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고궁 및 종묘.

서울 5대 궁궐 중에서 제일 많이 파손이 되어진 '경희궁' 및 '서울 역사박물관' 을 돌아보고.(1)

용암2000 2020. 2. 3. 19:21
2020년 1월 31일.(금요일)


1. 경희궁의 방문.
오늘 서울역 4층 식당가에서 지인 한분과 점심식사의 약속으로 만남을 가지고 다소 시간적 여유가 발생하는데, 그래서 서울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파손이 제일 많이 되어진 '경희궁(慶熙宮)' 을 돌아보기로 한다.
현재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Birus)로 인하여 군중들이 많이 모이는 집합 장소를 방문한다는 것은 다소 꺼림직하지만, 그래도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다소 한가할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경희궁이 자리하고 있는 서울특별시 중로구 새문안로 45번지로 들어서면 먼저 경희궁 정문이 되는 '흥화문(興化門)' 을 만나고, 흥화문에서 넓은 도로 따라 내부로 조금 걸어가면 보수로 인하여 휀스가 쳐 있는 공사장의 뒤편으로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숭정문(崇政門)이 자리하고 있다.
 
< 경희궁의 정문이 되는 '흥화문' >
 
< 흥화문에서 '경희궁' 으로 들어가는 도로 >
 
< '숭정문' 앞으로 보수를 위하여 휀스가 쳐 있는 공사장 >
 
숭정문 입구에서 경희궁을 소개하고 있는 팜플릿 한장을 획득하여 읽어보고 있는데, 주어진 시간 오후 2시 부터 경희궁에 대하여 해설을 하겠다는 안내 방송에 따라 설명을 경청하여 보기로 한다.


<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숭정문' >
 
< 숭정문 앞에 자리하고 있는 '안내문' >

서울에는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을 보유하고 있지만 오늘 관람할려고 하는 경희궁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궁궐이 되는데, 그래서 해설사는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궁궐이 되지만 추위로 인하여 요점만 간단하게 설명 하겠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초대 태조 이성계(李成桂) 임금이 1395년 '경복궁(景福宮)' 을 창건하여 법궁(法宮)으로 삼았고, 인접하게 있는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 태종 임금 때 이궁(離宮)으로 건립을 하였다.

1592년 선조(宣祖) 임금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하여 법궁이 되는 경복궁이 소실되어 지는데, 전쟁에 따른 피해로 인하여 소실되어진 경복궁의 복구가 불가능하여 선조는 창덕궁을 법궁으로 삼아 종사를 보게 된다.

1608년 선조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음 임금이 되는 광해군(光海君)이 등극하면서 광해군은 이궁의 필요성을 느껴 새로운 궁(宮)을 건설하는데, 문제는 이곳 경희궁 터가 광해군의 후임으로 등극하는 인조(仁祖) 임금의 아버지가 되는 정원군(定遠君:元宗)의 집 근처가 된다.

이곳 색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부사(府使) 신경희(申景禧)의 말에 따라 이곳의 왕기를 제압하기 위해 광해군 9년(1617년)에 수백 호의 여염집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경덕궁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뒤인 1620년 완공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 이라 불려졌지만 영조는 정원군의 시호가 경덕(敬德)으로 발음이 경덕궁과 같아 경희궁으로 부르면서 도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궐(西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경희궁 대지는 약 6만평이 되어지면서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처음 광해군이 새로운 궁궐을 빨리 짓기 위하여 대지의 경계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한 탓에 땅의 모양이 동서로 길고 건물도 외전(外殿)과 내전(內殿)이 전후로 배치하지 못하고 좌우로 배치를 하였다고 한다.

서궐도안(西闕圖案) 도면에 따르면 전각과 문은 약 190여 채가 되면서 정문이 되는 홍화문은 종로와 마주 보는 동쪽 방향으로 건설하였는데, 현재는 모두가 소실되어 처음과 너무나 상이하게 흥화문도 남쪽으로 배치하면서 경희궁 부지도 약 1만평 미만으로 축소하면서 건물도 3채(숭정전, 자정전, 태령전)만 복원을 하였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부터 건물 대부분이 헐리고 면적도 대폭적으로 축소가 되어져 궁궐의 모습과 위상을 완전하게 잃어버리고 있는데, 국가에서는 2025년 까지 복원을 계획하고 있지만 토지 수용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숭정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안내를 하면서 숭정전 까지 넓은 마당에는 품계석(品階石)과 함께 삼도의 길을 만들어져 있는데, 품계석은 양쪽으로 정9품에서 정1품까지 동일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고 설명을 한다. 

