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고궁 및 종묘.

2018년 경북대학교 기계과 가을 모임은 조선 왕조의 궁이 되는 '창덕궁' 을 구경하면서.(2)

용암2000 2018. 10. 24. 21:09

2018년 10월 17일.(첫날 : 수요일)

 

3) 창덕궁 관람.

시간의 조정으로 인하여 긴급하게 창덕궁 후원을 먼저 관람하고 후원을 벗어나면서 내려오는 길에 '창덕궁(昌德宮)' 을 관람하기로 하는데, 창덕궁의 첫 방문은 2013년 2월 29일자 나의 블로그에 기술하므로 이번에는 사진 중심으로 다소 짧게 기술하고자 한다.

서울의 도성에는 5개의 왕궁이 자리하고 있는데, 첫번째 궁은 태조 4년(1395년) 9월에 준공한 경복궁(景福宮)이고 두번째 궁은 태종 5년(1405년) 10월에 준공한 창덕궁이다.

세번째 궁은 성종 15년(1484년) 9월에 준공한 창경궁(昌慶宮)이 되며 네번째 궁은 광해군 14년(1622년)에 건립한 경희궁(慶熙宮)이 되고, 마지막 다섯번째 궁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1897년 2월에 환궁하면서 지은 덕수궁(德壽宮)이다.

금일 오후 서울 동문의 초청으로 관람이 이루어지고 있는 창덕궁에서 조선 임금의 재위 기간이 1405년 부터 1910년 까지 무려 505년 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데,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 및 생활 공간이 되는 궁궐이라 하겠다.

정문이 되는 보물 제385호 '돈화문(敦化門)' 을 지나면서 내부로 50m 정도 올어가면 앞에는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궁궐 내에 세운 관청이 되는 궐내각사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출입을 통제하고 있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90도 꺽어서 들어가면 금천교(錦川橋) 돌다리를 만난다.

 

 

< 창덕궁의 정문이 되는 보물 제385호 '돈화문' >

 

< 많은 관광객이 움직이고 있는 '정문' 후면 >

 

< 창덕궁을 홍보하고 있는 '안내문' >

 

< '창덕궁' 의 조감도 >

 

<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제되어 있는 창덕궁 >

 

<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궐내각사' 방향 >

북한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건너는 금천교는 아취형 돌다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아취형 돌다리 사이로 남쪽에는 해태상이 자리하고 있고 북쪽 방향에는 거북이 한마리가 자리하고 있다.

 

< 90도 방향으로 꺽인 지점에 있는 '금천교' >

 

< 금천교 남쪽을 지키는 '해태상' >

 

< 금천교 북쪽을 지키는 '거북이' >

 

< 금천교 난간 옆 큰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고목' >

이곳 금천교를 건너자 마자 본격적으로 궁궐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되는 '진선문(進善門)' 을 만나면서 진선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이 자리하면서 그 끝지점에 '숙장문(肅章門)' 이 자리하고 있다.

 

< 본격적으로 궁궐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되는 '진선문' >

<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에 있는 넓은 '마당' >

 

< 진선문과 마주보고 있는 '숙장문' >

 

창덕궁은 일제 강점기에 많은 전각이 헐려 나가고 경복궁에서 이건한 전각이 적지 않아서 원래의 모습을 알기가 매우 어려운데, 다행스러운 것은 왕조의 중흥을 위하여 순조의 아들이 되는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대(1827년에서 부터 1830년 까지)에 제작한 창덕궁 및 청경궁의 그림이 되는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 가 남아있다.

현재 동궐도의 보관 장소로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및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2곳의 박물관을 먼저 관람하고 나서 창덕궁을 찾았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되어질 것 인데 다소 아쉬움을 가져본다.

이 밖에 각 전각의 쓰임과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궁궐지(宮闕志)' 가 도움을 주고 있는데, 궁궐지는 조선 헌종 때와 순종 때 기록한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넓은 마당의 중간지점 왼편으로 창덕궁의 메인 건물이 되는 국보 제225호 '인정전(仁政殿)' 으로 들어가는 보물 제813호 '인정문(仁政門)' 을 만나는데, 인정전은 정치 공간이 되므로 치조(治朝) 이라고도 불려진다.

 

 

< 메인 궁궐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



인정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과 함께 2단의 월대 위에 2층으로 되어져 있는 인정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인정전은 전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도합 20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 넓은 월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225호 '인정전' >

 

< '인정전' 주변에 있는 조감도 >

 

이곳 인정전 건물은 조선 태종 5년(1405년)에 건립하였지만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1차로는 태종 18년(1418년)에 건물이 너문 좁아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이나므로 광해군 원년(1609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순조 3년(1803년) 12월 13일 수렴청전을 하던 정순왕후의 편전이 되는 선정전에서 일어난 불이 번져서 인정전이 소실 된다.

불탄 인정전은 바로 재건을 시작하여 1년 만이 되는 순조 4년(1804년)에 공사를 마쳤지만, 철종 5년(1854년)에 건물이 오래되어 다시 중수하면서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그 뒤 인정전은 순종이 1907년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지붕의 용마루에 왕가의 왕실 문양이 되는 오얏문양으로 넣고, 실내 바닥을 전돌에서 마루로 바꾸었으며 안으로 미는 창문을 밖에서 열도록 하였다고 한다.

