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울산, 경남)

지리산 쌍계사 계곡 언저리에 있는 "서산대사 길과 대성동" 마을까지 트레킹 길 걸어면서.

용암2000 2014. 6. 19. 22:23

2014년 6월 15일.(일요일)

 

오늘은 어머니 품과 같이 포근함을 간직하고 있는 지리산 중심부에 해당하는 하동군 쌍계사 앞으로 흐르는 화개천 원류에 있는 "서산대사 길" 과 더불어 6.25 동란 때 빨지산 근거지가 되는 "대성동" 마을까지 연결하는 트레킹 길과 함께 걷기 위하여, 대구 드림산악회에서 야심차게 개발하여 대구시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코스에 동참하여 본다.

아침 7시 30분 대구 동부지역에서 출발한 산악회 버스는 내가 승차하는 동아쇼핑 앞에서 8시 10분에 경유하므로 그곳에서 버스에 승차하니, 앞 정류장에서 다소 많은 산행인들이 선승(先昇)하므로 분주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버스는 계속하여 7호광장과 더불어 마지막 탑승지 성서 홈플러스 앞에서 많은 여성분들이 동행하므로 더욱더 소란스러움을 가진 버스는 남도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하동 Toll gate를 벗어나 섬진강 따라 북상하기 시작한다.

오늘 산행을 인도하는 Guide는 섬진강변 따라 펼쳐지는 풍경의 설명과 더불어 금일 걷고자 하는 서산대사 길과 대성동 트레킹 길을 설명하여 주는데, 이곳 서산대사의 길은 쌍계사 앞에 펼쳐지는 십리 벚꽃길 따라 올라가다가 칠불사(七佛寺)로 들어가는 길림길에서 오른편 골짜기로 조금 올라가면 신흥마을에 도착한다.

오늘 트레킹 길은 신흥마을과 종점의 의신마을의 첫글을 따서 "의신옛길" 이라고 하는데, 이곳 2개의 마을과 마을 사이에 흘려내리는 상부 화개천 옆으로 조성되어진 약 4.2Km의 길이면서 한편으로 서산대사가 걸었다고 하여 "서산대사 길" 이라고도 한다.

 

< "서산대사 길" 의 안내문 >

 

Guide는 몇일 전 지리산 언저리에 내린 비로 풍족하게 흐르는 수량과 더불어 오늘 같이 쾌청한 날씨가 병행하므로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축복받은 날씨와 함께 계곡 따라 걷는 행운의 날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고 하는데, 오늘 정말로 세상에서 만들어진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걷고 걸어보자는 인사로 대신한다.

버스는 칠불사로 올라가는 3거리에서 오른편 계곡 방향으로 한 5분 정도 올라가면 지리산 산기슭에 빗대어 만들어진 아담한 신흥마을에 도착하면서 일행을 하차시키고, 버스는 계속하여 앞으로 전진하여 도로의 끝지점에 있는 의신마을 종점 인접지역에 주차하도록 이야기하여 준다.

 

<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로 올라가는 "다리" > 

 

Guide는 마을 앞에 하차한 일행에게 비활동적인 몸으로 바로 산행에 임한다는 것을 좋은 현상이 아니라고 하면서 간단하게 국민체조와 더불어 스트레칭을 시키는데, 국민체조는 예비군 훈련 때 한 경험 이외는 전무하여 장농 속에 묻어둔 국민체조를 꺼집어 내어 실시하여 보니 추억의 한 Page가 된다.

트레킹에 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서산대사의 길 초입에 서 는데, 넓은 계곡 왼편 야산기슭 따라 만들어진 초입길은 처음 부터 조그마한 토끼길이 되고 계곡 건너편으로 대성동 의신마을로 올라가는 차도가 새롭게 조성되어 그 차도가 울창한 지리산 품속에서 보였다가 살아졌다가 반복한다.

