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회.(고등학교 동문 모임)

우암회 2일째 여행은 서산시의 유명한 사적지 "해미읍성" 및 해미읍 재래시장 돌아보면서.

용암2000 2014. 7. 26. 21:45

둘째날 (7월 20일 : 일요일)

 

1) 해미읍성에서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박집에서 일어나자 마자 해안가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다음 여정에 대한 의견을 가지다가 일단 대천해수욕장을 떠나 집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3대의 승용차가 움직이는 서울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산시 "해미읍성(海美邑城)" 으로 들어가 관람하고 나서, 인접하게 있는 식당을 찾아 점심식사를 끝으로 하기휴가의 모임을 종결하기로 한다.

그래서, 짐을 챙겨 주인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한 30분 정도 달려 해미읍성 앞에 있는 주차장에 집결하는데,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안내소를 찾아 10명의 일행에게 해설 한자락을 부탁하니, 흥쾌히 허락이 떨어지면서 한 아주머니가 핸드 마이크를 들고 길을 안내한다.

 

 

< "서산시" 여행 조감도 >

 

 

 < "해미읍성" 입구에 있는 주차장 >

 

주차장에서 해미읍성 남문이 되어지는 "진남문(鎭南門)" 으로 이동하는데, 진남문 주변에는 8월 17일 로마 바티칸의 주인공 "프란치스코" 교황(敎皇)이 방문한다는 현수막과 더불어 성문 주변으로 공사를 하기 위하여 중장비의 굉음소리가 한여름의 더위를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다.

 

 

< 주차장에서 "진남문" 으로 이동하는 길 >

 

 

< "교황" 이 방문한다는 안내 현수막 >

 

 

 < 공사를 하고 있는 "진남문" >

 

 

< 해미읍성으로 들어가는 "진남문" >

 

성문을 들어서면 성을 가로 질려있는 중앙통로를 기점으로 좌우에 넓은 잔디광장이 나타나는데, 오른편으로 관리사무소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 왼편으로는 옛주막 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초가집과 더불어 넓은 공터가 자리하고 있다.

 

 

< 해미읍성을 알리는 "안내목" >

 

 

< 동헌으로 들어가는 "중앙통로" >

 

 

< 중앙통로 오른편에 있는 "관리사무소" >

 

 

< 중앙통로 왼편에 있는 "주막집" >

 

해설사는 왼편 잔디광장을 가로질려 광장의 중앙지점에 있는 회화나무 아래에 있는 의자로 인도하여 편안하게 자리에 앉게하고, 본인소개를 비롯하여 해미읍성의 유래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 중앙통로 왼편에 있는 "잔디광장" >

 

 

 < 회화나무 그늘 아래에서 "해설사" 이야기를 경청하는 학생들 >

 

이 해미읍성은 고려말 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들이 해앙지역을 통하여 침입하므로 인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조 17년(1417년) 부터 세종 3년(1421년) 사이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 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약 4년간 축성한 성이라고 한다.  

효종 3년(1652년)에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약 230년 간 군사권을 행사하였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완전히 이설되고 나서 해미현(海美縣)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 1914년 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서 내포지역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라고 한다. 

해미읍성은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성되어진 성으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고 있는데, 성을 형성하고 있는 외벽의 석축은 네모지게 잘 다듬어진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다고 한다.

성곽둘레 전체가 1.800m, 총 면적이 약 6만평, 성벽의 높이는 4.9m,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어 있으므로 인하여 상부 성벽의 폭이 2.1m 정도가 되고,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 출입문이 되는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모두가 폐허가 되므로 인하여 1974년에 동문과 서문의 복원을 시작하면서 부터, 현재 3곳의 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가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점진적으로 모든 것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에 의하면, 현재의 동헌 서쪽에는 객사의 자리가 있었으며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 외곽석장기지(官衙 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으며,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둘려 심어 "탱자성" 이라는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 해미읍성 안에는 300년의 수령을 간직하고 있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옥사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옥사와 더불어 회화나무의 슬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하여 다음달 중순에 교황이 방문한다고 한다.

