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가야산)

2010년 6월 12일 38년간 긴 잠에서 깨여난 가야산 "만물상" 코스로 산행을 하여 보면서.

용암2000 2010. 7. 11. 00:42

2010년 7월 9일.(금요일)

어릴 적 소에게 먹이를 주기 위하여 내 고향 성주군 용암면 마월동 뒷산 성암산 "두무사" 에 올라가면 눈 앞에 높게 솟아 있으면서 주변의 산들을 호위하고 있는 산 중의 명산 가야산. 

이곳 가야산의 백미를 자랑하는 "만물상" 코스가 2010년 6월 12일 부터 38년 간 긴 잠에서 깨여나 산악인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지도 어인 25여 일이 지나갔다.

하지만 긴 장마와 더불어 목구멍이 포도청인 핑게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삼복더위의 중심지가 되는 7월 9일 금요일 찾아간 곳 가야산 만물상.

이번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 에서 만물상 탐방로 개방구간은 백운동 야영장에서 "만물상을 거쳐 서성재" 까지 3.6㎞의 능선 길이다.

1972년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 경계에 있는 가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부터 일반인들에게 출입을 금지한지 38년 만이다.

주 중이면서도 삼복의 지루한 장마 철이라 버스에는 약 20여 명 단촐한 등산객만 승차하는데, 계절의 별미를 제공하여 주는 "참외" 의 고장 성주 땅을 통과하여 9시 40분 가야산 백운동 산자락에 이른다.

백운동 입구에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새롭게 단장하여 놓은 야생화 단지가 철 따라 새롭게 피어나는 야생화 꽃들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데, 야생화 꽃들이 잠시 머물면서 구경하고 가라고 손짖을 하고 있다,

 

< 가야산 "야생화 단지"  입구 >

 

야생화 단지는 평소 가끔씩 들려본 곳이라 손만 흔들어 답례하고, 백운동 공원관리사무소 앞에 새롭게 단장한 등산로 입구로 방향 잡는다.

 

< 새롭게 단장한 "만물상" 등산로 입구 > 

 

옛날 부터 열려 있는 산행 길은 다리를 건너 "용기골 계곡" 방향으로 하여 "서성재" 까지 올라가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 으로 올라가는 등산코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 코스로는 몇 번이나 다녀본 코스이면서 계곡 따라 서서히 상승 하지만, 새롭게 단장한 "만물상" 코스는 산행 초입 부터 "상아덤' 까지 능선을 타고 급경사의 길로 올라가다 보니 이내 땀으로 번벅이 된다.

약 1시간 정도 경사 길로 올라가면 이내 암벽이 펼쳐지는 능선에 이르면서 조망이 서서히 눈 앞으로 펼쳐지는데, 좌우에 또 다른 암벽 능선이 손에 잡힐 듯 만물상 능선과 동일 선상에서 같이 도열하면서 고도를 높이고 있다.

왼쪽으로는 "심원골" 이라는 깊은 골짜기 뒤편으로 성주군에서 합천군으로 넘어가는 기산고개에서 시작하여 "돈봉능선" 이 만물상 능선과 합류하는 지점이 되는 "상아덤" 까지 이어지고 있다.

 

< 왼쪽으로 펼쳐지고 있는 "심원골 및 돈봉능선" >

 

오른쪽에는 동성재에서 시작하여 "동성봉" 을 지나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 으로 연결 되는 바위 능선이 파노라마와 같이 펼쳐지지만, 이 2개 능선은 아직 등산객들에게 발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영원한 "불정토" 땅으로 남겨진 신성한 산이다.

 

< 오른쪽으로 펼쳐지고 있는 "동성봉" 능선 >

 

올라 왔든 길 뒤돌아보면 "가야산 관광 Hotel" 의 높은 빌딩이 고즈늑하게 자리하고 있고, 더 시야를 높이면 고령군의 넓은 들판과 더불어 낙동강의 흰 백사장 속에 파란색 물이 뱀 같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능선 초입에 올라서면서 부터 만물상의 진가를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만물상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바위를 넘고 넘어야 한다.

