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행사.(대구)

경북대학교 기계과 제1회 대구에 거주하는 동문 초청으로 1박2일 "대구 인근지역" 의 여정.(1)

용암2000 2013. 11. 11. 22:37

2013년 11월 8 - 9일.(1박2일)

 

1969년 3월 대구 북구 산격동에 있는 경북대학교 기계공학과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처음 만나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한 세월이 벌써 수십년이 흘려갔는데, 이제는 백발의 노인(老人)의 모습으로 동문들을 대면하면서 부터 더욱더 옛 향수를 일으키게 하는 할아버지 사이가 되어진다.

우리 동문들은 지금까지 혼사(婚事) 또는 정기 및 임시 총회를 통하여 자주 교류가 있었지만, 금년 9월 28일 및 29일 1박2일 동안 서울에서 거주하는 동문들이 지방의 동문을 서울로 초청하여 좋은 구경과 더불어 풍족한 대접에 따른 보답 차원에서 2차로 대구에서 초대를 가지도록 한다.

서울 모임에서 앞으로 3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모임을 가지도록 계획을 수립하는데, 이러한 지역(경인지역, 대구지역, 기타 지역)별 모임이 올해 처음 계획하고 실행하는 행사가 되어진다.

 

첫째날 : 11월 8일.(금요일 : 밤)

 

1. 온누리 장작구이 식당에서 저녁식사.

대구에서 사업(事業)하고 있는 한 동문의 후원으로 팔공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대구은행 연수원에서 숙소를 정하는데, 1차로 오후 7시까지 집결하여 방을 배정하고 나서 인접하게 있는 "장작구이" 식당으로 이동하여 만찬을 가지도록 한다.

아직도 현직(現職)에서 근무하고 있는 소수 동문의 업무시간과 서울에서 내려오는 KTX 기차 시간으로 다소 지연된 7시 20분 식당에 전원 도착하여 지는데, 30명 졸업생 중 과반수 15명이 참석하여 진다.

기계과 1회 동문은 다른 동문들과 차별나게 다소 모임의 회수와 단합 대회를 자주 개최하다 보니, 오히려 대화의 내용이 더욱더 풍성하여 지므로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멈추게 하는 듯 많은 이야기 꽃을 피운다.

 

< "온누리 장작구이" 식당 내부 >

 

< 저녁식사와 더불어 이야기를 즐기는 "동문" 들 >

 

2. 대구은행 연수원에서의 숙박.

인접하게 있는 대구은행 연수원 숙소로 다시 돌아가 대구에서 사업하는 동문 사모님이 서울 동문의 보답으로 숙소와 아침식사 및 밤을 지새우면서 마실 맥주와 간식, 연수원장이 제공하는 선물 Set 까지 알뜰하게 챙겨주므로 나와 같은 실업자 주머니를 가볍게 하여 준다.

특히 숙소는 4인실 방 4개와 더불어 대형 방이 2개나 있는 회의실을 함께 예약하므로 회의실에서 2차의 만찬을 가지면서 추가 이야기 꽃이 이어지다가 한명 한명 자기의 방으로 도망가 버린다.

아침에 일어나 연수원 주변 숲속을 한바퀴 산책하기 위하여 "Oh Pride" 산행길로 걸어 보는데,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면서 걷는 길은 매우 아름다운 길이 되어지지만 옥의 티로 연수원 오른편에 있는 축사에서 풍겨나오는 냄새로 분위기가 많이 떨어지는 산책길이 되어진다.    

이어 8시 30분 연수원 식당에서 제공하여 주는 아침식사를 가지고 나서 인접하게 관광지를 관람하기 위하여 출발하는데, 대구에 거주하는 한 동문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오후에 다시 합류하기로 하고 14명이 길을 나선다. 

 

< "대구은행 연수원" 숙소에서 2차를 즐기는 동문 >

 

< "대구은행 연수원" 을 알리는 입석 >

 

< "대구은행 연수원" 건물 외형 >

 

< 연수원 주변을 걷는 "Oh Pride" 산책길 >

 

< 아침 일찍 걸어보는 "산책길" >

 

둘째날 : 11월 9일.(토요일 : 오전)

 

3. 군위 삼존석굴 관람.

대구은행 연수원에서 군위군 부계면에 있는 "삼존석굴(일명 : 제2석굴암)" 을 관람하기 위하여 한티재를 넘어 경내로 들어가는데, 아침부터 한무리의 영남대학교 학생들이 삼존석굴에 대한 문화 해설사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어 함께 도청하면서 역사의 의미를 공부하여 본다,

삼존석굴(三尊石窟)은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수도전법 하시던 곳으로 화상께서 처음으로 사찰을 건립하였고, 그 후 원효대사께서 절벽 동굴에 미타삼존불(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조성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곳 삼존석굴은 7세기 경 화강암 절벽에 조성하므로 경주 석굴암 보다 약 1세기(100여 년) 정도 빠른 선행 양식으로 건축되어 지므로, 토함산 석굴암을 조성하는데 모태(母胎)가 되어진다.