 

< "서산대사 길" 알리는 지시표 >

 

< "서산대사 길" 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문 >

 

몇 개의 돌계단으로 만들어진 길로 올라서면 이내 산의 비탈면 따라 서산대사의 길이 이어지는데, 좁은길 옆으로 낭터리가 형성하면서 그 밑으로 흘려가는 우령찬 물소리가 무아지경으로 걷게 만든다.

 

< 좁은 낭터리지 옆으로 이어지는 "서산대사 길" >

 

대부분 삼삼오오 짝을 형성하면서 무리지어 걸어가는 먼 발취에서 언제나 혼자 걸어가는 나는 오직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를 친구로 삼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길의 가장자리에 "낙석주의" 라는 안내문과 더불어 곳곳에 자생하고 있는 농산물은 농부의 소중한 땀방울이라는 경고문이 함께 하고 있다.

 

< 녹차 밭과 함께 하는 "무덤" >

 

< "낙석과 농작물" 에 주의를 요구하는 경고문 >

 

오솔길 주변으로는 거대한 밤나무에서 밤꽃을 형성하면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므로 코가 확 뚫리게 만들어 주고 있으며, 이 많은 밤나무 사이로 종종 감나무, 호두나무, 고염나무, 잣나무, 돌배나무, 대추나무 등 다양한 과실수 등이 함께 하면서 매우 작은 열매들이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 길의 좌우에 펼쳐지는 "밤나무" >

 

< 한참 과실을 열기 시작하는 "돌배나무" >

 

이렇게 주인도 없는 야산 비탈면에 각종 과실나무와 더불어 산나물, 약초, 고사리, 토종 벌통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고 걷기를 부탁한다는 알림표시가 더욱더 견물생심(見物生心)을 유발시킨다.

 

< 많은 물이 흘려내리고 있는 "화개천" >

 

< "토종벌" 을 키우는 벌통 >

 

< 다양한 "약초와 야생화" 를 키우는 밭 >

 

무상무념(無想無念)의 심정으로 한참 걸어가면 비탈면 따라 양철지붕을 가진 한 채의 집이 보이는데, 집안에서 한마리의 개가 짖은 것을 보니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면서 이 많은 과실수를 관리하는 주인장 집인가 보다.

 

< 양철집 주변에 있는 "감나무와 호두나무" >

 

또 다시 시원한 물소리를 벗으로 삼고 계속하여 계곡 옆으로 만들어진 길을 넘고 넘어가면 하나의 작은 고개에 오르면서 돌 의자 한개가 놓여 있는데, 그 의자 뒤편에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려 왜군을 물려쳤다는 설명문이 붙어있다.

 

< 계속되는 "오솔길" 을 걸으면서 >

 

< 서산대사가 도술로 만든 "돌 의자" >

 

< 도술로 만든 "돌 의자" 설명서 >

 

서산대사는 1540년 의신마을에 있는"원통암" 으로 출가하였으며 출가 후 아래 신흥마을에 있는 "신흥사" 까지 왕래하면서 걸었던 길이지만, 현재 신흥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하므로 사지(寺址)만 남아 있다고 한다.

시대를 초월하여 서산대사가 걸으면서 휴식을 가진 의자에 앉아 잠시 상념(想念)에 빠지다가 천천히 고도를 상승하면서 계곡 따라 올라가면, 더욱더 깊숙한 지리산 협곡에는 너무나 우거진 녹음으로 햇빛 하나 내리지 않는다.

 

< "나무테크" 길도 걸어보고 >

 

< 때로 "비탈면" 도 걸어가면서 >

 

< 많은 수량을 가지는 "화개천" 계곡 >

 

"서산대사(西山大師)" 그는 중종 15년(1520년)에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으며 완산 최(崔)씨로 본래 이름은 여신(汝信)이라 하며, 아명은 운학이며 별호는 백화도인 또는 서산대사, 풍악산인 등으로 불리고 법명은 휴정(休靜)이라고 한다.