 

< 인정전 내부에 있는 '어좌' >

 

< 인정전 내부의 현대시설 '조명기구' >

인정전 우측에 있는 대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가면 임금이 업무를 보는 보물 제814호 '선정전(宣政殿)' 건물을 만나는데, 선정전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정치를 의논하는 장소이다.

 

< '선정전' 으로 들어가는 선정문 >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면서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푸른 청기와의 건물이 되는데, 선정전에서 임금이 신하를 만나 정사를 의논 할 동안 반드시 예문관에서 파견된 사관(史官)과 승정원에서 파견된 주서(注書)가 임금의 좌우에서 회의내용을 기록하면서 이 기록을 사초(史草)라 하면서 사초는 뒤에 실록을 편찬할 때 주요 자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선정전 오른편에 보물 제815호 '희정당(熙政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희정당은 선정전 보다 더 크고 멋드러진 편전이 되면서 본래는 숭문당(崇文堂)이라 하였으나 연산군 2년(1496년) 때 불타 새롭게 건립하면서 희정당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남향각 정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과 함께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희정당 안체 건물을 만나는데, 안채 건물은 여러 둘기둥이 떠받들고 있는 누마루 집으로 형상하고 있으면서 내부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쌓여 있다.

 

 

 < 희정당 '남향각 정문' 의 자태 >

 

< 희정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

 

안채 건물 내부 벽면에는 조선 총독부 시절 내부시설을 서양식으로 꾸몄는데, 벽면 좌우에 해강 '김규진(金圭鎭)' 선생님의 작품 '총석정 절경도(叢石亭 絶景圖)와 금강산 만물초승경도(金鋼山 萬物肖勝景圖)' 가 걸려 있지만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고개를 빼고 보아도 가장자리 일부만 보인다.

 

< 희정당 내부에 있는 '생활도구' >

< '희정당과 대조전' 사이에 있는 공간 >

 

희정당 건물 뒤편 내삼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왕비의 공간이 되는 보물 제816호 '대조전(大造殿)' 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인 동시에 정치도 하는 궁궐이다.   

 

< 대조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

 

< 많은 관광객이 관람하고 있는 '대조전' >

 

< 대조전 옆 전각을 관람하고 있는 '중국' 학생 >

 

희정당 오른편으로 세자들이 기거하였던 '성정각(誠正閣)' 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성정각 주변으로도 많은 전각과 더불어 건물이 자리하므로 때때로 임금도 함께 사용한 건축물이 된다고 한다.

 

< 세자들이 기거하였던 '성정각' >

 

< 성정각 앞에 자리하고 있는 '누각' >

 

< '성정각' 을 홍보하고 있는 안내문 >

 

이곳 성정각의 동쪽 편으로 후원으로 들어가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공간 오른편으로 '낙선재(樂善齋)' 건물 군락지를 만나는데, 이곳 낙선재는 원래 청경궁에 속 했으나 현재는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 '낙선재' 의 전경 그림 >

 

< '낙선재' 의 전경 >

 

< 낙선재의 정문 '장락문' >

낙선재는 언제 세워졌는지 불명확하지만 영조 32년(1756년) 사도세자가 대리 청정을 하고 있을 때, 낙선재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고 기록하므로 세자와 관련이 되는 건축물이라 하겠다.

그 뒤 헌종 13년(1847년)에 중건하였기 때문에 동궐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순종 때 만든 궁궐지에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원래의 기능은 국상을 당한 왕후 및 후궁의 처소로 세워졌다고 한다.

 

< 메인 건물이 되는 '낙선재' >

 

< 낙선재 왼편에 있는 '사랑채' >

 

< 낙선재 중간건물이 되는 '석복헌' >

 

 

< 낙선재의 오른편 건물이 되는 '수강재' >

 

특히 낙선재에서는 고종과 엄귀비 사이에 태어난 영친왕 '이은(李垠)' 과 그의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이곳에서 기거하였고, 1989년 이방자 여사가 이곳에서 별세하므로 우리들에게 마지막 왕조의 비극을 느끼게 하는 건축물이다.

 

4) 저녁식사 및 서울의 야경을 내려볼 수 있는 숙소.

낙선재를 횡하게 돌아보고 창덕궁을 떠나기로 하는데, 오늘 하루 동안 많은 장소로 이동하여 피로가 엄습하여 오지만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서울 동문들이 마련한 저녁 만찬식을 참석한다.

식사의 장소는 일전에도 한번 방문하였던 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오리집으로 이동하여 푸짐한 식사의 시간을 가지고, 숙소를 구하기 위하여 무작위로 전화를 거니까 좋은 숙소가 있다고 하여 지하철 마포역으로 달려간다.

 

< 마포 '한강 게스트 하우스' 가 되는 숙소 >

 

< '국회의사당' 이 내려보이는 야경 >

 

< '6.3빌딩' 도 보면서 >

 

 

< '아파트' 군락지 사이로 보이는 야경 >

 

< 옥상 테라스에서 '음주' 를 즐기는 동문 >

 

< 아침식사를 위하여 직접요리를 하고 있는 '동문' >

 

마포역 앞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픽업(Pick-up) 차량이 도착하므로 승차하여 숙소로 들어가는데, 숙소는 외국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장소로써 비용도 저렴하면서 무척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가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