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고궁 및 종묘.

경북대학교 기계과 동문회 모임 2일차 관광은 조선왕조의 대명사가 되는 "경복궁" 의 방문.(2)

용암2000 2016. 3. 15. 13:30

2. 둘째날 : 3월 1일(화요일)

 

2) 경복궁 나들이.

충무로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이용하여 경복궁역에 하차한 동문들은 경북궁 정문 왼편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방향으로 올라가 사적 제117호로 지정된 "경복궁(景福宮)" 을 관람하기 위하여 광장 반대편에 있는 매표소 방향으로 이동하는데, 경복궁의 첫째 관문이 되는 광화문 앞에서 문지기들이 교대식을 거행하고 있다.

 

< 경복궁의 첫째 관문이 되는 "광화문" 후면 >

 

< 국립고궁박물관 광장에서 바라보는 경복궁 두번째 문이 되는 "흥례문" 전경 >

 

먼 발취에서 교대식을 구경 함과 동시에 매표소에서 경로 입장권을 구입하고 나서, 광화문(光化門)과 흥례문(興禮門) 사이에 있는 광장에서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여 보면 경복궁은 정말 환상적인 자연 속에 건축되어진 궁궐이다.

 

< 경북궁 첫째문이 되는 "광화문" 을 배경으로 문지기 교대식을 끝내고 >

 

황제가 살고 있는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은 허허벌판 속에서 성곽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인공의 정원을 꾸미고 나서 5문3조의 황궁을 건축하였지만, 조선의 왕이 살고 있는 경복궁은 인왕산과 북악산이라는 자연을 정원으로 하여 3문3조의 왕궁을 건축하였다는 것이다.

 

< "인왕산" 을 정원으로 하고 있는 경복궁 주변 풍경 >

 

3문3조에서 3문은 궁궐의 밖에서 왕이 집무를 보는 메인(Main) 건물까지 들어가는 3개의 문으로 경복궁에서는 광화문(光化門), 흥례문(興禮門), 근정문(勤政門)이 되고, 3조는 먼저 외조(外朝)로써 외조는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고 문무백관이 조회하는 근정전 권역, 두번째는 치조(治朝)로써 치조는 왕이 정무를 보는 사정전 영역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연조(燕朝)는 흔히 침조(寢朝)이라고도 하는데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강녕전과 교태전 권역을 말한다.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진 궁궐에서 중국의 자금성은 24만평 부지를 가지지만 경복궁은 14만평의 부지를 가져 규모 면에서 자금성의 60% 밖에 되어지지 않지만, 축성 년도에 있어서 자금성은 1420년에 완공하였고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하므로 경복궁이 자금성 보다 25년이나 먼저 축성되어진 궁궐이라 하겠다.

오늘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경복궁을 다시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천천히 걸어서 입장권을 확인하는 두번째 문이 되는 흥례문을 지나 세번째 문이 되는 근정문(勤政門) 앞으로 전진한다.                 

 

< 입장권을 확인하는 3문3조 중 2문이 되는 "흥례문" > 

 

근정문 앞에 펼쳐지는 광장 곳곳에 경복궁을 설명하고 있는 해설사 마이크 소리가 발생하여 지는데, 해설사의 언어들이 영어를 비록하여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이 혼용하면서 상호 메아리가 되어 경복궁 마당이 장돌뱅이들이 물건을 판매하는 난장판과 비슷하다.

그 중에서 나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해설사 꽁무니에 서서 잠깐 도청하여 보는데, 이곳 경복궁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왕이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도읍을 옮기기 위하여 당시 풍수의 대가로 칭하는 "권중화(權仲和)" 선생님에게 도읍지를 선정 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권중화 선생님은 대전 인근에 있는 계룡산이 최고의 길지(吉地)이라고 추천한다.