서산대사가 3세가 되던 해 사월 초파일 그의 아버지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 스님을 뵈러 왔다” 라면서 아이의 이름을 "운학" 이라 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 일로 서산대사의 아명은 운학이 되었고 또한 어려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도 남다른 바가 있었는데, 돌을 세워 부처님이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고 하는 등 일찍이 훌륭한 승려가 될 자질을 보였던 것 같다고 한다.

9세와 10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의고 거처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혀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지리산으로 여정을 떠났으며. 이후 지리산의 화엄동, 칠불동 등을 구경하고 여러 사찰에 기거하면서 불법의 연구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출가한다.

그 후 명종 4년(1549년) 승과에 급제하였지만, 벼슬자리는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 두륜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다니며 스스로 교리를 갈고 닦고 후학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피난을 하면서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 서산대사를 불렀으니, 이내 서산대사는 전국에 격문을 돌려 구국에 앞장 설 승려들을 모았고 의승군을 통솔하여 평양을 탈환한다.

선조는 서산대사의 공을 높게 평가하여 군직을 하사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제자인 유정 스님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으며 그 뒤에도 여러 곳을 다니다가 선조 37년(1604년) 나이 85세에 가부좌 하여 앉은 상태로 입적하였다고 하는데,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고 있다.

몇 번의 구비구비 언덕과 벼랑길을 넘어가면 이윽고 의신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의신마을은 높은 지리산 지맥으로 빙돌려쳐 있는 비탈면 따라 지어진 그림같은 집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목가적이다.

 

< 트레킹 길에서 만나는 "민가" >

 

< "서산대사 길" 에서 만나는 휴식처 >

 

< 깊은 계곡과 높은 산자락에 자리한 "의신마을" >

 

< 의신마을로 올라가는 "오솔길" >

 

<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의신마을" >

 

마을 앞으로 흘려내리는 우렁찬 물소리 따라 조금 올라가면 하얀색의 별장 건물과 더불어 개울을 건너는 출렁다리를 만나는데, 그 출렁다리 아래에는 많은 물이 흐르고 있어 일행은 땀으로 번벅이 되어진 몸을 씻기 위하여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가 더위를 날려 보낸다.

 

< 의신마을로 넘어가는 입구에 있는 "별장" >

 

< 별장 앞에 있는 "출렁다리" >

 

나는 출렁다리 위에서 계곡 위쪽과 아래쪽을 내려다 보면서 거대한 암벽 사이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정신을 놓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면서 다리 아래에서 옷을 입은 상태에서 목욕을 즐기는 선인의 목욕 모습을 훔쳐보면서 무한정 출렁다리에 몸을 의존하여 본다.

 

< 출렁다리에서 바라보는 상부 "화개천" >

 

< 출렁다리에서 내려보는 하부 "화개천" >

 

한참 후 다리를 건너 의신마을로 올라가니 버스 종점과 더불어 도로 건너편에 음료수를 판매하는 가게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어 나도 뒤 따라 들어가, 빙과류 한개를 구입하여 목을 적셔본다.

 

< 의신마을 버스 종점 앞에 있는 "가게" >

 

그러고 마을길을 천천히 돌아보는데, 마을 가장자리에는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의 지도와 더불어 하동 8경의 내역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이정표가 하나가 서 있다.

이정표에 따르면 왼편의 더 골짜기로 2.5Km 올라가면 "삼정마을" 이 있다는 표시와 더불어 오른편 아래 방향 9.2Km 지점에 세석 대피소가 있다는 이정표가 붙어있다.

 

< 하동군 "지도 및 하동 8경" 설명서 >

 

< 2.5Km 지점에 "삼정마을" 이 있다는 이정표 >

 

버스정류장 뒤편으로 많은 평상이 놓여 있어 몇 명과 함께 간단하게 점심 식사시간을 가지고 다시 대성동 마을로 들어가기 위하여 출발 할려고 하는데, 우리가 타고온 버스가 도로변에 주차하고 있다.

