 효(孝)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과 함께 하는 서원이 되어진다.

 

< 서원 오른편 동산 위에 있는 "조옹대" 정자 >

 

< 서원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건립한 "충효문화수련원" 건물 >

 

< 주차장 뒤편에 있는 "계현재" >

 

< 임고서원 주변에 있는 "힐링" 길 조감도 >

 

다소 더위로 인하여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임고서원을 구경하고 나서 국도를 이용하여 대구로 들아와, 한 동문의 숙소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