 

< 끝 없이 가야하는 능선의 "암릉" 길 >

 

만물상 산행 길은 조금만 위험한 곳에도 이곳 지방자치단체에서 안전 사다리 잘 만들어 놓고 있는데, 위험한 곳은 전연 없이 안전한 산행 길이 이루어지면서 또한 곳곳에 전망대도 설치하여 놓아 산행의 백미 더하고 또 더하여 준다.

 

< 위험한 지역에 설치하고 있는 "나무계단"  >

 

오늘 산행하는 날씨는 산행 초입에 들어서니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라 운무가 끼여 시야가 많이 흐려져 실망을 가지면서 산행 시작하였으나 만물상 근처에 이르니, 화창한 날씨로 변화가 되어 가야산 전체의 융곽 불 수 있는 행운까지 가져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만물상"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산은 금강산과 설악산 및 오대산 노인봉 만물상이 떠오르겠지만, 이곳 가야산 만물상도 그들과 버금가는 암릉 미(美)를 보여주고 있다.

 

< 암릉 미를 자랑하고 있는 "바위" 를 배경으로 >

 

만물상(萬物相)의 뜻은 금강산의 암산에서 나온 말로 "바위가 기묘하게 온갖 모양을 하고 있는 형상" 이라고 하는데, 가야산 만물상은 금강산과 달리 수십년간 잠들고 있어 아직 바위들이 출생 신고가 되지않아 이름이 붙여있지 않은 바위로 구성되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업을 영위하고 있는 "관상가" 또는 "작명가" 님들 이곳 가야산 만물상으로 원정 좀 와서 바위 마다 새로운 이름 붙여주면 금상첨화가 되겠는데.....

금강산 만물상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해발 1,000m가 넘은 "천선대" 까지 발품을 팔아야만 진정한 풍경을 본다고 하는데, 이곳 가야산 만물상을 보기 위해서도 해발 1,100m가 넘은 "상아덤" 까지 발품을 팔아야만 진가를 느낄 수 있다. 

 

< "상아덤" 까지 가는 능선의 전경 >

 

상아덤까지 올라가는 길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줄지어 늘어진 모습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특히 뒤돌아서 보는 풍경이 환상적이다.  

억겁의 세월 동안 바위들이 비바람에 씻기고 또한 깍기어 여러가지 물체의 형상하고 있는데, 그 형상이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모자바위, 곰, 거북이, 토끼, 사자, 손가락, 부처님 등의 갖가지 모양을 한 바위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형상을 뽐내고 있다.

 

< 올라오는 길을 뒤돌아 보고 있는 "만물상" 의 전경 >

 

능선 길 따라 올라가면 갈수록 기묘한 바위들이 천태만상 형태하고 있는데, 바위마다 감상과 더불어 올라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다 보니 산행 속도가 억망으로 늘어진다.

특히 카메라 들고 설치되고 있는 아줌마 부대 뒤 꽁무니 따라 갈려니 하니 왕짜증 덩어리가 발생하는데, 좀 옆으로 서서 사진을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Guide가 천천히 걸어도 2시간 30분이면 만물상 꼭지점 "상아덤" 까지 도착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나, 3시간이나 허비하고 나서야 비로서 겨우 상아덤 바위에 이른다.

 

< "정견모주" 와 "이비하" 천신이 살았다는 "상아덤" 바위 >

 

상아덤 바위는 기암 괴석의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건축물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모양새가 신비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이 깍아서 만든 것 같은 넓은 바위가 40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걸쳐 놓아져 있는데, 옛날 여자들이 시집갈 때 탓다는 "가마" 모양을 하고 있어 "가마바위" 라고도 하고 있지만 국립공원 안내도에는 "서장대" 라고도 기술되어 있다.

이곳 상아덤에는 신라 말 "최치원" 선생님이 가야산에 머물면서 지은 "석순응전(釋順應傳) 및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가야산의 여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 와 하늘의 천신인 "이비하(夷毗何)" 라는 신이 살았다는 전설의 장소이다.

가야산 처럼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간직한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에 사는 백성들이 가장 우르러 받드는 여신이었다.

여신은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밤낮으로 소원을 빌면서 기도 하였는데. 이에 감동한 하늘의 신 "이비하" 가 오색 구름을 타고 이곳 상아덤으로 내려와 부부의 연(戀)을 이루어진다.