Guide가 대성동 마을 까지 왕복 길에는 무거운 배냥을 차량에 두고 간편하게 물만 가지고 가는 것도 좋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생각나지만, 그래도 배냥을 메고 대성동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길을 찾아 나선다.

 

< 도로변에 주차하고 있는 "버스" 를 지나면서 >

 

이곳 의신마을에서 대성동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길 찾기가 다소 난이한데, 버스주차장에서 한 200m 정도 하부로 내려가면 길의 좌측편 좁은길 모퉁이에 서산대사가 출가한 원통암과 대성동 마을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붙어있다.

 

< "원통암" 을 알리는 이정표 >

 

약간의 오르막 길 따라 50m 정도 올라가면 이제는 도로 오른편으로 "벽소령 산장" 간판과 더불어 그 아래에 대성동 마을을 가르키는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벽소령 산장 건물 앞 마당을 가로 질려나가 야산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간이용 변소와 더불어 대성동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길이 된다.

 

< "벽소령 산장" 과 "대성동" 마을 알리는 이정표 >

 

< 대성동 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간이용 변소" > 

 

이 초입길 언덕으로 올라서면 지금까지 걸어온 서산대사의 길 옆으로 펼쳐지는 계곡의 풍경이 발 아래에 머물고 있으며, 눈을 최대한으로 뒤로 돌리면 조금 전에 지나온 의신마을이 또 다른 모습이 한폭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 대성동 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바라보는 "화개천 계곡" >

 

< 야산 들머리에서 내려보는 "의신마을" 전경 >

 

비탈면 따라 만들어진 밭을 지나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도로변에 17인의 항일투사 "의총(義塚)" 한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무덤 앞에 의총의 내역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있어 간략하게 읽어본다.

 

< 17명의 항일투사 의인을 모시고 있는 "의총" >

 

이 무덤의 주인공은 일제시대 때 이곳 하동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한 80여 명의 무명용사들이 순직하므로 지리산 곳곳에 묻혀있는 시신을 발굴하여 그 중에서 무명의 17명 의인(義人)을 이곳에 모시고 있다는 설명문이 붙어있다.

이 무덤을 지나면서 세멘트 포장길은 야산의 허리를 가로질려 계속하여 비스듬 하게 올라가지만 이내 시멘트 포장길을 끝나고 올창한 숲속으로 길이 연결되며, 여기에서 부터 길은 완전히 흙과 바위로 이루어지는 오솔길이 되므로 안전을 요구하는 길이다.

 

< 대성동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좁은 "세멘트" 포장 길 >

 

< 이내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오솔길" 로 걸으면서 >

 

길의 옆으로 농작물과 산나물을 재배하므로 절대 출입금지를 요구하는 삭막한 안내문이 붙어있어, 이제 산골마을에도 훈훈한 인심이 살아지고 모든 것이 돈으로 측정하고 있는 물질 만능의 모습이 이곳 지리산 골짜기에도 만연하고 있는가 보다.

 

< 산골 "인심" 도 점점 각박하고 >

 

Guide는 이곳 의신마을에서 대성동 민가(民家)가 있는 마을 까지 2.5Km로써 왕복 약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다고 하면서, 지금 까지 서산대사의 길을 걷고 나서 추가로 이곳으로 올라가는데 다소 힘이 들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펼쳐지므로 강력하게 추천한다고 한다.

특히 이곳 대성동 마을은 우리나라에서 뼈 아푼 동족상쟁의 현장으로 빨지산이라고 불려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사령관 "이현상" 부대가 우리나라 "차일혁" 총경이 이끄는 전투경찰 부대와의 교전으로 사살 되어진 곳이라고 한다.       
몇 번의 고비를 넘고 넘어 가면서 깔닥고개에 도착하여 크게 휴식을 가지고 나서 산의 허리를 돌아서 가면, 멀리 낭터리지 아래에서 우뢰와 같은 물소리가 들리오지만 계곡의 깊이를 가름하기 조차 어려운 대협곡이 펼쳐진다.