태조는 "무학대사(無學大師)" 와 지관에게 직접 명을 내려 계룡산의 풍수를 확인하고 나서 그곳에 새로운 도읍지를 선정하여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으나, 공사 중 하륜(河崙) 선생님이 계룡산으로 신도(新都)를 옮기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에 태조는 권중화 선생님과 삼봉 "정도전(鄭道傳)" 을 불러 하륜이 제기하였던 문제점을 하나 하나 검토하면서 뜻을 받아 들이고 나서, 공사를 중단 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신도 후보지를 다시 선정하게 하므로 무학대사가 추천하는 현재의 한양 자리로 변경한다.

문제는 이곳 한양의 경복궁 자리에서도 궁궐의 방향을 무학대사는 인왕산(仁王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동남향을 주장하였고, 정도전은 북악산(北岳山)을 주산으로 하는 남향을 주장하므로 상반되는 의견이 발생하여 진다.

여기에서 무학대사는 남향에 대한 궁궐의 문제점을 하나 하나 도출하면서 이야기 하였지만, 막강한 권력과 칼자루를 휘두르고 있는 정도전 의견에 따라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남향의 궁궐로 축성하므로 오늘의 방향으로 정하여 진다.

궁궐을 완성시킨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에서 죽음을 당하여 천수를 누리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무학대사는 천수를 누리므로 인하여, 어느 분이 풍수의 상수(上手)가 되는지 아직도 판단이 내리지 못하게 한다.

어찌하던 정도전은 태조 3년(1394년) 9월에 신도읍지 마스터 플랜트를 3개월 만에 완성하고 12월 4일 개토제(開土祭)를 올리고 나서 공사를 시작하였고, 이듬해가 되는 1395년 9월 29일에 이렇게 방대한 왕궁은 불과 10개월 만에 완성하여 그 해 11월 29일 부터 천도가 시작 되어진다.

흥례문에서 근정문으로 들어가는 중간지점에 맑은 물이 흘러내리게 하는 조그마한 금천(禁川)이라는 개울을 만들도록 하면서, 개울 위로 금천교(禁川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으면서 금천교의 다른 이름을 "영제교(永齊橋)" 이라고 불려진다.

 

< 근정문 앞 금천 위에 있는 "영제교" 를 건너는 관광객 >

 

영제교 돌다리 양 옆으로 호안석축(護岸石築)에는 물길을 뚫어져라 내려보는 돌짐승 4 마리가 앉아 있는데, 이 돌짐승의 이름은 "천록(天祿)" 이라고 하면서 천록은 전설 속의 신령스러운 짐승으로 "왕의 밝은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 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짐승이다.

 

< 호안석축 위에 누워 금천을 지키는 "천록" >

 

< 금천을 지키는 또 다른 "천록" >

 

이 금천교를 지나면 3문의 마지막 문이 되는 근정문(勤政門)에 이르는데, 근정문 앞에는 다시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 끝지점에 2층의 국보 제223호 "근정전(勤政殿)" 이라는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여기서 부터 3문3조 중 1조가 되는 외조(外朝)의 영역이라 하겠다.

 

< 3문3조 중 3문이 되는 "근정문" >

 

< 북악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3문3조 중 1조의 외조가 되는 "근정전" 전경 >

 

근정전 앞에 있는 넓은 마당에는 회랑으로 반듯하게 둘려 있고 바닥에는 조각보를 이은 듯한 박석(薄石)이 기하학적인 무늬의 형상으로 깔려 있고, 근정문에서 근정전의 월대까지 가운데로 어도(御道)의 길이 만들어져 있으면서 길의 옆 좌우에는 문관과 무관의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쌍의 "품계석(品階石)" 이 서 있다. 

 

< 근정전 앞 마당에 서 있는 "품계석" >

 

기학적인 무늬로 깔려 있는 박석은 강력한 햇빛이 비치는 여름철에 난반사를 방지하므로 눈 부심을 줄이고, 아울러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의 물이 박석과 박석 사이로 긴 물길을 형성하면서 흘려가므로 불어나는 물이 홍수가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길이 되어지므로 선인들의 과학적인 지혜가 숨어 있는 마당이라 하겠다. 