 

 

 < 숭정전 앞 마당에 있는 '품계석과 삼도' >

              

 

< 숭정전을 감싸고 있는 '회랑' >

     

이렇게 동일한 품계석으로 나열하면서 왼편에는 무관(武官)이 서 있는 자리이고 오른편에는 문관(文官)이 서 있는 자리가 되는데, 양쪽의 무관과 문관을 합하여 양반(兩班)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삼도의 길 따라 내부로 들어가면 2단의 월대 위에 정전(正殿)이 되는 '숭정전(崇政殿)' 에 도착하는데, 다른 궁궐에 있는 정전은 모두가 2층으로 건립되어져 있지만 이곳 경희궁 정전은 단층으로 지어진 이유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재정의 궁핍으로 그렇게 건축되었다고 추측한다.

 

 

< 2단의 월대 위에 단층으로 지어진 '숭정전' 전경 >

 

 

< 숭정전 지붕에 있는 '잡상(雜像)' >

 

 

< '숭정전' 앞에서 바라보는 서울시가지 빌딩 >

 

이곳 숭정전 건물은 새롭게 복원이 되어진 건물로써 본래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내 정각원(正覺院)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문화재청에서 왜 본래의 건물을 이전시키지 않고 새롭게 건축을 하였는지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 새롭게 복원한 '숭정전' 건물 >

 

현재 경희궁 정문이 되는 흥화문(興化門)도 일제가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사용하려고 떼어간 것을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으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는데, 이곳 경희궁에 있는 건물 대부분은 서울 사대문 안에 곳곳에 산재하고 있지만 원상복구한 건물은 유일하게 흥화문 하나 뿐이라 매우 불만 스럽다고 한다. 

숭정전에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등극한 인조가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고 그 뒤 효종(孝宗)에서 부터 철종(哲宗)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현종(顯宗)과 숙종(肅宗)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 화재와 수리가 특히 많았다. 

숙종은 경희궁의 정전 중에 하나가 되는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융복전(隆福殿)에서 죽었으며 경종(景宗)은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를 하였으므로, 경덕궁에서 최초로 즉위식을 가진 임금이라 하겠다.

영조(英祖)도 경희궁에서 즉위를 했으나 몇 달만 이곳에서 지냈으므로 거의 빈 궁궐로 남았으나 1810년 순조(純祖)가 이곳으로 옮겨 지냈는데, 순조 29년(1829년)에 많은 건물이 불타 2년 뒤에 중건하였으며 1834년 회상전에서 죽었다.

헌종(憲宗)도 이곳에서 즉위했으나 여섯 달만 머물렀는데, 그뒤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가 철종 11년(1860년) 수리를 하고 철종이 일곱 달만 머물고 창덕궁으로 옮김으로써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빈 궁궐로 남아 있었다.

이 밖에도 우리들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일화를 만들고 있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비롯하여 희빈장씨(禧嬪張氏),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도 경희궁에서 살았던 대표적 여성 인물이 된다. 

 

 

< '숭정전' 내부에 있는 어좌 >

 

 

< 숭정전 천정에 있는 7족의 '용' >

 

 

< '숭정전'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숭정전 내부를 관람하고 나서 뒤편에 있는 '자정전(資政殿)' 으로 올라가 보는데, 자정전은 편전(便殿)으로 사용한 건물로써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조회(朝會)를 하거나 경연(經筵)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한 곳이다.

 

 

< 자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자정문' >

 

< 임금의 편전이 되는 '자정전' >

 

또한 자정전은 숙종이 승하(昇遐)하였을 때 빈전(殯殿)으로 사용하였으며 선왕의 어진(御眞)이나 위패(位牌)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이 빈 공간으로 남겨두고 있다.

 

 

<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자정전' 내부 전경 >

 

이곳 자정전 왼편에 있는 회랑(回廊)의 사잇문을 통과하여 뒤편으로 넘어가면 야산의 언저리에 거대한 바위 한개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바위를 왕암(王巖)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 자정전에서 '서암' 으로 들어가는 사잇문 >

 

왕암이라고 불려지는 이유는 광해군이 이곳 바위에 왕기가 서려져 있는 곳이라 하여 경희궁을 건립하였는데, 숙종 때 바위 이름을 서암으로 바꾸고 돌에 '서암(瑞巖)' 이라는 글씨를 새겨 두었다고 한다.

 

 

< 야산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서암' >

 

 

< 옛날 바위 밑으로 많은 물이 솟았다는 '샘' >

 

 

< '서암'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서암의 앞쪽으로 '태령전(泰寧殿)' 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태령전은 본래 특별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건물로써 1744년 영조 어진(御眞)이 완성되자 태령전을 중수하여 그곳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 서암의 앞에 자리하고 있는 '태령전' >

 

 

< 태령전 내부에 비치하고 있는 '영조' 어진 >

 

이상과 같이 해설사와 함께 경희궁 내부를 돌아보는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너무나 슬픈 역사를 간직하므로 문화재(文化財) 하나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한 아푼 역사를 돌아보고 있으니 눈 앞이 암울하여 진다. -제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