 

< 산의 허리에 있는 "깔닥고개" 에서 >

 

이 깔닥고개에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면 휘귀한 2그루 소나무를 만나는데, 이 소나무 밑둥치에서 나무가 한번 붙어지므로 인하여 "연리목(連理木)" 나무가 되고, 위쪽에 한개의 가지가 다시 연결되어 "연리지(連理枝)" 가 되므로 2개의 나무가 얼마나 사랑했으며 연리목과 연리지가 동시에 일어날까?

 

< 2그루의 소나무가 사랑의 징표로 표시하고 있는 "연리목과 연리지" >

 

가끔씩 산나물과 고냉지 채소를 키웠던 산간 밭이 나타나지만 밭에는 많은 잡풀이 우거진 야산으로 변화를 이루고 있지만, 가는 길에는 울창한 숲으로 인하여 터널의 길이 되므로 내내 심오한 삼림욕을 즐긴다.

 

< "반달곰" 출현에 대비하는 요령 >

 

< "삼림욕" 을 즐기면서 무아지경으로 걷는 길 >

 

< 많은 피톤치드를 배출하는 "고목" >

 

어느 지점에서 90도로 꺽어 낭터리지 아래의 길로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 바닥에 도착하는데, 다수의 사람들은 바위 사이로 안마와 더불어 자장가를 불려주면서 흘려가는 냇물로 들어가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 계곡으로 내려가게 하는 "이정표" >

 

< 다시 만나는 거대한 "대성골 계곡" 과 바위 >

 

개울 옆으로 이어지는 길 따라 한 고비를 올라가면, 마을 입구를 알리는 노송(老松) 한그루가 무릉도원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심신을 점검하는 듯, 수문장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 대성동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 "노송" >

 

이 수문장 노송을 통과하여 작은 모퉁이를 돌아서면 산 비탈면 따라 지어진 붉은색의 양철집이 보이는데, 이 양철집은 긴 마당을 형성하면서 몇 채가 지어져 있고 조금 아래로 떨어진 개울가에 양철집 지붕 한채가 보이고 있다.

 

< "대성동 마을" 로 들어가는 길과 개울가 폐가 양철집 >

                                                                   

2가구 양철집에서는 여기 까지 올라온 산행인들에게 음식과 더불어 막걸리 등은 판매하는 간이주점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마을에서 판매하는 가격에 대비하여 막걸리 한병 8.000원 받고 있다.

 

< 좁은 마당과 더불어 나란하게 지어진 두채의 "대성동 민가" >  

 

Guide는 여기까지 오는 교통수단으로는 오직 두발이고, 생활 필수품을 운반하는 유일한 도구는 지게를 이용할 수 밖에 다른 수단이 없으므로 그렇게 높은 가격을 받아도 가성비(價性比)가 월등하다고 하는데, 많은 산꾼들이 좁은 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즐기고 있다.

이곳에 있는 두집의 민가 중 한집 마당에서 중년의 아주머니가 손님을 위하여 양파를 다듬고 있으며 다른 한 집에는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며느리와 아들이 2명의 자녀와 생활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젊은 부부는 TV에 자주 출연하므로 지리산의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고 부언하여 준다.

 

< 양파를 손질하는 "아주머니" >

 

< 풍족한 물이 흘려내리는 "음료수" >

 

마루에서 휴식을 가지는 노인에게 이야기 하는 도중에 이곳 산골에는 문명의 혜택은 없지만, 그래도 22년 전 부터 전기가 들어오므로 메스콤을 통하여 세상 살아가는 내용은 다 알고 있어 어떻한 불편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면서 지리산 자랑이 대단하다.