옛날 삼존불을 비롯한 고을 인근 지역에 8만 9암자가 있었다고 전하여 내려오고 있으나 임진왜란 당시 거의 소실되고,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혀오던 중 1927년 한밤마을 "최두환" 씨에 의해 삼존석굴을 다시 발견하여 1962년 12월 정부로 부터 국보 제109호로 지정을 받았다.

동남형의 거대한 암벽에 조성된 석굴은 입구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석굴 안의 평면은 대체로 정사각형을 하고 천정은 활의 등 모양으로 안쪽 벽에 붙여서 원각의 삼존불을 모시고 있는데, 석굴의 지름이 4.25m, 본존불의 높이 2.88m, 왼편의 보살 1.92m, 오른편의 보살 1.8m의 크기를 가진다고 한다.

현존하는 주변 사찰 건물은 1985년 12월 조계종 "법등스님" 이 제3대 주지로 부임하여 와서, 10여 년 동안 중창하면서 대작불사를 발원하여 도량을 일으켰다고 한다.

 

< "삼존석굴"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

 

< 국보 제109호 군위 "삼존석굴" 모습 >

 

< "삼존석굴" 앞에서 해설을 듣고 있는 학생들 >

 

< 삼존석굴의 본찰 "비로전" >

 

< 삼존석굴 앞에 있는 "부처" >

 

< "삼존석굴" 을 배경으로 >

 

 

4. 한밤마을 구경.

군위 삼존석굴 인접지역에 "한밤마을" 의 자랑이 되는 돌담길을 걸어보기 위하여 과수원 사잇길로 만들어진 마을 뒤편으로 이어지는 도로 따라 조금 내려가다가 도로 가장자리에 주차하고 나서 마을 안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곳 한밤마을은 팔공산 뒤편에 분지 형태의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써, 원래는 "큰대(大)" 자와 "밤율(栗)" 자를 써서 "대율마을" 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지만 현재는 친근감이 묻어나는 순수 한글의 이름이 되는 한밤마을로 더욱더 많이 불려지고 있다.

이곳 한밤마을은 진주 이씨와 영천 최씨의 성(姓)을 가진 사람이 다소 살고 있지만, 대부분 "부림홍씨(缶林洪氏)" 집성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화목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가옥과 더불어 재실, 성안 숲, 제방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마을 내에는 문화적인 유적지가 많이 산재하고 있는데, 이 한밤마을은 원래 거대한 "사찰의 터" 이라고 한다.

한밤마을에는 돌담길 전체가 약 4Km가 넘을 정도로 긴 돌담을 형성하고 있는데, 돌담 넘어로 빨간색 장미꽃과 더불어 산수유 열매가 가을 정취를 고조시켜 주고 있으므로 아침 부터 한적하게 걷기에 최적의 장소가 되어진다.

돌담길 따라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면 유형문화제 제262호로 지정된 "대청(大廳)" 이라는 2층 루각 건물을 만나는데, 이 대청은 원래 사찰의 종각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건립한 학사(學舍) 건물이라고 한다.

대청 건물은 조선 전기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인조 10년(1632년)에 다시 건축하였으며 그 후 효종과 숙종 때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그 옆으로 "남천고택(南川古宅)" 이라는 입석이 서 있는 옆에 잠겨져 있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부림홍씨 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통가옥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전통가옥은 250여 년 전 "홍우태(洪禹泰)" 씨의 살림집으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하는데, 사랑채 대청에 있는 상랑문에 조선 헌종(1836년)에 건립하였다고 기록되므로 인하여 건물 년대를 가름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사랑채에는 "쌍백당(雙柏堂)"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이 집의 남쪽 오른편 구석에 재실과 더불어 거대한 잣나무 2그루가 성장하고 있어 쌍백당이라는 이름을 붙었다고 한다.

2년 전 방문하였을 때 이 집에 거주하는 막내 아드님이 대구에서 막 귀촌하여 건물 유래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는데, 지금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집안을 억망으로 만들고 있어 출입을 통제한다고 하면서 대문을 굳게 잠그고 문도 잘 열어주지 않은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게 변모한 이유는 방문하는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하여 화재가 발생할 뻔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쓸쓸하게 발길을 돌려야 하는데, 주인의 인심을 말하기 전 방문자의 시민의식 수준을 높혀 전통가옥 보존에 함께 노력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을 안길로 횡하니 돌아보고 나서 다음 목적지로 떠난다.

 

< "한밤마을" 내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돌담길 >

 

< 돌담길 넘어 피어 있는 "장미꽃" >

 

< 빨간색 "산수유" 열매도 구경하면서 >

 

< 이끼로 장식하고 있는 "돌담길" 을 걷고 있는 동문 >

 

< 한밤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대청" >

 

< 대청 옆에 "남천고택" 을 알리는 입석 >

 

< 북향으로 건립되어 있는 남천고댁 "안채" 의 남쪽 방향 >

 

< "ㄷ" 자 형태의 남천고택 안채 모습 >

 

< 사랑채 건물에 붙어있는 "쌍백당" 현판 >

 

< 약 250년 수령을 가지고 있는 2그루 "잣나무" >

 

<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서당" 건물 >

 

< 많이 허물어지고 있는 "돌담길" 옆을 걸으면서 >

 

5. 한티 피정의 집 견학.

