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고궁 및 종묘.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이 되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종묘" 를 관람하면서.

용암2000 2017. 9. 7. 21:11

2017년 9월 2일.(토요일)

 

오늘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지인 중 한명의 아들이 오후 5시 봉은사 앞에 있는 인터콘티넨털 호텔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는 연락을 받으므로 아침 일찍 대구에서 출발하여 서울에 거주하는 다른 한 친구와 재회의 시간을 먼저 가지도록 한다.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서울에 있는 명소를 방문하여 여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주어진 시간에 예식장으로 내려가기로 하는데, 오늘 관람하고 싶은 장소는 종묘(宗廟)를 계획하므로 종로3가 역에서 오후 1시 정각 만남의 시간을 가진다.

친구와 지하철 역에서 만남을 가지고 나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광장시장과 종로5가 역을 지나 동대문 종합시장 내의 골목 안으로 들어가 "진옥화 할매" 원조 닭한마리 식당을 찾아간다.

다소 늦은 시간이 되어도 너무나 많은 사람으로 3층 까지 운영하는 식당에서 2층으로 울라가 겨우 자리를 마련하여 식사를 하여야 하는 음식점이 된다.

 

< 동대문 종합시장 내에 있는 "진옥화 할매" 원조 닭 한마리 식당 >

 

처음 대면하여 보는 닭 요리에 심취하면서 즐거운 식사를 끝내고 나서 다시 종로3가 역 인접지역에 있는 종묘를 관람하기로 하는데, 종묘는 넓은 광장과 함께 좌우로 공원이 조성하고 있으면서 정문이 공원의 후미 100m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 "종묘" 를 알리는 입간판 >

 

그래서 종묘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대로(大路) 변에서 부터 조금 걸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먼저 공원 우측 입구에는 대소인원(大小人員)을 불구하고 모두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와 더불어 세종대왕 때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를 두었던 돌 받침대가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다.

 

< 종묘 입구 오른편에 있는 "하마비" >

< 하마비와 나란하게 있는 "앙부일구" 의 돌 받침대 >

 

넓은 길 따라 내부로 조금 들어가면 하마비 뒤편의 공원 가장자리에 왕의 우물이 되는 어정(御井)이 있었다는 터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물이 솟았지만, 광장 아래로 지하주차장을 만들므로 물이 말라 버렸다고 몇 명의 어린이를 대동하면서 해설을 하는 한명의 여 선생님 이야기가 귀전으로 흘려 지나간다.

 

< 공원 가장자리에 있는 "어정" >

더불어 종묘 정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공원의 왼편으로 높은 동상 한기가 서 있는데, 이 동상은 일제시대 때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거하신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님의 동상으로써 왜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 궁궁증을 가지면서 종묘를 관람하기 위하여 정문 방향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 종묘 앞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월남 "이상재" 동상 >

정문 오른편에 매표소가 자리하므로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경로의 무료 입장권을 발행하여 정문을 통과하는데, 정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 형태 건물로써 단층도 화려하게 칠하지 않으면서 매우 단촐하게 지어진 건물이면서 "외대문(外大門)" 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 종묘로 들어가는 "외대문" 과 매표소 >

 

외대문 입구에 있는 검표원에게 입장권을 제출 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종묘를 관람하기로 하는데, 종묘의 관람 방법은 다른 고공이나 박물관 관람과 차별나게 주어진 시간을 정하여 해설사와 동행하면서 관람이 이루어지지만 토요일에는 자유관람의 날로 정하므로 해설사 없이 마음되로 관람이 가능한 날짜이라고 한다.

 

< 해설사와 함께 주어진 "시간제 관람" 을 한다는 안내문 >

 

그래서 금일은 토요일이 되므로 나와 친구는 자유롭게 종묘를 거닐어 보기로 하는데, 해설사가 없으므로 관람의 순서 및 방향을 선정하기에 다소 난이하여 정문 근처에 있는 조감도를 보면서 움직이는 동선(動線)을 선정하기로 한다. 