이들 부부 사이에 2명의 아들을 가지는데, 형은 아버지인 이비하 신을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굴면서 불그레하고 동생은 어머니 여신을 닮아 얼굴이 가름하고 흰 편이다.

그래서 형의 이름은 "뇌질주일" 이라 하면서 "대가야국" 의 첫 임금인 "이진아시왕" 이 되고, 동생은 "뇌질청예" 라 하면서 "금관가야국" 의 "수로왕" 이 된다.      
이렇게 전설이 담긴 상아덤은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건국신화가 서린 장소로서 상아덤이라는 유례는 찾아보면 상아는 "여신" 을 말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덤은 "바위" 를 지칭한다고 하는데, 즉 하늘의 여신이 산다는 뜻을 간직한 이름이다. 

이곳 바위를 정점으로 하여 오른쪽 방향으로 한 200m 정도 완만하게 만들어져 있는 능선 따라 내려가면 "서성재" 이라는 고개에 도착한다.

 

< 상아덤에서 바라보는 가야산 정상 "칠불봉" 전경 >

 

서성재에서는 T자 형태의 길로 나누어지는데, 백운동 야영장에서 용기골 계곡 따라 올라오는 등산로와 교차하는 지점으로 휴식을 취하는 나무의자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어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나도 휴식도 겸하면서 간단한 식사하고 나서 칠불봉 방향으로 길을 잡아보는데, 이곳에서 부터 많이 다녀본 길이라 정감이 묻어나는 길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부터 허물어진 "가야산성" 따라 돌을 발고서 다녔지만, 이제는 산성 옆으로 새롭게 나무계단 길을 만들어 놓아 걷기가 많이 편리하게 한다.

가야산성은 대가야 무렵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면서 옛 기록에 자주 등장 될 정도로 유명한 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기술된 내용 요약하여 보면 산성은 계곡을 품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동서남북 4방향으로 성문이 나 있으면서 석축의 둘레가 4830m에 높이가 15m이며, 성내 면적은 200여 만m2 또한 성내 계곡이 6개에 10여 개 우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인 고증을 통하여 하루 속히 사방으로 흩어진 돌을 모아 산성을 복원하여 옛 조상들이 살았든 흔적과 더불어 후손들에게 호국의 숨결을 보여주는 학습장으로 거듭나면 좋겠다.       

이렇게 허물어진 옛 성터 옆을 발고서 한 30여 분 정도 울창한 숲속 길 따라 걷다보면, 또 다시 거대한 암릉 구간에 직면히게 만든다.

거대한 암릉에 아슬하게 걸쳐 있는 철제 사다리 계단수 마음으로 샘하면서 한발한발 올라가면 또 다른 사다리가 연속적으로 나오므로 힘의 한계에 부딛치지만, 겹겹히 쌓여있는 바위와 곧 무너질 듯한 암릉 밑을 통과하다 보니 고난은 고사하고 두려움에 더위도 저 만큼 살아진다.

곳곳에 "낙석주위" 라는 펫말을 옆으로 하고 계단과 씨름하여 30여 분 정도 더 투자하면 해발 1433m "칠불봉(七佛峰)" 정상에 도착한다.

 

< 해발 1433m "칠불봉" 정상석을 배경으로 >

        

칠불봉 정상에서 보는 조망이 환상적으로 펼쳐지는데, 지금까지 힘들어 올라온 만물상의 기다란 암릉 길이 한줄로 선을 형성하면서 자리하고 있다.

그 옆으로 넓게 펼쳐지는 평원 속에 "해인사" 사찰 지붕이 숲 속에서 숨박꼭질 하듯 살며시 고개 내밀고 있고, 그 앞에는 또 다른 암릉산 "남산제일봉" 이 높이를 뽐내면서 여름철 짙은 녹음 속으로 푸르름을 나타내고 있다,

 

< 중앙 능선이 되는 칠불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만물상" 능선 >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가야산의 또 다른 정상이 되면서 소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우두봉" 의 거대한 바위가 크기를 자랑하고 있는데, 그 뒤편에는 풍요로운 "덕유산" 의 산맥들이 아련하게 이어지고 있다.