여기 해미읍성이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 된 이유는 이곳 해미읍성 주변에 있는 가야산과 덕숭산에는 임금이 탄생 할 정도의 명당 터가 많이 있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죽어 살고 있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이 경기도 연천에 있는 그의 아버지 "남연군" 묘소를 이곳 가야산 언저리로 이장하면서 부터 비극이 발생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 이 임금으로 등극하면서 부터, 프랑스 군대가 한반도를 유린하는 과정에서 고종의 할아버지 남연군 묘소가 이곳 가야산 근처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도굴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프랑스 신부와 접촉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약간의 외국어를 구사 할 수 있는 점을 이용하여 천주교 신자를 앞세워 묘소를 찾아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대원군이 사전 도굴에 대비하여 묘소 내부에 콘크리트로 감쌓므로 인하여 도굴이 실패로 돌아간다.

이 소식을 접한 흥선대원군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라고 불려지는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과잉 충성하기를 좋아하는 아전들이 이곳 홍성 및 서산, 예산에 거주하는 약 1.000여명의 신자들을 잡아, 회화나무 가지에 철사줄로 메어 고문하므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순직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 회화나무는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 라고 하는데, 그 때 나무에 호롱불을 달고 밤낮으로 고문 하였다고 하여 호야나무라고 불려지며, 현재 동쪽으로 뻗은 나뭇가지에는 고문할 때 사용한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호야나무 뒤편에는 그 시절 신자들이 수감되었던 감옥이 자리하고 있으며, 처형의 장소로 쓰였던 개천 "돌다리판과 진둠벙" 등이 해미읍성 주변에 그대로 산재하고 있어, 매년 수만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해미읍성 내부에 많은 민가들이 있었지만 읍성의 조성에 따라 모두 이주하였으며, 현재 눈에 보이는 약 3만평의 잔디광장 곳곳에 호서좌영 시대에 있어던 관아와 객사 건물들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아울러, 관아 뒤편에 있는 약 3만평의 야산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지므로 산림욕 하기에 최상의 장소가 되므로 인하여, 멀리 대구에서 왔으니 천천히 산책하면서 힐링(Healing)의 장(場)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객사 왼편으로 국궁장이 조성되어 있으면서 10발에 2.000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친구들과 시합도 겸하면서 먹걸리 내기도 하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해미읍성의 풍경에 푹 빠지는 시간을 가지면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종합적인 해설을 끝내고 질문시간을 가진다. 

참, 추가적으로 다음달 교황 방문시에는 신원조회 등을 통하여 입장 할 모든 사람과 절차가 벌써 끝났으니 그때 다시는 방문하지 말고, 특히 집에도 반가운 손님이 방문하면 청소를 하는데 현재 성내 곳곳에 보수하고 있어 다소 짜증이 발생하여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와 더불어 좋은 관람이 이루어지기를 부탁한다는 부언(附言)의 말도 잊지 않는다.

해설사가 지정하여 주는 방향으로 읍성 내부를 구경하기 시작하는데, 먼저 읍성 중앙지점에 있는 회화나무를 구경하고 나서 그 뒤편에 있는 옥사(獄舍)까지 구경 할려고 하니, 해설사 말씀과 같이 공사로 인하여 문이 꽁꽁 잠겨져 있어 문틈으로 내부를 들어다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 호야나무 주변에 있는 "순교기념비" >

 

 

<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형틀로 사용한 300년 수령 "호야나무" >

 

 

< 공사로 인하여 문이 잠겨져 있는 "옥사" >

 

이어, 읍성의 오른편으로 관람하여 보는데, 관람 코스의 길에 조롱박과 수세미의 터널 길이 만들어져 있어 내부룰 통과하여 터널을 벗이나면 옛 충정도 지역의 백성들이 살았던 한옥촌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 한옥촌에는 양반의 집과 서민의 집 등이 아기자기한 골목을 형성하면서 무리지어 있다.

 

 

< "조롱박과 수세미" 로 이루어진 터널을 걸으면서 >

 

 

 < "조롱박" 터널 끝지점에 있는 한옥촌 >

 

 

< 서민들이 살았던 "한옥" >

 

 

< 한옥촌 측편에 있는 "동문" >

 

다시, 중앙통로 길로 나와 동헌 건물 앞으로 걸어가면, 동헌 앞에 거대한 회화나무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회화나무 뒤편으로 동헌으로 들어가는 2층의 루각을 만나는데, 루각 입구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동헌 앞에 있는 또 다른 "회화나무" >

 

 

< 동헌으로 들어가는 "호서좌영" 루각 >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동헌 내부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의 가장자리에 동헌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내부에는 현감이 아전과 함께 집무를 보는 모습의 밀납이 만들어져 있고, 그 뒤편으로 객사와 더불어 서적을 보관하는 책실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 현감이 집무하는 "동헌" >

 

 

< 아전과 함께 집무를 보고 있는 "현감" >

 

 

< 현감이 기거하는 동헌 내부 "객사" >

 

 

 < 각종 서적과 서류를 보관하는 "책실" >

 

이 동헌의 건물 오른편 쪽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오면 높은 돌계단이 자리하고 있어 그 둘계단으로 올라서면, 넓은 공터의 가장자리에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려쌓여 있는 언저리에 아담한 정자 한채가 자리하고 있다.