종묘는 유학을 통치 기반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 왕조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追尊)이 되는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면서 제사를 봉양하는 곳인데. 건립 당시에는 정전(正殿) 건물만 종묘이라고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더불어 영녕전(永寧殿) 모두를 합쳐서 종묘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정전 및 영녕전 건물의 외형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왕실의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기 때문에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건축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전에는 조선 태조의 신주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역대 왕과 왕비 49분 신주를 모시고 있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하여 조선의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이 되는 왕과 왕비 34분 신주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종묘에는 건물과 더불어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므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으로 등제 되고,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도에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으로 등제가 되어진 곳이라 하겠다.     

 

< '종묘" 의 내력을 안내하는 설명문 >

 

정문에서 북쪽 방향으로 길게 판돌이 깔린 다소 넓은 폭의 길이 나타나면서 길은 3개로 구획하는 삼도(三道)의 길로 중앙에는 신향로(神香路) 라는 신(神)이 다니는 길인데,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 정전 및 영녕전으로 들어가는 "삼도의 길" >

 

오른편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이고 왼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가 되는데, 일반적으로 왕이 왼편에서 걷고 세자가 오른편에 걷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지만 신(神)의 입장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중앙에 있는 신향로 길로 걷는 것을 가능한 자제하여 달려는 안내문으로 조심 스럽게 양쪽의 길로 걸으면서 조금 들어가면 왼편에 다각형이 되는 인공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 삼도의 길 왼편에 있는 다각형의 "인공 연못" >

 

다시 삼도의 길 따라 조금 더 내부로 들어가면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직사각형의 "중연지(中蓮池)" 라는 인공 연못을 만나는데, 인공 연못의 중앙에는 원형의 섬이 자리하면서 섬의 중앙에는 고목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 삼도의 길 오른편에 있는 인공 연못 "중연지" >

 

직사각으로 만든 인공 연못은 지구를 나타내고 있으며 중앙에 있는 원형의 섬은 하늘을 나타내고 있고, 향나무는 죽은 사람으로 부터 혼(魂)을 부르 때 사용하는 나무가 되는 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정전 및 영녕전 까지 이어지는 삼도의 길을 벗어나 인공 연못 앞을 통과하여 오른편 방향으로 들어가면 향대청(香大廳) 영역에 도착하는데, 향대청 건물은 제례에 바칠 향과 축문 및 폐백을 보관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이 대기하는 건물이다.  

 

< "향대청 영역" 에 있는 건물의 조감도 >

 

향대청으로 들어가기 전 제례를 올릴 때 왕이 잠시 머물면서 앞선 왕의 공덕을 기리는 망묘루(望廟樓)의 건물 뒤편으로 들어가면 제일 구석자리에 숨겨진 작은 쪽문을 만나는데, 쪽문 입구에 공민왕(恭愍王) 신주를 모시고 있는 신당(神堂)이 자리하고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 향대청 영역의 건물이 되는 "망묘루" >

 

< 망묘루 뒤편 구석자리에 공민왕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신당" >
,

열려있는 쪽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작은 방에는 고려 제31대 공민왕와 더불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정 및 준마도가 그려져 있다.

조선 태조가 종묘를 건축할 때,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되는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신당을 짓도록 명령하므로 이곳에서 함께 지어진 건물이라 하겠다. 

 

< 신당 내에 모시고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 의 영정 >

 

공민왕 신당에서 나와 망묘루 건물 모퉁이를 꺽어 향대청을 돌아보기 위하여 위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먼저 제례에 종사하는 집사들이 머무는 집사청(執事廳)이 자리하고 있는데, 집사청에는 2개의 출입문이 있다.

 

< 향대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집사청" >

 

집사청 아래 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일단의 축대 위로 9.5칸 짜리 기나긴 향대청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의 오른편 반쪽은 영상실로 운영하면서 종묘를 홍보하는 영상물을 연속적으로 상영하고 있다.