 

< 칠불봉에서 본 "우두봉" 능선 길 : 뒤편 둥근 바위가 우두봉 바위 >

 

한 때는 이곳 우두봉이 가야산 정상 차지하고 있었으나 2004년 2월 GPS 및 토탈 스테이션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인하여 높이가 3m가 미달 하였는데, 정상을 이곳 칠볼봉으로 양보하다 보니 위용이 많이 반감 되어진 봉우리가 된다.

북쪽으로는 성주군이 자랑하는 넓은 들판에는 참외를 생산하는 비닐하우스가 하얀 물결을 이루고 있는데, 그래서 매우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가야산은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의 경계선 상에 있지만, 지금까지 정상으로 인정한 "우두봉" 과 유명한 사찰 품고 있는 "해인사" 가 합천군에 포함되어 있다.

교과서와 지도책 및 등산자료에서는 "합천군 가야산" 으로 표기 되어있으나. 이제는 가야산 전체 면적의 약40%와 더불어 최고 봉우리인 "칠불봉" 이 성주군으로 포함되어 있다.

더욱더 만물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마져 성주군에 포함되므로 인하여, 이젠 가야산은 "성주군 가야산" 으로 표기를 변경하여야 하는 변혁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이렇게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선으로 인하여 최고봉 논쟁이 부질없이 이루어 지지만 "칠불봉과 우두봉" 봉우리는 말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면서 수만년 전 부터 내려온 위용을 뽐내면서 오늘도 산 아래를 내려보면서 가야산을 찾는 산꾼들에게 넉넉함이 묻어나는 인(仁)자 함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산은 많은 인자(仁者)들이 오르 내리면서 "호연지기" 를 키우는 큰 산이 되는데, 인간에게 인내의 힘을 부여하고 있다. 

작년에 올라가 본 문경 새재에 있는 "주흘산" 도 옆에 있는 "주흘영봉" 보다 높이가 낮아 주흘영봉에게 정상을 양보하고 있지만 동일한 "군" 에 속하므로 인하여 크다란 문제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가야산은 동일한 국립공원에 속 하지만, 이렇게 "경상남도 및 경상북도" 와의 다툼이 발생하는 장소로 변경이 되어지다 보니, 상호간의 개발 차이가 발생됨이 눈으로 보인다.

양쪽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합심하여 좋은 관광지로 만들고, 균형있는 개발을 통하여 전 국민이 사랑받고 있는 명산이 이루지기를 기원하여 본다.

칠불봉에서 약 250m 정도 떨어진 우두봉에 올라가니 변함없는 모습으로 등산객들에게 길을 열어주는데, 이젠 정상석을 표현하는 비석이  다소 빛이 바래지지만 그래도 한때는 가야산을 호령한 산의 무게를 간직하고 있다.

 

< 가야산 "우두봉" 의 정상석 전경 >

 

특히 우두봉에 올랐다 하면 꼭 보아야 하는 곳 "우비정(牛鼻井)" 인데, "우비" 라는 뜻은 소의 코 이라는 뜻으로 우비정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다.

또한 우두봉은 소의 머리 모양하고 있는데, 소의 코에는 항상 코물을 흘려야 건강하다고 하는 것 처럼 우비정에는 언제나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린 빗물인지, 이슬인지, 아니면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인지는 증명 되지 않지만, 가로 세로 각 1m 정도의 크기에 약간 둥근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 위의 연못에는 항상 비단 개구리가 살고 있다. 

 

< 가야산 우두봉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우비정" 연못 >

   

겨울에는 물이 꽁꽁 얼어 붙으므로 개구리들의 생존이 전연 불가능한 것 같은데, 봄이면 항상 올챙이가 성장하여 개구리로 변모하는 모습보면 자연의 신비가 묻어나오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우두봉 정상에서 칠불봉 바라보고 있으면 참 재미있는 현상을 느껴지는데, 날카로운 형상으로 이루어진 칠불봉을 남성으로 비유된다면 우직하게 생긴 우두봉은 여성으로 견줄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는 칠불봉은 굳셀 강(强), 둥그스러운 형상하고 있는 우두봉은 부드러울 유(柔)로 표현하여 보는데, 양쪽 봉우리가 "강과 유" 즉 "남과 여" 또는 "음과 양" 의 아름다움과 어울림을 두루 갖추고 있는 조화의 미(美)를 갖추고 있는 산이라 하겠다.

