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문화와 산행.

영덕군 출신이면서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려지는 "신돌석 장군의 유적지" 기념관 및 생가 방문.

용암2000 2017. 11. 11. 17:59

2017년 11월 8일.(수요일)

 

삼사해상공원을 출발한 나는 7번 국도를 이용하여 영덕군의 대표적 도시가 되는 강구항 및 영덕읍을 통과하면서 강릉 방향으로 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영덕군의 제2항구가 되는 축산항으로 들어가는 길을 만나자 마자 이내 도로변으로 "신돌석 장군 유적지" 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정표 따라 국도를 벗어나자 마자 인접하게 신돌석 장군 유적지 및 생가를 알리는 이정표를 만남과 동시에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하여 지는데, 유적지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함께 안내소가 자리하고 있다.

 

< "신돌석 장군 유적지" 정문 앞에 있는 이정표 >

 

안내소로 들어가니 다소 연세가 많이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자리하므로 해설을 부탁 할려고 하니 팜플렛 한장을 주면서 해설 보다 팜플렛에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훨신 더 충실하다고 하면서, 팜플렛으로 대신하여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주차장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유적지 조감도와 함께 하고 있는 설명문을 정독하여 보는데, 신돌석(申乭石) 장군은 분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순경(蕣卿), 호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 이명(異名)으로 돌석(乭石) 이라고 쓰고 별명으로 태백산 호랑이라고도 불려졌다고 한다. 

 

< 주차장 가장자리 "신돌석 유적지" 조감도와 설명문 >

 

신돌석 장군은 고종 5년(1878년)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출생하였고, 퇴계 "이황(李滉)" 선생님의 방계가 되는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 선생님에게 학문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영해는 동해를 접한 경상도의 요충지로서 왜구의 약탈과 지방관의 수탈이 극심하여 1871년 이필제(李弼濟)를 중심으로 한 농민(農民) 봉기가 일어났던 지방인데, 이곳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터 반 봉건적 배경과 더불어 항일 의식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고 본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영해의병진을 창군하여 맹활약을 하였지만, 고종황제가 의병 해산에 따른 조칙이 내리자 고향으로 내려와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한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체결을 하자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3월 신돌석 장군도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陳)" 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 창군하니 각처에서 모여든 동지가 300여 명이 넘었는데, 그 때 장군의 나이가 29세가 되었다고 한다.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 등의 넓은 지역에서 항쟁을 거듭한 의병장이기도 하고,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 전에도 능수능란(能手能爛) 하였다고 한다.

1907년 이인영(李麟榮) 13도 창의(倡義) 총대장으로 부터 경상남북도를 합친 교남 창의 대장으로 추대가 되어 서울 공략전에 참여 하였으나, 당시 전국의 의병장은 양반 또는 유생으로 구성하므로 평민이라는 이유로 배제가 되어졌다고 한다,

같은 해 영덕의 관공서를 격파했으며 영양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퇴각을 시켰으며 경주의 대산성에서도 수일 간 전투를 벌였고, 또한 영덕의 조현(鳥峴)에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고 한다. 

1908년 11월 18일 엄동설한을 앞두고 굳게 믿었던 부하이면서 친척이 되는 김씨 삼형제에게 무참히 살해가 되어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여 지는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가 되고 1971년 장군의 유해를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설명문을 정독하고 나서 먼저 사당을 돌아보기 위하여 왼편에 있는 계단을 통하여 일단의 축대 위로 올라서면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의 입구 오른편 구석자리에 한시(漢詩)가 새겨져 있는 거대한 시비(詩碑)를 만난다.

 

< 신돌석 장군이 쓴 "한시" 를 새긴 시비 >

 

이 시비에 새겨진 한시는 장군이 1904년 27세 때 울진군 평해에 있는 월송정(月松亭)에 올라가 지은 시(詩)로써,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현실을 통탄하면서 우국(憂國) 정신의 마음을 표현한 시(詩) 이라고 한다.

한시와 함께 하는 넓은 마당의 제일 안쪽으로 유적지를 관리하는 관리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시비의 뒤편으로 만들어져 있는 계단을 이용하여 일단의 축대 위로 다시 올라가면 신돌석 장군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사당(祠堂)의 영역에 도착되어 진다.

 

< 마당 안쪽에 있는 "관리사" 건물 >

 

돌담으로 구획하고 있는 사당 입구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외삼문이 자리하고 있으며 외삼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다시 넓은 마당과 더불어 좌우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양 건물 중앙을 통과하여 내부로 더 들어가면 일단의 축대 위에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내삼문에 이른다.