 

< 향대청 건물의 오른편에 있는 "영상실" >

 

건물의 왼편 반쪽에는 종묘에서 제례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사상 차림 및 제례의 방식 등을 홍보하는 전시실로 운영하고 있는데,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가 먼저 좌측 벽면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제물을 차려 놓은 제사상을 관람하여 본다.

 

< 향대청 건물의 왼편에 있는 "전시실" >

 

제사상은 2개의 테이블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전면 테이불에는 두줄의 다양한 용기를 진열하고 있으면서 앞쪽의 줄에 있는 용기에는 정화수를 담은 용기가 되고 뒤쪽 줄에 있는 용기에는 술이 담겨져 있는 용기가 되는데, 정화수는 양(陽)이 되고 술은 음(陰)이 되므로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 향대청 전시실 내부에 진열하고 있는 "제사상" >

 

뒤편 테이블 위로 음식을 담아 놓은 다양한 그릇을 진열하고 있는데, 오른편에 있는 그릇에는 마른 음식을 담아 두고 왼편에 있는 그릇에는 젖은 음식을 담으므로 이곳에도 마른 음식은 양이 되고 젖은 음식은 음이 되어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테이블 뒤편 벽면에는 3개의 신주가 붙어 있으면서 제일 왼편에는 왕의 신주가 되고 중앙의 신주는 첫째 왕비의 신주가 되고 다음에는 두번째 왕비의 신주가 되는데, 이곳도 왕이 죽으면 음의 기운을 갖게 되므로 왕의 신주를 음의 공간에 부착하고 있다.

전시실 오른편 방향으로 이동하여 관람하여 보면 이곳에는 제례를 올릴 때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을 비치하고 있는데, 종묘 일간도, 축문, 책장, 보장(금보, 은보, 옥보) 등을 전시 하고 있으므로 제례에 사용하는 예법 등을 공부하게 만든다.

 

< 향대청 전시실 오른편에 있는 "전시물" 전경 >

 

< "종묘 일간도" 설명문 >

 

< 전시하고 있는 "축문" >

 

< 전시하고 있는 "책장" >

< 전시하고 있는 "보장" >
 

주어진 시간으로 인하여 간단하게 관람을 끝내고 나서 집사청 반대편에 있는 문을 통과하여 공원 내부로 조금 들어가면, 입구에서 헤어진 삼도의 길과 함께 제례를 지내기 위하여 왕과 세자가 머물었던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불려지는 재궁(齋宮) 영역에 도착한다. 

 

< "재궁 영역" 의 조감도 >

 

남문을 통과하여 재궁으로 들어가면 아담한 마당과 함께 정면과 좌측 및 우측으로 3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남향으로 지어진 재궁에는 왕이 머무는 어재실(御齋室) 건물이 되면서 건물 내부 오른편으로 제례 때 십이장복(十二章服)을 입고 있는 실물의 디오라마(Diorama)를 전시하고 있다.

 

< 재궁으로 들어가는 "남문" >

< 마당의 뒤편에 있는 "어재실" >

 

복장은 궁궐에서 입는 관룡포와 차별나게 검은 색을 사용하므로 엄숙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고, 머리에 쓰고 있는 면류관에는 구슬이 달려 있으면서 한줄에 12개의 구슬과 더불어 관모 앞뒤 면으로 각각 12줄이 되므로 전체 구슬의 수가 288개가 된다.

 

< 어재실 내 "십이장복" 을 입고 있는 왕의 모습 >

 

마당 오른편에 있는 건물은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世子齋室) 건물로 내부에는 병풍으로 방을 꾸며져 있고, 마당 왼편에 있는 건물은 왕과 세자가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몸을 단정하게 하기 위하여 목욕을 하기 위한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자리하고 있다.

옛날 왕이 목욕을 할 때 따뜻한 물을 용기에 담아 사용하므로 방의 내부에는 아무런 용기는 비치하지 않고 빈 공간에 가마 한채를 진열하고 있다.

