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대구)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화' 시인의 생가 방문.

용암2000 2023. 6. 3. 17:30

2023년 6월 2일.(금요일)

 

* 이상화 시인의 생가 방문.

대구광역시에서는 '빼앗간 들에도 봄은 오는가' 또는 '백조(白潮)' 등 시(詩)로 유명한 '이상화(李相和)' 시인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대표적 흔적으로 이상화 선생님이 탄생한 생가, 마지막 삶을 가진 고택, 기념관, 인물 동상, 시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그 많은 흔적 중 대구광역시 계산동에 자리하고 있는 고택(古宅), 달서구에 있는 기념관(記念館). 두류공원 내에 있는 인물 동상, 달성공원 및 수성못 가장자리에 만들어져 있는 시비(詩碑) 등은 관람하였지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되는 이상화 선생님이 탄생한 생가(生家)는 구경하지 못하였다.

 

< 대구시 계산동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화 선생님의 '고택' >

 

< 대구시 달서구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화 선생님의 '기념관' >

 

< 대구시 두류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화' 선생님의 인물 동상 >

 

< 대구시 달성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화' 선생님의 시비 >

 

< 대구시 수성못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화' 선생님의 시비 >

 

그래서 작년 가을철 생가를 한번 방문하였지만 대문이 굳게 닫혀져 있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여 오늘 오후 집사람과 함께 서문시장에 볼일이 있어 걸어 갔다가 서문시장과 다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상화 생가를 다시 방문하여 보기로 하는데, 이상화 생가는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 '이상화'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골목 >

 

< 생가 입구 '근대로의 여행' 을 알리고 있는 입간판 >

 

생가 터가 너무나 외진 곳이면서 좁고 긴 골목 안쪽에 자리하므로 찾기가 무척이나 난이하지만 그래도 한번 방문한 곳이라 기억을 더듬어 겨우 집을 찾았는데, 현재 이곳 생가에는 시각디자이너 '권도훈' 대표가 생가를 매입하여 '라일락 뜨락 1956' 이라는 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 생가를 매입하여 카페로 운영하고 있는 '권도훈' 대표 >

 

현재 이상화 생가는 마당을 중심으로 'ㄱ' 자 형태의 안채와 더불어 작은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사랑채 앞에는 수령 약 200년 가까운 라일락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라일락 나무의 모습이 너무나 굴곡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게하여 준다.

 

< 'ㄱ' 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안채 >

 

< 안채와 마주보고 있는 '사랑채 및 라일락' 나무 >

 

< 안채와 사랑채 앞에 비치하고 있는 각종 '악기' >

 

안채와 사랑채 모두가 홀(Hall)로 개조하여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우리부부가 방문하는 시점에 안채와 사랑채 모두 많은 손님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어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주인장과 서서 약간의 대화의 시간을 가져본다.

 

< 주인장이 운영하고 있는 '주방' >

 

 < '커피' 를 내리고 있는 기계 >

 

< 주인장이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및 서재' >

 

< 많은 손님이 머물고 있는 '안채' 홀 >

 

< 안채에 있는 또 다른 '테이블' 홀 >

 

나는 2013년 2월 2일 대구 계산동에 있는 '고택' 및 2022년 9월 15일 '이장가 문화관 및 이상화 기념관' 을 방문하면서 어느 정도 이상화 선생님의 가계도(家系圖) 및 발자취를 공부하여 나의 블로그에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화 선생님의 할아버지가 되시는 '이동진(李東珍)' 선생님은 '이일우(李一雨) 및 이시우(李時雨)' 등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되는 이시우 선생님은 이상정(李相定), 이상화(李相和), 이상백(李相佰), 이상오(李相旿) 등 4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그 중에 이상화는 이시우 선생님의 둘째아들이 된다.

아울러 이상화 선생님의 연역(演繹)을 기술하여 보면 이상화 선생님은 1901년에 출생하였는데,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므로 큰 아버지가 되시는 이일우(李一雨) 선생님의 보살핌으로 살았으며 그 또한 42세가 되는 1943년에 사망하므로 매우 단명의 삶을 살았던 시인이라 하겠다. 