다시 대구 방향으로 넘어오기 위하여 한티재를 넘자마자 왼편에 있는 "한티 피정의 집" 으로 들어가 보는데, 한티 피정의 집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떨어진 행정구역으로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의 깊은 골짜기 속에 자리잡고 있다.

산 줄기로 치면 팔공산과 맥(脈)을 같이하는 해발 약 600m의 심심산골에 천주교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하여 몸을 숨긴 곳이면서 처형을 당하였고, 또한 그들이 무덤이 남아 있는 순교 "성지의 터" 이다.

유교의 전통이 강하였던 영남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박해를 피하여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진보, 안동, 영양, 상주 등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계속적인 체포를 인하여 이곳 한티로 숨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혜의 은거지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 돌리기에 안성맞춤의 한티 교우촌에도 밀고로 인하여 경신박해(1860년)가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순직하였는데, 현재 37구의 순교자 묘소가 피정의 집 주변 야산에 산재하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먼저 언덕 위에 있는 순교자 무덤을 찾아보는데, 제1호 및 제2호 무덤 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던 초가집과 옛공소를 들어가 본다.

그러고 왼편 옆으로 가톨릭 학생들이 공부한 양성관을 지나 피정의 집으로 올라가 보는데, 피정의 집 2층에서 4층까지는 많은 신자들이 피정을 하고 있어 절대 조용하게 하여 달라는 안내원의 이야기와 함께 1층에 있는 "이문희" 주교님이 전 세계를 방문하면서 수집한 성모를 진열하고 있는 전시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관람하여 보는 시간을 가진다.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 건물 앞에 잘 조성되어져 있는 잔디 밭을 빙돌아 걸어보는데, 갈대 숲도 지나고 주변 조형물도 구경하면서 천천히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 한티 "순교자" 무덤으로 가르키는 입석 >

 

< 순교자 무덤 앞에 있는 "기도처" >

 

< 순교자 무덤을 생각하게 하는 "시" >

 

< 바위 속에 잠들고 있는 "제1호" 순교자 무덤 >

 

< 순교자들이 살았던 "초가집" 전경 >

 

< "옛공소"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가톨릭" 학생들이 공부하는 양성관 >

 

< 한티 "피정의 집" 으로 올라가는 도로 >

 

< 아름다운 잔디 정원을 가지고 있는 "피정의 집" > 

 

< "이문희" 주교님이 기증한 성모 >

 

< 세계 각 나라에서 수집한 "성모" >

 

< 피정의 집 앞에 있는 "억새길" 을 걸으면서 >

  

< 성모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어떤 "부부" >

 

6. 송림사 관람.

한티 피정의 집에서 고불고불한 도로 따라 대구 방향으로 내려오다가 오른편으로 송림사(松林寺)를 가르키는 이정표 따라 사찰 방향으로 인도하는데, 1개월 전 방문할 때 송림사 본찰의 대웅전(大雄殿) 건물과 대웅전 앞에 있는 5층 전탑(塼塔)을 보수하기 위하여 천막으로 완전히 밀봉이 되어 관람이 가능한지 다소 걱정이 앞선다.

사찰 앞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서 일주문을 통과하여 경내를 들어가니 이제는 일부 보수가 끝나므로 보물 제189호 "5층 전탑" 은 새로운 모습으로 탑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탑 뒤편에 있는 보물 제1605호 "목조 석가여래삼존불 좌상" 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 건물은 아직도 공사로 인하여 많은 목수들이 움직이고 있다.

송림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5층 전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이전에 건립되였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 사찰이지만,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시대 까지 번창하였던 송림사는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인하여 가람과 사적이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경내에 가장 오래된 중심 불전 대웅전은 1649년도에 새롭게 건축하였으며 1850년도 주초석을 다시 배열하여 큰 규모의 사찰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재 다시 대웅전을 중수하기 위하여 오래된 나무를 전부 교환하면서 대대적인 수술을 병행하고 있어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에 나타낸다.   

이 밖에 보물 제1606호 "석조 아미타여래삼존불 좌상" 이 있는 삼천불전 등을 돌아보고, 송림사 앞에 있는 송림지 아래에 있는 동명 4거리 인접지역 송림지 곤드레밥 식당으로 들어가 오후 대구시 중구에 있는 근대골목을 걷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하여 푸짐한 식사로 배를 채운다.

 

< 팔공산 "송림사" 로 들어가는 일주문 >

 

< 보수가 완료되어 새롭게 단정한 송림사 "5층 전탑" >

 

< 아직도 중수 중에 있는 "대웅전" >

 

< 보물 제1606호 "석조 아미타여래삼존불 좌상" 을 안치하고 있는 삼천불전 >

 

< 동명 4거리에 있는 "송림지 곤드레밥" 식당 >

 

< "곤드레밥" 을 즐기는 동문 >

 

식당 밖으로 나오니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는 거리가 되어지므로 각자 안전하게 운전하여 대구시내 계산성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대구시내로 출발한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