가야산 산자락에 태어나 성장한 유명한 유학자 한강 "정구" 선생님의 말씀 중 산을 찾는 주 목적은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을 넓히기를 힘씀이지 시야를 넓히기 위함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높은 가야산 정상에 머물면서도 마음은 하나도 안 넓혀지고 주위 조망만 눈에 들어오고 있는데, 아직 진정한 인생의 철이 들기에는 까마득 한것 같다.

우두봉에서 부터 해인사 까지 내려가는 길의 이정표가 3.8Km로 갈 길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데, 서둘러 "해인사" 방향으로 하산 길로 접어드니 내려가는 길목은 전부 바위 투성의 길로 이루어진다.

한 20여 분 정도 내려오면 50m 거리에 보물 제 264호인 "석조여래 입상" 이 있다는 이정표가 희미하게 붙어있는데, 그 길 따라 들어가 보니 나무 밑으로 희미하게 길이 이어진다.

거대한 바위 하나를 돌아서 가니 약 2m 정도의 석조입상 불상 한기가 서 있으나 주변 관리가 억망이면서 그 앞에는 설명서가 붙어있는데, 설명서도 찢어져 억망으로 되어 있어 이렇게 보물급 문화재를 방치하고 있다니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온다.

 

< 보물 제 264호가 되는 "석조여래 입상" >

 

< 찢어진 석조여래 입상의 "설명서" > 

     

아마 해인사에서는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문화청으로 부터 문화재 관리비 꼬박꼬박 챙기고 있겠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숨어 있는 문화재를 건성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진다. 

이래서 가야산은 배부른 합천군과 이분화로 나누어 관리하는 방법 보다는 가여산의 정상 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성주군으로 넘겨야 하는 것 아닌가?

이곳에서 부터 하산 길은 점점 바위가 사라지면서 육산의 부드러운 흙으로 혼합되어 걷기가 매우 수월하고, 하산의 고도가 급변하게 내려가는 길이라 순간적으로 수 많은 종류의 수목으로 바꾸어지는 변화무쌍한 길이 된다.

때로는 울창하게 높이를 뽐내는 전나무 숲속을 걷다가 어느 때에는 키가 적은 산죽나무 길로 이어지는데, 마지막으로 울창한 소나무 길로 통과하다가 단풍나무 길로 바톤을 넘겨준다.

 

< 산죽나무로 어이지고 있는 "하산 길" >

 

땀으로 젖은 몸을 산림욕으로 목욕하면서 약 2시간 정도 걸어 내려오니까 "해인사" 일주문에 도달하는데, 이곳 해인사도 몇년 만에 다시 찾아보니 많은 새로움이 묻어난다.

 

< 가야산 해인사의 "일주문" 전경 >

 

일주문 통과하면 1945년 해방 때 죽은 거대한 고목나무의 밑 둥치 하나만 남아 있는데, 이 나무는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순응" 과 "이정" 이라는 2분 스님이 "해인사" 를 만든 기념으로 심은 나무이라 한다.

약 1.100년의 수명을 다하고 이제는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목의 밑 둥치만 조금 남겨져 있는데, 삶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나무이다.

 

< 고목으로 생을 마감한 1.100년 된 "전나무" 밑 둥치 >

 

일주문, 사천왕문, 해탈문, 구광루를 지나면 넓은 마당을 만나고, 마당 중심에 석등과 더불어 3층 석탑이 있으면서 석탑 뒤편 가파른 돌 계단으로 올라서면 "대적광전" 이라는 해인사 본당을 만난다.

 

< 해인사의 본당이 되는 "대적광전" 전경 >

 

해인사 본당을 돌아서 뒤편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돌계단을 만나는데, 돌계단 위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제된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 을 직면한다.