 

< "TV" 를 즐기는 노인 >

 

나는 지뿔도 없이 이제 겨우 귀촌하여 자연을 벗으로 삼고 살아갈려고 첫발을 내밀고 있는 나의 신세를 돌아보고 있으니 한심한 마음이 일어나므로 재 빠르게 민가 마당을 통과하여 뒤쪽으로 들어가니, 여기에서 6.6km 지점에 세석 대피소가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 집의 벽면에 있는 "대성골" 지도 >

 

< "세석 대피소" 로 올라가는 산행길 >

 

< "세석 대피소" 까지 거리를 알리는 이정표 >

 

세석 대피소에서 내려오는 몇 명의 산행인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면서 개울가로 내려가니 바위 속으로 거대한 담(潭)을 형성하고 있어 재빨리 양발을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들어가 더위를 식혀보는데, 발에서 냄새가 진동하는지 작은 물고기들이 때로 물려와 닥터 피쉬(Doctor Fish)를 하여준다.

 

< 세석 대피소로 올라가는 입구의 "계곡" 전경 >

 

닥터 피쉬 덕분에 나의 발은 깨끗하면서 피로도 풀어지지만,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많은 물고기들이 나의 발에서 풍기는 냄새와 더불어 때를 선사 할려고 하니 다소 미안한 감이 일어난다.

 

< "닥터 피쉬" 를 즐기면서 >

 

그런데 개울가로 이 마을의 주인공 젊은이와 2명의 어린이와 함께 몰놀이를 하기 위하여 합류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안면이 많다고 하면서 인사와 더불어 반가워 하는데, 현재 아이의 나이가 어려 부모님과 함께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면 저 아이들도 교육을 위하여 이 산천을 떠나겠지?

도시로 나아가 교육을 받아도 내 같이 돈도 출세도 못하고 병신 같이 살아 갈려면, 차라리 이 산천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할 지 모르겠는데 하는 마음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기원하여 본다.  

약 30분 간 물속에 앉아 지리산의 산천 풍경과 더불어 머리를 식히면서 앉아 있어도 나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시(詩) 상도 잘 떠오르는지 조금전 민가 벽면에 붙어있는 시구(詩句)가 주마등 같이 눈 앞에 아롱 거린다.

 

< 대성동 민가 벽면에 붙어있는 "대성골" 시 >

 

이윽고 주어진 시간과 더불어 무릎 통증으로 인하여 내려가는 길에 다소 두려움이 발생할 것 같아서 무한정 머뭄이 불가능하여,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자리를 정리하고 하산길로 들어선다.

다시 오기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으로 몇 번이고 지리산 속살에 눈맞춤으로 사진을 찍고 찍으면서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데, 아마 저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릉도원의 세계에서 사는 분이 아닌지 의문을 가져본다.

천천히 대성동 마을을 통과하여 하산길로 혼자 내려오고 있으니, 한 중년 아저씨가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오고 있어 수고의 인사를 나누어 본다.

 

< 오직 "지게" 로 운반하는 짐꾼 >

 

중년의 남자는 짐을 운반하는 전문 짐꾼인지 아니면 양파를 손질하고 있는 아주머니 남편인지 모르겠으나 저렇게도 무거운 짐을 지고 발걸음도 가볍게 올라가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나의 인생은 빈 배냥에도 힘들어 하는 모습이 너무나 허무함이 묻어난다.

약 1시간 정도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와 의신마을 도로에 주차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가니 일행 한명도 보이지 않아 Guide에게 물어보니, 4시 45분 출발시간 까지 20여 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대부분 출렁다리 아래에 있는 계곡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 "의신마을" 중앙통을 거닐어 보면서 >

 

나도 어찔 수 없어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의신마을 돌아보는데, 마을에는 "지리산역사관" 과 "지리산 반달 작은 도서관" 건물이 보이지만 그곳으로 들어가 관람하기에 시간적 부족으로 다음 차량을 이용하여 한번더 방문하여 보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약속시간 내에 버스에 오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