 

< 어재실 오른편 있는 "세자재실" >

 

< 어재실 왼편에 있는 "어목욕청" >

 < 어목욕청 내에 전시하고 있는 "가마" >

 

왕과 세자는 이곳 재궁에 머물다가 재궁의 서문으로 나와 정전의 동문을 통과하여 제례를 올렸다고 하는데, 왕과 세자가 걸었던 길 따라 정전의 동문 방향으로 올라가면 먼저 전사청(典祀廳) 건물을 만나게 된다.

 

< 재궁의 서문을 나오면 만나는 "정전" 의 전면 모서리 >

 

전사청은 제례를 올릴 때 음식물을 준비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이곳에 제례 때 사용하였던 집기를 보관하는 장소인데, "ㅁ자" 형태의 건물로써 마당에는 음식을 만드는 돌 절구들이 남아 있다고 하나 건물 입구에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가로막의 차단으로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게 된다.

 

< "전사청 영역" 의 조감도 >

 

< 정전 동문 앞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 >

< 전사청 오른편에 있는 "우물" >

 

이 전사청 앞에는 정사각형의 찬막단과 성생위 이라고 불려지는 2개의 단(段)이 자리하고 있는데, 다소 큰 정사각형의 찬막단에는 제례의 제물로 사용할려고 하는 소와 양 또는 돼지 등을 검사하는 장소가 되고 작은 사각형이 되는 성생위에는 제사에 올릴 음식을 검사하는 장소가 된다고 한다.

 

< 전사청 앞에 있는 "찬막단" >

또한 정전으로 들어가는 동문 앞에도 정사각형의 단이 2개가 자리하고 있는데, 각 단에는 정전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리기 전 왕과 세자가 서서 먼저 4번의 절을 하고 나서 정전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 동문 앞에 왕과 세자가 서서 절을 하는 "사각의 단" >

 

종묘의 제사일은 4계절의 첫달 상순, 정초, 단오, 한식, 추석, 동지의 납일과 매월 삭망(朔望)일로 정하였는데, 왕이 백관을 거늘이면서 친제한다.

왕세자는 아헌관으로 영의정은 종헌관이 되어 작헌(酌獻) 및 분향(焚香), 재배의 복잡한 절차를 밟으며 향사하며 국상일의 경우에는 이를 피한다고 한다.

 

< 종묘에서 "제례" 를 올리는 사진 >

 

나는 정전의 정문 방향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다시 재궁 방향으로 내려와 삼도의 길 따라 정전 정문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정전의 전면에는 기나긴 돌담과 더불어 잔디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색을 즐기면서 걷기에 안성맞춤의 길이 된다.

 

< 전사청에서 "정전 정문" 으로 가는 삼도의 길 >

 

삼도의 길 따라 조금 걸어가면 정전(正殿) 정문에 도착하면서 정전의 입구에는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삼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문은 돌아가신 왕의 혼령이 드나들고 있는 문이라 하여 "신문(神門)" 이라고 불려진다.       

 

< "정전 영역" 의 조감도 >

< 정전으로 들어가는 "신문" >

 

이 밖에 정전에는 동쪽과 서쪽에도 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동문(東門)은 제례를 지내는 왕과 더불어 제관들이 드나들고 있는 문이 되고 서문(西門)에는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들이 출입하는 문이라 하겠다.    

이곳 정전은 태조 4년(1395년)에 신실(神室) 7칸 규모의 건물을 창건하였지만 여러 차례 증축을 통하여 현재 19칸에 이르는 건물인데, 건물은 넓은 월대(月臺)를 앞에 두면서 높고 거친 월대 바닥과 더불어 그 위로 육중한 지붕이 떠 있는 모습으로 건축 되어졌다.