 

< "팔만대장경" 으로 올라가는 계단 길 >

 

해인사 사찰 내부와 대장경의 역사를 면밀하게 돌아보고 본당 왼편에 있는 "학사대" 로 올라가 보면, 거대한 전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이곳 전나무는 약 1.300여 년의 수명을 가진 높이 30m에 둘레 5.1m를 자랑하는 나무인데, 이 나무는 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님이 짚고 다니든 지팡이를 꽂아 놓았다는 나무이다.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말을 제자들에게 하고 나서, 선경의 경지로 들어갔다는 일화가 있는 나무이다.

 

< "최치원" 의 지팡이가 자란 전나무 >

 

오늘 산행기는 가야산 만물상을 기술하는 것에 중점으로 두고 있으므로 해인사의 유래는 다음 기회에 상세하게 기록을 하도록 하고, 사찰을 건성으로 돌아보면서 경내를 떠나기로 한다.

일주문 통과하여 도로에 나서면 "영지(影池)" 라는 작은 연못을 만나는데, 경주 불국사를 건축하였다는 김대성씨의 부인이 남편을 만나기 위하여 불국사 앞에 있는 또 다른 영지를 찾았다는 것과 유사한 전설이 깃든 곳이다.

상아덤에서 탄생한 둘째 아들인 금강가야국 시조 "수로왕" 은 인도에서 온 허왕후와 결혼하여 10명의 왕자를 두는데, 첫째는 금강가야국의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 성 따라 "허(許)" 씨 시조가 된다.

나머지 7명의 왕자는 외삼촌 "장유화상" 따라 가야산 칠불봉 정상에서 산신이 되기 위하여 기도 증진하고 있는데, 모친인 허 왕후가 아들을 보기 위하여 해인사를 찾았다.

하지만 높은 칠볼봉 까지 올라가지 못하였는데, 그림자 라도 보여 달려는 간절한 기도의 보답으로 이곳 영지에 비치는 아들 그림자를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 해인사 일주문 옆에 자리하고 있는 "영지" 못 >

 

아직도 마음이 여리고 정성이 극진한 사람들에게 이곳 영지 연못 앞에 서면 칠불봉 봉우리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시험 차 내 마음도 점검하여 보니 아무 것도 보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 나는 가야산 꼭지점에 올라가 보아도 마음 한 구석도 안 넓어지고 이곳 영지에서도 가야산 정상도 보이지 않는데, 지금까지 나의 인생살이도 바르지 못하고 억망으로 살아온 삶 인가 보다.

영지 연못을 지나면 해인사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을 만나는데, 이곳 안내문도 너무나 낡아 글씨가 보이지 않아 실망이 매우 크게 만든다.

이곳 해인사는 그렇게 많은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는데, 해인사를 방문하는 모든 불자와 방문객들에게 최소한의 기초 지식를 부여하는 안내문을 작성하는 성의도 보여주지 않는 아주 비열한 사찰로 둔갑이 되었나 보다.

 

< 해인사를 홍보하고 있는 보이지 않은 "안내문" > 

 

오늘 사찰을 구경하여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사찰 내부에 있는 축대를 보수하면서 수억원 비용이 드는 중장비와 인력을 이용하면 일을 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성철스님" 이었다면 현재의 해인사 방장의 빰을 몇 대 치고 나서 한번 더 일어나 한대 지박겠는데, 육신이 화장되어 주먹이 없음이 원통하다.

안내문을 돌아 보면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태웅당 성철스님" 의 사리를 모시는 거대한 사리탑이 봉안되어 있는 넓은 장소를 만난다.

 

< "성철스님" 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전경 >

 

아마 성철스님은 살아생전 해인사와 자신의 사리를 모시는 곳에 돈으로 치장하는 것 보다 숨겨져 있는 문화재 한점이라도 소중하게 관리하여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마음의 위안 보여 주는 것이 그 분의 뜻이 아닌지 알고 싶다.

이렇게 한국 3대 사찰 명성을 가진 해인사가 나에게 많은 실망 안겨주는데, 역시 한국 사찰도 돈 앞에는 속물로 변하는 모습을 보니 한심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저러나 참 오래 만에 걸어보는 가야산과 해인사 종주 길에서 주차장에 도착하니까, 꼬박 7시간 30분이나 소요되는 머나먼 산행 길이 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