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문화와 산행.

성주역사 태마공원 내에 있는 성주읍성, 성주사고, 성주이씨 시비공원, 봉산재 등 관람.(1)

용암2000 2020. 11. 30. 14:19

 

2020년 11월 28일.(토요일)

 

1. 탐방의 개요.

오늘은 나의 농원을 방문한 고등학교 동문부부와 함께 성주군 가천면으로 넘어가 추어탕으로 푸짐한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 성주군청 뒤편으로 새롭게 조성한 '성주역사 테마공원' 을 방문하여 보기로 하는데, 이곳 역사 테마공원은 금년 10월 31일에 오픈(Open)식을 가졌지만 차일피일하다고 금일 방문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이곳 성주역사 테마공원 내에는 성주읍성(星州邑城), 성주사고(星州史庫), 성주이씨 시비공원(星州李氏 詩碑公園). 봉산재(鳳山齋), 충헌각(忠獻閣), 청사도서관(靑史圖書館) 등 다양한 역사적 시설물이 한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로 인하여 성주의 역사(歷史)를 한 눈에 조명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이 많은 역사물 중에 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경제 부총리를 엮임 하신 청사 '서석준(徐錫俊)' 선생님의 기념관과 함께 하고 있는 청사도서관(靑史圖書館))은 2019년 4월 17일에 방문하였는데, 그 때 나의 블로그(Blog)에 청사기념관 및 도서관의 탐방 내용을 이미 기술하였으므로 이번 방문에는 생략하기로 한다.

 

2. 성주역사 테마공원의 내역.

성주군청 옆 오른편 도로에서 조금 올라가면 청사도서관을 가르키는 이정표 따라 내부로 들어가면 청사도서관 건물을 만나는데, 청사도서관 건물은 작년(2019년 4월 17일) 방문할 때 있었던 솟을대문도 철거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도서관 건물 앞에 있는 작은 공터에 주차를 시키고 나서 도서관 건물의 끝지점에서 왼편으로 꺽어서 올라가면 성주읍성으로 들어가는 중앙도로를 만나는데, 도로 가장자리에 성주역사 테마공원을 그린 현수막 조감도가 붙어있다.

 

< '성주역사 테마공원' 의 현수막 조감도 >

 

조감도에 따르면 청사도서관 바로 뒤쪽이면서 왼편으로 충헌각이라는 비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중앙도로 따라 내부로 더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성주사고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성주읍성의 중심지에 있는 북문이 자리하고 있다.

 

1) 충헌각을 돌아보면서.

청사박물관 바로 뒤쪽 왼편으로 '총헌각(忠獻閣)' 이라는 비각 건물 한채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건물 내부에는 '김창집(金昌集)' 선생님의 발자취를 기리는 유허비 한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김창집 선생님이 누구이며 무엇을 했으면서 이곳 성주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궁궁증을 유발하게 만든다.

 

< 청사도서관 바로 뒤편에 있는 '충헌각' >

 

충헌각 입구에 기술하고 있는 설명문에 따르면 김창집 선생님은 영의정 까지 엮임하신 분으로 인조 26년(1648년)에 한양에서 출생하여 경종 2년(1722년)에 이곳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74세 때 사사(賜死)를 당한 선비이자 노론의 영수이라 하겠다.

김창집 선생님의 본(本)은 안동 김씨이면서 호는 충헌(忠獻)으로써, 연잉군(후에 영조 임금으로 등극)의 대리청정을 둘려싼 신임사화(1721년) 때 역모의 누명으로 인하여 1차로 거제도로 위리안치 되었다가 다시 성주로 이배되었지만 1722년 4월 29일에 이곳 자리에서 처형을 당하신다.

김창집 선생님의 증조 할아버지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선생님이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 선생님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선생님으로 충절의 명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정왜곡에 따라 할아버지와 아버지 및 본인 등 3대가 사사를 당하시는 애석한 가문이라 하겠다.

 

< '충헌각' 의 설명문 > 

 

나의 본향이 되는 성주군에서는 조선 세종대왕 시절 영의정으로 엮임하신 '이직(李稷)'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강 '정구(鄭逑)" 선생님이 죽어서 영의정으로 추서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영의정까지 엮임하신 선생님이 이곳 성주에서 잠깐 계셨다는 것을 알게하여 주는 비각이 되어진다.

 

2). 성주읍성의 탐방.

중앙도로 따라 조금 올라가면 성주읍성 북문(北門)에 도착이 되어지는데, 북문의 가장자리에 성주읍성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성주군에는 가야산 상봉의 가야산성지(加耶山城址)를 비롯하여 독용산성(禿用山城), 성주읍성지(星州邑城址), 성산성지(星山城址) 등 하나의 군에서 최다의 성터가 남아 있다.

 

< '성주읍성' 으로 올라가는 중앙도로 및 북문 >

 

다양한 성터 중에서 성주읍성은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에 토성(土城)으로 축성하였으며 조선 중종 15년(1560년)에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하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기 1년 전이 되는 1591년에 성문(城門)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성주읍성은 현재 성주읍의 중심부가 되는 경산리. 예산리, 성산리, 백천리 일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성주목읍지(星州牧邑址)에 따르면 읍성의 둘레는 6.755척(尺)으로 약 2.1Km가 되는 대규모의 읍성이라 하겠다.

읍성의 형태로는 옛 고지도 자료 및 최근의 지표조사 보고서 등을 통하여 볼 때 장방타원형(長方楕圓形)의 모습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현재의 성주읍성은 북문을 포함하여 전체 길이 약 270m 정도를 복원하였다.