 

< 넓은 마당과 함께 하고 있는 "정전" >

 

건물 몸채의 양쪽으로는 익공의 창고와 더불어 부속실 건물을 두고 있는데, 건물 외형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의 미(美)에서 극치를 이루고 있어 국보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 부속실 건물과 함께 하는 "정전" >

 

마당을 통과하여 넓은 월대로 올라가 건축물을 관람하여 보면 건축물은 칸수를 구획하는 기둥으로 인하여 웅장함을 느끼면서 중앙의 칸으로 출입문이 있는데, 출입문에는 빗장으로 막아 출입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비록 출입문은 하나이지만 내부 감실은 상호 통하게 되면서 감실에는 19명의 왕과 더불어 30명의 왕비 등 모두 49명의 신주로 채웠져 있는데, 제일 왼편으로 신과 가장 가까운 곳이면서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신주를 제일 왼편 감실에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 감실 내에 모시고 있는 "신위" 순서 >

 

정전 앞 월대에서 전면으로 바라보면 왼편으로 총 16칸의 공신당(功臣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건물 중앙으로 3칸의 판문(板門)이 설치되어 있다.

그 내부에는 역대 왕을 보좌한 공신들을 위한 사당인데, 내부에는 정전과 영녕전에 모시고 있는 총 83위의 신주와 동일하게 83위의 공신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 정전 앞에 있는 "공신당" >

 

더불어 오른편 구석으로 칠사당(七祀堂) 이라는 작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칠사당에서는 일곱의 작은 신이 되는 봄의 신 "사명과 사호", 여름의 신 "사조와 중류", 가을의 신 "국문과 공려", 겨울의 신 "국행" 을 모시고 있다.

 

< 정전의 앞에 있는 "칠사당" >

 

칠사당은 사계절 마다 신들에게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에 있어 아무런 탈도 없게 잘 풀리도록 기원하는 사당으로 지어졌는데,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결합된 국가 의례의 일종이라 하겠다.         

서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면 악공청(樂共廳)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악공청에는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사(雅樂師) 들이 대기하면서 연주를 위하여 연습하는 건물이라 한다.

 

< 정전을 떠나는 "서문" >

< 서문 밖에 있는 "악공청" >

 

악공청에서 다시 삼도의 길 따라 내부로 더 들어가면 영녕전(永寧殿) 영역에 도착하는데, 영녕전에는 세종 원년 때(1421년) 종묘에 모시던 태조의 추존왕이 되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의 왕비들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하여 세워진 별묘(別墓)가 된다.

 

< 악공청에 조금 올라가면 만나는 "영녕전" >

< "영녕전 영역" 의 조감도 >

 

이곳도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진 정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16칸 규묘의 영녕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 있는 건물은 정전에 비교하여 매우 작지만 건물 형태는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건축과 비슷하게 중앙에 다소 높게 지어져 있다.

 

< 영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 >

< 건물 중앙에 솟을 형태를 하고 있는 "영녕전" >

 

영녕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라는 뜻으로 지어진 건물로써,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하여 왕의 신주 16위와 왕비의 신주 18위 등 총 34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보물 제321호로 지정되어진 건물이다.

조선은 모두 27명의 왕이 통치를 하였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로 들어오지 못하므로 총 25명의 왕이 되는데, 정전과 이곳 영녕전에 모시고 있는 왕의 숫자는 모두 35명이 되므로 10명의 신주가 더 있는 셈이 된다.

10명 중 한명은 고종의 7번째 아들이 되는 영친왕의 신주가 되고, 나머지 9명의 왕은 선왕 또는 왕실에서 정식으로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왕으로 추존이 되는 왕의 신주가 된다. 

이렇게 영녕전을 관람하고 나서 서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면 영녕전 뒤편으로 오솔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방향으로 올라가면 울창한 숲과 더불어 왼편으로는 나무판으로 만든 벽면에는 각종 그림이 붙어있다.

 

< 영녕전 마당에서 거닐고 있는 "여우" >

< 영녕전의 "서문" >

< 영녕전 뒤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

< 종묘의 뒤편을 구획하고 있는 "나무판" 벽면 >

 

영녕전 뒤편으로 이어지는 고개를 넘으면서 종묘을 한바퀴 빙돌아 내려가면 먼저 관람한 전사청 건물에 도착하는데, 여기에서 부터 관람을 끝낸 지역이라 길 따라 내려가 외대문을 벗어 나면서 종묘의 관람이 종결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