 

< 근정전 앞 마당에 깔려 있는 "박석" >

     

어도 끝지점에 있는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과 더불어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며 또한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政殿)이자 법전(法殿)이 되어지는데,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임진왜란 이전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근정전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큰 목조건물이 되어지는데, 경회루 및 종묘의 정전이 비슷한 평수를 가지는 건물이지만 근정전은 높직한 월대 위에 훨칠한 중층으로 건축 되어지므로 외관상으로도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 높은 월대 위에 중층으로 건립되어진 "근정전" >

 

근정전 건물은 주변으로 회랑이라는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마당의 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 2단의 월대를 높직하게 쌓고 그 위에 지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중층 건물로 기둥의 처마에는 다포식(多包式)이면서 팔작지붕으로 건축 되어졌다.

근정전 건물 외곽은 중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 없이 전체가 통칸으로 트여 있어 매우 넓은 공간을 간직한 건물이면서 중앙의 뒤면에 어좌를 마련하고 그 뒤편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의 병풍이 놓여 있다,

 

< 근정전 내에 있는 "어좌와 일월오악도" >

 

아울러 건물 중앙의 천장에는 절집에서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 위의  닫집 처럼 보개를 마련해 구름 무늬를 새기고, 발톱이 7개가 되는 "칠조룡(七爪龍)" 두마리가 상호 엉켜져 있다.

 

< 근정전 천정 7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는 "칠조룡" >

 

근정전 뒤편으로 돌아서 가면 또 다른 구획이 되는 3문3조 중 2조가 되는 치조(治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사정문(思政門)을 통과하면 왕이 신하와 함께 일상적인 정사를 논하는 보물 제1759호 "사정전(思政殿)" 이 자리하고 있는데, 사정전도 일단의 축대 위로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 3문3조 중 2조의 치조 영역으로 들어가는 "사정문" >

 

사정전 건물은 열다섯 칸 규모의 건물이 되어지지만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고 건물 중간 중간에 있어야 할 고주(高柱)를 생략하면서 천장이 아주 높고, 바닥 전체에 마루가 깔려 있어 공간감이 크면서 근정전과 같이 매우 광대함을 느끼게 한다.

 

< 왕의 일상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사정전" >

 

이곳도 임금의 자리는 한단 올린 어탑(御榻) 위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그 어탑 뒤편으로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 가 둘려쳐 있는데, 근정전에 있는 일월오악도와 이곳 일월곤륜도의 진품을 구경 할려면 경북궁 입구 왼편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을 함께 관람하여야 경북궁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 사정전 내에 있는 "일월곤륜도" >

 

사정전 주변의 오른편에는 만춘전(萬春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왼편에는 천추전(千秋殿) 건물이 함께하고 있는데, 이 2개의 건물에는 사정전과 달리 온돌이 깔려 있어 왕이 휴식도 취하면서 신하와 함께 정무를 나누는 부속 건물이라 하겠다.

 

< 사정전 오른편에 있는 "만춘전" >

 

< 사정전 왼편에 있는 "천추전" >

 

특히 사정전 앞 축대 위에 세종대왕 시절에 만들어진 한대의 해시계가 자리하므로 눈 앞에서 해의 그림자를 보면서 시각을 측정하는 짬의 시간도 가져보는데, 현재 KBS 방송국에서 성황리 방영하고 있는 "장영실" 이라는 주말 드라마를 더욱더 심도 있게 청취하도록 만든다.

 

< 사정전 축대 위에 있는 "해시계" >

 

사정전 주변으로는 왕의 내탕고가 되는 행각 건물들이 둘려쳐 있어 대충 건물들을 돌아보고 나서 뒤편으로 이동하여 3문3조 중 3조가 되는 연조(燕朝)로 구획되는 향오문(嚮五門)을 통과하는데, 연조 구역은 왕과 왕비의 사생활 공간으로써 침전이라고 부른다.