또한 이상화 선생님은 민족 저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및 대구 대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교육자로써 수 많은 시를 썻는데, '백조 및 개벽' 이라는 신간지를 통하여 '나의 침실로', '마음의 꽃',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비갠 아침' 등 주옥 같은 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이상화 생가는 대구 서문로 2가 11번지로 약 400여 평이 넘었지만 1956년 4개의 번지(11-1번지, 11-2번지, 11-3번지 및 12번지)로 분활하였는데, 현재 카페로 활용하고 있는 '라일락 뜨락 1956' 은 생가 안채가 있었던 11-3번지의 터이라고 한다.

 

< 4개의 번지로 분활하고 있는 '이상화' 생가 >

 

더불어 사랑채 앞에 자라고 있는 라일락 나무의 수령은 약 200여 년으로 추정하면서 라일락 나무는 이상화 선생님의 탄생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상화 선생님은 민족 저항의 시인으로 성장하므로 나무도 저항의 표현되로 뒤틀림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 많은 뒤틀림을 가지고 있는 '라일락' 나무 >

< '라일락' 수령을 나타내고 있는 안내문 > 

 

고목의 나무 원줄기는 비스듬하게 자라고 있지만 그곳에서 자생하고 있는 5개의 나무가지가 똑 바로 자라고 있는데, 5개 나무가지 중 제일 끝에 있는 나무가지가 금년 봄에 싹을 피우지 못하면서 죽어 제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4개의 나무가지가 자라면서 매년 4월 초에서 부터 5월 까지 꽃을 피우고 있으나 금년에는 예년보다 1주일 정도 빠르게 3월 말에 꽃을 피웠다고 하는데, 오늘은 꽃을 불 수 없지만 주인장이 찍어 놓은 사진으로 대신하여 꽃을 감상하게 만든다.     

 

< '5개의 가지' 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그림 >

 

< 주인장이 직접 찍은 '사진' >

 

라일락 꽃은 벚꽃과 개화 시기가 비슷하고 꽃이 아름다우면서 향(香)이 강하여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서 벚꽃나무와 함께 관상수로 심기도 하는데, 라일락 꽃말은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 우정, 아름다운 명세 등 다양한 꽃말을 가지고 있다. 

나무 형태가 너무나 애초롭게 자라고 있어 혹시나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2세 나무를 키우면 좋겠다는 나의 의견을 제시하여 보는데, 주인장은 2세 나무의 번식을 위하여 각종 공공기관을 통하여 무척이나 노력하였지만 모두 실패(失敗)하였다는 경험담을 이야기하여 준다.

 

< 시각디자이너 '권도훈' 대표가 찾아낸 이상화 생가의 역사 >  

 

또한 이곳 한옥의 대들보에 지금으로 부터 68년이 되는 단기 4288년(서기 1955년) 을미년 10월 17일에 대들보를 상량(上樑) 하였다는 글씨가 쓰여 있고, 토지는 그 다음 해가 되는 1956년에 4개로 분활하므로 카페 이름을 '라일락 뜨락 1956' 으로 작명하였다고 한다.

 

< 건물의 대들보에 쓰여있는 '상량' 일자 >

 

< 카페의 명칭을 '라일락 뜨락 1956' 으로 쓴 현판 >

 

많은 순님들이 자리를 비우므로 한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주인장과 약간의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주인장은 이상화 가계와는 어떠한 인연(因緣)도 없지만 이상화 선생님에 대한 많은 자료 수집과 더불어 내용을 알고 있어 다소 긴 정보 교환을 가져 보았다.  

 

< '손님' 이 나간 빈 좌석에서 >

 

또한 주인장은 카페에서 매월 이상화 선생님이 쓰신 시(詩) 낭독을 비롯하여 오페라 등 다양한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대구시가 배출한 한 시인을 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에 무언의 감사를 표현하면서 라일락 뜨락 1956 카페를 떠나기로 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