 

< 사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 >

< 외삼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동재" >

< 외삼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서재" >
 

< "솟을대문" 을 하고 있는 내삼문 >

 

내삼문을 통과하면 또 다시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마당 가장자리에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忠義祠)" 라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열려 있는 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건물 오른편 벽면으로 장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순직한 사람의 위패 및 중앙 벽면에는 신돌석 장군의 위패와 호랑이 옷을 있고 있는 사진이 함께 하고 있다.

 

< 신돌석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 >

< 사당의 내부 오른편 벽면에 자리하고 있는 "순직자" 위패 >

< 사당의 내부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신돌석 장군 "위패" 와 호랑이 옷을 입고 있는 사진 >

 

사진 앞에서 간단하게 목례로써 예(禮)를 올리고 나서 사당의 외삼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오면 아담한 정원이 펼쳐지면서 정원의 가장자리 좌우에 2개의 비석이 서 있는데, 오른편 비석은 기념비(記念碑)가 되고 왼편에 있는 비석은 유허비(遺墟碑)가 되어진다.

 

< 사당의 앞 정원 오른편에 있는 "기념비" >

< 사당의 앞 정원 왼편에 있는 "유허비" >

 

작은 정원 앞에 신돌석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記念館)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기념관 건물 내에 전시하고 있는 기록물 또는 유품을 관람하기 위하여 자동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전시실 입구에 꽃을 목에 걸고 있는 장군의 흉상(胸像)을 먼저 만나게 되어진다.

 

< 정원 앞에 있는 "기념관" >

< 기념관 입구에 있는 신돌석 장군 "흉상" >

 

전시실 왼편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전시품을 관람하기로 하는데, 처음 부스에는 장군의 활동상을 그린 사진과 더불어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장군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므로 쉽게 이해가 가능하게 한다.

 

< 장군의 "활동 지역" 을 나타내고 있는 설명문 >

<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장군의 일대기" >

 

전시실 내부로 들어가면 벽면 따라 의병들이 사용하였던 총기류 및 죽창 등의 무기류, 울진 우체국을 습격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다오라마(Diorama), 장군이 쓴 일기, 국가로 부터 받은 훈장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의병군이 사용한 "무기" >

< "울진 우체국" 을 습격하는 의병 >

 

다른 한편으로 피살 당시의 상황, 영해읍성의 전투, 가족 관계 등 내용을 일목요약하게 기술하고 있어 전부를 읽어 보기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요구하므로,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돌아보고 기념관을 떠나기로 한다.

 

< "영해읍성" 의 전투 >

< 신돌석 장군의 "가족 관계" >

 

기념관 밖으로 나와 유적지 주변을 돌아보면 마당의 가장자리 따라 양궁장, 본인의 체력에 적합한 무게의 돌 들어올리기 등 체험장이 만들어져 있고, 곳곳에 의자를 비치하므로 휴식의 시간을 가질수 있도록 하고 있다.

 

<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양궁장" >

< 신돌석 장군이 들어올린 "돌" >

 

이렇게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답사하고 나서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약 1.6Km 정도 떨어져 있는 생가를 방문하여 보기로 하는데, 좁은 도로 따라 조금 운전하여 가면 야산 언저리에 다소 넓은 주차장에 도착되어 진다.

주차장 뒤편으로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는 2채의 초가집이 자리하고 있는데, 왼편에 있는 초가집은 담장으로 구획하면서 입구에 신돌석 "장군의 생가" 라는 팻말이 붙어있고 오른편에 있는 초가집은 생가의 집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가진 집이지만 아무런 설명문이 없어 의구심을 일어나게 만든다.

 

<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신돌석 장군의 "생가" >

< "생가" 를 건립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표지석 >

 

생가의 팻말이 붙어있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서면 달랑 정면 4칸 짜리 초가집 한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신돌석 장군의 생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불을 질려 없어지면서 공터로 남아 있었던 것을 1995년에 다시 복원하여 건립한 집이라고 한다.

생가를 구경하고 나서 오른편 옆에 있는 초가집 용도가 많이 궁궁하여 신돌석 유적지 정문에 있는 안내원에게 다시 찾아가 그 내용을 물어보는데, 집은 생가와 아무런 연관이 없고 단지 생가를 관리하기 위하여 지어진 관리동 건물이라고 한다.

 

< 생가의 오른편에 있는 "관리동" 건물 >

 

어찌하던 오늘 영덕군에 있는 유적지를 관람하기 위하여 불원천리 찾아와 바다와 더불어 힐링(Healin)을 즐길 수 있는 기회의 보람을 가져보았는데, 다소 늦은 시간이 되어지므로 더 이상 관람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