 

< 새롭게 복원한 '성주읍성' 전경 >

 

< 조금 확대하여 보는 '성주읍성' >

 

< 오른편에서 바라보는 '북문' >

 

북문의 전면에는 '민락루(民樂樓)'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루각(樓閣)으로 올라서면 루각의 왼편으로 빛고을 성주군을 상징하는 보름달 모습을 하고 있는 거대한 풍선 한개가 산들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 거대한 풍선과 함께 하고 있는 '북문' >

 

북문을 통과하여 성문 밖으로 넘어가면 성벽의 뒤편 비탈면에 다양한 비석(碑石)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비석들은 성주군이 배출한 유명한 선비 또는 성주군에서 선정(善政)으로 통치한 목사들을 찬양하는 공덕비 등 다수가 자리하고 있다.

 

< 성문 밖에서 바라보는 '북문' >

 

< 북문 밖에서 바라보는 '성곽 및 공덕비' >

 

< '놋쇠' 로 만든 공덕비 >

 

또한 북문의 뒤편 오른편으로 성주의 연못이 되는 '쌍도정(雙島亭)' 이라는 정자를 재현하고 있는데, 이곳 쌍도정은 성주관아 내에 있는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조성한 정자의 이름으로 겸재 '정선(鄭敾)' 선생님의 그림을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 공덕비와 함께 하는 '쌍도정' >

 

< 월동의 준비로 물이 빠진 '쌍도정' 전경 >

 

< 겸재 '정선' 선생님이 그린 쌍도정 >

 

북문의 뒤편 오른편으로 어린이 놀이터를 비롯하여 분수대, 운동기구, 쉼터, 잔디광장, 화장실 등 다양한 시설물이 자리하고 있어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가 되어진다.

다시 성문으로 되돌아 와서 성문 가장자리 따라 걸어보는데, 비롯 성곽이 새롭게 축성 되면서 길이가 270m 정도가 되는 매우 짧은 성곽으로 고풍(古風)의 미는 매우 떨어지지만 성주의 풍경을 한 눈으로 불 수가 있어 매우 아름다운 성곽이라 하겠다.

 

< '성곽' 의 가장자리 따라 만든 오솔길 >

 

< '성곽' 의 뒤편 풍경 >

 

< 성곽에서 내려보는 '어린이 놀이터 및 성주농공공단' > 

 

3). 성주사고의 관람.

북문에서 내려오면 중앙도로 바로 오른편으로 '성주사고(星州史庫)' 가 자리하고 있는데, 사고로 올라가는 입구에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라는 '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 이라는 비석이 길을 안내하고 있다.

 

< 중앙도로 오른편에 있는 '하마비' >

 

하마비에서 S자형 길로 빙돌아서 위로 올라가면 넓은 공터의 중앙에 새롭게 단장한 성주사고 건물을 만나는데, 사고를 구획하는 담장의 중앙에 있는 솟을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또 다시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2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성주사고' 의 전경 >

 

< 성주사고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양쪽 건물에는 작은 쪽문으로 구획하고 있는데, 왼편에 있는 건물에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였던 2층의 서고(書庫) 건물이 되어지고 오른편 건물에는 서고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기거하였던 관리사 건물이 된다.

 

< 왼편 '서고' 로 들어가는 쪽문 >

 

< '조선왕조실록' 을 보관하였던 서고 >

 

< 오른편 '관리사' 건물로 들어가는 쪽문 >

 

사고(史庫)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서고(書庫)로써 조선 1대 태조(1392년)에서 부터 25대 철종(1863년) 까지 472년 동안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 왕조의 공식 국가기록 문서가 되어지는데, 3대 태종 13년(1413년) 때 태조실록을 처음으로 편찬하였고 26대 고종 2년(1865년) 때 마지막으로 철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정치, 외교, 군사, 법률, 사상, 생활 등 다방면에 걸쳐 역사적 사실을 총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책(冊)인데, 실록은 역대 국왕의 사후에 선대 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방식을 취하므로 진실성과 신빈성이 매우 높은 기록물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로 지정 되면서 1997년 10월 1일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이 되는데,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는 유산이다.

이렇게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을 조선전기 4대 사고가 되는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 등 네곳으로 분산하여 보관하였는데,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3곳의 사고(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는 불타 버린다.

선조 36년(1603년)에 긴급하게 남겨진 전주사고에 보관 중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4부로 복사하여 5곳(춘추관사고, 묘향산사고, 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 마니산사고)으로 분산 보관하여 왔는데, 춘추관사고는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 떄 다시 소실이 된다.

이후 묘향산사고는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여 있는 전라남도 무주군에 있는 적상산사고로 이전을 시키고, 또한 태백산사고와 마니산사고는 강화도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이전을 시킨다.

일제 강점기시대 무주군에 있는 적상산사고를 서울 창덕궁의 후원에 있는 장서각으로 이전시키며 오대산사고는 일본 도교제국대학으로 이전시키고, 강화도에 있는 정족산사고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 전신)으로 옮긴다.

또 다시 6.25전쟁의 발발로 창덕궁 장서각에 보관하고 있는 사고는 북한이 강제로 탈치하여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보관하고 있고, 도교제국대학에 보관하고 있는 실록은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되고 경성제국대학에 보관하고 있는 실록은 현재 국가기록원 및 서울대 규장각에 분산 보관하고 있다.

 

< '성주사고'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비록 성주사고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전소(全燒)가 되어 역사적으로 살아져 없어진 유적이 되지만, 이렇게 현재의 위치에서 성주사고를 재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성주군에서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유물이라 하겠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