 

< 사정전 뒤편 3문3조 중 3조의 연조 영역으로 들어가는 "향오문" >

 

침전의 메인 건물으로는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으로 나누어 지는데, 강녕전은 양반 집의 가옥에서 사랑채와 비슷하여 외부인들의 접촉이 많아 강녕전 대청 앞에 넓은 월대가 있어 크고 적은 행사장으로 사용하고 교태전은 양반 집의 안채와 비슷하므로 월대가 없는 대신 행각들이 모두 연결되어 많은 시녀와 함께 생활하는 왕비의 복잡한 안살림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 왕의 침실이 되는 "강녕전" >

 

< 왕비의 침실이 되는 "교태전" >

 

교태전 뒤편으로 돌아서 가면 아담한 동산을 만나는데, 이 동산은 경복궁 좌측에 있는 경회루 주변에 있는 연못을 파는 과정에서 발생한 흙을 옮겨서 쌓을 인공적으로 만든 꽃 동산이면서 동산의 이름을 "아미산(峨嵋山)" 이라고 불려진다.

 

< 교태전 뒤편에 있는 "아미산" 전경 >

 

< 관리인들이 봄 단정을 하고 있는 "아미산" >

 

아미산을 구획하고 있는 담장과 더불어 아미산 상단에 있는 4개의 굴뚝이 너무나 아름다운 색을 가진 벽돌로 만들어지므로  경북궁 자체가 국가적인 사적지임에도 불구하고, 담장의 벽화와 더불어 아미산 굴뚝을 별도로 보물 제811호로 지정될 정도의 문화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가 되어진다.

 

< 보물 제811호로 지정된 "벽화와 굴뚝" >

  

이상과 같이 경북궁의 메인 건물을 관람하고 나서 강녕전 왼편에 있는 사잇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아가 경회루로 들어가는데, 경회루는 외국의 사신이나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 연회식을 거행하는 장소로써 경회루가 있으므로 경북궁의 3문3조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궁궐이 되어진다.

국보 제224호로 지정 되어진 "경희루(慶會樓)" 는 경북궁의 근정전 및 종묘의 정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 단일 건축물에 있어서 최고의 평수를 가진 건물인데,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48개의 돌기둥 위에 세워진 2층 루각으로 정면 7칸에 측면 5칸으로 남북 33m, 동서 29m의 대형 건축물이라 하겠다.    

 

< 국보 제224호로 지정된 "경회루" 건물 >

 

건물의 누마루 공간은 그냥 평면이 아니고 3단의 높이로 구획하는 형태의 누마루를 가지면서 그 면적이 298평이나 되므로 1평에 1명의 사람이 올라가도 300명이 넉넉하게 자리할 수 있는 넓이를 가지는데, 기록상으로 1.200명이 모였던 적이 있으니 그 사실 자체에 노램을 가지게 하는 건물이다.

경회루 건물 주변으로 남북 113m 및 동서 128m의 면적을 가진 연못으로 빙둘려 쌓여 있고, 연못 곳곳에 인공적인 섬을 만들면서 섬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루각 건물과 나무들이 물 속에서 어른거리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므로 많은 사람들이 사진 촬영의 포인트가 되는 장소이다.

 

<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하는 "경회루" 전경 >

 

경복궁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여기에 있는 경회루를 마지막으로 관람을 끝내고 되돌아 가는 것이 원칙으로 하지만, 진정한 경복궁의 속살을 알기 위해서는 경희루 뒤편에 있는 궁궐 속의 궁궐이 되는 건청궁과 집옥재까지 관람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애석하게 만든다.

일행은 경복궁의 내력을 더 알기 위하여 경희루 연못의 왼편으로 빙돌아 뒤편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영역이 되는 궁궐 터가 자리하고 있지만 그 터에는 아직 건축물을 건립하지 못하고 공터로 남아 있는 공간을 지나 더욱더 뒤편으로 이동하면 새로운 정원이 되는 "향원지(香遠池)" 이라는 연못이 나타나는데, 향원지는 "건청궁(乾淸宮)" 앞에 있는 정원이 되어진다.