 

 

< 읍성 내 야산으로 올라가는 능선에 있는 "광장" >

 

이 정자의 오른편 앞으로 많은 장승들이 도열하고 있는데, 이 장승들은 몇년 전 태풍으로 쓰려진 소나무를 재활용하여 장승으로 거듭 탄생하므로써 하나의 예술품으로 다가오는데, 그 장승의 모양은 역대 한국 대통령 모습을 하고 있다.

 

 

< 야산 입구에 있는 "정자" >

 

 

< 역대 "대통령" 의 해학적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장승 >

 

여기 정자에서 부터 울창한 소나무 숲을 형성하면서 숲속으로 만들어진 트레킹 길에는 상쾌한 피톤치드 물질에 도취하면서 걸어 보시라는 해설사 이야기를 뒤로하고, 그냥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와 동헌의 왼편 방향으로 구경하여 본다.

동헌 왼편에는 또다른 객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객사 건물 옆으로 변소와 더불어 국궁장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국궁장에는 한무리의 가족들이 활을 쏘면서 어린이들에게도 활쏘는 방법을 가르키고 있다.

 

 

 < 한양에서 방문하는 관리를 모시는 동헌 외부 "객사" >

 

 

< 객사 옆에 있는 "국궁장" >

 

 

< 국궁장의 "표적물" >

 

마지막으로 왼편 성곽 따라 조금 걸어서 앞으로 내려가면 서문이 나타나는데, 이 서문에도 복원 공사를 하기 위하여 석공들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우거운 돌을 운반하고 있는 모습에 감사의 기분이 일어난다.

 

 

< 해미읍성 서쪽 방향에 있는 "서문" >

 

넓은 잔디구장을 가로질러 다시 중앙통로 방향으로 나와 통로 가장자리애 전시하고 있는 "천자총통" 등의 조선시대에 사용한 무기들을 구경하여 보는데, 이 해미읍성은 선조 12년(1579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약 1년간 군관으로 근무한 곳이라서 그런지 통영시에 있는 거북선 내에 있는 무기와 많이 일치한다.

 

 

< 서문에서 "중앙통로" 로 가는 잔디광장 >

 

 

< 각종 "연" 을 판매하는 주막집  >

 

 

< 중앙통로 가장자리 따라 전시하고 있는 "천자총통" 외 무기류 >

 

2) 해미읍의 재래시장 방문.

금일이 해미읍의 5일 장날이라서 시골장도 구경할 겸 해미읍의 중심가로 걸어가서 시장을 돌아보는데, 시장은 거의 형성되지 않고 도로변에 몇몇 시골 아낙들이 가지고 온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는데, 이곳 서선시와 해미읍의 주 생산품이 "6종마늘" 이 최고의 상품이라고 한다.

 

 

 < 해미읍 시가지에 있는 "재래시장" >

 

일반적으로 6종마늘은 경북 의성이 최고의 품질을 가지고 있다는 우리들의 막연한 생각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이곳 서선시에서 만들고 있는 흑마늘이 최고의 상품으로 출시하므로 서선시에 있는 흑마늘 체험마을에 한번 돌아보라고 한다.

그러고, 인접하게 한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로 바지락 칼국수를 주문하면서 먼저 서선인들이 애용하고 있는 "면천샘물" 막걸리로 목을 적셔보는데, 아주 독특한 맛을 가진 막걸리가 되어진다. 

 

 

< 점심식사와 더불어 마셔보는 "면천샘물" 막걸리 >

  

몇개의 막걸리 병을 비우고 나서 바지락 칼국수 점심식사 시간을 가지면서, 이것으로 공식적인 우암회 하기휴가의 일정을 전부 소화시키면서 주차장으로 내려가 작별하기로 한다. - 첫 방문지 끝 -