 

< 경회루 뒤편 "공터" 로 남아 있는 궁궐 >

 

< 향원지와 함께 하는 "건청군" 전경 >

 

< 경복궁 제일 뒤편에 있는 "건청궁" 으로 들어가는 문 >

 

건청군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흥선대원군의 며느리 이면서 부인이 되는 "명성황후" 와의 정치적인 간섭으로 부터 자립하기 위하여, 고종이 재위 10년이 되는 1873년 경북궁 내 북쪽 구석에 건립한 궁궐이다.

건청군 내에는 명성황후의 침전(寢殿)이 되는 곤녕합(坤寧閤 : 옛 옥호루), 상궁들이 기거하는 복수당(福綏堂), 고종이 머물면서 사랑채가 되는 장안당(長安堂) 등 3채의 궁궐로 구성되어 있다.

 

< 건청궁의 안채가 되는 곤녕함으로 들어가는 "초양문" > 

 

< 명성황후가 기거하였던 안채의 "곤녕함" >

 

< 안채 옆 축대만 남아 있는 "건청궁" 내 공터 >

 

< 건청궁의 사랑채가 되어지면서 고종이 기거하였던 "장안당" >

 

고종 13년(1876년) 경복궁의 대규모 화재로 인하여 800여 칸의 건물이 소실 되어지므로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사를 갔다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당하면서 1885년 다시 경북궁으로 돌아와 기거하였는데, 10년 후가 되는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놈에게 시해가 되어지므로 고종은 다시 러시아 공간으로 피신하였던 궁이다.

경복궁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일본놈들에게 경복궁 전체가 붙타버린 경복궁이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 2년(1865년) 흥선대원군이 대대적인 중건으로 다시 복원되어진 경복궁이 30년도 되어지지 않은 1895년 다시 일본놈들의 만행으로 인하여, 명성황후가 시해 되는 비극적인 현장을 돌아보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진다.

후궁 영역으로 만들어진 향원지 연못 속에는 원래 취로정(翠露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건청궁을 창건하면서 취로정 자리에 6각형의 보물 제1761호 "향원정(香遠亭)" 이라는 새로운 정자를 건립하므로 현재는 건청궁의 앞 정원이 되어진다.

 

< 건청궁 앞 정원이 되는 "향원정" >

 

< "건청군과 향원정" 의 설명서 >

 

< 향원정 오른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

 

향원정에서 다시 북서쪽 방향으로 이동을 하면 고종의 서재가 되는 "집옥재(集玉齋)" 가 자리하고 있는데, 집옥재는 1876년 경복궁의 대화재로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건청궁으로 다시 돌아올 때 청덕궁에 지어졌던 집옥재와 협길당(協吉堂) 등의 건물을 건청궁의 서쪽으로 이전하여 자신의 서재 또는 외국 사신의 접견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 창덕궁에서 이전한 "집옥재" >

 

< "집옥재"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지금까지 경복궁의 메인 영역이 되는 관광지 관람을 끝내므로 아직 경복궁의 별궁이 되는 동궁, 소주방, 자경전, 수정전, 함화당과 집경당, 태원전을 돌아보는 것을 생략하기로 하고, 집옥재 서편에 있는 쪽문을 통하여 경복궁을 벗어나기로 한다.

 

< 경복궁의 북문이 되는 "신무문" >

 

< 신무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청와대" 정문 >

 

청와대 전경과 청와대 사랑채를 구경하기 위하여 경복궁 북문이 되는 신무문(神武門)을 통과하여 경복궁 바운다리(Boundary)를 벗어나기로 하는데, 신무문으로 나가기 전 쪽문을 지키는 청와대 경호원으로 부터 먼저 소지품 검사와 더불어 입장권을 반납하여야 한다. - 둘째날 2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